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01화 〉120. 보기만 해선, 별을 딸 수 없으니까.(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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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리고 있었―다!”
“…….”
애써 희극적인 모습을 보였지만, 정작 그것도 티키타카가 맞아야지.
서 있는 것만으로 우울함이 물씬 풍기는 아르스피엘 덕에, 애송이도 희희덕거리던 표정을 바꿔 한결 차분해진 얼굴로 소녀를 맞이했다.
“그래서, 그렇게 작별하는 건 아쉬우니 하고 싶은 말이 있다거나… 아니면….”
“…….”
망설이는 기색이 역력하다.
어느 의미론 여기에 왜 왔는지 스스로 고민하고 있는 건 아닐까.
애송이는 침착하게, 그녀가 준비되기까지 기다려줬다.
침대에 엉덩이만 걸터앉은 채, 여전히 선 채로 망설이고 있는 소녀를.
“오늘.”
얼마나 기다렸을까.
“할아범이 죽었어.”
“…….”
할아범?
그녀에 대한 건 크게 아는 바가 없었다.
심지어 주변에 물어도 흔히 알려진 것들 대부분.
공주님이었다더라, 그런데 사정이 있다더라.
뭐 이런 흔한 건 그러려니 쳐도, 애초에 스스로 소통을 하지 않고 문을 꽁꽁 걸어 잠그고 있던 터라, 개인적으로 그녀에 대한 정보는 그녀를 지도하고 선도하는 교도들 정도가 고작.
그런 그들에게 물었을 때도, 개인적인 정보며 사정 등에 대해선 별말 않는 투철함들을 보였기에, 거기서 파악한 힌트도 극히 일부분이었다.
그러니까….
저번에, 외부인이 와서 그녀와 연관된 이유 혹은 사정으로 교도들하고 싸웠다는 소식에 대한 내용조차, 애송이는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 연장인가, 아니면 급작스레 발생한 사고인가.
어찌 됐든.
“할아범은, 부모님을 대신해 널 키워주거나, 보살펴준 존재…인 거지?”
“응.”
“그분이 돌아가셨다고? 어쩌다가?”
“노환. 지병도 있었으니까. 최근서부터 안 좋아졌다고 들었거든.”
“흐음….”
이에 대해선 뭐라 말하기가 그랬는지, 애송이 녀석은 침착하게 경청의 자세를 취했다.
여기선 분위기 파악 못 하도 입을 잘못 놀릴 정도로, 녀석이 눈치 없는 녀석은 아니었으니까.
오히려 반대다.
현대인으로서, 대한민국의 그 거시기한 환경 속에서, 눈치를 안 보고 산다는 게 말이나 되나.
“그래서, 넌 어떻게 하기로 했는데?”
“돌아갈 생각이야.”
“그리고?”
“거기서도 할 일이 있을 테니까.”
“그러니까, 그 할아범의 유지를 잇는다? 아니면 뭐 유산이라도 물려받는다던가?”
“…비슷하긴 해.”
“그러냐. 뭐 그러고 싶다면야 말릴 이유는 없지. 언제나 만남이 있음 이별이 있는 법이니까. 나도 그렇고.”
“…….”
“그래도 마지막에 얼굴 봐서 좋네. 이런 속내도 밝혀주고 말이야. 시간이 조금 더 있었으면 어땠을까 싶네. 내 쪽이 오히려 배웅해줬으려나?”
아쉬움은 여전히 남는다.
그런 기색이 역력했다.
“그래서 말이야.”
그러니까.
아르스피엘이 최대한 담담한 척, 무덤덤한 태도를 연기해가며.
“여기서, 살고 싶다고, 있고 싶다고 했었지?”
이런 이야기를 끄집어낸 순간.
“괜찮아.”
애송이는, 뭔가 느낀 게 있는지 이어지려는 소녀의 말에 급제동을 걸었다.
“내가 여기 남으면 저쪽에 있는 부모님에게 민폐가 되니까. 어쩌면 돌아간 뒤로 시간이 몇날 며칠… 정도라면 다행이지만, 몇 개월, 년 단위가 지났다면… 그건 좀 그렇잖아?”
“…….”
“그러니까, 이건 어쩔 수 없는 거야. 물론 마음 같아선 나도 이곳 세상이 좋기야 한데, 살아가고 이를 받아들이는 건 또 별개지.”
“…….”
“그러니까, 돌아올 수 있다면 모르겠지만… 그게 아니라면, 나는 돌아가는 게 맞다고 봐.”
능청스럽게 떠들던, 평소의 모습과는 달리 녀석은 침착한 어조로, 표정으로 진정성 있게 소녀를 대하고 있었다.
이게 본 모습일 거다.
애초부터, 자신이 기억하는 나란 놈은 재미없는 놈이었으니까.
어릴 적부터 진지하기 짝이 없고, 유머 감각도 괴멸적이고.
애들이 유행어랍시고 주절대는 거 따라 하는 것조차 용기를 발휘해야 했었으니까.
딱히 유별난 점은 없다.
주변 애들이 놀러 가자면 pc방으로 같이 기어들어 가지만 노래방 같은 곳은 항상 방관자로 머문다던가.
성적은 뭐, 공부하면 좀 나오고 아니면 평균이나 때때로 재수가 없으면 그보다 낮게 나온다던가.
숙제하는 것도 번거로워 학교에 나와서 쉬는 시간에 후다닥 하고 베끼거나 날림으로 해내고, 못 하면 그냥… 맞으면 되는 거고.
그래, 뭐 하나 특별할 게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제안을 해주는 건 고맙긴 한데, 내 그런 사적인 욕심이나 의지 때문에, 더한 걸 놓칠 순 없으니까.”
지루하더라도 좋다.
누군가가 슬퍼할 뭔가를 만들지 않았으면 싶다.
최우선은 역시 주변 관계.
부모님이며 친척이며 사촌이라던가, 친구들이며 아는 이들?
“어차피 나는 잊게 될 거고, 너도 어차피 떠난다 했잖아? 단순한 아쉬움 때문에 무언가를 결단을 내릴 정도로, 내가 필요한 건 아닐 거 아냐? 어때?”
“…….”
“이번 기회를 놓치면 난 영원히 돌아가지 못할 지도 모르지. 어쩌면 운이 좋아 방법을 빨리 찾을 수 있을지도. 그런데, 세상이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걸, 난 잘 알고 있거든.”
어릴 적엔 영재 소리 잠깐 들었다.
유치원에선 늘 상을 독차지했다.
그런데 초등학교를 입학하기 무섭게 금상은 은상, 동상으로 바뀌었고, 2, 3학년이 되니 그조차도 못 받게 됐다.
학습 능력도 그쯤 되니 유별날 게 없어졌다.
그러니 어릴 때부터 조기 교육이랍시고 학원에 잠깐 갔지만, 되려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니 학원을 갈 필요성이 없어졌다.
뭐 학원 선생들이야 늘 모든 시기가 중요하다고 입을 털어댈 테지만, 다행히도 우리 부모님의 경우엔 중학생 때는 그렇다 쳐도 초딩 때까지 박 터지게 공부할 필요는 없다는, 열린 사고를 지닌 분이셨으니까.
“내가 그 기회를 손 놓는다는 건, 사실상 여기에 전부를 건다는 거야. 그건 당연하지만 불확실하지. 음, 어려운 말을 하는 것 같기도 한데, 결과적으로 내가 누리고 겪어왔던 모든 걸 포기하고 남는다, 라는 건데… 네가 나에게 그걸 요구한다는 건, 그러한 걸 감안하고 하는 이야기인 거야?”
“…….”
그래, 이렇게 이야기하면, 차마 못 권하겠지.
어느 의미로 이건 애써 떼어놓고자 하는 거다.
아쉬움이 남지 않도록.
유감스럽더라도, 결국 어쩔 수 없음을 받아들이게끔 하고자.
당장 오늘, 소중한 이가 영영 볼 수 없게 된 소녀에겐 잔혹한 말이 될 수도 있겠지만….
‘그렇다고 어설프게 동정해봤자….’
그거야말로 기만이고, 위선이고….
“그리고 사귀자 사귀자 했던 건 나름 진심이었어. 언제나는 아니어도, 여기서 머물 때만큼은 진심을 보여보고 싶었거든. 평생 그런 적이 몇 없으니까.”
어차피 잊고 사라질 노릇.
젊은 시기니까, 한 번의 만남이 평생의 인연으로 발전할 수 있다는 건… 제법 낭만적이지만….
그러니까, 기왕 하는 거….
“아무튼 흥미롭기도 했고, 이런저런 것들 전부 즐거웠었어. 뭐… 이런 아쉬움도 내일이면 잊힐 테지만.”
그러나 그 아쉬움도 결국 사라질 테고.
그러니 그때까지만 시간을 보내면 된다.
그쪽은 특기나 다름없다.
가만히, 아무 생각 않고 시간을 썩히면 되는 거니까.
그건 의외로, 학창 시절 내내 벌여왔던 짓 아니던가.
그러니까, 아쉬울 건 무엇 하나….
“아….”
작은 소리.
아르스피엘이 고개가 떨구어진다.
신음과도 같은, 아주 미약한 울음.
처음엔 자신이 이해한 게 맞는가 싶었다.
“……?”
그러나 금세 수습된다.
심호흡하듯 크게 어깨가 들썩인다.
그럼에도 최대한 그런 티를 안 내도록 노력하려는 듯, 짙은 날숨이 큼지막하게 뻗어 나오는 걸 제외하면, 녀석은 그 뒤로 어떠한 기미도 내보이지 않았다.
그저….
“그래, 그게 네가 바라는 거라면.”
거기서 다시 침묵.
그리곤 무언가 결단을 내리듯.
차분하게 손 올려, 자신의 앞머리를 쓰윽 걷어 올린 아르스피엘은.
“이 말도… 잊히겠지만… 부디… 행복…했으면 해. 진심으로. 너라도.”
“…….”
라고 말했다.
녀석의 푸른 두 눈이, 어두운 배경과 맞물며, 마치 푸르른 은하수를 보는 듯 느껴진 건 어떤 조화이려나.
생각 이상으로 눈이 큰 녀석이다.
그보다.
‘너라도.’ 라.
그 말이 참 무겁게 들려왔다.
그 말은 그거냐? 난 안 그러니까, 너라도 그렇게 되라는?
“아아! 나답지 않게… 부끄럽게….”
그러곤 금세 앞머리를 떨궈 얼굴을 다시 가리는 녀석.
그렇게 가벼이, 손짓과 함께 작별을 표현한 녀석이 애써 등 돌려 방을 나서려 하자….
덥석!
“…….”
등 돌린 채 움찔하며 몸을 떤 아르스피엘.
어째서인지, 멀쩡히 보내줘야 했음에도.
애송이는, 녀석의 손을 단호히 붙들었다.
뭐 하는 걸까.
여기서 그랬다간.
…미련만 더 심해지잖냐.
자신이었다면 포기했을 거다.
그런데도 녀석은, 치미는 감정이란 추잡한 유혹에 사로잡혀, 그 유혹을 떨쳐내지 못한 덕에.
결국, 아르스피엘을 붙들고야 말았다.
탄식이 절로 새어 나온다.
그러나 이를 지켜보는 나와는 별개로.
녀석은, 말했다.
“그거 진심 맞냐?”
그러고는, 손째로 그녀를 자신의 품으로 끌어당겼다.
어이쿠….
오글거려야 정상인데도 왜일까.
그 모습을 지켜본 나는, 재차 탄식하며 혀를 차고 말았다.
차라리 그 나이 또래에 걸맞게 분위기와 성욕에 미쳐, 기회 온 김에 그런 쪽 본능을 적극 발휘했다.
라는 식으로 넘어갔으면 싶다.
그랬었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