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98화 〉119. 나는 달을 바라본다.(3)
선민의식까진 아니어도, 미개한 환경에서 자랐다고 생각하는 놈에게 별 시답지 않은 내용으로 설교를 받고 있다는 걸, 방금 전 말로 확실하게 자각한 듯한 눈치였다.
“너 따위가….”
“그래! 화를 차라리 내! 감정 묵혀두지 말고! 눈치만 살피고 불안감에 몸사리기만 하지 말고! 확실하게 의사 표현을 하라고! 뭐가 문제고! 뭐가 마음에 안 들고! 이건 좋고! 이건 하고 싶고!”
“그, 그럴 수 없으니까 이러는 거잖아!”
“누가 하지 말랬어?!”
아니, 그나저나 너흰 왜 싸우고들 그러냐.
심지어 여긴 도서관이다. 싸우면….
“이보게들. 정숙하지 않고 뭣들 하는 겐가?”
저 봐라.
사서로 보였던 여성 중 하나가 다가온다.
분개한 눈초리를 한 그녀는 구석에서 요란을 떠는 둘을 향해 엄한 시선과 질책의 소리를 내고자 했으나.
“잠시만요! 시끄러운 거 알지만 잠시 좀 참아주세요!”
“뭘 참으라는 것이냐!”
되려 깽판을 치는 녀석이 사서를 향해 적반하장으로 큰 소리를 쳐댄다.
“지금 중요한 대목이거든요?!”
“뭐가 중요해?! 너희가 소란 피우는 것보다 중요한 게 어디 있다고?!”
“가끔 이렇게 귀를 어지럽혀줘야 고요함의 소중함도 깨우치고 그러는 거 아닙니까?!”
“말이 되는 소리를?!”
결국 몇 마디 못 하고 내쫓긴 둘.
소녀, 아르스피엘은 억울함이 가득한 표정이었다.
반면.
“뭐 애들이 살다 보면 소란 좀 피울 수 있는 거지.”
애송이 녀석은 황당할 정도로 태연했다.
전혀 잘못을 뉘우치는, 반성하는 기색조차 없다.
“봐, 혼났다 쳐. 그래서 우리 인생이 끝장났냐?”
“뭐?”
지금 무슨 소리를?
의구심과 당혹감이 뒤섞인 시선을 던지는 아르스피엘.
“달라진 건 없어. 소란 좀 피울 수 있고 요란 떨 수 있고 민폐 끼칠 수도 물론 있지. 그래서, 그게 죽일 죄냐? 목이 뎅겅 잘려나갈 죄야?”
“그….”
그건, 아니지.
“뭐가 문제야? 아무런 문제도 안 되잖아?”
“…….”
이 녀석이 무슨 소리를 지껄이고 있는지, 도무지 모르겠다.
그런데도 뭘까.
이 막막하면서도, 한편으론 꽉 막힌 것처럼 심장을, 폐부를 조여오는 무언가는.
소녀는 자책인지 혼란인지 모를 감정을 실감하며, 다시금 눈앞에서 머리 빈 멍청이처럼 당당하게 헛소리를 나불대는 소년을 지켜본다.
“행복을 위해 살아라. 위대한 업적을 이뤄라. 역사에 이름 한 줄 남겨라. 뭐 다 좋다 이거야. 그러나 진심으로 무언가를 하고자 한다면, 전심전력을 발휘 안 하면, 될 것도 안 된다고. 애초에 타고 나지도 않고 가진 바 재능이며 자질이든 뭐든 다 미천하다 치면, 더더욱 그러겠지. 남들보다 배는 열정을, 노력을, 열의를 안 보이는 주제, 남들보다 더한 걸 어떻게 이루겠다고?”
“…그렇게 말하는 너는, 그게 가능하다고 보고?”
“아니.”
“말이 앞뒤가 안 맞잖아. 그렇게 당당하게 이야기해놓고서!”
“여태까진, 그런 게 하나도 없었으니까.”
가슴 뛰는 일이라던가.
눈을 반짝이며 우와! 하고! 이야! 하며 감탄사며 탄성을 절로 내뿜으며.
몰입하고 집중하며 빠져들 수 있는, 그런 게 무엇하나 없었으니까.
그러니까 게임을 하고, 만화며 소설을 탐독하고, 영화며 드라마를 보고.
그런데 그건 어차피, 간접 체험 아닌가.
그러기에 지금이 소중했다.
그게 기약도 없는 단 며칠이라 하더라도.
어쩌면 이 며칠이 영원히 혹은 죽을 때까지 이어질지 어찌 알리.
세상은 한 치 앞도 모르는 거다.
우리의 세계처럼, 잿빛과 회색빛으로 물든 그런 단조로운 일상이 확고히 자리매김한 세계에서조차, 이변은 늘 상 이루어지는 마당에.
“그러니까, 그런 게 생겼다고 치면, 멈출 수가 없잖아.”
“…….”
애송이는 망설이지 않는다.
어쩌면 대단히 어설프고, 생각이 얕고, 대책도 없고 답도 없는… 천덕꾸러기일지도.
아니, 그게 맞겠지.
그럼에도 왜일까.
우린 저런 놈들을 보며 항상 생각한다.
‘새끼, 겁나 재미있게 사네.’
멋지게, 유쾌하게.
잘들 노는구나.
“…….”
그리고 소녀는 그런 애송이를 직시한다.
어쩌면 여태 본 적 없는 부류의 인종일지도.
아니, 봤다 쳐도 지금처럼 자신에게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끼치는 부류가 있기는 했던가.
있었을지도.
그러나 그때와 지금은 또 다르다.
무엇보다 따스한 불을 자주 본다 쳐도, 직접 불길에 손을 대는 것과, 멀리서 간접적으로 불을 쬐거나 바라만 봤을 때가, 결코 같을 순 없을 테니.
그러기에 소녀는 자신도 모르게 충격 비슷한 영감을 느꼈을지도.
그러나 그게 당장에 현실의 장벽을 허물 정도는 아닐 거다.
인간은 환경에 종속되고, 지배당하는 생명체이기에.
사지육신만 달렸을 뿐, 그들이 우리가 말하는 인간과 같은 종족이라 취급할 수 있을지는 또 모르겠다.
뭐, 그건 넘어간다 쳐도.
그럼에도 난, 애송이의 저 당당함에 한껏 슬픔 비슷한, 애처로움을 실감했다.
왜냐면 저건, 나… 그리고 우리가 바랬던… 이상 같은 거였으니까.
‘그러니까, 놓치기 아쉬운 거지.’
그래서 더 필사적이고.
그래서 더… 날뛰는 거겠지.
본인이 제대로 자각하고 저러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러나 결국, 그 모든 건 환상이다.
전부 잊혀지고, 전부 사라질….
뭐 기억은 사라지지만 그 소중한 것들은 몸 어딘가며 감각에, 세포에 남고 어쩌고?
…그런 낭만적인 게 현실에 적용될 리가 없잖아.
무엇보다 나는 이 결말을 알고 있다.
팀장님께 들었으니까.
그럼에도, 알면서도 보면서 울상 짓고, 가슴이 씁쓸해진다거나, 때때로 몇몇 이들에 따라선 알고서도 눈물 짓고, 슬퍼하는 예가 있듯….
어차피 멈출 수도, 정지할 수도 없는 무언가다.
그러니, 결말이 날 때까지… 계속 지켜볼 수밖에.
“그래서, 반했으니 사귈까?”
“…꺼져.”
그리고 아직은 애들이다.
그 풋풋함이, 퍽 마음에 들어, 더 지켜보는 맛도 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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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로 둘의 마음의 장벽은 한결 더 허물어진 듯 보였다.
요 며칠간은 사귀지 않고 있다 뿐, 절친에 가까운… 여사친 느낌이 다분했다.
뿐만 아니라 애송이 녀석의 중재 덕에 여태 이야기 나눈 적 없던 애들과도 안면을 트게 됐다.
의외로 이쯤 되면 텃세나 눈치를 주는 이들, 괜한 관심 몰이로 기싸움을 벌여대려는 애들이 있을 수 있었는데, 만화며 소설에서 늘 그런 애들이 등장한다는 걸 잘 아는 탓인지, 애송이는 그조차도 잘 처리하는, 생각 이상의 위용을 이루어냈다.
덕분에 아르스피엘에게 있어 요 며칠은, 수년간 이곳 기관에 머물렀을 때 이상의 확고한 대인 관계 변화가 생겨났다. 가히 변혁, 혁명적인 단계라 불러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물론 그 와중에 애송이 녀석의 인지도도 대폭 상승하긴 했다.
그리고 애송이는, 확실하게 자신도 이곳 세계에 머물렀으면 하는 생각을 은연중 드러냈지만… 한편으론 돌아가야 한다는 현실에도 납득해 수용하려는 식의, 묘한 입장 풀이를 뒤죽박죽 반복해대고 있었다.
“부모님이 계시니까.”
아주 효자가 따로 없지.
…심지어 저 때 품은 그게 아직까지 지탱되며 유지되고 있다는 점을 기뻐해야 할지, 애석해해야 할지.
그러나 결국 애송이는 외지인, 외부인이다.
아르스피엘이 엮여가는 것과 애송이가 엮여가는 건 전혀 별개의 문제다.
그리고 대놓고 들이대고는 있지만, 내가 보기에 은연 중 그런 식의 분위기에 녹아들지 못하는 애송이의 모습이, 드문드문 포착되기도 했고.
그럼에도 포기 않고 엮이고, 좌절감이 쌓여가는 것도 외면해가며, 적극 활동을 이어간다.
그 모습이 마치, 인싸가 아닌 놈이 인싸인 척 그 대열에 들어서려 발악하는 것 같아서, 조금 안쓰럽기까지 했다.
물론 주변 또래의 녀석들은 거기까진 간파하지 못하는 듯 느껴졌지만.
특히 아르스피엘은 더더욱.
하지만 그조차도 결국 한계라는 게 있는 법.
“3일 뒤 의식을 실행할 테니 알아두도록 해라.”
담당이었던 중년 사내가 찾아와 그 목적만 말하곤 자리를 뜨자.
“올 것이 왔는가.”
애송이는 좌절인지, 한탄인지 모를 콧방귀를 끼며.
“…그래도.”
막연히 받아들이기보단, 무언가를 시도해보고자 하는 의지가 확연하게 느껴졌다.
아직 불이 꺼지지 않았다.
그게, 지금의 나로서는 도무지, 이해가 안 가는 부분이었지만.
젊음이란 단어 하나로, 그 현상을 받아들여야 하는가.
솔직히 그게 좀, 헷갈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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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이는 죽어 가죽을 남기고, 사람을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데, 난 그게 의미가 있나 싶다.”
“…또 무슨 소리를 하려고.”
아르스피엘은 얘가 또 뭔 개소리를 하려나 싶은 눈치였다.
애송이는 태연한 척하지만 계속해서 고민하는 눈치다.
이게 맞나.
다시 한 번 되새겨봐야 하는 건 아닌가.
여기에 떨어진 이래 처음으로 고뇌하며 고민하는 기색.
문제는 그걸 녀석을 제외한 누구도 눈치채지 못하고 있단 점.
그래, 그게 맞지.
애초부터 나는, 타인에게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았으니까.
위장하며 웃는 척, 즐거운 척, 담담한 척하는 건 특기였다.
딱히 주변 환경이 어지럽거나 혼란스러워서 그런 게 아니라, 우리는 이러한 걸 미덕이라 가르침 받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으니까.
특히 동아시아권이 이게 심하다고는 하는데, 그 일환이겠지.
예컨대 속내를 감추고, 처세에 입각하는 태도를, 우린 어릴 적부터 학습해온 셈.
안 그러면 매를 맞거나 꾸중을 듣고, 욕을 퍼먹거나, 비난을 받으니까.
칭찬을 받고 싶어하는 아이들에게 있어 호통은 무엇보다 두려운 것.
그러니 애써 어릴 적부터 애교를 떨고 더욱 칭찬을 받기 위해 그들이 원하는 형태로 노력하고, 학습하고, 분발해가며.
우린 우리의 순수성을, 계속해서 깎아 내려간다.
적성에 그게 맞다 치면 그 놈은 난 놈이랍시고 치고 나가는 거고.
아닌 이들은 도태돼서 반항심만 높아져 가지.
그리고 현실의 장벽에 계속 치이고 깎이며.
뒤죽박죽이던 돌도, 어느덧 자갈처럼 갈리고 갈려 더는 저항할 의지를 못 느끼고, 현실에 수긍하는 법을 배우게 되는 거지.
그렇게 세상은, 국가며 사회는 우릴 그렇게 개조해 나간다.
뭐 거대한 규모의 인간 사회를 온전히 유지하고자 한다면, 개성 넘치는 부류가 무차별적으로 날뛰는 건 장려하기 어렵겠지.
ceo는 한명이어야지, 여럿이면 회사가 제대로 굴러가겠나.
사공이 많은 배가 산으로 간다는 말도 있지 않나.
…그나저나 이게 당장 중요한 건 아니지.
어쨌든 태연하게 주변과 어울리고, 청춘을 구가하던 녀석도 결국 시간이 촉박해지자, 에라 모르겠다는 투로 불쑥 이야기한다.
“이틀 뒤 돌아갈 수 있다나 봐.”
“응? 어딜?”
“어디겠어?”
우스갯소리로 말한 거치고는, 보통 내용이 아니었다.
적어도 아르스피엘에겐, 그렇게 와닿았는지, 살짝 풀린 얼굴이 급속도로 얼어붙는 게 아주 선명하게 눈에 보일 지경.
“다행이네.”
그리고 그걸 보며 묘하게 만족감을 표시하는 애송이.
“그 말이 네게 영향을 줄 정도는 됐다는 거구나.”
“…….”
이 변태 새끼.
상대가 쇼크받는 걸 되려 관종 기질로서 즐기고 자빠졌네?
멋진 새끼. 그건 좀 마음에 드는구나.
지금이라면 여성 측이 마음에 상처를 입을 테니 결코 저런 장난질을 해대지 않겠지만….
뭐 그런 거 있지 않나.
한 여성이든 누군가, 동료며 소중한 이를 위해 전심전력을 다 해서 희생한 다음, 막바지에 죽어가거나 사라져 가는 날 보며 울부짖고, 슬퍼하고, 사랑을 속삭이며 모든 관심과 사랑, 의지와 시선 등을 독차지하는… 뭐 그런 거.
사실 지금도 그거에 대한 로망은 있다.
단지, 그때처럼 자기 파멸을 감행해가며 그걸 누리고픈 의지가, 저 시절에 비해 급격히 줄어들었다는 게 차이라면 차이지.
나이를 먹어보니, 살아있는 상태로 온전히 즐겨대는 게 최고다.
그러니 저걸 누리고자 한다 치면, 나이를 먹어 침대 맡에 가족들 여럿, 수십이 둘러쌓아서 행복하게 세상을 뜨는, 뭐 그런 게 그나마 현재로서의 로망이라면 로망이겠지만.
“다시, 말해봐. 뭐라고?”
“잘못 들은 거 아니니까 진정해.”
그러기에 애송이는 아마도, 그 부분에 만족하기로 내심 타협을 했나 보다.
적어도 녀석은 아르스피엘을 구제했다.
라고, 생각하고 싶은 거겠지.
솔직히 틀린 이야기는 아니다.
아마 자신이 사라져도.
그녀는 이제, 주변에 어우러질 수 있을 테니까.
그게 가능하면 친구를 사귀고, 누군가와 연을 맺고, 관계를 개선 시켜가는 건 어려운 게 아닐 테니.
다 처음이 힘든 거다.
그래, 처음이.
그리고 그녀는 이제 괜찮을 거다.
어찌 됐든, 쓸모없는 나보다는, 훨 나은 존재니까.
…라고, 속으로 타협하고 체념한 게 아닐지 모르겠다.
이상하리만치, 저 시점에 한에서는 애송이 녀석의 사고가 눈에 훤하게 간파됐다.
아마도 저 기질이 발전을 거듭한 게, 현재의 나일 테니.
체념에 익숙해지고, 좌절에 좌절 않도록 애써 마음을 가다듬어가며, 현실에 타협해대는 것에 순응하게 된, 지금의 자신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