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73화 〉111. 잠깐 사이 꿈이어도 좋다니….(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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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말리온 가문에 대한 처우는 순식간에 일단락 됐다.
결정적인 건, 루다나가 가문에 대한 미련이 전무하기에 가능했던 일.
…사실 버티고자 하면 거저 귀족 가문의 가주가 되는 건데도, 그녀는 의외로 실속을 추구했다.
“텅 빈 곳간을 차지한들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곳간은 채워진 이후에도 관리해야 하는데 저는 그럴 능력이 없습니다. 곳간이 크다 하여 욕심을 부릴 처지가 아니란 거지요.”
“…현명하십니다.”
에드릭이 놀란 점은, 그녀는 생각 이상으로 만족이란 개념에 한에선, 더 없이 완벽한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는 점이다.
예컨대 과욕을 부리지 않는다.
선을 명확하게 지킨다.
자칫 잘못하면 호구되기 십상이나, 그녀는 본질을 정확하게 꿰뚫고 있었다.
귀족 가문 가주랍시고 저리 있다 한들, 그녀는 결국 누군가의 혼인을 하게 될 것이고, 그로 인해 모든 실권을 잃게 될 거라는 점.
실무에 대해 따로 배운 것도, 그걸 눈여겨보며 습득할 정도로 요령이 좋지도 못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아니, 늦었다.
가문을 멀쩡히 양도받은 것처럼 보이나 이건 멋모르는 이들의 시각.
가지고 있던 이권 태반은 주도권을 빼앗긴 상황.
비록 욕심을 부리지 않는다 치면, 먹고 사는데 지장은 없다지만, 귀족 사회에서 이는 권장할 만한 태도가 아니었다.
그녀가 느긋하게, 현대인들이 꿈꾸는 자유로운 여가를 꿈꾸며 힐링하는 걸 과연 그들이 지켜만 볼 텐가.
사내였다면 그나마 다행이나 그녀는 여성, 무엇보다 외모가 워낙 탁월하다.
…차라리 평범했다면 또 모르겠지만, 그게 아닌 시점에 그녀는, 스스로를 지켜낼 여력이 없는 형편이었다.
지금도 사실, 에사나가 적절하게 선을 그어두지 않았다면, 매파며 강제 혼인을 들먹이는 이들로 그녀는 밤잠을 못 이뤘을 터다.
화려한 파티가 끝나 직후엔 처참함만 맴돌 뿐.
어질러진 식기와 남겨진 음식물들, 조금 더 넓게 보면 토악질을 하고 널브러진 인간 군상들에 난잡하게 뒤엉켜 욕망을 풀어대는 남녀 간의 뒤엉킴까지.
그걸 방치하면 가관도 이런 가관이 없을 거다.
그러나 언제나 그렇듯, 치우는 인원이 따로 있고, 어지르는 인원이 따로 있는 법.
매번 파티를 열기만 하고 치우고 정리하는 인원이 없다면, 파티장이며 축제장이야말로 가장 난잡하고 추잡한 쓰레기통으로 전락하리라.
그러기에 귀족이며 왕족, 아무쪼록 귀하디귀한 족속, 기득권, 권세를 누리는 이들은 겉은 화려하나, 뒤로는 구리고, 난잡하고, 더럽고, 어둡고 음습하기 그지없는 바.
규모가 클수록, 방대할수록 이는 필연적이다.
왜냐면, 언제나 어지르는 측과 치우는 측은 동일하지 않기에.
그걸 동일하게 취급하는 이들을 세간에선 이렇게 평한다.
없이 사는 자.
모자란 자.
무식한 자.
근본 없는 것들.
…말도 안 되는 소리지.
에드릭은 생각했다.
과연 루다나는, 그런 점을 헤아리고 있는 걸까 하고.
그리고 대화를 나눠볼수록, 에드릭은 아쉬움을 짙게 느꼈다.
뭐랄까.
자신이 소유하기엔 너무나도…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기에.
실로 어이없게도, 그녀는 자신처럼 임자가 있는 누구보다는, 더욱 사랑 받고, 사랑하기 유용한 누군가와 맺어지는 게, 훨씬 행복하지 않을까 하고.
…네가 그렇게 해주면 되잖아?
라는 속내가 불쑥 고개를 빼들었지만, 에드릭은 고개를 내저었다.
‘그건 실례다.’
왜냐하면.
그녀는, 여럿 중 하나로 취급하기엔 너무나도….
팀장님이며 패왕녀가 없었다면, 아마 에드릭은 순수하게 그녀에게 꽤 깊숙이 빠져 들었을지도.
물론 아직은 표면만을 보고 그런 판단을 내린 걸 보면, 그녀가 겉치장을 정말 잘한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어쩌면 속으론 지독한 맹독을 품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지만, 여성을 많이 접한 에드릭으로선… 오히려 그게 있는 게 되려 낫겠다는 생각이 들 지경이었다.
‘그리고 그건, 자신의 애인이며 배우자에게 들이대는 게 아니라, 자신의 안위, 애인과 가정에 안위를 무너뜨리려는 이들에게 쓰이겠지.’
뱀이 맹독을 품고 있다 하여, 자신의 반려며 새끼에게까지 독니를 쑤셔 넣진 않는 것처럼.
“…….”
그런데 이렇게 생각하면 또 그녀들에게 미안해지고.
가장 먼저 알리샤며 에우리에 누님이 떠오르고, 그 외에도 데이엔 가의 모녀며, 줄줄이 깊이 관여하고 있는 여성들이 연달아 떠오른다.
비록 비공식적이라지만, 에드릭은 딸도 있지 않나.
…평생 내 딸이라 자처할 일은 없겠지만.
단순히 품고 마는 정도의 여성까지 기억해 집착할 정도로, 에드릭도 일일이 모든 것에 진지한 형편은 아니었다.
품을 때만 진지하게 사랑을 속삭이는 융통성도 충분히 지니고 있었으니까.
…안 그랬음 세자릿수를 아득히 넘는 그 인원들을 일일이 다 기억한다는 건데, 말이 되나?
그러기에 에드릭은, 이에 대해 진지하게 이야기를 해줬다.
그러자 루다나는.
“상관없습니다. 일전에도 말씀드렸지만, 1년에 며칠 정도만 헌신해주신다면, 그것만으로 충분히 만족합니다.”
“…….”
못할 건 없지.
그래, 못 할 건 없다.
이게 대단히 미묘하면서도, 현실적인 여지를 둔 요청인 터라, 더 무섭게 느껴지는 건 왜인지.
1년에 단 며칠을, 평생 사랑하는 애인이며 배우자처럼 대해주는 것.
…이거 남자로서 엄청난 로망, 메리트가 차고 넘치다 못해 폭주하는, 뭐 그런 내용 아닌가 모르겠다.
견우 직녀의 이야기를 에드릭은 좋다고 생각해온 근본적 이유도 여기에 있다.
1년에 단 하루의 재회.
…그럼에도 변치 않는 사랑.
어쩌면 이게 로맨스, 사랑의 가장 이상적인 형태 중 하나가 아닐까.
매번 만나고 부대끼는 매 순간 인간은 전심전력을 다해 사랑할 수가 없었다.
애초에 결혼한 부부가 같이 살다 보면 못 볼 꼴 다 보며 질리고, 익숙해지고 이러지 않나.
그러면서 정이 들고, 마음을 굳히는 등.
…그러나 첫사랑, 첫 교제 때의 설렘을 걸 기대하기란 영….
사실 행복해지기 위해 결혼하지 않나.
그런데 왜 대부분 결혼한 뒤로 싸우고, 다투고, 그러다 헤어지며 상처 입고, 원수 이상의 관계가 돼서 꼴도 보기 싫어질 정도로, 서로를 증오하거나 애증하게 되는 걸까.
…에드릭은 그나마 좋은 롤모델이 있었다.
자신의 부모님.
티격태격해도 잘만 지내신다.
딱히 애정 행각을 안 하셔도, 그러려니 하신다.
깨가 쏟아지지 않아도, 마치 당연하다는 듯 그러고 사는 모습.
거기엔 불편함이라거나, 착잡함, 답답함 따위는 느껴지지 않았다.
되려 포근하고, 뭔가 구질구질한 거 같다가도, 없으면 허전하고….
…물론 이건 에드릭 개인의 생각이지만.
아버지는 어머니가 어디 놀러 갔다 하면 좋구나 하고 농땡이를 피우시곤 하셨으니까.
“이야기나 일화만 듣고 반한다는 게 사실이긴 하네요.”
에사나는 그게 꽤 감탄스러웠던 모양이다.
“…그러기에.”
에드릭도 예외는 아니었지만.
도대체 뭐가 그녀에게 그리도 깊은 인상을 안겨준 걸까.
에드릭 자신은 그다지, 뭔가를 한 게 없다고 생각했는데.
실제로도 그랬고.
패왕녀 쟁탈전…에 가까웠던 부군 경쟁은, 낭만 따위 없는 막장으로 결국 전쟁 명분으로까지 쓰이게 되지 않았나.
참가자 중 포기 않고 버틴 것들은 전부 옥살이를 하고 있는 마당이고.
사실상 에드릭은 승리자라곤 하나, 이건 뭔가… 정당하지 못한 흐름이었다.
‘거기에 내 노력이 없었냐 하면 그건 아니겠지만.’
정말로 무성의하게, 대충 했다면… 억지를 부렸다 한들 무리였겠지.
결국 자물쇠 또한 알맞으니 맞물리고, 맞아 떨어지고, 잠겨지는 걸 테니까.
“그건 그렇고 이제 다 처리했으니까 할 거죠? 할 거죠?”
“……약속은 약속이니까.”
“섹스하는 걸 여자가 남자한테 허락받고 애원하는 건 대체 무슨 경우래요?”
“그러게.”
아니다 싶으면 강제로라도 덮치지 그랬냐?
물론 단호하게 패퇴시켜줬겠지만.
“그녀의 소재는요?”
“당분간은 이곳에 머무는 게 맞겠지. 아르막티우스 가에서 어찌어찌 한다 쳐도, 본인이 자리를 비우면 네 입장이 뭐가 되겠냐?”
“체면 같은 거야 상관없죠. 오히려 귀족 가문에선 이런 게 플러스 요소라고요? 가치가 떡상했으면 했지, 격하되는 일은 없을걸요.”
“실세인 여성은 보기 좋은 꽃을 원하는 사내들에겐 마이너스 요소일 텐데?”
“뭘 모르네요. 강박적인 사내들은, 저와 같은 강렬한 욕망의 대상에 더욱 끌리기 마련이죠. 내가 가질 수 없으면 부숴버리겠다는 말이 왜 나왔겠어요? 제가 가지기 어려울수록, 제 가치는 더욱 상승하죠. 그러니 자기들끼리 걸러내고 걸러져, 결국 가장 잘난 놈이 제 앞에 오게 될 테고, 저는 그걸 기다렸다가 낚아채기만 하면, 알아서 가장 좋은 물품을 수령만 하면 될 테고요.”
“…넌 마치 그게 제일 이상적인 관계라 여기는 거 같다?”
“이곳이 진짜였다면 저도 선배처럼 배우자를 택하려 했겠지만, 여긴 가상이잖아요 우리 기준에선? 이런 곳에서 현실 결혼을 왜 신경 써요? 무엇보다 화려하고, 강렬하고, 짜릿하고! 그런 걸 전 원해요. 그걸 추구하는 게 또 본사 업무하고도 맞아 떨어진다니까, 저는 제 역할에 충실하는 거죠. 어려운 건 하나도 없어요.”
“뭐, 입맛에만 맞는다면야.”
에드릭이 구태여 잡소리를 꼰대처럼 늘어놓을 필요는 없겠지.
진지함, 진실, 가치, 순수함, 고결, 어쩌고 어쩌고가 뭔 의미가 있을까.
각자 자신들만의 길을 걸어가기 마련.
어긋나고 부서지고 망가지고 넘어진다 한들, 그 또한 자기 몫.
그 책임 소재만 타인에게 전가 안 한다면, 망가진 배를 끌고 나가든, 잘 만든 배를 끌고 나가든 뭐라 할 필요는 없겠지.
잘못된 길을 간다고 붙잡아다가 팽개치고 설교를 한다 해서, 그걸 알아먹을 놈이었다면, 애초에 그 짓을 안 했을 테고.
…거기다 그렇게 하면서 원망과 저주를 들으면서까지, 누군가의 삶에 관여할 정도로, 에드릭은 자신의 가치며 신념에 강렬한 확신을 가지진 못하고 있었다.
‘맞춰가는 거지.’
물은 무엇과도 다투지 않고 엮이고, 섞이며 흐르기 마련.
…내가 물이 될 순 없겠지만 그 기질을 본받아 삶을 조금이라도 지혜롭게 꾸려 나갈 순 있을 테니까.
딱히 물의 정령을 다루게 되고, 이쪽 속성이 트여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건 아니지만, 아무래도 친화성을 기르다 보니, 그쪽 기질과 성질에 대한 이해의 깊이며 폭이 넓어진 덕에, 자주 그러한 현상에 영감을 얻는 것도, 완전 배제할 순 없을지도.
그리고, 그 안에서도 에드릭은 한 가지 확고한 게 자리하고 있다는 점은, 여전히 부인할 수 없었다.
‘결정을 내리고 말고는 그 다음 문제겠지.’
그녀를 만나고자 군도 쪽으로 가고자 하는 이유도, 그 결정적인 요인에 대한 해답을 찾고, 마련하기 위함일 테니까.
오히려 루다나를 접함으로써, 그 마음은 더욱 확고해졌다.
그 외에도 무수히 많은 연인들과의 관계를 확고하게 다지기 위해서라도, 에드릭은 그 문제를 확실히 해결해야만 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럼 오늘은 저하고 릴리에나하고 질펀하게 즐기고 내일… 아니 내일 모레는 루다나하고 질펀하게 하시겠네요?”
“…….”
너는 진짜 분위기 잡치는데 천재냐?
그럼에도 말하는 내용이 워낙 꼴리는 내용이라, 벌써 그쪽으로 의식이 쏠리려 드는 걸 보면… 나도 양반은 아니구나 싶은 에드릭이었다.
‘그치만!’
나도 오래 참았다고!
내심 한계다! 한계!
저 꼴리는 몸매, 외모!
거기다 애교 터지는 음란하고 음탕한 걸 보고 태연한 척, 느긋한 척하라니! 이게 무슨 고문이냐!
…라곤 해도 아직이다.
침대에 들어가기 전까진 태연하게.
이러한 모습이 또, 남성미를 극대화하는 요소 아니겠나.
저렴하게, 천박하게 헤헤헤, 흐흐흐 거리며 접근하는 사내놈이 멋있냐, 느긋하게 웃으며 섹시하게 허리를 바짝 끌어안고, 턱을 손가락으로 슬쩍 들어 올려주며, 위에서 아래로 내리꽂히듯, 내리 앉듯 살포기 키스하며 몸을 바짝 당겨주는 것.
어느 게 멋있는지, 굳이 말이 필요한가?
…뭐 천박하게 굴어서 극혐해 하는 여성의 표정과 태도, 기색을 즐기는 방식도 있겠지만, 적어도 에드릭일 땐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러기에.
“자꾸 저렴하게 입 놀려대면 그냥 넘어가는 수가 있다.”
“선배에에에~!”
그래그래, 계속 칭얼대라. 귀여운 녀석… 흐흐.
아닌 척하기도 참 힘드네.
입가가 풀리려는 걸 애써 억누르며, 에드릭은 차분히 마차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