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13화 〉124. 무덤에서 요람까지.(2)
‘죽는 건데.’
근데 이건 이것대로 문제가 되는 게, 일방적으로 관계자들에게 슬픔을 끼얹는, 아주 경우에 벗어난 행위가 아닌가 싶었다.
행복이니 즐거움이니, 도움을 주고자 했던 취지와는 정 반대 개념.
차라리 적당히 어울리고 노는 정도라면, 한참 모습을 드러내지 않다가 그런 소식만 딸랑 전달해주면 뭐… 그걸로 족하겠지.
그러나 일부는 에드릭하고 상당히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기에, 막연히 그런 식으로 인연을 단절하고자 극단적 조치를 취해야 할 필요가 있을까 싶었다.
그렇다고 대놓고 가서 누구하고 결혼 혹은 인연이 됐으니 우리의 연은 여기까지입니다!
…하고 고백하는 건 더더욱 난센스고.
애초에 패왕녀와 혼인까지 하고서도 다들 그러려니 했을 정도인데, 거기서 그런 소리해봤자 지금 와서 그러는 건 무슨 경우냐? 하는 반응만 생겨날 게 뻔하다면 뻔하달까.
아니라 해도 어쨌든 그녀들에게 상처를 준다는 사실 하나만큼은 변함이 없기도 할 거며….
이 경우, 비즈니스 관계임을 서로가 숙지하고 있는, 왕녀 전하와의 관계도 여러모로… 아니, 그녀의 경우는 애초에 이걸 허락했으니 상관없으려나?
그러면 이 경우 정치적 파트너로서의 입지를 굳힌다던가.
근데 그러면 후계는 어떻게 되는 거지?
멀쩡히 남편이 있는데, 한동안은 그러려니 싶지만, 자식을 낳는 일 없이 계속 흘러간다 치면… 여러모로 그녀의 권위며 위엄에도 상당한 악영향으로 번질 여지가 있었다.
이 또한 에드릭이 죽으면 만사 오케이.
남편과 사별한들 의리며 사모하는 마음을 지키고자 독수공방하며, 홀로 버틴다고 한다 치면, 정치적으로도 포화를 맞을 일도 없을 거다.
되려 신성함으로 이를 치장하기도 좋고. 특정 종교쟁이들이 아주 눈엔 아주 고결하게 비칠 여지도 있을 거다.
뭐, 카일론의 국가적 특성, 민족적 특성상 이를 곱게 보지는 않겠지만, 어차피 그녀는 실적을 마구 쌓아가기에 명분 같은 건 얼마든지 치장이 가능할 거다.
전쟁 군주의 최고 미덕은 전쟁에서 승리하며 강함을 과시하고 피력하는 거지, 쓸데없는 정쟁에 휘말려 이도 저도 아니고 우왕좌왕하는 게 아니다.
뭐, 국가 권력을 전쟁에 퍼붓고자 한다면, 정치가 필수라고는 하지만….
“어떻게 정리하면 좋겠습니까?”
계획안을 몇 개 떠올렸지만, 다들 어렴풋하기만 했다.
“네가 원하는 선에서, 네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을 채택해줬으면 싶은데.”
“음.”
미묘한 조건이다.
내가 원하는 선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라….
“죽으면 되는 겁니까?”
“에드릭 아바타는 멀쩡히 내버려 둬야지.”
“아, 예.”
죽어서 결자해지하는, 쉽고 빠른 결론은 이걸로 기각.
어느 의미로 이게 사실 제일 곤란할 수도 있는 건수인데, 일단 금지됐으니 한편으론 다행일지도.
그만큼 또 머리가 복잡해질 거 같지만.
“그래서, 결과적으로 이건 어떤 선택지인 겁니까?”
“궁금해?”
“…….”
생각하면 머리 깨질 거 같으니, 관두기로 했다.
뭐, 어련히 알아서 잘 하시겠지.
“츄릅!”
그리고 에드릭이 앉은 좌석에서 조금 떨어진 부근.
강아지처럼 배를 깔고 앉은 루넨브리스가 졸린 눈을 게슴츠레 뜬 채 자신의 새하얀 손을 마냥 핥아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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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흥!”
사자 수인이 풍성한 갈기를 쓰다듬다가 애써 아닌 척 손을 거두었다.
이유?
노골적인 시선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왜? 계속하지?”
“…….”
외모만 보면 철없는 나잇대로 보이지만, 저건 일종에 노물이다.
기다란 귀만 해도 이들이 무슨 종족인지는 명백했다.
그뿐인가.
“거 쓸데없이 떠들지 좀 말지? 정신 사납게 말이야.”
저쪽의 수염이 그득한 난쟁이는 또 괜한 시비다.
물론 사자 수인이 아니라, 방금 전 입을 놀린 엘프에게 하는 소리겠지만.
“어디서 개미 새끼가 웅얼대나.”
이에 대응하는 엘프의 반응도 기똥차다.
“뭐라 씨부려대냐, 귀 긴 계집아.”
“개미가 아니라 쥐가 울어대나.”
“내 욕했수?”
뜬금없이 쥐 형상을 한 수인이 신경질적으로 고개를 돌려 대꾸했다.
“…후우.”
수라장이 따로 없군.
그들이 자리한 곳은 원탁.
그것도 꽤나 넓기에 앉아 있는 인원만 해도 상당했다.
그나저나 용케 이들을 끌어모았군.
여기까지는 오는데 자신도 한몫 거들었다지만, 영 쉬운 일이 아니었다.
다만 이번 모임엔 분명한 목적이 있었다.
또한 모두가 이로 인해 얻어낼 것들이 있었기에 더더욱 그럴지도.
“정숙들 합시다.”
그때, 연배로 따지면 젊은 축에 속한 늑대 수인이 목을 깔며 주변을 위협하듯 으르렁댔다.
하지만.
“너네 가죽이 그렇게도 좋다며?”
“간만에 늑대 고기 좀 먹어볼까?”
“아 내장은 제가 구매하지요. 낭인족 심장과 내장이 별미라며 찾는 손님들이 있어서….”
“이 새끼들이 지금 해보자는 거냐?!”
그리고 젊은이는 보통 저런 모욕적 언사를 좀처럼 농지거리로 받아들이는 법에 익숙지 못한 법.
다들 노골적인 욕지기를 서로의 얼굴에 박아넣으며 위협을 가한들 실제로 손을 쓸 정도로 과격한 행각을 벌인 이는 없었다.
하지만 저 녀석이 보기엔, 아마 그거나 이거나 별 차이 없게 느껴지겠지.
‘기 싸움에서 명백히 밀려나고 있지 않나.’
그렇게 침착하라 일렀거늘.
그렇다 해도 기가 죽어 움츠리고 있거나 눈치만 살살 살피는 것보단 낫다.
기왕 죽는다면 당당하게 죽어 동족의 본이 되어야지.
“이런 곳에서 깡패 양아치 새끼들처럼 이죽대지 말고 할 말 있으면 제대로 하란 말이다! 어차피 하나 마나 한 소리 지껄이며 시간 낭비나 해대고! 너흰 그렇게 시간이 썩어 나냐? 그러니까 제국의 충실한 개새끼랍시고 누군 인간들 취향에 맞는 성 노리개에 누군 물건만 찍어내는 도구에 누군 더럽고 추잡하다며 하수구 청소부로 내몰리기나 하지.”
“이 새끼가? 너 말 다 했냐?”
턱수염을 부들부들 떨던 난쟁이, 드워프 족 대표의 얼굴이 금세 시뻘겋게 변한다.
“하수구 청소부? 사는 곳이 맞긴 한데 청소부는 아니지?”
쥐 수인, 서인(鼠人) 족 대표의 눈이 가늘어진다.
“성 노리개 좋잖아? 걔들은 자기들이 주인인 줄 알지만 그것도 잠깐이지. 결과적으로 우리가 가문 다 먹어치웠는데? 마지막에 승리한 자가 승리한다고 인간 영웅이 주절댄 적이 있는데, 교양 상식 좀 길러보지 그러니, 꼬맹아? 아, 설마 너, 아직 안 해봤니? 요만해서 남들에게 보여줄 처지가 안 되나 봐?”
반면, 엘프의 반응은 미묘했다.
“뭐가 어째?!”
역으로 도발에 걸린 늑대 수인의 표정이 돌변했다.
털이 쭈뼛 서며 전신이 부들부들 떨려대고 있는 거 보니, 화가 잔뜩 치민 모양이다.
“…저러니까 창부 소리 듣고 자빠졌지.”
그리고, 그걸 지켜보던 다른 엘프가 한심하다는 양 콧방귀를 낀다.
“껄껄껄!”
그리고 이를 지켜보는 또 다른 종족들까지.
되려 재미 들린 듯 구령을 넣거나 호령을 추가하는 등, 아주 싸우라 부추기기까지 한다.
결국 얌전히 지켜보는 걸론 이 소요가 해결되지 않을 것만 같은 상황.
“그만들 하시지.”
결국, 별수 없이 그가 중재했다.
사자 수인답게 체구도 육중한 데다 전신에 자리한 근육이 탄탄히 자리 잡은 육신 덕에, 겉만 보면 누구든 침을 꿀꺽 삼키며 긴장할 정도로, 그의 존재감은 압도적이었다.
실제로 그는 이름 높은 전사며 용병이기도 했고, 몇몇 부족에겐 살아있는 전설로 불리기까지 하는 역전의 용사이자, 명사이기까지 했다.
가히 문무양립.
유일한 흠이 있다면, 나이 때문에 젊을 때처럼 혈기왕성하다거나, 패기를 내세울 정도로 의욕이며 열정이 샘솟지 않는다는 거지만, 수인들에게 있어 이건 되려 미덕이다.
좀처럼 냉정하기 어려운 그들이기에 이러한 냉정함, 냉철함은 대소사를 논하는데 무척 도움이 되곤 했다.
…세상 사는 게 재미가 없어져서 그렇지.
콰당!
그리고 적절한 시기에.
“카, 카일론의 유일무이하신….”
“제군들. 시간은 금이오, 피며 생명일지니. 쓸데없는 없는 소란은 곧장 접도록.”
왕녀의 진입을 앞서 호명하려 들던 수행원을 무시한 채, 원탁 중 가장 윗줄, 시계로 치면 12시 방향에 빈자리로 향한 그녀.
눈치 보는 이들이 태반이긴 했지만, 일부는 자존심 때문에 서로에 대한 신경전을 이어가고 있었다.
이를 잠시간 지켜보던 패왕녀.
“훗!”
그녀가 곧장 테이블을 내리쳤다.
쿠웅!
철갑으로 전신이 무장된 그녀다 보니, 이건 이것대로 위압감이 엄청났다.
“지금부터 한마디라도 헛소리를 하려거든 문밖으로 곱게 나가면 된다. 불만이 있으면 덤비던가.”
“…….”
“…….”
언제 소란을 피웠냐는 양 침묵이 도래한다.
그 상황을 수초 간 관망하던 패왕녀는.
“이제 준비가 된 듯하군.”
투구에 가려졌기에 표정은 보이지 않기에 더욱, 그녀의 심중을 오리무중일 따름이었다.
“그럼 지금부터… 국토 복원, 영역 및 국경 선정, 이를 비롯해 권역 해방 협력전선에 대한 회의에 돌입하기로 하지.”
여러 수인들과 각종 종족들이 자리한 이곳에서, 패왕녀는 단숨에 안건을 밀어붙였다.
“우선, 없애버릴 인간 국가들부터 추려보기로 하지.”
인간인 그녀가, 이종족들과 함께 인간을 밀어버릴 것을, 본격적으로 제안하는 순간이었다.
“아, 그리고, 가만 생각해보니 아까 너희, 목소리만 높이지 말고 하는 김에 정말 결투를 벌여보는 건 어때? 목숨을 걸어라. 종족, 부족, 단체 대표로 온 것들이 추잡하게 빼지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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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1개월 전.”
“…꽤 지났네요.”
“그리고 현재, 나라 몇 개가 대혼란에 빠져들었지. 외적의 침입에 대응하기 어려울 정도로.”
“…그런가요.”
에드릭으로서, 팀장님이 하는 이야기를 들을수록, 패왕녀의 계획이 퍽이나 무섭게 느껴졌다.
“초원 엘프들이 본격적으로 일부 종족들과 합쳐져 국가 건국을 표방할 날도 머지않았지. 여타 종족들도 그러하고.”
“그나저나….”
에드릭이 물었다.
“정말로 싸움 붙였습니까? 신경전 벌이던 이들끼리?”
“그랬다는데?”
“…어떻게 됐답니까?”
“서인족 하나 대가리가 잘리고 대표가 바뀌었지. 엘프는 가슴에 할퀸 자국이 새겨졌고, 낭인족 대표는 팔이 잘릴 뻔한 걸 간신히 붙였다던가?”
“…드워프는요?”
“술 대결로 요령 좋게 끌어가서 다들 거절했더니 혼자 정신 승리했다던데.”
역시 드워프.
다들 노예일 때, 노예 가운데서도 유일하게 최상급 대우를 받은 기술자들답다.
기술자에 장인 이미지가 강해서 그렇지, 애초에 저들 내에서도 처세며 정치에 능하지 않은 이가 없었을 리가 없지 않나.
단점이라 치면 그들의 예술, 기술 혼이 타락하고 더럽혀지고 어쩌고 한다지만, 절제절명의 위기엔 살아남는 게 우선 아닌가.
기술이란 건 전수, 전승, 계승을 통한 후세의 전달이 매우 중요하다.
그걸 위해서라면 영혼이라도 팔아 먹을 족속들이 아예 없을 순 없겠지.
…그리고, 그럴 필요가 없다 하더라도 그래야만 할 거고.
간신배며 매국노라 하지만, 매국도 나라가 있어야 파는 거지, 나라 없으면 매국도 못 한다.
“…….”
이렇게 보니 난쟁이족이 아주 개x끼처럼 느껴지네.
그럼에도 이쪽 대열에 들어서게 된 걸 보면, 그들의 기술 및 노하우가 그만큼 중요하다는 의미겠지.
모름지기 쓸모만 있으면, 어지간한 개x끼라 해도 넘어갈 수 있는 법.
…나중에 다 써먹고 결정적일 땐 어떨지 모르겠지만, 그조차도 당장 살아남고, 우군이 된 이후에나 걱정할 문제지, 그조차도 안 되고 배척당하고 짓밟히면 얄짤없는 거다.
하루하루 먹고는 살아야 꿈을 꾸던 말던 하는 거다.
당장 굶어 뒤지게 생겼는데 집이다 권력이다, 명예다, 신념이다!
이딴 게 다 뭔 소용인가.
“카일론과 각 종족들의 대표적 머리들이 한데 모아 서로의 핵심 정보를 공유하며 작전을 짠 거고, 그 회의는 사실상 이를 수행한 이후, 생겨날 혼란에 대응하는 것과, 그로 인해 생겨난 이득을 어찌 분배하고 나누느냐, 그런 문제를 논하는 외교의 장이었던 셈이지.”
“…그런데 그런다고 그게 다 지켜질까요?”
인간만 머리 검은 짐승이라며 통수를 잘 치는 게 아니다.
애초에 통수엔 위아래, 종족 여부라던가.
이런 걸 나누는 거 자체가 딱히 의미가 있을까 싶은데.
“그조차도 다 대응하고 있겠지. 되려 그들이 맹약, 협약을 어겨주면 더 좋을 거라 생각하고 있을 걸, 그녀는.”
“…명분도 그렇고 적당하게 싹 다 정리할 수 있으니까요?”
“그렇지. 그리고 그걸 아는 일부는 얌전히 고개를 꺾을 테고, 이제 중요한 건 덤벼도 될 법한 이들이 문제가 되겠지.”
“…대략 짐작이 가네요.”
아마 엘프 세력이 제일 문제가 될 거다.
현재 구 제국을 계승한다는 명목으로 적폐 진형을 구축한 편입 엘프들이 적은 것도 아니니.
대대손손 구멍 동서랍시고 박아대다 그걸로 모자라 아예 가문을 탈취한 기이한 족속들.
세상에 대한 증오와 원망, 나중엔 그조차도 무의미해져 철저히 인간답게, 고령자이자 장수족으로서의 권리를 제대로 누리고 활용해대기 시작해서, 구 제국 당시에도 그렇지만 망하고 나서도 반드시 척결해야 하는 1순위가 또 그들이니.
그런데도 여태 살아남아 성세를 이루고 있는 건, 그만큼 그들이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그게 끝은 아니지만.”
“……?”
“그러면 문제. 나는 이걸 어떻게 알고 있는 걸까? 모든 걸 손바닥 보듯이.”
“음….”
방법이야 많지.
다만 팀장님이 굳이 이 사실을 공개하려는 양, 밑밥을 까는 건 무슨 연유일까.
‘뭔가 있는 거 같긴 한데….’
“그리고 나는 왜 여기에서 이러고 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