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12화 〉124. 무덤에서 요람까지.
두려움이 없었다면 거짓일 테지.
아니, 매 순간 두려웠다.
그래서 아닌 척 노력했다.
어차피 다 잊힐 거라면, 그 정도도 못 할까 싶었다.
어디서 이런 용기가 자라났을까, 하다 보니 정말로 겁대가리를 상실한 건 아닌가 싶기도 했고.
반쯤은 컨셉이었는데, 하다 보니 진심이 됐다.
리플리 증후군이랍시고, 허구며 거짓된 걸 진실이라 믿고 행동하다 이를 진심으로 믿고야 마는 예처럼.
한편으론 거기에 만족했는지도.
그래.
본래의 난, 이렇게 살고 싶었는지도.
그러니까.
누굴 위해 멋지게 죽어 무대에 퇴장해 기억에 영원토록 소중히 남을 수 있다면.
그런 삶도, 좋지 않을까 하는, 그런 얕은 생각은, 무심코 해봤다.
그래서였을까.
어이가 없을 정도로, 망설임이 생겨나질 않았다.
원래 세계, 저쪽 세계에서의 난,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그저 그런 존재지만.
적어도 여기선 다르다.
여기서의 난.
누군가에게.
그녀에게.
유일무이한 존재였으니까.
그토록 날 갈구하고, 바라는 존재가 있다는 걸 생전 처음 느꼈는데….
그걸 거절할 수 있을 리가 없잖아?
그게 비록, 죽음으로 직결하는 얼빠진 결정이라 하더라도.
나는….
어쨌든 나이 어린, 중2병에 찌든, 사춘기 청소년이었으니까.
소중하다 어쩐다 하지만, 그걸 제대로 실감 못 하던 시기기도 했고.
그러니까, 그랬던 거 같다.
특별한 신념이나, 숭고한 목적이나, 헌신, 희생을 자처하고자 하는 의도와는 별개로.
결과적으로 그렇게 됐다지만….
아무튼 그렇다 치고.
그래서 다 자라서 이 사실을 접하고, 심지어 지금 이 메시지까지 접하는 나는, 안녕하신가?
넌 만족할 만한 삶을 살았고? 후회는? 효도는? 꿈이라는 건… 저쪽 세계에서 뭔가를 발견이라도 했다면 그거야말로 축복할 일이겠지만, 어떠려나.
아무렴 지금의 내가 알 수 있는 그런 건 아니겠지만.
뭐, 별로 할 말이 없다.
나머지는, 알아서 해라.
…근데 이게 필요는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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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숨 자고 일어나자, 기묘한 기시감을 느낀다.
저번엔 팀장님 꿈? 아무튼 그걸 꾸더니 이번엔 자기 자신이 남긴 개소리를 꿈으로 접하는 꼴이라니.
“뭔 까도 까도 계속 튀어나와. 양파도 아니고.”
그보다 중요한 건 여전히 말해주지 않은 거 같은데.
“…상관없나.”
결과적으로 여기에 도달한 시점에, 그게 뭐 대수냐 싶지만.
팀장님의 경우는 갑작스러운 연락에 후다닥 자리를 떴다.
타이밍이 참 미묘한 게, 그대로 있었다간 한바탕 거사(?)를 치렀을지도 모를 정도였는데, 아쉽다면 아쉽고… 초조해할 필요는 없겠지.
“그나저나….”
그녀가 무슨 선택을 했는지, 그에 대한 대답을 아직 듣지 못 했다.
어느 쪽이든 공교로운 건 마찬가지지만….
‘뭐, 어련히 알아서 잘 선택하실까.’
어쩌면 3가지 외에 다른, 최적의 거시기를 선택하실 수도 있겠지.
그보다 그렇게 되면….
“흐음.”
뭐 그건 나중 문제라 치고.
그보다 숲의 현자님의 설계에 일방적으로 놀아났다고 보면 되는 건가.
“썩 좋지 않은데.”
대관절 선의가 있든 뭐든 간에 통수맞는 건 영 꺼림칙하단 말이지.
“그보다… 이러면 또 한편으론 앞뒤가 맞네.”
본사 진입, 이후 설렁설렁 테스트.
그 뒤 카일론에 보내지고….
아니, 카일론 전에 신대륙 갔을 때 거기 정착이라도 했다간 카일론에 닿지 못 했을 수도 있을 테고.
“심지어 카일론에서도 만족 않고 우왕좌왕했고.”
정확하겐, 편승을 안 했다.
전쟁 군주 옆에서 강대한 국가, 구 제국 못지않은 강대한 제국 열강을 형성하는 그 대업에 혼신을 다하는, 뭐 그런 거.
심지어 깽판 치기 충분할 정도의 능력이며 기량도 갖추고 있었기에, 따지고 보면 거기에 만족해 염병 떨고 먼치킨 식 깽판질에 심취했다간….
‘이 기회는 영 물 건너 갔겠지.’
짐작이긴 하지만, 아마도 그렇지 않을까.
애초에 깽판을 내가 치며 즐기려면, 짓밟히는 대상이 있어야 하는데, 그건 다른 의미로 타인의 피눈물을 양산하고, 피륙을 쥐어 짜내야 한다는 의미인데….
‘그런 쪽은 여전히….’
게임이라 치면, 게임이니까 그러려니 싶었겠지만.
적어도 난, 여길 게임이랍시고 그러려니 하고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그 이유는 대체 뭘까.
“…사실 이게 정상이지.”
국내를 벗어나 외국에 나갔다 해서, 피부색이며 언어가 다르다고 게임 속 npc 취급을 한다? 이거야말로 정신병자 아니겠나.
“그렇다 쳐도.”
전화에 휩싸이는 시대의 흐름을 억제하진 못하겠지만… 거기까진 내가 어쩔 수 없는 걸지도.
차라리 대가리가 안 굴러가서, 그저 평화주의를 주창하는, 머리에 꽃밭이 핀 부류였다면야, 개수작이라도 부려보겠지만, 유감스럽게도 자신은, 전쟁의 당위성 및 의미, 그것이 발발할 수밖에 없는 필연성을, 어느 정도 이해하고 있었다.
애초에 우리 세계에서도 전쟁은 곧 역사인 셈이니.
그로 인해 성장하고, 잘못을 이해하는 등….
“예전에도 그랬지만.”
내 사후에 난리가 났다면, 그랬다면 차라리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을지도.
종족 차별, 어긋난 권력 구도, 절대자 및 중재자의 공백, 난세가 아닐 뿐 군웅할거와 별 차이 없는 대륙 구도라던가.
카일론 왕실에 속해 있기에 그들이 그리는 전망을 에드릭은 대강 유추할 수 있었다.
이윽고 카일론은 인간뿐 아니라 다양한 초원 부족과 중앙 및 외곽에 자리한 이들과 합심, 그 외에 구 제국에 의해 억압받아왔던 종족들과의 규합을 추진하고 있었다.
인간 중심의 세계가, 다른 의미로 개편되게 될 거고, 이건 인간 기준에선 망조에 가깝더라도, 다양한 종족, 생명체들 기준에선 정당한 복수이자 정당한 권리 회복, 획득을 위한 저항 및 복권(復權) 운동에 가까울 거다.
“그건 그렇다 치고.”
그렇게 생각하니 좆간은 좀 당해도 싸다는 생각이 불쑥 들었다.
…아닌가?
“배가, 고프군?”
슬슬 허기가 진다.
내부는 마치 SF에 나올 법한 공간이라 인간미가 좀 부족하게 느껴졌다.
즉, 혼자 있자니 뭐랄까.
‘외로움이 배가 되는 느낌?’
잘 꾸며진 감방이 이런 느낌이려나.
문 앞에 다가서자 알아서 문이 열리는 걸 보면 가둬두려는 수작은 아닌 듯 느껴졌다.
그나저나 여전히 사람 하나 없는 게 영 꺼림칙하네.
“루넨브리스는….”
괜스레 멋쩍어서 그렇게 혼잣말을 주절대자.
[안내해드릴까요?]
“…….”
허공에서 뚝 하고, 뭔가 기계 비슷한 게 드론처럼 날아왔다.
“알려주면 고맙지.”
드론은 마치 고개를 끄덕이듯 고도를 한 차례 낮췄다가 올리곤, 느린 속도로 앞장서기 시작했다.
…이렇게 보니 조금 귀여울지도.
그보다 복도가 참 황량하다.
은백색으로 뒤덮인 공간인 탓에 여전히 SF틱하긴 한데, 창문을 비롯해 뭔가 뚫린 게 전혀 없어서, 공기 순환이 잘도 되고 있구나 싶었다. 아마 순환기 같은 게 돌아가고 있겠지. 숨 쉬는데 지장도 없고 온도도 적절하고….
그렇게 드론이 목적지로 여겨지는 입구에 도착하자 고도를 높이더니 레이저를 복도 벽에 방사하듯 쏘아 이쪽이라는 듯한 과장된 크기의 화살표를 표시했다.
“음….”
그러니까….
“설산?”
안으로 들어서자 한걸음 차이로, 즉각적으로 눈이 잔뜩 내리는 설산의 풍경이 순식간에 시각을 장악하기 시작했다.
뿐만 아니라… 춥기까지 했다.
“몸이 튼튼하니 망정이지.”
인간의 몸을 초탈한 지 오래라 그러려니 하는 거지….
“늦었다뭉멍?”
“…그래.”
눈 사이를 뒹구는 루넨브리스는 여전히 인간형 몸체.
그나마 용케 옷 입고 그러고 있어서 눈 보신… 아니 시선 처리에 곤란함을 느낄 필요까진 없었지만….
‘왜 하의 탈의인데.’
셔츠를 입고 있어 상반신을 가려졌다 쳐도, 하반신은 팬티조차 없는 완전 노출형.
엉덩이에 꼬리가 살랑살랑, 그 큼지막한 게 탄력 넘치고 좌우로 움직이는 것만으로 반가움이 그대로 느껴졌지만, 그것과 별개로 앞에 고스란히 비치는 그곳이 조금….
‘그쪽 털을 귀엽다고 느끼면 조금 선 넘은 거려나?’
그나마 노골적으로 그 부근이 새하얀 털에 가려진 건 조금 묘한 감상을 불러 일으켰다.
과연 저건 나체인가 아닌가.
아, 하반신만 기준점에 놓는다고 쳤을 때….
“뭉멍?”
“아무것도 아니란다.”
다리 인근까지 와서 고개를 갸웃거리는 통에, 에드릭은 별수 없이 그녀의 머리를 평소처럼 쓰다듬어줬다.
귀가 섰다가 내려앉기는 반복하는 게 퍽 기분이 좋았나 보다.
“그래서, 지루하진 않았고?”
어느덧 설산 풍경이 스르륵 증발하더니, 뭔가 난로가 놓인 공간이 형성됐다.
무심코 난롯가? 불을 피우고 그곳에 있고자 하는 욕구가 살짝 치밀었는데, 그런 의식이 반영됐나 보다.
마다할 필요는 없기에 에드릭은 그쪽으로 가선 흔들 의자에 풀썩 몸을 내려놓았다.
‘리얼하네.’
이건 심지어 실제로 존재하는 게 아닌, 가상으로 구현된 물체? 물건? 그런 종류인데도 진짜와 별차이가 느껴지지 않았다.
거기다 만들어진 난로조차 당장 뿜어내는 열기가 매우 리얼했는데, 단순히 뇌를 조작해 착각을 불러 일으킨다고 하기엔, 실질적으로 느껴지는 그 실체감, 리얼감이 차원을 달리했다.
‘애초에 흔들 의자를 뇌의 착각으로 만든다 해서 구현 가능한 것도 아니고.’
허공에 투명 의자로 앉는 건 그렇다 쳐도, 흔들의자에 앉아 있는 흔들림마저 구현한다? 이건 단순 하반신이 무지막지한 걸 떠나 코어까지 신경 써야 할 텐데? 아니, 그것만으로 버텨지긴 하려나?
이런 시답지 않은 생각을 하며, 에드릭은 어느새 마련된 핫초코를 후루룩 마시며, 옆에 앉아 꼬리를 좌우로 펄럭거리는 루넨브리스이 머리와 귀 부근을 차분히 쓰다듬어줬다.
‘좀 전에 잤는데 또 졸리네.’
분위기가 이래서 무서운 거다.
뭐, 잘 생각은 없지만.
이러며 다시금 생각을 정리하고, 다듬어 봐도… 나쁘진 않겠지.
…여기를 당장 나서야 한다거나, 급하게 빠져나가야 하는 이유가, 그닥 있는 것도 아니었고.
“…….”
그래, 그게 좋겠군.
그러고 보니 팀장님이 말한 내용 가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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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뭘 어쩌려는 속셈이더냐?”
숲의 현자의 물음에, 윤미라는 멀거니 허공을 쏘아봤다.
“어쩌긴요. 예정했던 대로 진행하는 거죠.”
“이리될 줄 알고 있었다는 투로군?”
“설마요.”
그녀는 어깨를 으쓱였다.
“어떻게 되든 전부 수습할 수 있게 계획을 짜라고 가르치신 게 누구신 데요.”
“때때로 그러기가 여의치 않을 경우도 있는 게지.”
“그걸 되게 만들고 말고가 유능한지 아닌지를 판가름낼 때도 있다면서요?”
“그도 그렇지.”
모습은 보이지 않으나 목소리는 뚜렷하게 들려왔다.
그녀는 텅 빈, 마치 수족관처럼 어둡기만 한 개인 사무실 비슷한 공간에서 느긋하게 차를 한잔 곁들였다.
“잘 굴러가면 이걸로 빚은 전부 갚은 겁니다?”
“고얀 것.”
웃음기가 서린 음성이 여운처럼 공백을 흔들더니, 얼마 안 가 다시금 정적과 침묵이 도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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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을 낸다 쳐도 이런 식으로 흘러가면 뭔가 뒤끝이 남겠지?”
얼마 뒤 돌아온 윤미라가 에드릭을 향해 그리 말했다.
“뒤끝이요?”
뭔 이야기인지 갈피는 섰다.
다만 그걸 어쩌고저쩌고, 결정권이 자신에게 있다고 하긴 뭐했다.
기억을 잃고 아바타를 반납했을 경우, 에드릭이란 인물이 엮여 있는 여러 인물들은 어찌 되는가.
자신이 아닌 타인이 에드릭 행세를 하는 거는 그다지… 이쪽 입장에선 유쾌한 흐름은 아니었다.
그러니 아예 기억을 지운다던가, 알면서도 그걸 쾌락과 막대한 이득으로 찍어 누른다던가.
그게 아님 그냥 되돌아간다던가.
선택지들 하나하나가 꽤나 극단적이라 에드릭 기준에선 뭘 선택해도 사실, 손해 보는 게 없는 듯 보여도, 반드시 무언가를 잃어야만 하는, 그런 선택들의 연속이었다.
그리고 그는, 자의로 뭔가를 선택하는 쪽엔 약한 편이었다.
“에드릭으로 엮여 있는 인연을 네 선에서 정리할 수 있겠어?”
“음, 그건….”
그건 그것대로… 뭐랄까.
“정리라는 건 어떤 식을 이야기하는 거죠?”
이 경우 에드릭이 취할 가장 강렬한 선택지가 있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