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60화 〉107. 나는 오늘도 일을 쉬고 있다.
회포를 푸는 건 그렇다 쳐도, 일을 마무리하는 건 또 다른 문제.
일이라는 게 참 신기한 건, 내버려 두면 알아서 잘 굴러가는 듯 보이나, 막상 눈으로 살피면 뭔가 어설프거나 잘못 굴러가는 게 여실히 눈에 포착된다는 점이다.
어쩌면 산재 된 잘못이 방치돼 추후 고름처럼 터져 나오는 걸 미연에 방지하는 거라 느낄 수도 있겠지만, 막상 잘 마무리하고 처리한다 해서 그 문제라는 녀석이 안 터지냐 하면 그건 또 아니었다.
이걸 해결하면 다른 문제가 보란 듯이 터져난다.
결국 완벽하게, 확실하게 처리한다는 건 사실상 불가능하며, 규모며 범위가 확대되고 넓어질수록 헤아릴 영역의 한계 덕에 그 문제는 더욱 불거진다.
…이때 선택해야 한다.
속내가 불편해도 알아서 하게 내버려 둔다던가,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다 뜯어고쳐 상황을 쇄신하거나 통제 하에 둔다던가.
원래 세상은 알든 모르든 슬렁슬렁, 어설피 넘어가는 예가 부지기수다.
철두철미하게, 완벽하게… 말은 좋지.
다만 과정이 어떻든 결과 직전에만 완벽에 가까우면 좋은 거다.
왜냐면, 똑같은 목적지라 해서 모두 하나의 길로 가야 한다는 보장이며 의무는 없으니까.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는 말이 이럴 때 필요한 걸 테지.
애초에 키 작은 인간과 키 큰 인간의 작업 방식이 같을 수 없을 테고, 천하장사와 건강이 부실한 사내에게 같은 일은 시킨다 해서 똑같은 과정에다 결과로 이어지길 원하는 게 정신병이지.
“흠.”
그러기에 에드릭은 굵직한 것들만 손 보고, 나머진 방치하기로 마음먹었다.
또 헛짓거리 못 하도록 살 떨리게나마 눈치를 주는 정도?
어차피 근시일 내로 떠날 예정인 터라 오래 붙들고 늘어질 수도 없었다.
“오호통재라.”
세상이 황량한데 이쪽에선 뭘 할 수 있는 여지가 없다.
나는 이리도 미력하고 무력한가.
세상 앞에 우린 이토록 부질없는 부류인가 싶어 괜스레 감성에 젖어 들게 된다.
…날이 추워서 그런 것도 있겠지만, 이조차도 다른 이들이 느끼는 추위에 비하면 양반인 수준.
에드릭의 경우는 옷을 두껍게 입지 않아도 다른 이들보단 추위를 덜 느끼는 몸이었지만, 이것도 익숙해지니 다른 의미로 느껴진다고 할까.
익숙함이란 이리도 무섭다.
“그러고 있어도 돼?”
발코니 부근에서 바람을 맞으며 이러고 있자니, 에우리에가 특유의 무심한 얼굴로 그리 물어온다.
이에 에드릭은….
“참는 게 이기는 거니까요.”
“……??”
에우리에로선 영문 모를 소리를 해댄 덕에, 그녀의 머릿속에 자리한 의문 부호는 갈수록 그 크기를 늘려만 갔다.
일벌레, 워커홀릭이 주의해야할 건,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 자체를 일단 내려놓을 필요가 있단 점이다.
너 없어도 세상 굴러가! 회사도 굴러가! 일터도 굴러가!
이런 마인드를 가져야 일을 조금 더 합리적으로, 유순하게 굴려댈 수 있는 거다.
안 그랬다간….
‘저번처럼 적당히 하라고 지적 당하겠지.’
그런 의미에서 패왕녀하고 에드릭 자신은 일을 굴려가는 방식에 한에선 뭔가 아귀가 맞는 구석이 있었다.
그쪽도 워커홀릭, 이쪽도 워커홀릭.
…문제는 일벌레가 최상위에 자리 잡고 있으면, 아랫것들만 죽어난다는 거지.
세종대왕 휘하 신하들은 격무에 시달리기 일쑤였고, 죄지은 자조차 엄벌을 내리기 이전에 관용을 베풀고, 이를 인질이며 명분으로 삼아 신나게 부려 먹었는데, 힘들다고 뭐라 하면 뒤질래, 살래로 협박한 예가 있을 정도라 한다.
…대놓고 직설적으로 안 그랬다 뿐이지.
그런데 그조차도 안 하려 들면 법으로 조졌고.
전염병이 한창이던 시기에 신하들이 그거 무섭다고 집에 짱 박히자, 법으로 출근 안 하면 죽여버리겠다 한 게 무려 세종.
그 외에도 과장 좀 보태면, 신하를 비롯해 관련자들에게 자기 관할 구역 백성이 한 사람이라도 병으로 죽으면 마찬가지로 너도 죽여버리겠다고 대놓고 명을 하달해 신하들을 비롯해 관련자들이 사시나무 떨듯 덜덜덜 몸을 떨었다지.
그리고 세종 이상으로 신하들을 신나게 부려 먹고 갈궈댄 왕이 또 정조다.
애초에 세종이나 정조나 조선의 최고 엘리트들을 일방적으로 갈궈댈 정도로 학식 면에선 넘사벽이었던 터라, 일단 이거 자체로 대소신료들 차원에선 뭐라 대들기 어려운 구석이 있었는데, 단순히 학식만 뛰어난 게 아니라 합리적이기까지 하며, 진취적이기까지 하니 머리가 굳어갈 그들에겐 이게 참 부담도 그냥 부담이 아니었을 거다.
거기다 대표적 워커홀릭인 정조는 온갖 귀하신 몸인 덕에 온갖 약재를 가까이했었으나, 결국 자신이 쓴 개인 문집에다 담배 예찬을 주절댔음은 물론, 대놓고 담배의 유익한 점을 일컫기로 더위를 씻어주고, 추위를 막아주고, 식사 뒤 소화를 돕고, 변을 볼 때 악취를 쫓아주며, 잠이 안 올 땐 이걸 피면 꿀잠 자니, 이보다 유익한 게 어디 있으랴, 라는 식의 기록을 해두기까지 했단다.
…그러면서 나중엔 수능, 아니 과거 시험에도 담배 문제를 냈는데 이게 그 유명한 남령초 책문이다.
“끄응….”
일을 안 하는 게 일이었을 땐 괜찮았는데, 일을 할 수 있는 상황에서 자제하자니, 금단 현상이 일어나려 한다.
‘이 정도로 심각했나?’
이건 다른 의미로 병인데?
“…놀 거리가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된 이상 놀이 문화를 전파해주지.
일 못 하면 놀기라도 잘 놀아야지.
시간은 금이라네, 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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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세이유의 보드 게임은 널리 퍼져 나가 있었다.
그러기에 이곳에 자리한 술집에도 이런 판이 깔린 구석은 여럿 볼 수 있었고, 여기서 내기며 게임이 진행되곤 했는데, 대충 구경해보니 긴장감이 미묘한 구석이 있었다.
‘거기다 주사위 놀음은 결국, 작정하고 주사위를 얼마나 잘 굴리냐를 점치는 식으로 고인물이 양성될 여지도 높고.’
재미 삼아 몇 판 하는 정도라면 굳이 그렇게까지? 할 거다.
그러나 저걸 거의 직업 겸 주력 취미로 삼는다 치면? 집에서 주사위를 손에 굳은 살이 박히도록 연습 삼아 굴려댈 여지도 다분했다.
애초에 주사위를 잘 굴려 원하는 위치에 말을 가져가게 하는, 프로로 인정받는 부류들 사이에선 이런 고인물 대전들이 심심찮게 발생하는 걸 보면… 이걸 어설프게 보기도 조금 뭐했다.
‘다른 의미로 신규 유입 및 활성화를 막는 뭐시기지.’
비록 맨몸으로 가면 어디서든 순번이며 기회가 오면 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지만, 그만큼 부정행위도 무시할 수 없는 노릇.
그리고 그런 호황 속에 약간 비주류에 속하는 이들이 나무로 된 패를 굴려대며 자기들끼리의 여흥에 빠진 모습을 보며, 에드릭은 의외구나 싶었다.
‘카일론 출신인가?’
시기가 무르익을 때도 됐기에 마작이 퍼져 나가도 크게 이상할 건 아니지만, 그렇다 쳐도 여기에서까지 이걸 보게 될 줄은….
“흐음.”
그렇다고 여기서 참가하자니 이건 또 뭔가….
보기완 달리 에드릭은 뭔가 엄한 사람한테 가서 게임하자며 들이댈 정도로, 낯짝이 아주 두꺼운 부류는 아니었다.
일이라 생각하면 미소를 활짝 그리며 말 한마디 나눈 적 없는 인간들하고 대화까지 트는 건 퍽 문제될 게 아니었다.
하지만….
사적으로 접근하려니, 없던 수줍음이 생겨나려 한다.
‘본래는 중국집에 전화 거는 것도 부담스러울 정도였으니까.’
배달 앱이 생기기 전과 생긴 이후, 에드릭의 배달 빈도는 수십 배 차이가 났는데, 이유는 전화로 어지간하면 뭘 시키지 않았기 때문이다.
배달 앱 이전엔 심지어 인터넷 주문을 애용할 정도였지만, 그조차도 대중화가 안 됐기에 대형 프렌차이즈에서나 가능했었다지?
“이거 참.”
이렇게 보면 스스로가 참으로 한심하게 느껴지다가도….
‘그런가.’
일을 할 때가 되면, 적어도 나라는 걸 배제할 수 있다.
본사의 지엄한 명, 지상 과제며 목표에 충실한 역꾼으로서 활동할 때와… 완전히 개인이자 나로서 움직여야 할 대는 확실히 느낌이 다르지.
…눈치를 안 살피는 듯하나 그건 공적일 때나 그런 거지, 사적일 때 가급적 방구석에 처박혀 늘어져 있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리라.
“멀었네.”
며칠 더 머물까 했는데, 아무래도 하루 이틀 뒤에라도 이곳을 떠야겠다 싶었다.
계획대로 아르세이유에 가서 선배를 일단 보고….
“가는 김에 데이엔 쪽도 들리고… 또….”
그래, 역시 계획이며 일 쪽으로 머리를 굴리니 마음이 참 포근해진다.
…미쳐도 적당히 미쳐야 하는데, 아무래도 이쪽 증세를 완화하기 위해선… 많은 조치가 필요할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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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과적으로 이틀, 확실하게 그녀들과의 회포를 진득하게 푼 에드릭은 그제서야 아쉬움을 덜어낸 채, 곧장 순간이동 서비스를 통해 아르세이유로 흔쾌히 이동할 수 있었다.
“여긴 여전하군.”
의외로 떠났다고 복귀한 이후로도, 특유의 활기는 여전한 듯 느껴졌다.
도시의 화려함도 그렇고.
에드릭은 곧장 백화점…이 아닌 일반 저택으로 향했다.
어느새 선배도 윗선에서 물러나 다른 이에게 자리를 내준지 오래인 상황.
…심지어 이걸 여기 온 다음에야 전해 들었는데, 최근에 그런 결정이 내려졌다는 모양이다.
“말 안 했었나?”
“…안 했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