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85화 〉115. 숙제는 잘 풀어왔고?(2)
“그,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그냥 한 번 물어본 겁니다.”
그렇다고 너무 뜸 들이는 건 더한 패착.
잔 기침을 하며 잽싸게 답한 에드릭.
헌데.
“그냥이라니… 떠본 건 아닐 테고 긴장을 풀은 겐가? 언제부터 그리 물러졌는가? 이거… 봄철에 너무 익숙해진 나머지 북풍 설한과 맞서오던 시기마저 잊어버린 겐가? 흠… 발언을 매 순간 주의하던 자네가 이런 실수를…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고 하여 올려두면 나아질까 했더니, 너무 높이 올려둔 탓에 군살만 늘어난, 배부른 돼지가 되어가고 있는 겐가? 그런 것인가?”
“…실례했습니다.”
여기서 아니다, 아닙니다 라고 하면, 상대에 대한 판단과 지적에 정면으로 반발하는 거밖에 안 된다.
그 이후 물어뜯길 걸 생각하면, 차라리 인정하고 즉각 고개를 꺾는 게 현명.
“흠….”
침음하는 숲의 현자는 느긋한 음색이지만, 내용이 결코 느긋하지 않았기에 에드릭의 등에서 절로 식은땀에 흘러나왔다.
“주의하시게. 너무나도 멍청한 소리를 들어서, 순간 내 귓구멍이 잘못됐나 의심할 뻔하지 않았나. 드디어 나도 노망이 든 건가, 귀신이 들려 환청이 들리는 건가 하고.”
“…….”
뼈아프네.
속이 쓰려왔다.
생각해보니 이 노인, 대놓고 본사니 뭐니 언급해대는 인간이잖아.
거기다 뭔가 속 모를 사정도 이것저것 품고 있는 거 같고.
거기다 이 시점에 등장했다는 게 대단히… 의미심장했다.
어차피 목적이 알려지는 것 정도야 그러려니 싶다.
다만….
‘왜 하필 이 시점에 온 거지?’
단순한 변덕? 장난?
윗선에서야 재미 삼아 그럴 수 있다.
그게 갑질러의 특권 같은 거니까.
반면 아래쪽에선 이걸 온전히 장난으로 받아넘기기가 어렵다.
왜냐면, 저쪽에서 대놓고 적의, 악의, 살의를 가지고 대한다 치면, 이에 맞설 수단이 극히 한정되기에.
애초부터 대비를 하고 있으면 모르겠지만, 딱히 대비해둔 것도 없었다.
경황이 없었다, 시간이 부족했다 따위는 변명의 여지조차 안 된다.
“그래서, 대답은?”
누더기처럼 헤진 검은 후드에 눌려 진 머리 사이로 어렴풋이 비추는 그의 두 눈이, 을씨년스럽게 에드릭을 응시해온다.
“혹시 숙제를 아직 풀지 못한 겐가?”
“…그건 아닙니다.”
“하면 답해야지. 어서.”
숲의 현자가 에드릭에게 건넨, 숙제라는 건 이것.
본래라면 에드릭은 패왕녀의 단신, 즉 유일한 부군으로 선정됐어야 마땅.
그러나 그 흐름이 깨졌다.
패왕녀는 왕에게 직접 에드릭의 아이디어를 밀어붙여, 모두를 부군으로 맞이하는 걸 관철시켰다.
이미, 자기들끼리 정해둔 예정조차 무너뜨리면서까지.
그리고 그 사태가 발생했다.
강제적으로 에드릭은 몸에서 격리당해 현실이자 원래 세계로 돌아왔고, 위쪽에 불려갔다.
어쨌든 숲의 현자는, 왜 패왕녀가 굳이 그런 수작을 벌였는지, 그런 선택을 나름 리스크마저 짊어지며 관철했는지, 이 속내며 의도, 목적에 대한 걸 숙제로 내주었다.
그녀는 왜 그리했는가?
심지어 그 당시 패왕녀와 흡혈룡 키헨젤바라투스 아토게르나엔자를 증인으로 두고 에드릭은 이것저것 여러 수작을 펼쳤었다.
한정된 부탁마저 들이밀며.
결과적으로 그 모든 게 무용지물처럼 여겨졌지만, 아직도 그 여파는 고스란히 미치고 있었다.
‘적어도 쉽사리 내 몸을 가져가진 못하지.’
정확하겐 아바타.
당장은 어떨지 몰라도, 추후 키헨젤, 그녀와 재회하는 시점에 그녀는 자신이 에드릭 본인인지, 아님 다른 영혼이 됐든 뭔가가 딸려온 전혀 다른 존재인지, 그 점은 그녀의 재량대로 알아서 알아낼 거라 에드릭은 생각했다.
만약 그런 것조차 속이고, 뒤집고, 바꿀 수 있다면… 그땐 뭐, 답이 없는 걸 테지만.
“왕녀 전하께서 그런 선택을 한 것에 대한 이유는….”
답은 나와 있지만, 문제는 그게 한 가지가 아니다.
그리고 에드릭은 아직도, 결정적으로 왜 그랬는지에 대한 확신은, 무엇 하나 가지지 못 했다.
본인에게 묻는 게 나았을까.
아니, 그건 아니지.
그 부분은 꽤 민감한 주제다.
아닌가? 내 쪽이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는 건가?
겁쟁이의 말로란 이런 건가 싶기도 하고.
“첫째는 제가 그녀에게 진심일 수 없음을 알았기에 그런 선택을 했을 거란 가정입니다.”
“한 가지만 말하면 될 걸 여러 가지를 이야기하고자 하는군. 흐음….”
꼼수를 부리는 건가?
라고 대놓고 타박하는 것보다 훨씬 더 묵직한 지적이다.
일종에 할 거 다 해봐라. 결과는 그때 가서 결정하지, 라는… 압도적인 여유.
조급할 필요도, 초조할 필요가 전혀 없는 이들이 흔히 보이는, 일말의 자비.
“둘째는, 그쪽이 최대한의 이득을 얻어낼 수 있다는 가정이 섰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되려 반복, 분열, 혼란으로 번질 거란 생각은 들지 않았는가?”
“그녀와, 국왕 폐하 두 사람이 판단하기로, 그것이 적절했기에 그러한 결과가 나온 거라 생각합니다.”
한편으로는 왕녀 측이 왕에게 뭔가 하자가 되는, 즉 리스크를 짊어질 어떤 제안을 하여 밀어붙였을지도 모르겠지만.
이 부분은 여전히 미스터리다.
“마지막으로 셋째로, 그녀가 절 원하든 원치 않든….”
“그러한 가정은 좋지 않네. 말장난은 관두게나.”
이런….
“…제가 지닌 권리, 이로 인한 대의명분만 확보해 활용할 수 있다면, 사실 혈연이니 결혼 문제는 다분 부차적인 걸로 여겨집니다. 피를 합쳐 혈통을 잇는 건 그 다음 문제라 봅니다만….”
“주의하시게. 진실을 논하며 이를 판별할 수 있으며, 구분을 명확하게 하길 원칙으로 삼는 이들에게, 그런 식의 모호한 발언은, 큰 실언으로 작용하기 마련이니. 버릇 삼아 실수를 저지르지 마시게. 의도할 때 또한 마찬가지고.”
“…명심하겠습니다.”
그녀가 절 원하든 원치 않든….
구렁이 담 넘듯 훌러덩 넘어가 가정 밑밥 하나를 더 깔려 했는데, 발언하기 무섭게 격당했다.
“일단 잘 알겠네. 안쓰러운 면은 있지만, 그게 결정적 실책은 아니니, 그걸 가지고 책을 잡진 않겠네.”
“…….”
“그래서, 자네가 이곳에 온 목적이 무엇인가?”
차분한 어조지만 괜스레 심장이 떨린다.
‘다 알면서 묻는 건가, 아니면….’
모를 리는 결코 없다.
문제는, 솔직히 답하냐, 끝까지 부인하느냐다.
상대가 알 게 뻔함에도, 부인해야 할 때가 있다. 아니라고 고개를 저으며, 태연히 거짓을 고하며, 발뺌해야 할 때가 있다.
의외로 살다 보면 그런 예가 많다.
진실을 고하라 말하지만, 진실을 고한 시점에 쓰레기 취급 당하는, 그런 뭣 같은 상황들이.
솔직한 게 좋다지만, 실제로 솔직하면 호구 취급하고 약점 잡아 엿 먹이고….
그러나 어쭙잖게 헛소리를 늘어놓는 게 과연 유용한가.
‘나 혼자만 좆되면 그나마 다행인데….’
팀장님한테까지 불똥이 튀는 건, 도저히….
“바로 답해야지. 여기가 머리를 굴려야 할 시기인가?”
3초도 채 안 돼 채근한다.
“원하는 걸 얻고자 찾아왔습니다.”
“또 말장난이군. 흐음… 젊은이가 패기를 보여야지, 그런 식으로 자꾸 움츠리기만 해서야….”
“전 겁쟁이입니다. 패기가 설혹 있다 하더라도, 그걸 자제하고, 억눌러야 한다고 늘 생각해왔습니다. 또한 그게, 본사가 저에게 기대하는 덕목이라 믿고 있습니다. 현재까지도요.”
“그런가.”
알 듯 모를 듯한 음색으로, 그가 짧게 침음하더니 훌쩍 몸을 일으켰다.
“대답은 잘 들었네. 어디 한 번, 재주껏 발버둥 쳐보게나.”
“…….”
불안하게 왜 그런 소리를 하십니까. 발버둥이라니….
“한 가지 충고하나 하지.”
“말씀하시지요.”
“자네는 스스로 꽤 큰 내기판에 올라섰다는 자각이 있긴 한가?”
“……?”
내기판?
“인지는 해두시게. 몰랐다가 나중에 한탄하지 말고.”
“…명심하겠습니다.”
에드릭이 대답하기 무섭게 그의 기척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내기? 내기판?”
뭐가 뭔지 하나도 모르겠네.
그보다 뱃사공 삼아 데려온 인간이 실은 그 노인네였다니.
“망할.”
뭐가 어쨌든, 찍혔다는 건 확실히 인지했다.
이윽고 제멋대로 나아가던 배가, 모래 사장이 그득한 어느 뭍에 도착한다.
어차피 능력 덕에 돛이며 따로 노를 젓지 않아도 움직이는덴 지장도 없었고.
물의 흐름을 따라 배를 댈 수 있는 장소를 대략 유추해 나아가게 한 거까진 주효했다.
예상치 못한 상황은 그 이후에 생겨났지만.
안개를 헤집고 사람 크기 되는 인영이 점잖게 이쪽을 향해 접근해 오는데….
“응?”
뭔가 낯이 많이 익다?
“뭉멍?”
“헐?”
아니, 네가 왜 여기 있는데?
“오랜만이다뭉멍?”
“왜 여기 있는데?”
그녀가 왜 여기 있는지 모르겠다.
루넨브리스가 반가운 듯 눈을 반짝여댄다.
뿐만 아니라 바짝 접근해 쓰다듬어 달라는 양 고개를 내밀자, 에드릭은 뭔가 미묘한 얼굴로 그런 루넨브리스의 탐스러운 머리를 이전처럼 차분히 쓰다듬어줬다.
“…….”
전혀 예상치 못한 출현인데.
뭐지, 내가 놓친 뭔가라도 있는 건가?
에드릭은 잠시간, 이해 못 할 이번 사태를 헤아리고자 안 돌아가는 머리를 박박 굴려야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