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67화 〉109. 음담패설 그리고 티 타임.(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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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황하지 마라, 이건 필시 공명의 함정이니라.
…라는 심경으로 우선 마음을 추스르곤, 사태를 파악하고자 우선 뭔 사유로 그런 소리를 하는 건지, 우선 들어보고자 했다.
“흠, 그러니까 결론짓자면… 이곳 가문에 큰 기대도, 바람도 없으나 이대로 있다간 어디로 팔려 나갈지도 모를 테고… 그런 것들 다 고려하다 보니 이곳을 탈출을 해야겠는데, 맨몸으로 빠지기엔 이미 너무 멀리 왔다? 그러니 타인에 의해 멋대로 팔려 나갈 바엔, 스스로 바라는 곳으로 자신을 비싼 값에 팔겠다… 맞습니까?”
요약이긴 한데 뭐가 이리 지리멸렬한가.
다시 요약하면, X 같은 가문에 발목 잡힐 바에, 차라리 팔아넘겨서라도 탈출해 제대로 미래를 추구하겠다, 뭐 그런 거려나.
그리고 그 선택지 중 하나가 에드릭에게로 투신…이랄까, 선처를 바라는 거였는데… 에사나가 우선 만나 뵙게 해준다고 입을 털었던 모양이다.
“어떠신지요?”
“…….”
그건 그렇고 터무니없네.
이 정도 미색이면 소문이 팍팍 퍼져 나갔어야 했는데, 용케 안 알려졌네.
…뿔 달린 거 때문에 불길하게 여겨서 그런 걸까.
그렇다 쳐도, 이 정도의 최상급 비주얼을 보면서도 소유욕보단 배척을 추구하다니, 이것들은 다 고자 새끼들인가.
“…어찌 됐든 저는 이미 반려가 있는 만큼, 도의적으로도 이를 제 의중대로 결정하는 건 이치에 맞지 않다고 봅니다.”
“그러면…?”
“…다만 가문을 나서고자 하신다면, 호의 차원에서 돕도록 하겠습니다.”
“아무런… 조건도 없이요?”
“조건은 있겠지요. 무상으로, 자선의 개념으로 제가 선처하고 돕는다면, 이건 다른 의미로 오해를 살 여지가 다분하니, 아가씨께서도 그렇게 좋진 못할 거라 봅니다. 그게 귀족 가문에 핏줄과 자리를 차지한 이의, 불가피한 숙명 같은 거니까요.”
“…저는 그런 건 잘 모르겠어요. 생각하고 싶지도 않고요.”
“충분히 이해합니다.”
여태 가문 내에서도 방치되고 배척되다시피 하다가, 핏줄이 싹 다 갈려 나간 덕에 졸지에 자리를 차지한 격이니, 더 그럴지도.
그러니 또 가신들이 얕보며 팔아넘기려는 수작질을 그녀가 뻔히 알 정도로, 대놓고 보여대는 걸 테지만.
“하면, 이곳 가문을 누군가에게 넘긴다 하더라도 문제가 없다, 그렇게 해석하면 되겠습니까?”
“…예, 오히려 하루빨리 자유로워지고 싶은 기분뿐이에요.”
“그러면 이쪽 가신들을 불러다가 협상을 하는 편이 맞겠군요. 어떻게 생각해?”
에드릭이 고개를 슬쩍 돌려 에사나에게 묻자.
“걔들이 바보 천치가 아닌 한, 그녀와 같은 보기 좋은 먹잇감을 허투루 놓아줄 일은 없을 거라 보는데요? 사냥개를 사냥에 쓰지 못한다면, 삶아서라도 먹어야겠죠. 자기 소유에 대한 집착이 과한 부류들에게, 그것을 무의미하게 손 놓으라 하는 건, 명백한 손해일 텐데, 납득을 과연 할까요?”
“그걸 왜 신경 써? 중요한 건 본인 의지지.”
“…말 참 쉽게 하시네요.”
“네가 선배라 부르는 내가 뭐하는 종자냐?”
“그야, 카일론 왕국, 왕위계승 1순위인 패왕녀로 이름 높은 왕녀 전하의 하나뿐인 부군입지요. 후보도 아니고, 이젠 명실공히 세상에 널리 그 망명 높은 이름이 떨친, 전여신(戰女神) 알브레시아스 칼 에스클리오네의 반쪽. 맞아요 틀려요?”
“맞지. 공식적으로는.”
“그럼 비공식적으로는요?”
“그걸 정하고 말고는, 그녀가 권좌에 앉은 이후에 결정할 노릇이고.”
“…우와, 터무니없는 소리를 하시네요. 왜요? 부부 관계가 온전하지 않으세요?”
“당장은 업무 관계니까.”
“…꽤 민감한 사항인데 여기서 마음 편히 누설해도 되는 거고요?”
“내가 이걸 입 밖에 낸 게, 당장 공식적으론 몇 군데 안 되는데, 그게 퍼져 나간다면… 용의가 어디에 쏠릴지는 너무 당연한 거 아니려나?”
“아하. 그러니 이거네요. 당신이 터놓고 이야기해줬으니 나도 굳이 그걸 이야기해서 수평적 관계를 성립하겠다? 친절하기도 하시네요.”
“내가 뭐 누구 등 처먹으며 이용해먹는데 이골이 난 케이스도 아니고.”
“들었죠, 루다나?”
“…절 위해서?”
아무래도 그녀는, 그녀가 입으로 시인한 것처럼 정치적 수완은 조금 부족한 듯 느껴졌다.
뭐, 그게 능숙했다면 지금과 같은 자리에서 막연히 다 내려놓고 탈출하고 싶단 소리를, 얼굴 한 번 본적 없는 누군가에게 토로할 이유가 없었겠지.
“그런데 이번 건수 왕녀 전하께 가져다 드리면, 이용해 먹지 않고 뭐했냐며 성내는 거 아닐까 싶은데요?”
“선을 지켜야지. 내가 노예는 아니잖아? 부부라는 건 수평적 관계야. 동등하면서도, 양보하고 배려하고… 헌신하면서도 의지하나, 그것이 구속이나 제약이 돼선 안 되지.”
“…하면 선배는 왕녀 전하께서 남자들 수십명 끌어안으며 주지육림의 퇴폐 행각을 벌여도, 멀뚱히 지켜만 볼 속셈이세요?”
“그녀가 그러고자 한다면, 내가 말릴 이유가 뭐 있겠어?”
“소유욕, 집착을 못 느끼는 시점에 누굴 사랑한다고 진심으로 말하긴 어렵겠죠?”
“그녀와 내 관계는 사랑으로 성립된 게 아니야. 그러나 나는 그녀가 원한다면 그 원하는 남편의 역할을 충실히 이행할 생각이고.”
“패왕녀 전하 정도면 세상에 다시 없을 부인감이잖아요? 뭐가 아쉬워서 그런 소리를?”
“그녀가 나보단 자기 직무를 우선시 하니, 나 또한 그러는 거지. 그리고 나는 그걸 충분히 이해해. 나라의 주인이자 어머니, 기둥이라는 건 그런 거니까. 오히려 그 자리를 특권이라 여기는 부류보다야 훨 낫지.”
“뭔가 모순되지 않아요?”
“전혀.”
에드릭은 어깨를 으쓱였다.
그러자 에사나가 다시 루다나에게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들었지? 선배는 네가 기대하던 그런 낭만적인 사내가 아니라고. 생각 이상으로 냉정하고, 자기 멋대로인 구석이 있지.”
“…….”
지금 느낌은, 마치 미팅 자리에 와선 전혀 꾸밈없이 냉담한 소리를 늘어놓은 격인데….
‘좀 깬다.’
…라고 끝나면 차라리 다행일지도.
그러나 의지할 구석이 없는 그녀로선, 도움을 준다는 부분에 초점을 잡곤 그쪽 목적으로 이제 의지해오거나 매달려올 거다.
그러면, 에드릭보단 아마 도움을 확실하게 주었으며, 능력을 증명한 에사나 쪽에… 훨씬 의지할 여지가 크겠지.
걸림돌이 있다면, 여성 혐오라는 건데… 의외로 에사나하고 잘 어울리는 거 보면 그게 문제 될까 싶기도 했다만.
“쉽사리 마음을 주지 않는다. 그러지 않는다는 건… 다르게 말하면 마음을 주었을 땐 진심으로 대한다, 라고 생각하면 될까요?”
그러나 예상과 조금은 다른 방향으로, 루다나는 에드릭의 정나미 떨어지는 소리를 다르게 받아들인 건지, 그리 물어오는 게 아닌가.
“…호?”
에사나가 살짝 감탄하는 기색을 보인다.
“저쪽 눈치와 달리 이쪽은 민감하네?”
“…….”
루다나의 못마땅하다는 듯한 시선이 노골적으로 에사나를 향해 꽂힌다.
“선배, 그 정도로 그녀의 콩깍지를 벗겨내긴 무리였던 모양이에요?”
“…그걸 왜 나한테 따지냐.”
떨떠름한 얼굴로 에사나를 쏘아본 에드릭.
“에드릭 님의 애인들이 많다고는 들었어요. 저는 당연히 그녀들보다는 늦게 경을 뵙게 됐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저는 포기하고 싶지 않아요.”
“뭘 말입니까?”
“에드릭 님은 절 불결하다거나 불길하게 생각지 않으세요. 저는 그렇게 느꼈는데, 맞나요?”
“물론이죠. 애초에 그렇게 왜 생각해야 하는지가, 저로선 의아할 따름입니다만.”
“…세상 모두가 그렇진 않지요. 그리고 그렇게 느꼈을 때, 제가 자랑하는 거 같아 조심스럽게 이야기해보겠습니다만, 저는 필시 외모적으로 꿀리는 게 없다고, 확신하는 바거든요. 여기…… 에사나 양과 비교하더라도요.”
“호, 재미난 소리를. 내가 얼마나 인기가 많은지 알고 그런 말을 쉽사리 입에 담는 건지요? 우리 루다나 양?”
“…….”
오, 이번엔 진짜 혐오스럽다는 표정이다.
에사나도 필시 눈부신 외모에 특유의 밝고 화창한, 그 분위기 덕에 대체로 긍정적 이미지가 생겨날 수밖에 없는 존재임에도, 루다나는 정말로, 진저리가 난다는 듯한 표정으로 인상을 구겨대고 있었다.
…근데 이 여자, 인상 구겨도 예쁘네.
콩깍지가 쓰인 게 아님에도, 에드릭은 객관성을 유지할수록, 터무니없는 미인이라는 걸 새삼 실감했다.
…왜 이 망할 세계는 이토록 개성들이 뚜렷한 미녀들이 차고 넘치는지 원.
“에흠!”
잔기침으로 분위기를 환기시킨 루다나는.
“그러니 제가 비록 몇 번째가 되더라도, 저는 에드릭 님께 확실하게나마, 단 며칠, 1년에 며칠이더라도… 충분한 애정과 관심을… 받았으면 싶어요.”
“저 말고, 평생 자신을 바라만 봐주는 누구를, 루다나 양의 경우는 아무렇지 않게 구할 수 있을 거라 보는데요.”
“저는 소유되고 싶지 않아요.”
응?
“…그리고 에드릭 님이 아까 전 하신 말씀을 듣곤 확신했어요.”
그녀, 루다나는.
“에드릭 님은, 애정을 줄 지언정 소유하려 들지 않아요. 아르세이유에 있던 당시 에드릭 님께서 여성들을 존중한다는 명목을 해준 이야기도 그렇고요.”
“어떤 이야기를 말씀하시는지요?”
“추한 마녀와 결혼한 고결한 기사, 사내에게 내주었던 선택지 말이에요.”
아, 그거 누구냐, 퍼시발? 가웨인? 누구였더라?
어쨌든 아서왕 때문에 추한 마녀와 결혼했더니, 정작 신혼 당일 밤, 절세 미녀로 등장한 그녀가 양자택일하라 하며 내놓은 문제.
그리고 거기서, 녀석은 그녀에게 선택권을 줘버려 잘 풀렸다는… 뭐 그런 이야기.
에드릭이 그 당시에 꽤 많이 우려먹던 이야기기도 했다.
에드릭의 여성관에 대해서 긍정적 이미지가 박히는데 일조한 에피소드기도 하고.
설마 꽤 시간이 지난 이 시점에 이것과 다시 마주할 줄이야.
“감명 깊게 느끼셨다니 감개무량하군요.”
“그 이야기를 듣고, 결혼을 한다면 저는 에드릭 님과 같은 사내였으면 싶었어요. 그러나…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것도 알았기에, 머릿속에만 담아두고 있었죠.”
“흐음.”
뜻하지 않은 고백.
그러나, 에드릭은 의외지만 제법 고백을 많이 받곤 했었다.
…물론 숙녀들 특유의 고백보단, 네 씨앗 내놔, 유전자 받아 가자! 네 아를 낳으리라! 라는 식이 대다수였지만.
그러기에 이런 정통에 가까운, 뭔가 가슴이 으실으실? 아니아니, 오돌오돌? 야리꾸리? 샤르르?
아무튼 뭔가 간질거리는 듯한 고백이… 뭐랄까, 생각보다 좋다? 기분이?
“크흠!”
“얼레리 꼴레리 해줄까요, 선배?”
“닥쳐.”
낯짝이 빨개지진 않았겠지만, 저런 절세 미녀가 숭고하기까지 한 태도로 저렇게 진심 어린 고백을 해오니, 이쪽도 덩달아 영향을 받는 기분이었다.
덕분에 에드릭은, 잠시간 할 말을 잃어버렸다.
뭐랄까.
이것도 썩, 나쁘진 않네.
그렇게 미묘한 기분에 빠져 잠시간 얼을 타는 사이.
덜컥!
“여기 계셨군요!”
산통을 깨듯, 누군가가 불쑥 안으로 들어섰다.
그나저나 저 새끼, 노크도 안 했는데… 여기 집안에선 이게 일상인 건가?
“엇…? 그, 그대는?”
그리고 그 청년은, 에사나와 눈을 마주치곤 놀라 두 눈을 부릅 떴다.
“후훗!”
에사나는 몇십 년 묵은 여우처럼 살포시 미소 지었지만, 에드릭이 보기엔… 히죽거리는 구렁이가 따로 없었다.
‘요사스러운 년 같으니.’
어쩜 저렇게 뻔뻔하게, 아무렇지 않게 표정을 스스륵 구렁이 담 넘듯 변화시키는지 원.
아까 전 뺀질거리는 그 인상은 어디로 사라졌는지, 지금은 그저 알 듯 모를 듯 아련한 미소와 분위기, 기품 등이 내려앉아 있었다.
…명배우 여기 계시네. 거 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