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99화 〉120. 보기만 해선, 별을 딸 수 없으니까.
“너 여기서 살고 싶다고 했지?”
아르스피엘이 물었다.
“오, 그냥 간다 하니까 아쉬워서 그런 거냐?”
“…….”
정강이를 후려 맞은 애송이가 무릎을 부여잡은 채 깽깽이 발로 날뛴다.
“솔직하게 인정하면 어디 좀 덧나냐?!”“넌 좀 닥쳐.”
“맞잖아! 왜 인정을 안 해!”
“…….”
“또또!”
후려 찰 거처럼 왼발을 뒤로 빼자, 펄쩍 몸을 뒤로 뺀 애송이.
“근데 방법은 있고?”
“…그걸 알아봐야지.”
“못 알아보면?”
“…….”
표정만 보면 ‘내가 아냐?’ 하고 당장에라도 투덜댈 것만 같은 인상이다.
“그보다 넌 왜 네가 태어난 세계를 싫어하는 건데?”
“싫어하면 안 되냐?”
“응?”
“안 되냐고?”
“그건… 아니지.”
“반항기일 수도 있고 사춘기일 수도 있는데, 아무튼 입에 안 맞는 걸 어쩌냐.”
솔직히 애니며 만화, 재미있는 소설이 있다 쳐도 아쉬운 건 잠깐이다.
현실이 더 스펙타클하고 스릴 넘친다 치면, 소설 따위는 안 봐도 좋다.
방에 앉아 글과 그림으로 간접 체험을 해대는 것보단, 현실이 훨씬 좋다.
애송이는 스스로 리처드 파인만처럼 물리학이라는 걸 즐길 수 없음을 확실하게 이해하고 있었다.
그들에게 현실은 미지와 기적과 환상의 일종이지만, 자신은 그 영역에 발을 들일 수 없다.
앞서 먹고 사는데 신경써야 하며, 주변의 편견과 시선, 그리고 온갖 부조리와 자신을 억누르려 드는 악의와 싸워야만 한다.
거기에 대체, 무슨 로망이 있고, 무슨 낭만이 있단 말인가.
결혼을 한다 쳐도 그게 과연 제대로 된 생활이 이루어질지 의문이다.
나이만 먹고 대학을 가면 애인을 사귀고, 학교를 졸업하면 취업해서 그럭저럭 살 수 있다 어쩐다 하지만….
한국은 IMF 이래 취직으로 인한 종신 계약이란 개념이 증발해버렸다.
애초에 이걸 알게 된 계기도 아버지가 IMF 때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는 걸 술김에 언급했을 때, 그걸 흘려듣다가 사회 과목 선생님이 한국 경제며 상황 문제랍시고 언급한 것과 맞물려서, 알아보니 취직을 당연 시 여기는 흐름이 과연 맞는지, 의구심을 가지게 됐다.
그래서 어른들한테 물어보니 다들 뭐라 하던가?
‘대학이나 들어가라.’
‘취직은 그 다음 문제다.’
‘공부나 제대로 하고 그걸 걱정해라.’
‘어딜 감히 어른이 시키는 일은 안 하고 쓸데없는 걱정이나 하고 자빠졌냐?’
‘아직은 이르니 지금은 공부에 집중하렴.’
오, 그놈의 공부 공부 공부!
정말로 공부를 하면 인생이 보장되는가?
심지어 타이밍 좋게 일류 대학을 졸업한 이들의 열악한 여건을 보이는 사회적 문제, 그 기형적 구조에 대한 다큐까지 이어지니, 더더욱 의구심은 부풀어 갔다.
거기다 대한민국은 대부분 대학 졸업이 필수다. 취직 시 기존 전제 조건이 대졸인 곳이 허다하고.
뭔가, 구조가 좀 이상하지 않나?
한편으론 공부 안 하려고 좋은 변명을 내세우는 걸지도 모른다. 아니, 반쯤은 그게 맞지.
즉, 그러한 의혹과 의문이 해결되지 않았기에, 더더욱 노력하는 게 부질없게 느껴지며, 애초에 그걸 원하지 않았는데, 그걸 강요한다 해서 해야 하는 것도 문제고….
학교에 짱 박혀 갇힌 시점에 학교가 감방이란 점에 대해선 초중고 시절 내내 생각했던 건데, 이게 단순 생각이 아니라 실제로도 그런 구조로 돌아가고 있다는 것도 파악하게 됐다.
역사며 사회 구조가 이를 증명해줬다.
우연히 책을 잘 고른 건지는 모르겠지만.
독서를 그리 많이 하는 편도 아니었음에도, 하나하나가 주옥같았다.
부자 아빠며 가난한 아빠를 놓고 이것저것 비교해댄 누구 씨의 책도 있었고.
판타지 소설 보다가 겸사겸사 선생님이 책을 압수하니, 압수 안 하게 그런 쪽 책을 위장 삼아 들추게 된 게 그쪽 도서를 탐닉한 계기라면 계기.
고작 그 정도로 인생관이 대폭 변화를 맞이할 일은 없다지만….
“사람이 너무 많아서, 거기선 내가 뭘 해야 할지 모르겠거든.”
“그건… 또 신기한 발상이네.”
사람이 많은 걸 핑계로 삼다니. 이 녀석 정신 구조는 대체 뭘로 이루어진 걸까.
아르스피엘은 어째 녀석에 대해 알면 알수록 도리어 헷갈려가는 걸 실감한다.
그런 주제 왜 저리 대책 없이 자신감에 넘치는 걸까.
막상 보면, 뭔가를 할 거 같긴 하다.
그게 뭔지 모르겠지만.
그럼에도 정작, 뭘 하나 제대로 해내는 걸 못 봤다.
녀석은 특별하지 않다.
그러나 특별한 것처럼 행동한다.
아니, 어쩌면 사소한 건지도 모르겠지만, 거기에 망설임이나 주저함이 없다.
위태롭기 짝이 없지.
그럼에도.
그 생각 없이 날뛰는 행동 덕에, 아르스피엘 자신과 주변의 환경이 바뀐 것만큼은 확실했다.
그조차도 고작 한 달도 채 안 된 기간.
“네가 정말 특별하다면, 이번 것도 어떻게 해결해보던가.”
“그건 어쩔 수 없지. 약속이기도 하고, 내가 여기에 머문다 쳤을 때, 부모님은 어떡하라고?”
“…….”
부모가 존재한다는 걸 부러워하던 시절도 있었는데, 어째 이건 다른 의미로 걸림돌처럼 느껴지는 건 왜인가.
그러나 그건 아르스피엘 본인의 생각. 녀석은 결코 그런 식으로 생각지 않고 있음을, 그녀는 분명하게 느꼈다.
가족이 소중하고 자시고를 떠나, 그냥 그게 당연하다.
굳이 소중하다는 걸 언급하고 자시고 없이, 우선시하는 게 숨을 쉬듯 당연한 거처럼.
머리가 아니라, 녀석은 가슴으로 그걸 받아들이고 있기에, 그런 부분에서 결코 망설임이라는 게 없는 거다.
“…사춘기라면 도리어 부모님이며 어른들한테 반항심 가지고, 반발하고, 떨어지려 하고, 그게 맞지 않아?”
“다 잘 되자고 그러는 거지. 말이 안 통하고, 소통이 불가능하다 해서 아예 안 보고 살 건 아니잖아? 남남이라면 그냥 쌩을 까면 그만이지만, 그게 아니잖아?”
“…….”
그게 가족이라는 건가.
솔직히 아르스피엘로선 알 도리가 없었다.
그녀에겐 가족이란 게 특별히 없었으니까.
유일하게 그걸 느낄 만한 이는….
“그러니까 아쉬우면 만들던가.”
“뭘?”
“가족이든 애인이든 뭐든. 내 경우는 떠나는 김이라 이제 와서 사귀자고 치근덕대면 괜히 너한테 안 좋은 뭐 시기만 남을 거 같으니까, 그래! 지금 이 순간부터는 사귀어달라 안 그러마. 아, 혹여 네가 날 찾아와서 사귀자 하면 그건 예외지만. 그럴 수 있다면야….”
“그래야 할 이유가 없는데.”
“너 말고 다른 얘들한테도 요청해보지.”
“…….”
“왜? 아쉽냐?”
“닥쳐.”
할 말 없으면 닥치란다.
뭐 아직 언어 구사 및 관련 감수성이 풍부하길 기대하긴 어렵겠지.
아닌가? 이건 학습과 반복 훈련을 통해 단련해야 하는 부분인가?
말이며 언어도 잘 다루고 써봐야 다양한 바리에이션이 생겨나는 거지, 매번 시발시발만 거려 봐라. 모든 감정을 시발 하나로 표현해버릴 텐데, 언어 구사력이 나아지겠나.
그러니 어릴 적에 웅변이라던가, 책 등을 많이 읽고 낭독을 해 버릇하는 게 조기 교육상에서도 썩 나쁘지 않은 거다.
…한편으론 시대착오적인 애라면, 괴상한 취급 받을 수도 있겠지만.
“원래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가 딱 좋은 거야. 결혼하고 부대끼고 살다 보면 못 볼 꼴 다 보게 되고, 그러면 서로에 대한 환상 다 깨지는 건데, 너도 그래. 여전~히 이마하고 눈 가려대고. 그거 뭐냐? 머리카락 눈 가리면 안 불편해? 눈꺼풀이라던가 눈 자꾸 들어가서 안 찔려? 안 아파? 그리고 한창 성장기잖아? 너 머리카락이 이마 자꾸 쓰다듬게 하면 그쪽에 뾰록지 나고 여드름 같은 거 막….”
“닥쳐 좀! 왜 자꾸 그런 이상한 소리를 하는데?!”
“아니 원판이 좋은데 왜 가리냐고. 최소 눈이라도 보이던가!”
“내가 불편한데 어쩌라고?”
“뭐 상처라고 있어? 칼집이라도 났다던가? 화상? 눈이 안 보여? 뭐 그것도 다 매력에 일환일 수도 있긴 한데… 드러내 대놓고! 나는 사실 특수하며 특별한 과거와 상처가 있어! 내 우울함과 고독하고 차가운! 뭔가 있어 보이는 그걸 느껴봐! 하고 그런 오라? 포스를 풀풀 풍겨보시던가! 지금 넌 그냥 우중충이잖아? 아? 혹시 눈에 다크 서클 껴서 머리카락 걷으면….”
“넌! 좀! 닥쳐! 좀!”
“아! 차지 마! 그만! 차지 말라고! 아프! 야! 졸라! 아 좀!”
그렇게 호들갑 떨던 둘을 향해.
“거기 둘.”
아….
딱 봐도 신경 날카로워 보이는 중년 여성.
그녀가 안경을 바로 잡곤 설교조로 말했다.
“복도에서 시끄럽게 떠들지 맙시다. 기본 예의도 모르는… 당신은 이곳 소속도 아닌데 왜 자꾸 얼쩡대죠?”
“소속이 아니라 해서 오면 안 된다고 신께서 말씀하시진 않으셨잖습니까?”
“…저번엔 법을 이야기하더니, 금세 또 말을… 하여간 잔머리만 늘어 가지고.”
장탄식을 터트리는 여교도.
“아르스피엘. 당신도 당신입니다. 그전처럼 조용히 절조를 지킬 생각은 않고 자꾸 요즘엔….”
“활발해져서 좋지 않습니까?”
“당신은 입 다무세요. 제가 지금 누구한테 말하고 있습니까?”
“선생… 아니 교도님도 너무 그러지 마세요. 그러니까 노처녀 히스테릭이라며 주변에서….”
“뭔 노처녀?! 이것 봐요 생도! 아니! 생도도 아니지만! 당신은 웃어른에 대한 기본적인 예의와 범절을 배울 필요성이 있어 보이는군요!”
“걱정 마시지요! 제가 꼰대와 예의범절에 이가 갈린다는 예법의 나라에서 왔습니다.”
“말은 참 잘하는군요! 그런데 지금 이 태도며 행동거지는 대체 뭐하자는 겁니까?! 말의 앞뒤가 무엇 하나 맞지 않잖습니까!”
“예법의 나라에서 왔다 해서 제가 예를 지키는 건 별개 아닌지요? 나라와 개인을 함부로 엮어선 아니 됩니다! 무릇 교육이란 개인의 개성과 적성에….”
“닥치세요. 또 궤변을 늘어놓으려고….”
“아, 논리에서 밀리시니 나이와 권위로 누르려 하시는군요?”
“나이가 거기서 왜 나옵니까! 나이가!”
“그래도 교도님이 얼마나 훌륭한 분이신지는 전부 이해하고 있습니다.”
“하! 갑자기 무슨 허황된 말을….”
“아뇨, 저희 나라였으면 보통 여기까지 말 하기 전에 이미 귀싸대기 날리고, 몽둥이로 후려 까고, 발로 걷어차고, 넘어뜨린 뒤 다시 재차 걷어차 댔을 텐데, 안 그러시잖습니까? 그거 하나만으로 교도님께서 얼마나 생도며 학생들을 배려하고 예를 갖추어 그들을 인격자로서 존중하는지, 누구보다 확실하게 실감하고 있습니다! 이야, 이런 분께 배움을 받으니 이곳 생도분들은 축복받은 거로군요. 온갖 열정과 열의를 다해 후학과 후배 양성에 혼신을 다하고 계시니….”
“…아부는 됐습니다. 아무튼 시끄럽게 떠들지 말고, 무엇을 하나라도 배우고자 한다면, 그에 걸맞은 예의와 행실을 보이도록 하세요. 주변에 이상한 영향 전파하지 말고!”
“옙! 명심하겠습니다!”
“……하아.”
대체 어디서 저런 게 굴러와 가지고….
골치 덩어리를 마주한 듯 머리를 절레절레 저으며 사라지는 교도를 배웅한 애송이.
“…넌 대체 왜 아무렇지 않게 교도님들한테 그렇게 막 나가고 그러냐?”
“난 오늘만 사는 놈이니까.”
“……?”
아르스피엘은 얘가 뭔 개소리를 하는 건가 싶었다.
그러나 그 말이, 진실로 애송이가 저렇게 막 나갈 수 있는 유일한 이유였음을, 소녀는 알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