〈 352화 〉104. 드디어 자유다? 글쎄….
계절이 어떻든 세상은 돌아간다.
겨울잠을 자는 짐승들하곤 아무래도 살아가는 방식이 같을 수가 없다 보니, 인간을 비롯한 인외종, 이성체는 결국, 어떤 식으로든 살아남기 위해 뭐든 하고, 해야 하는 법.
창칼을 나누는 전쟁은 살짝 주춤한다 쳐도, 말과 언어, 문자로 발생하는 또 다른 분쟁 및 전쟁은 여전히 진행되는 추세였다.
그리고 그것과는 별개로, 평화로운 곳은 여전히 평화롭기 그지없으니….
반쯤 허락을 받은 상태로, 왕녀의 묵인 하에 카일론을 뜬 에드릭은 가장 먼저 케사린 영지 쪽으로 향했다.
이동 관문을 이용한 것도 아닌지라 움직임은 더 없이 신속하고 은밀했는데, 말을 타고 숲길을 넘어 산 중턱에 올라, 열기구를 타고 버젓이 상공을 이동하는 마법사와 시간을 맞춰 고도를 낮춘 열기구에 탑승하기 무섭게, 곧장 순간이동 마법 서비스를 바탕으로 오게 된 터라 실질적인 시간을 이틀이 채 걸리지 않았다.
몇 단계 걸쳐서 이동했다곤 하나, 이쪽 서비스의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는 소수, 개인간 이동 시의 신체 부작용, 부담을 최소화시키면서도 빠르고 정확한 이동이 주력이기에, 이번에 알리샤가 말한 그 혜택과 편의를 아주 제대로 맛본 에드릭이었다.
‘소수라는 게 살짝 아쉽지만.’
부담을 추가하면 몇 정도 늘릴 순 있다지만, 이걸 몇 차례 반복하면 몸이 익숙해져 있다 해도 속이 뒤집히고, 바이오리듬이 깨져 정상 활동에 지대한 영향을 끼칠 터.
안정적인 지대에 이동 관문을 설치해 순간이동을 감행하는 것도 이런 부작용을 줄이기 위함인데, 언젠간 이러한 문제도 해결이 될 테지만, 적어도 아직은 아니었다.
석탄을 떼고 달리는 열차가 대중화된 시대에 뜬금없이 수소로 굴러가는 초고속 비행기 탑승을 원하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어불성설 아니겠나. 상상은 그렇다 쳐도 현실은….
모든 기술엔 다 중간 다리가 있기 마련.
그걸 넘어서면 혁명이라 하지만, 그런 혁명조차 최소한의 맥락이라는 게 있다.
“흠.”
후드를 눌러쓴 채 주변을 둘러보니, 겨울임에도 꽤 분주한 곳들이 여기저기 눈에 띄었다.
아무래도 중앙 대륙에 훨씬 가까운 위치여서 그런지, 카일론처럼 혹독하진 않았지만 그렇다 해서 이곳이 겨울이 아닌 건 아니었다.
…생각해보니 왕도의 중심을 가르는 그 큼지막한 강에 살얼음이 둥둥 떠다닐 정도로 추운 건 좀 문제가 있는 거긴 하지.
그리고 그 추위는 심지어 구 제국의 출정을 3차례나 막은 전례가 있는, 유서 깊은 혹한이었다.
그래도 춥기만 하니 다행이지, 에드릭 세계의 러시아처럼 라스푸티차 라도 생겨 주변이 진창, 진흙 바다라도 되면 전쟁 물자 운송 자체가 불가능해지니, 그보단 나은 형편일 테지만.
왜 러시아며 소련이 열차에 그리 목을 맸는가, 다 이유가 있는 거다.
그 열차 노동의 무리수로 노동자들을 학대하다시피 몰아붙인 끝에, 혁명의 불길이 샘솟기 시작했다는 건, 로마노프 왕가를 비롯한 관련 기득권 세력 측에 있어선 유감일 테지만, 한편으론 자업자득 아니겠나.
자동차, 전차가 있는 시대에도 여전히 날씨, 기후로 인한 한계는 여전한 바.
하물며 이곳 시대처럼 그런 게 전무한 세계에서 그런 환경적 요건은, 그들에겐 또 다른 장벽으로 여겨질 터였다.
…그 유서 깊은 편견을 박살 내고 진격할 수 있다면, 한니발이며 나폴레옹 꼴을 낼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마법이란 변수도 있고….’
과학 기술과는 다른 형편으로 돌파구가 마련되는 건 그런 이유.
예컨대 강이 있음 강을 얼린다.
반대로 얼어붙은 강을 녹이는 것도 가능하고.
땅은 또 안 그렇겠나.
멀쩡한 땅을 진창으로 바꾸고, 기름이 딱히 없어도 숲에 불을 화악 지르는 것도 가능. 기름을 추가하면 삽시간에 불바다를 만드는 건 일도 아니겠지.
어쨌든 온갖 창의적 요소들이 부합되며 이를 가능케 하기엔, 전쟁 수행에 있어 이런 참신함은 또 다른 전략적 우위, 전술적 우위를 가져다주곤 한다.
그러기에 전쟁의 양상이라는 게 에드릭 세계 기준의 상식을 가끔, 아득히 벗어날 때가 있었다.
그리고, 그런 쪽 특기가 어이없지만 패왕녀의 주특기에 해당했다.
‘기사 행세하는 주제 정작 마법적 대응에 특화됐고, 육탄전이 압도적인 건 방어구 때문에 그렇다 쳐도, 중장기병이자 전차, 중장보병이자 반(反)마법 대응팀. 말 그대로 특수부대 겸 공작대네.’
흑성 기사단 외에도 그런 대응이 가능한 정예 부대가 다수.
차이가 있다면 주 무기의 차이가 있는 정도였다.
말 그대로 남들이 협잡질 벌이며 전력 낭비 및 보존만 간신히 이어가고 있을 시기에, 아주 각 잡고 업그레이드 충실히 해대며 스타로 치면 배틀이나 캐리어 같은 최상위 유닛을 모은 예랄까.
아마 카일론을 상대하는 부류들은, 13세기 몽골의 침략을 받은 유럽 국가 같은 느낌을 받고 있을 거다.
초원 엘프가 동맹으로 합류한 시점에 그 느낌은 더욱 강해졌겠지.
구 제국 당시엔 진짜로 카일론은 기사보단 경기병, 궁기병이 훨씬 강력하기도 했었고, 그 전통은 여전히 이어져 오고 있었다.
차이가 있다면, 그 시절의 경기병이 중장기병으로, 궁기병이 특수 궁기병으로 변한 거 정도?
“봄철이 되고, 여름쯤 될 때면 이쪽 인구도 늘겠군.”
전쟁의 참상을 피해, 새로운 기회를 얻고자, 피난처를 확보하고자 밀려드는 이들이 다수일 거고, 빈곤과 기아, 각종 전염병 등이 몰아칠 걸 대비해 의료 시설과 상공업 활성화를 위한 대응을 연달아 이어가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겨울철에도 건설 현장을 점진적으로나마 이어가는 것도 그런 이유.
몰려드는 사람은 한순간이지만, 시설 및 건물을 비롯해 이런 걸 확충하고 확보하는 작업은, 사실상 수개월에서 길면 년 단위 작업이 소요된다. 미리 준비해야지 늦으면 되려 혼란만 가중될 터.
“…온다는 연락도 없었잖아?”
알리샤가 머무는 천막은 여전했지만, 에드릭은 이 시기에도 여전히 천막 생활을 하는 그녀의 처지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성 안에 머물지 그랬어요?”
“보수 중이야. 외부는 추우니 안쪽 작업부터 우선 하겠다 어쩐다 해서.”
“요령을 피우려 드네 이것들이….”
짓는다 쳐도 구획 나누면 그만인데, 그게 주인 대리를 성에서 쫓아낼 만한 명분은 아니지 않나? 아님 그 정도로 성 상태가 형편없다던가?
“그리고 성주 후보로는… 브리앙르의 도움을 받을까 싶은데 어때?”
“본인이 원한다면요.”
브레나임 변경백과 초원 엘프 쪽과 인연이 짙은 그녀라면, 정치 외교 측면에서도 얻은 게 적진 않을 거다.
…아니어도 상관은 없지만.
“그 외에도 신대륙 쪽 인원들을 순차적으로 받곤 있는데, 이 문제가 괜히 주변국 자극하고 이러지 않을까 싶단 말이지.”
“오히려 그걸 강조해서, 이쪽 눈치를 보게 해도 되죠. 괜히 민감하거나 이상하게 반응하는 녀석들은, 외교적으로 철저히 고립시켜버리면 그만이고요. 이 부분은… 음, 누가 왔다고 했죠? 그쪽에 대놓고 언질을 해두는 편이 아무래도….”
그런 식으로 얼굴 마주하기 무섭게 일 이야기로 접어든 둘은, 반 시간 가량 이야기를 나누고서야 인사말도 제대로 안 건넸음을 자각했다.
알리샤가 뒤늦게 탄식했다.
“나도 널 닮아가나 보다. 반가움보단 일 이야기를 먼저 논하고.”
“좋은 거 아닌가요?”
“안 좋아!”
그리 말하면서도 굳이 자신보다 커진 에드릭의 머리를 쓰다듬는 알리샤였다.
“바헬루스는요?”
“돌아갔어. 며칠 안 됐는데 일찍 오지 그랬어?”
“…처지가 처지다 보니.”
“카일론 왕궁에 잡혀 있었으니 그러기도 쉽지 않았겠지. 그럼 금방 돌아가야 해?”
“아뇨, 당분간… 일 좀 보려고 나왔죠.”
패왕녀가 묵인했다 쳐도 철왕은 아니다. 멀쩡히 돌아가면 뭔 상황이 생겨날지 모를 일.
…아예 패왕녀가 전쟁 마무리하고 왕위 얻는 시점에 돌아갈까를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는 에드릭이기도 했다.
“…….”
그러고 보니 시간이 꽤 됐는데도, 현실로 돌아간다는 생각을 못 하고 있었네.
아니, 어느새 이쪽이 훨씬 더 현실적인 느낌이 강해지고 있는 것도 좀….
‘아닌가?’
본래 철왕은 부군이 되면 타 세계로 돌아가거나 나서는 일 없게 만든다 엄포를 놓지 않았던가.
그거 어기고 엿 먹으라는 양 돌아간다 치면… 어떠려나.
본사 쪽 정보를 파악할 겸, 조만간 선배 얼굴도 본다 치고….
‘이 와중에 후배 놈들이 헬프 친 것도 웃기고.’
뭔 오픈 월드 RPG게임에서 특정 구간 넘어 자유롭게 이동 가능한 시점인 것처럼, 부가 퀘스트 비슷한 뭔가가 자꾸 포착되는 건, 뭘까 싶었다.
그런 의미에서 메인 퀘스트하면, 역시 팀장님 찾으러 가는 길이겠지.
바벨픈 군도.
정보가 그렇게 잘 떠도는 것도 아니기에 이곳저곳 돈을 뿌려도 원활한 정보를 얻기란 요원했다.
정보 상인들이 만능도 아닌지라 구하기 힘든 정보들은 아무래도 한계가 있단 말이지.
어쩌면 의도적으로 정보를 은폐하고 있다던가.
이 경우 민간 차원에서 접하지 못하게 하는데는 몇 가지 이유를 들 수 있는데, 첫째가 군사를 비롯한 국가적 문제와 얽혀 있다던가, 둘째는 은밀함을 떠나 그 비밀들이 대세며 뭔가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다던가.
셋째는 그냥 그곳이 극단적 폐쇄주의를 표방하는 터라, 외부인을 철저히 경계함은 물론, 그쪽 구성원의 이탈을 철저하게 방지하고, 배제해대고 있다던가.
어떤 식으로든 정보는 새어가기 마련이지만, 그 샐 여지를 철저하게 관리 감독하고, 여지가 있음 싹은 잘라 버린다면?
‘대륙에서 떨어져 있는 것도 폐쇄성에 이바지하는 요소겠지.’
다만 팀장님이 그쪽 출신을 표방했다는 점과, 그쪽 출신 인물 소수가 대륙에 등장해 파란을 일으켰던 걸로 유추해보면….
‘본사의 무난한 사원들도 모르는 거 보면, 그쪽은 본사 쪽 인원 가운데서도 그럭저럭 상위, 고위층 인사들이 배정돼 있다던가….’
그러면 폐쇄성이 그럭저럭 납득이 가긴 하는데, 온전히 본사의 손길로 빗어진 장소인지, 원래 그랬는데 거기에 본사의 영향이 미쳤는지… 미쳤다면 그 여파가 어느 정도인 건지….
‘가기 전에 철저하게 살펴둬야지.’
에드릭은 현재 움직이는 전술, 전략에는 약간 못 미치는 인간 병기라 해도 부족함이 없었다.
그렇다고 능력 향상에 게을렀냐 하면 그건 아니다.
할 일이 없으니 오히려 그런 걸 다독이고 정리할 시간은 차고도 넘쳤기에, 오히려 이전보다 지금이 훨씬 더 강한 건 명확.
다만 실전성, 그쪽 감이 둔해진 건 어쩔 도리가 없겠지만, 그건 금세 복구될 거다.
중요한 건, 그 정도로 해결이 가능하냐 여부다.
힘이라는 건 어쨌든 상대적이기에, 상대가 더 강대하면 이건 이것대로….
‘그녀를 동행시키기도 그렇고.’
세계관 상 최강이라 불려도 부족함이 없는 흡혈룡 키헨젤바라투스 아토게르나엔자.
문제는….
‘부탁할 걸 다 했기에, 막바지에 뭔가를 부탁하면, 이젠 정말로 끝이란 거지.’
영혼이니 몸이니 이딴 걸 수거하고 어쩌고… 그 메커니즘이 어떨지는 모르겠지만, 간과해선 안 될 거란 느낌이 본능적으로 들었다.
“에우리에 누님은요?”
“마법사들하고 뭉쳐서 끼리끼리 노는 거 같던데.”
그러던 중.
“응?”
막 천막을 들어선 여성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야? 온다는 소식도 못 들었는데….”
“오랜만이죠?”
브리앙르가 신기한 듯 입술을 혀로 훔치며 반가움을 손으로 표시했다.
“오?”
동시에 그녀의 옆을 차지한 여성에게도 반사적으로 시선이 갔다.
“오랜만이다.”
그 시절보다 훨씬 유창하며 위화감이 일절 느껴지지 않는 대륙어가 튀어 나왔다.
“아는 사이인가?”
브리앙르가 묻자.
“전에 이야기하지 않았나?”
“…그랬었나?”
브리앙르가 어깨를 으쓱였고, 에드릭은 반가운 내색을 순수하게 표현했다.
“마이기신은 외국어에 능통하니 그럴 만도 하겠죠. 초원 엘프들 사이에선 그런 인재가 범람하진 않을 테니까요. 그러면서도 전사로서도 탁월하면서 외모적으로도 무엇 하나 부족함이 없….”
“또또 그 안 좋은 버릇을 드러내는구나.”
브리앙르가 에드릭의 미간을 검지로 툭툭 두들기며 말했다.
“꼬리 치지마라. 꼬리도 없는 주제. 아, 그렇군. 앞에 달린 이 음탕한 꼬리가 문제로구나?”
그러면서 순식간에 에드릭의 사타구니 부근을 와락 움켜쥐는 브리앙르.
“……저기요?”
“보는 눈이 있다는 걸 자각해라. 이래 봬도 너와 내 사이 아니더냐? 패왕녀한테 가지 않았다면 넌 내 옆에 있었어야 했어. 그걸 알면서도 내 앞에서 딴 여자에게….”
“자자, 진정들하시고.”
알리샤가 슬쩍 끼어들었다.
“…….”
못마땅한 기색이 역력한 브리앙르였지만, 알리샤의 말에 일단 한 걸음 빼는 모습에 에드릭이 되려 의아해졌다.
그리고 그 과정을 무덤덤하게 지켜보는 초원 엘프 족 전사, 바람 수리 부족, 바트르네의 독녀 아이홀, 그녀의 장녀인 마이기신은, 그 광경이 퍽 익숙한지 자못 태연한 기색이었다.
“오늘 일은 이쯤 마무리 짓고, 에드릭 온 김에 간단히 축하 파티를 해보는 건 어때? 나눌 이야기도 많잖아? 하고 싶은 말도 있을 테고.”
“…….”
브리앙르는 필시, 자신보다 나이 어린 알리샤의 말에 그럭저럭 수긍하는 모양새였다.
그 모습이 마치, 바람직한 여동생의 말에 그럭저럭 수긍해대는 나이 찬 언니의 모습이랄까.
“술? 고기? 좋다!”
그리고 파티, 연회 소식은 마이기신의 심금을 울렸는지, 표정이 활짝 갠다.
전사의 체면이라는 게 있어야 하는데, 아무래도 일전에 무투 대회로부터 시작된 인연, 거기서부터 몸까지 섞음으로서 비롯된 그녀의 인상.
즉 에드릭 내에 남은 그녀의 경직되고 강인한 인상과는 조금 다른 광경이긴 했지만….
“아, 그리고 저번에 애가 생기지 않았으니, 이번에도 씨를 부탁한다.”
“…….”
음, 이건 안 바뀌었네.
그리고 그 이야기에 눈살을 찌푸리는 브리앙르.
안대를 낀 덕에 그녀의 독안이, 못마땅한 내색을 한껏 풍겨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