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72화 〉111. 잠깐 사이 꿈이어도 좋다니….
이곳에 머문 지도 2주가 다 돼 간다.
열흘 정도면 마무리되고 자리를 뜰 거라 예상한 것과 달리, 역시 세상 일이란 자신이 원하는대로 굴러가는 건 아닌지, 체류 기간이 조금 더 지체되고야 말았다.
“그래서, 어떻게 됐다고?”
“아말리온 가문은 온전히 그녀의 손에 쥐어졌습니다. 다만 가문 자체만 쥐어졌을 뿐, 가신을 포함한 일부가 분가해 떨어져 나가는 건 어쩔 도리가 없게 된 셈이죠.”
“말이 분가지 사실상 그녀 쪽이 내쫓기는 게 아니고?”
“명목은 중요하니까요.”
그래도 가장 중요한 가문의 승계 및 정통을 이었다는 명분 하나만큼은 쥐고 있기에, 나머진 뭐….
아말리온 가문에 속해 있던 여타 이권들은 가신들에게 넘어갔다곤 하나, 이조차도 하이에나처럼 대기타고 있던 것들이 도리를 주장하며 그들에게서 그 권한을 강탈해 다시 루다나하고 연결되게끔 하되, 이권을 정당한 명분으로 할당받게 된다거나.
몇몇은 그녀를 가문에 합세시키고자 했으나, 이 문제는 에사나 측에서 알아서 잘 쳐냈다는 모양이다.
“이것으로 초기 목적은 다 이뤘네요. 짜증나던 가신들의 본심도 깨닫고 떨쳐낸 건 물론, 얽혀 있던 여타 이권에 대한 걸 온전히 넘기며 굳이 사업을 스스로 굴리지 않아도, 일부나마 그곳에서 나오는 이익을 받아먹을 수 있게 상황을 재편했고, 그녀는 그녀로서 가문의 이름을 자체적으로 이어갈 수 있게 됐으니… 가문의 위세며 명성, 영향력 확대를 목적으로 한 게 아니라면, 이전보다 훨씬 자유로운 삶을 살 수 있겠죠. 마냥 사치며 향락에 젖어 엄한 짓만 안 한다면야….”
“사치에 빠지면 한도 끝도 없지만, 애초에 그것과 거리가 먼 삶을 살았으니, 자체적으로 자제하면 문제는 없겠지.”
“…그건 그렇고 이런 흐름이면 그녀 쪽에서 첩 이야기를 도로 물려도 선배로선 할 말이 없지 않나요?”
“대신 네 의존도는 강해졌잖아? 그 정도가 어디게.”
“…그래도 뭔가 찜찜해서.”
“그리고 그녀가 아둔하지 않다면, 네가 이런저런 수를 쓴 게, 온전히 네 역량이라 생각진 않을 터인데… 어때? 그 정도도 눈치 못 챌 정도로 아둔한 부류인가, 그녀는?”
“모르죠 저야.”
“…그걸 왜 모르는데.”
공략 상대에 대한 세부 분석은 필수 요소거늘.
적어도 에드릭이 보기에 눈치를 두고두고 봐온 그녀는, 어차피 가문으로부터 탈출을 꿈꿨기에 두뇌 회전이 비상하진 않더라도, 멍청한 부류는 아니었다.
애초에 홀로서기를 하려는 인간들은, 뭐가 됐든 그것과 맞서고자 마음가짐이 남다른 법이니.
…우연과 필연을 가정한 형편 덕에, 가주가 됐다지만… 이거나 그거나 뭔 차이가 있을까.
‘조금은, 낫겠지.’
세상은 여성 홀로, 맨몸으로 나돌아다니기엔… 너무 험악한 환경이니까.
제아무리 그녀가 가문 내에서 고통받았다 한들, 어쨌든 그곳도 온실이었다는 거에 예외는 없으니.
다만 온실이라 해서, 늘 평화롭고 풍요로운 건 아니다.
온실 안에서도 일부 소외되는 화초며 상황에 따라선 몰래 자란 잡초가 아예 없을 순 없을 테니.
“일단 가보자고. 봐서 나도 슬슬 정리하고 가야 할 참이니.”
“…와서 계속 일만 하시더니 쉴 틈도 없이 가게요?”
“그럼 일하러 왔지 내가 놀러 왔나.”
“……설마 그냥 내뺄 생각은 아니죠?”
그녀의 인내심도 아마 극에 달했을 거다.
그나마 시간이 꽤 지나 익숙해진 덕에 담담한 척 연기하는 게 늘어났다 뿐.
“너야말로 애써 즐기면 되지 왜 그걸 또 참아?”
“제가 하면 선배는 따로 뺄 거잖아요. 릴리를 참가시키려 해도 애써 거절하는 것도 수상하고.”
“수상하긴. 대놓고 그런 거지.”
“…….”
너무 뻔뻔했나?
못 참고 해대면 릴리에나하고 바로 해줘서 염장 질러버릴 속셈이었는데.
그 사이를 못 참고 릴리에나마저 에사나의 마수에 넘어간다?
그럼 뭐, 즐길 곳이야 어디든 없을까.
오히려 루다나와 밀회를 했을지 또 누가 알리.
“하여간 진상.”
“과찬이군.”
“…….”
마차를 타고 아말리온 가 저택으로 향한 둘
이윽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전과 다를 바 없는, 절세의 미모를 뽐내며, 그러나 어딘가 아련한 듯한 태도로 에사나와 에드릭을 맞아준 루다나.
여전히 사용인, 하녀 하나 없는 집인 탓에 뭘 준비하든 그녀가 친히 준비해야 하는 모습이었는데, 자주 그래온 덕인지 익숙하게 느껴졌다.
차를 따르는 솜씨도 평균 이상이고, 실제로 입에 대고 맛을 보았을 때도, 썩 나쁘지 않다는 인상을 받았다.
간식이 따로 없긴 했지만, 그거야 뭐….
에드릭은 말을 앞세우지 않았다.
그저 침묵한 채, 상대가 먼저 패를 내보이도록 가만히 지켜보기만 할 따름…이었지만.
“기대했던 대로 이루어졌군요.”
“…….”
기대했던 대로?
“여기서 제가 감사하단 말씀을 드려야 할지, 두려움을 표하며 고개를 수그려야 할지… 아님 또 다른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애써야 하는지, 제 소견으론 알 수가 없으니… 직접 말씀해주셨으면 합니다.”
“뭘 그런 걸 가지고.”
에드릭은 담담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저 자신은 기대하는 바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녀에게 있겠군요.”
에사나 쪽으로 시선을 돌린 루다나.
봐봐. 자리가 사람 만든다고, 눈칫밥 먹고 이리저리 휘둘리며 생존하다 보면, 없던 재주도 생기게 된다니까 그러네.
“제가 부른 게 맞으니, 그 말이 완전 틀리다 볼 순 없겠죠.”
“아르막티우스 가에서 제게 원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루다나가 에사나 쪽으로 시선을 주며 물었다.
알면서 묻는 건지, 모르는 척 떠보는 건지….
에드릭 입장에서야 알 바는 아니었다.
이건 엄연히 에사나 쪽에서 해결해야 하는 문제였기에.
“글쎄요.”
그러나 에사나는 명료하게 답하지 않았다.
애초에.
‘아말리온 가를 원하는지, 그녀를 원하는지가 불분명하기도 하고.’
에드릭이 애써 루다나를 확보하지 않고 뜸을 들이는 연유기도 했다.
여자를 후리라고 듣긴 했지만, 그게 확보인지, 후리기만 하는 건지가 명확하지 않았고.
그게 단순 비유인지, 그냥 하는 소리였는지도 조금 불분명한 구석이 있었다.
선배한테 이런 속내를 밝히면, 왜 그리 생각이 많냐, 복잡하게 생각할 거 없는데, 라고 하겠지만….
‘이건 자의가 아니라 공적 사항이다.’
그러니 얽힌다 쳐도, 이것저것 고려해둬야 뒤탈이 없지.
…아니, 이것도 따지고 보면 사서 고생하는 걸 테지만, 어쩌겠나. 기질 자체가 이러한데
아마 곧 죽어도 안 바뀌겠지, 이 철두철미함을 가장한 태도는.
“협력도 그렇지만, 사실상 일련탁생(一蓮托生)… 아, 여기선 잘 모를 테니, 한 배를 타길 바랄 뿐이에요. 우선은 말이죠.”
우선은?
에사나의 말을 토대로 에드릭은 생각했다.
‘루다나가 목적이라기보다는 역시….’
아말리온 가문의 이름값과, 그 영향.
그 외에, 루다나가 모르는 무언가겠지.
어쩌면 가신들은 알지도 모르겠지만… 어떠려나.
어쨌든 표면적으로 보면, 결국 자신들 편으로 끌어들이고자 하는 바로 해석하면 좋겠군.
딱히 파벌이나 당파 형성 개념에서 편들라, 라는 건 아닐 거다.
“그게 전부입니까?”
“줄 수 없는 걸 달라고 요구할 정도로 염치가 없진 않아요. 무엇보다… 과한 걸 기대하지 않습니다. 친우 관계를 표방하고자 하는 거지, 종속 관계를 원하는 건 아니니까요.”
“…흠.”
드물게 진지한 에사나.
그렇다 쳐도 껄렁껄렁하게 보이는 건 여전했지만, 그녀치고는 얌전하게 분위기 잘 잡고 있는 행태라, 에드릭은 별걱정 않고 둘의 대화를 유심히 지켜만 봤다.
“…하면 저번에 말씀 드렸던 첩에 관한 건 역시… 단순히 지나가는 말로 받아들이신 게로군요.”
응?
“저는 당연하지만 첩으로 오라 하며 집안째로 흡수하고자 하는 게 아닐까… 싶었습니다.”
“선배는 일단 카일론의 국모가 되실 분의 부군이시거든요? 조금 냉정하게 들리겠지만, 아말리온 가가 제아무리 대단한들, 체면을 손상 시키면서까지 받아 들일 의무는 없으리라 생각되는데,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
여기서 입을 뗀다는 거 자체가 나 잘 났어용! 자신감 넘쳐용! 하고 나대는 거니, 루다나로선 조심스러울 수밖에.
권위를 바탕으로 에사나는 에드릭이 삿된 마음으로 그녀를 취할 거란 일말의 여지를 뿌리째 뽑아냈다.
…근데 솔직히 루다나 정도 외모면, 소문만 제대로 퍼지면 왕후장상들이 줄지어 몰려들 외양이긴 하지.
…뿔에 대한 거부감이랄까, 그쪽에 관한 혐오와 부정적 인상, 견해를 완전히 배제할 수만 있다면.
역으로 그렇기에 또 끌리는 구석이 있겠지만.
터부 시 되고, 뭔가 부정되면서도, 금기를 범하는 듯한 느낌은… 배덕감 창출에 있어 더할 나위 없는 구실이….
“크흠!”
“왜요?”
“아니다.”
에드릭은 애써 점잖은 척 찻잔 쪽으로 시선을 줬다.
“하면… 아까도 말씀 드렸습니다만, 제가 어찌 해야할지에 대해 일러주시길.”
“별건 없고 지금처럼 평범히 잘 지내면 어떨까 싶은데.”
에사나가 그리 말하자, 기분 탓인지 루다나가 못마땅한 것처럼 보이는 건 왜일까.
“정녕 그게 전부입니까?”
그러곤 에드릭을 똑바로 직시하며 이리 이야기하는데, 마치 무언가 기대하는 게 있다는 투다.
아니, 다른 의미로… 에사나 눈치 보지 말고 하고 싶은 말 있으면 하라, 뭐 그런 투?
“…….”
어쨌든 이걸로 에드릭이 여기서 할 수 있는 역은 끝났다고 보면 되겠지.
그런데….
……사실 여기까지 전개는, 에드릭이 없더라도 에사나나 릴리에나 정도면 충분히 해결하고도 남았을 텐데, 굳이 자신을 부른 이유가 뭘까?
그 점을 곰곰이, 한동안 생각해왔던 에드릭이었다.
그리고 얻은 결론.
“반대로 묻죠. 루다나 아가씨께서 원하시는 게 있지 않은지요?”
금력과 인맥을 동원해 주변을 후리는 것 정도야, 에드릭이 아니어도 에사나, 릴리에나로서도 충분히 차고도 넘쳤을 거다.
그럼에도 굳이 날 불렀다면, 결정적인 게 따로 있단 거겠지.
아마 이걸 대놓고 안 밝히는 게, 에사나 녀석의 꼬임일 수도 있었고, 릴리에나도 어느 정도 수긍하고 있는 부분이겠지.
에드릭이 에사나를 시험했듯, 녀석도 자기 나름대로 자신을 가늠할 뭔가가 필요했으리라.
…아님 정말로 떡이나 신명 나게 치자고 불렀을 리는 없겠지.
그게 주는 아닐 거다. 서브일 순 있더라도.
“전….”
“말씀하시지요. 확실한 건, 저는 바라는 걸 이뤄드릴 수 있단 겁니다.”
여기서 너무 과한 건 이뤄주기 어렵다, 라거나… 너무 과한 기대는 마세요, 라는 식의 낭만과 동떨어진 소리는 알아서 입안에서 걸러내야지.
설혹 그게 현실이더라도, 그건 나중 가서 해결할 문제.
그러기에 연애와 정치가 잘못 엮이면, 이런 문제로 심하게 발목 잡힐 수도 있다지만, 적어도 지금은 아니었다.
이윽고 침묵이 한참 이어진 끝에, 결심한 듯 루다나가 굳게 닫힌 입술을 개방했다.
“저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