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03화 〉121. 그렇게 오늘날, 달은 기운다.(2)
보내려 했다면, 그냥 가게 내버려 뒀던가.
그러나 그때 그대로 보내면 상처만 깊게 남고, 절망하며 좌절할 게 걱정됐다 어쩐다는 변명은, 여기선 무의미하다.
애초부터, 삶에 있어 좌절은 숙명과도 같은 거다.
되려 큰 충격을 겪고 빠르게 성숙해질 수 있다면… 이후 이어지는 무수한 좌절에 대해서도 최대한 덤덤하게, 익숙하게 받아넘기고 흘려넘길 수 있을 테니까.
…뭐, 이건 내 생각이지만.
그러니까, 애송이 녀석이 당장에 그 안쓰러움을 참지 못해서 붙들었다면… 그건 그 나잇대에 걸맞은 행동이라며, 대강 이해해줄 여지는 있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건 아닌 거 같단 말이지.
그도 아님 뒤죽박죽, 젊을 땐 원래 이리저리 뒹굴뒹굴 돌아가는 누구 씨의 하루처럼 행동과 생각, 의도와 목적이 제각각 따로 논다던가, 뭐 그런 거냐? 질풍노도이기에 합리화가 가능한 그거?
…충분히 타당하긴 한데?
“야 이… 나쁜 새끼야.”
그러던 중.
어깨를 떨며 억누르듯 참던 무언가가 터져 나온 것처럼.
감정이 잔뜩 실린 아르스피엘의 음성이 졸지에 터져 나왔다.
“너… 네가! 나한테 이러면 안 되는 거잖아. 이 나쁜 새끼야….”
“…….”
음, 오산이 하나 있다면.
아직 얘는 얘라는 건가.
거기다가 아르스피엘은 오늘 충격적인 소식을 접해 제정신이 아닌 상황.
그런 의미에서 여태 침착을 최대한 연기할 수 있었던 건, 평소의 태도며 행실이 누적돼 습관적으로 눌러앉은 탓이겠지.
하지만.
결국 참다 참다 그녀를 이루고 있던 헤진 방벽은, 이를 기점으로 완전히 허물어졌다.
댐이 터지듯, 한꺼번에 억누른 것들이 터져 나오기 시작하자 주체할 수 없었는지, 부들부들 전신이 떨려대고 있었다.
상기된 볼 위로 그리듯 투명하게 선을 그리며 떨어지는 물기.
방안은 어둡지만, 달빛과 어둠에 익숙해진 탓일까.
그 모든 것들이 아주 선명하게 비친 나머지, 못 알아보는 게 이상할 정도였다.
아마 애송이 녀석이 제 3자로서 지켜보는 내 쪽보다, 더 정확하게 그 모든 정경을 눈에 담고 있을 거다.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분명하게 해야지.”
근데도 웃긴 건.
상대가 울음을 터트린다는, 치트키를 행사했음에도.
녀석은 비교적 담담하게 대처를 취하고 있단 거다.
당황하는 기색도 일절 없이.
…내가 저 나이에 여자의 눈물이며 울음을 보고도 태연했던 부류였던가?
지금이라면 괜찮다.
겉으로야 호들갑을 떨거나 동요한 척하겠지만.
애초에 틈만 나면 눈시울 붉히고, 습기를 떨구는 것들이 오죽 많았어야지.
뭐 이것도 각각 차이가 있다지만.
우는 게 예쁜 이도, 보기 싫은 이도 있는 등.
사람이란 건 이토록 다양하다.
남녀 관계란 것도, 같은 구도며 전개임에도 누군 설레고, 누군 꺼림칙하고.
…괜스레 후배님한테 미안해지네. 그렇게 떡 치고 싶다며 매달렸는데, 어쩌겠냐. 그 시점엔 취향도 그렇지만, 아무튼 좀 아니었는데.
하도 하다 보니, 비주얼이란 건 뭔가 좀, 그러려니 하게 됐달까.
다 배가 부른 탓이고, 눈이 높아진 탓이겠지.
그럼에도 지금 저 꼬맹이들이 자아내는 이 군상극, 치정극? 아무튼 애정극은… 뭔가 보면 짠한 그런 게 있다.
클리셰 적으로도 이건 어느 의미로 뻔하고, 단조롭고, 그저 그런… 흐름으로 굴러갈 가능성이 농후했음에도.
왤까.
제법, 몰입이 된다.
실화여서 그런 건가.
그도 아님 저기 놓인 인물이, 단순한 영화 속 인물처럼, 대역이 아니라 실제로 나였던 존재였기에 그런 걸까.
“흑… 흐윽!”
울음을 최대한 삭히고는 있지만 부질없는 노력이었다.
그걸 물끄러미 지켜보던 애송이는.
좀처럼 말이 없다.
손을 뻗어 물기를 닦아준다거나, 위로와 격려 등을 한다거나.
그조차도 일체 없었다.
이 새끼, 배우지도 않았는데 주도권 싸움을 아네.
밀땅이라 하기엔 상당히 가혹한 태도다.
애초에 상대인 아르스피엘이 그런 걸 따질 정도로 영악한 부류도 아니고.
무엇보다 아르스피엘의 멘탈은 이미 바닥을 기고 있는데도 저러고 있는 거다.
가뜩이나 낯을 가리고, 매번 타인을 배척하듯 홀로 있길 고수해왔던 그녀다.
속이야 어떻든 사람이란 건 하루아침에 변하긴 어려운 건데, 그러한 장벽을 허문 채 무방비하게 지금, 자신의 본심과 약점을 내보이고 있다는 건, 어떤 식으로든 상대에 대한 그게 있다는 거다.
그러니까, 이걸 잘못 대하면, 대형 사고가 날 거다.
상대의 마음속에도, 상당한 크기의 상처가, 흉터로 자리매김할 테고.
진심으로 울고 있을 때, 냉정하게 팩트며 반발심을 불러오는 말을, 그런 언행을 들어본 이들은 알 거다.
이거, 두고두고 간다.
그러니 나였음 일단 끌어안고 울음을 그치기를 차분히 기다려주면서, 그 속에서 하나하나, 차근차근 풀어나갔을 거다.
이런 식으로든, 저런 식으로든 간에.
그래도 충분하니까.
애초에 속이려 들고, 뒤통수 치려는 목적이란 걸 전제로 깔고서 상대에 대한 경계심의 촉을 바짝 세우는 게 아니라면….
“자, 어서.”
그럼에도 녀석은 재촉한다.
접근은 최대한 자제한 채.
손을 붙들고 있는 정도가 고작.
아니면 그 정도로 충분하단 걸까.
잘 모르겠다.
손만 잡는 것만으로, 상대에 대한 애정과 배려, 신의가 흘러넘칠 정도로… 세상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을 텐데 말이지.
애정이며 친애의 감정이 뇌에 눌러앉지 않는 한.
“난….”
“단순히 작별이 아쉬워서 온 건 아닐 거 아냐?”
“…….”
의외로 핵심을 넘기지 않고 있었다.
거기다 이건, 분위기며 단순히 흐름에 떠넘겨지거나, 넘어가는 식으로 흘러가지 않게 하고자 하는 의도라는 것도.
생각해보니 뭔 말을 하게 될지는 뻔한 일.
흔히 이런 이야기가 있다.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라고 단정 짓고 완결 짓는 그 실체가 어떠한지.
“모르겠…어.”
“아니, 알잖아.”
녀석은 침착하지만, 방금 전 말에 살짝 감정이 동했는지, 추궁조로 말했다.
“다 알고 있는 거야. 그렇잖아?”
“그러면 말 안 해도 알아주면 되잖아!”
“그건 안 돼.”
거절은 아니다.
그러나 거절보다 매몰차다.
차분한 음성이었음에도, 그 의지만큼은 분명하게 전해졌다.
내 쪽보단 아르스피엘 쪽이 훨씬 더, 크고 아프게 들렸을 거다.
“네가 지금 하려는 말은, 내가 아까 전 했던 말들을 전부 외면하고, 그 선택을 하지 말길 바라는 건데, 그 정도 각오도 안 돼 있어?”
“…….”
그 말로 인해, 나는 추궁하듯, 진지하게 그녀의 답을 기다리는 애송이의 심정을, 완벽히 이해할 수 있었다.
녀석도 두려운 거다.
본인은 이미 어느 정도 수긍하고, 받아들이기로 한 상황이다.
그런데 변수가 생겼다.
그걸 외면하고, 무시하고 넘어가도 좋다.
사실 그게 정답이긴 하지.
그럼에도.
그럴 수 없어서인지, 아니면 다른 꿍꿍이가 있는지.
녀석은 번민한다.
여기선 사내답게 자기 의지로 결정해 결론을 내려도 좋겠지만.
녀석도 사실, 두려운 거다.
그러니까….
“난 말했지. 이 현실을 받아들이겠다고. 내일 시간이 되면 돌아가겠다고.”
“…….”
“왜 내가 돌아가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말해줬어. 난 처음부터 전부 다 솔직하게 말했어. 지금도 그렇고.”
그러니까 이건 내 선택의 문제가 아니야.
여기서부터는, 네가 선택할 일만 남은 거지.
“예전처럼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구석에 앉아 있는 것도 좋아. 사실 그러지 말라 말했으니 다시 번복하는 건 미안하지만, 그것도 하나의 방법이긴 하니까.”
중요한 건 인싸처럼 잘 사는, 그런 게 아니니까.
“자, 그래서. 넌 어쩌고 싶은데?”
“나, 나도! 솔직해지고 싶고! 하고 싶은 말도! 뭐든 원하는 것도! 전부 다! 전부 하고 싶다고! 그런데 안 되는 걸 어떡하라고!”
“안 되는 건 없어.”
애송이는 단언했다.
“우리가, 안 했을 뿐이지.”
하고 싶었지만, 안 했다. 하지 않았다.
그걸 인정하기 싫어 못 했다고, 불가능했다고, 처지가 안 되고, 기회를 못 잡고….
그런데 정말 그랬을까?
지금 늦었다 생각하면 정말 늦은 건 맞지.
그런데, 그렇다 해서 시작하지 말라는 보장은 누가 했는가?
결국 나 자신의 선택만 남을 뿐.
언제나 마주하는 건, 그거 한 가지뿐이었다.
“하지 않는다는 것도 선택이야. 우린 언제나 선택을 하지. 우리가 하는 모든 건 전부 선택이야. 가만히 있는 것도 선택이고, 시도하는 것도 선택이고. 그래서, 넌 어쩔 건데?”
“…….”
소녀는 번민한다.
또 고민한다.
이 정도 왔으면 이미, 판은 다 깔렸다.
그럼에도 자신의 기질, 습성, 습관 등은 쉽사리 벗어던지기가 어렵다.
평생 솔직하지 못했던 소녀는, 그러기에 솔직하게 말해야 하는 이 순간, 다시 없을 고뇌와 맞닥뜨린다.
결국, 이 또한 업보.
내 선택이 오랫동안 누적되고 쌓아온 결과물.
결국 변화며 변혁을 기대한다면, 기대만으론 부족하다.
희망이란 건 결국, 하늘에서 떨어지는 보물 상자 같은 게 아니니까.
그러기에.
소녀는 붙들린 손을 당겨 자신의 가슴팍에 자신의 손과 애송이의 손을 파묻었다.
그리고 그 위에 다시 자신의 빈손을 보태곤.
고개를 푹 수그린 채로.
기도하듯.
매달리듯.
애원하듯.
“가지…마. 미안… 미안해… 하지만… 나, 나는… 나 혼자선… 도저히….”
거기까지가 한계였다.
소녀는 결국 말을 이어갈 수 없었다.
그럼에도.
확 하고 끌어 당겨진 소녀는 소년의 품에 딸려간다.
어정쩡하게 품과 어깨 부근에 얼굴을 파묻게 된 소녀는.
“그래, 그렇게까지 말한다면야….”
자신의 머리 위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무심코 귀를 기울였다.
“그럼 먼저, 돌아갈 방법을… 아니지. 우선 저들을 설득해야 하려나. 그게 안 되면 도망이라도 쳐야 하나. 어떻게 하면 좋으려나.”
벌써부터 현실적인 대안을 궁리하는 듯한 그 혼잣말에, 그녀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눈가에 스며 맺혀 있던 물기가 무방비하게 흘러나온다.
두근대는 심장 소리와 왠지 모를 안도감.
그와는 대조적으로, 가슴을 아릿하게 하는 이유 모를 감정까지.
소녀의 표정은, 안도하는 그런 게 아니었다.
아마 본인은 모르겠지.
하지만, 여기까지 했다는 거 자체가, 아마도 그녀로선 한계였으리라.
동시에 도전이었을 테고.
뭐, 예상은 했지만.
돌아가지 않았으니까, 사건사고가 터진 거겠지.
그러니까 여기서부터가 진짜다.
이제, 뭔 일이 터지는지 지켜보자.
저 숙맥인 소녀가, 지금의 팀장님이 되게 된 근거이자 계기가, 거기에 있을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