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00화 〉120. 보기만 해선, 별을 딸 수 없으니까.(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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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하루를 앞둔 애송이는 잠을 설친 탓에 늦잠을 자게 됐다.
결국 눈을 뜬 건 오전과 오후의 교차점인 점심 경.
“…싸늘하다.”
새벽이나 이른 오전의 써늘함과는 달리, 따스하면서도 아늑한 기분.
무엇보다 창문을 통해 밝게 내려앉은 햇살이 생각보다 훨씬 밝게 느껴졌다.
애초에 깨어난 직후 깔끔하게 눈을 뜬다는 거 자체가, 잘 만큼 잤거나 잠을 설쳤다는 건데, 어느 쪽이냐 하면….
“내일인가.”
돌아간다고는 하나 아마 무엇 하나 기억하지 못 하겠지.
그래도….
‘그러려니 해야지.’
아마 이렇게 생각하고 있지 않을까.
타인을 대하거나 보는 눈이 있을 때와는 달리 혼자 있을 때의 녀석은 생각 이상으로 침착했다.
차분하면서도 조용한 인상.
본래라면 이게 정상이겠지.
그럼에도 또 어떤 심경에 변화를 맞이했는지, 표정을 밝게 바꾼 애송이는 침대에서 벗어나 세안 뒤 복장을 갈아입었다.
무심코, 이곳에 소환된 직후에 입고 왔던 복장이 불쑥 눈에 들어왔지만….
애송이는 시선을 한 번 줄뿐, 미련 없다는 듯 방을 나섰다.
“출출하네.”
혼잣말을 흘리곤 배를 문질러 대는 녀석은 곧장 식사를 위해 급배식실으로 향하는 듯 보였다.
거기까진 별다른 이변은 없었다.
마주치는 이들과 태연자약하게 인사말을 나누며, 아무렇지 않게 자기 몫을 떠서, 아무렇지 않게 남녀가 앉은 자리 중 남은 곳에 떡하니 난입한 녀석.
“뭐야? 어디 갔다 온 거야?”
한 소년이 묻자.
“자다 왔지.”
“응? 아르스피엘 따라 간 거 아니었어?”
“어? 걔는 왜?”
“왜라니…?”
뭔가 놓친 건가?
반응들이 뭔가 평소와 달랐다.
“나 없는 사이 무슨 일 있었어?”
애송이는 그러면서 포크 숟가락을 이용해 식사에 전념했다.
“그러니까….”
눈치를 보던 소년 소녀들이 곧장 애송이 녀석이 없는 사이 발생한 일에 대해 일러줬다.
그런다 한들 그들도 아는 건 별로 없었다.
그저 수업 중 불려 나갔다가 그대로 사라졌다는 것.
때마침 그 주변을 안에서 볼 수 있는 위치에 있던 얘가 심각한 표정으로 따라 나섰다, 라는 정도의 정보가 유일한 단서라는 모양인데.
“흠….”
“뭐야? 금방이라도 알아보겠다며 움직일 줄 알았는데.”
“아니, 배는 고프니까 먹어야지. 이걸 버리게 그럼?”
“…넌 정말 정신 세계가 고상한 거 같다 야.”
“별말씀을.”
칭찬은 아니지만 칭찬으로 받아들이면 이 또한 칭찬 아니겠나.
특이하다, 이상하다, 괴상하다는 칭찬이다.
암, 그렇고 말고!
남들과 똑같은 인생! 구질구질하지 않냐?!
아, 뭐… 일상을 구가하는 걸 뭐라 비난할 생각은 없지만.
표정만 봐도 애송이의 그런 속마음이 훤히 보였다.
심지어 주변에 있는 꼬맹이들도 평소 언행 탓에 그러한 걸 대략 유추한 듯 싶고.
애송이는 꾸역꾸역 스프며 빵이며 소시지에 샐러드 등을 모조리 섭취해 식판을 싸그리 비우곤.
“좋아, 그럼 가보마. 빨리 먹다 체하지 말고.”
“…네가 할 소리냐?”
3분도 안 돼서 남들은 아직 반도 안 먹었는데 싸그리 처리한 주제에.
“나야 이런 게 익숙하니까.”
피 같은 점심시간에 책 읽거나 퍼 자거나 숙제하거나 멍이라도 때리려면, 급식이라도 빠르게 처리해야 하는 법!
어차피 나이가 나이다 보니 조금 험하게 입안에 구겨 넣는다고 탈이 날까 보냐.
이건 무려 초딩 때서부터 꾸준히 숙달되어온 결실이다.
먹어야 산다.
성장기에 잘 챙겨 먹는 게 나이 들어 보약 및 산삼 등을 챙겨 먹는 것보다 중요하단 속설이 있다.
어쨌든.
애송이는 따로 묻는 바 없이 곧장 어딘가로 향했다.
“아르스피엘이라면….”
개인적 사정이 생겨 이를 전달하는 차원에서 어딘가로 향했단다.
“이거 참.”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공교롭게도 이런 일이 벌어지다니.
어쩔 수 없겠구나 싶어 애송이는 일단 신경을 끄기로 한 모양이다.
어차피, 당장 녀석이 할 수 있는 거라 해봤자 뭔 일이 벌어졌는지 묻고 다니는 게 고작.
그래서 알게 됐다 한들, 무엇이 달라지겠는가.
그러니 이 경우엔….
‘엮이게 된다면 원하든 원치 않든 이벤트가 발생하겠지.’
…라고, 다분 만화며 게임, 소설 등에 발생하는 뭔가를 생각하는 건 아닐까, 하는 걱정이 물씬 들었다.
대놓고 운명론을 주창하고 다니는 녀석이다. 뭔 일이 발생해도 이상하지 않겠다고 여길 지도.
근데, 그건 이야기며 창작물에나 해당하는 거지.
애초에 기승전결이란 건 이야기를 고조시키고, 몰입시키기 위해 적용되는 구성 장치지, 현실에서 그런 구조가 시의적절하게 맞아 떨어지길 기대하는 건, 조금 이상하지 않나?
그래서 실화들조차 그런 느낌이 들게끔 장면을 끼워 맞추고 그러지 않나.
어차피 보여주는 걸 어찌 보여주고, 그 시기를 어떻게 조정하느냐에 따라, 극적인 것도 물러 터지게 만들 수도 있고, 물러 터진 것조차 극적이게 포장할 수 있는 셈이니.
그러니 영화로 치면 감독의 역량에 따라 같은 내용도 표현 방식이 천차만별로 바뀌는 거고, 이는 만화며 글 작가도 예외는 아닐 거다.
어쨌든 지켜보는 누구 씨는 아랑곳하지 않고 애송이는 주변을 싸돌아다니며 나 내일 간다, 다들 잘 지내라 하는 등의 예비 작별 인사들을 분주히 해대고 있었다.
척 보면 구김 없고 여유가 흘러넘치는 것처럼 보였지만, 과연 어떨까.
나였다면….
아주, 엄청 불안했을 거 같다.
아예 저기에 발 들인 시점에 눈에 안 띄도록 적당히 눌러앉아 있다 돌아갔겠지.
어차피 내 안에선 이 모든 인연이 사라질 텐데, 아쉬움을 남길 필요가 뭐 있다고.
그리고 대조적으로 녀석은, 더욱 활기차게 주변을 헤집는다.
그게 참… 부러우면서도, 안쓰럽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해가 저물 때쯤.
“왔냐?”
“…….”
아르스피엘이 복귀했다.
애초에 앞머리로 얼굴의 반 이상을 가리고 있어 표정을 살피기가 여의치 않았지만….
“뭔 일인지 물어봐 줬음 하냐? 아니면….”
“됐어. 별일 아니니까.”
“그래?”
거기서 애송이는 조금 더 캐물을까 하다 그냥 내버려 두길 택한 듯, 한걸음 물러섰다.
헤어질 시간이 머지않았다. 괜한 미련을 가질 필요는 없다 여겼는지도.
아닌가? 그저 억지로 물어보는, 그 끈질긴 태도를 마지막까지 보일 필요 없다 생각한 건가?
“그래서, 가는 거야?”
“그러겠지.”
“그래.”
아쉬운 듯 입술을 달싹이다 결국 힘없이 어깨를 떨구는 아르스피엘.
그럼에도 말은 똑바로 한다.
“마중은 안 나갈게.”
“뭐야? 결국 이런 식으로 끝을 맺자는 거냐? 아쉽게시리?”
“…….”
척 봐도 기분이 좋지 않은 게 확연하게 느껴졌다.
그럼에도.
“뭐, 네가 그걸 진심으로 원한다면, 나는 그걸로 만족하마.”
말은 그렇게 해도, 애송이 녀석은 자꾸 미련이 남는 것처럼 보였다.
깔끔하게 헤어져도 아쉬울 판에 뭔가 뒤숭숭하게, 부적절하게 끝맺으려는 이 구도가 썩 마음에 들지 않은 걸지도.
그렇다 한들, 당장 녀석이 뭘 할 수 있겠나.
한계라는 건 예외가 없다.
그나마 손쓸 틈도 없이 벌어지는, 불가항력과도 같은, 불친절한 사건사고, 재난이 아닌 게 어디인가.
그리고 우린, 차근차근 그것들을 받아들이며 성장한다.
적응해가는 걸 몸소 학습해가며, 불현듯 어른이 된다.
내가 싫어도 몸은 늙어갈 테고, 수없이 쌓이는 기억이며 경험들 탓에라도, 신선미는 날이 갈수록 떨어져 갈 테지.
처음 재미있는 만화며 소설, 게임을 접했을 때의 설렘이라는 건, 결국 그러한 경험이 지속되고 누적되고 쌓여갈수록… 덤덤해질 수밖에 없는 거다.
“…….”
“마중은 안 나온다니 그럼 이번이 마지막인 거지? 저번에 말한 것처럼 구질구질하게… 사귀어 달라 어쩐다 말하진 않을 테니까, 아무튼 잘 지내고 나 보고 싶다며 엉엉 울고 그러지 말고. 알았냐?”
“…닥쳐.”
“하하.”
자, 그러면 다른 애들한테 고백이나 하러 가보실까.
장난스럽게 주절대며 등을 쓱 돌린 애송이는.
“아무튼, 나 없다고 또 어디 구석에 틀어박혀 있지 말고.”
“…….”
그 말을 끝으로, 등을 보인 채 손을 크게 휘저으며, 자리를 떴다.
노을이 내려앉은 복도 한복판에서, 그렇게 둘은 헤어졌다.
거기에 어떤 낭만이 있을까.
구도를 잘 잡고, 장면을 잘 추린다 치면, 조금 더 애달프고, 애처로웠을까.
글쎄다….
나는 잘, 모르겠다.
녀석은 그 뒤로도 이곳저곳을 오가며 신세 진 이들에게 감사며 작별 인사를 이어가는 둥, 생각해보니 이 녀석 짧은 시간 동안 꽤 분주히 싸돌아다녔음을 다시금 실감한다.
그걸 또 기억하고 일일이 찾아가다니… 무슨 정신머리지.
그냥 곱게, 조용히 사라지면 좋을 것을.
어쨌든 해가 지고, 마지막 식사로 배를 채우며 작별 파티 비슷한 환경 속에서 이런저런 아쉬운 말들을 들어가며 시간을 보낸 녀석은, 조금 이르게 방으로 돌아왔다.
나이를 퍼먹었다면 밤새 술 마시고 그랬을지도.
그리고 돌아온 직후, 녀석은 차분하게 침대에 앉아 뜬눈으로 시간을 보냈다.
방안은 어둑한 그대로, 고요하기 그지없었다.
녀석은 눕지도 않고, 활동복도 갈아입지 않은 채… 아니, 그러다 다시 몸을 일으키더니.
한쪽 선반에 접어 올려둔 교복을 들어 침대 위로 옮긴 녀석은, 차분히 옷을 갈아입기 시작했다.
그 뒤, 활동복을 다시 고이 접어 교복이 놓여 있던 선반에 이를 올려둔 애송이는, 다시 침대 위에 앉아 천천히 시간을 보냈다.
마치 일분일초를 곱씹듯.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똑똑
아주 작지만, 분명하게 노크 소리가 들렸다.
녀석의 표정도, 그 순간 일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