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16화 〉125. 쇠는 달아 있을 동안 치는 거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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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그러니까….”
에드릭은 방금 전 들은 말을 다시금 입에 담았다.
“죽으라는 거죠?”
“죽은 척을 하라는 거지.”
“…….”
그게 그거 아닌가.
실질적으로 에드릭 콘웰로서의 생을, 내려놓으라는 의미니까.
“어차피 외모 바꾸는 건 문제도 안 되잖아.”
“…그야 그렇죠.”
사실상 인체를 벗어나 정령에 가까운 형체다 보니, 마음만 먹으면 충분히 성형이 가능했다.
…게임으로 치면 외모 변경권 사서 외모를 변경하는 게 일반적이라면, 내 경우는 그게 공짜로 이루어지는 격.
캐릭 생성할 때는 별문제가 없다 쳐도, 이미 생성한 직후… 현실로 대입해보자면 태어난 뒤에 외모를 자유자재로 바꾼다는 건 태생적으로 무리.
성형을 하고 어떤 술수를 부리지 않은 한.
그러나 나는 그게 가능했다.
그래도 굳이 안 그러는 이유는….
‘에드릭 아바타가 워낙 압도적인 것도 있고.’
일단 그쪽 기능이 썩 원활한 게 아니라는 점.
외모라는 건 참 섬세해서, 턱선이 조금만 어긋나거나 바뀌어도 풍기는 인상이 180도 바뀌곤 한다.
제아무리 잘 생겼어도 옷차림, 코디에 따라 사람이 모자라 보이거나 추해 보일 수도 있는 거고.
또 머리 모양에 따라 개성이 확 트이거나, 되려 묻힐 수도 있는 법.
그런 의미에서 에드릭은 그쪽으로선 영…….
옷을 꾸미는 건 익숙해져서 그러려니 싶지만….
“카일론의 부군인 에드릭으로서 죽는다 치면, 그걸 이용해 뭘… 으음?”
“생각해봐. 뭐 때문에 그게 필요하다고 봐?”
윤미라 팀장의 말에 에드릭은 고민에 잠겼다.
‘이건 어느 의미로 카일론에서의 해방을 의미하기도 하는데.’
과연 그게 전부인가?
그녀는 아무리 생각해봐도 패왕녀 쪽 하고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듯 싶었다.
그렇다면 이 제안은 패왕녀의 안배까지 고려한, 그러한 선택지라는 건가?
그렇다 치면 이 경우, 패왕녀 측이 얻을 이득은?
카일론이 얻게 될 이득은 또 뭐고?
무엇보다 그냥 죽으라는 건 아닐 테니, 어떤 시나리오에 따라 퇴장해야 할지, 거기에 따라 적정 역할이 배정될 거 같다는 예감이 부쩍 드는데… 이건 이것대로 짐작이 가질 않았다.
“에드릭을 소유해서 얻을 이득이라면….”
음?
“구 제국 적정 계승권 같은 것에 영향이 따로 있기라도 한 겁니까?”
“그것도 포함돼 있지.”
그거 하나 날리는 게 목적이 아니라는 건가.
“희생을 바탕으로 특정 국가에 정당한 공격권을 확보하는 명분권 확보를 위해?”
“그것도 이유가 될 수 있지만, 그래서야 단순히 악의 넘치는 수작질에 불과하잖아?”
“…….”
짐작이 안 서는데.
패왕녀 측이 에드릭이 사라짐으로써 얻을 이득이란 게 뭘까 과연.
부군 영구 해제권? 자식 안 낳아도 되는 뭐시기?
“전제가 그거 하나라면 짐작하기 어려울 수도 있겠네.”
그녀는 여전히 오리무중에 가까운, 혼자만 알고 있다는 듯한 인상을 은연중 풍기고 있었다.
“…속 시원하게 알려주시죠? 제가 뭘 어떻게 하면 되는 겁니까? 또 그게 어떤 의미와 목적성을 지녔는지도.”
“이걸 알려줘야 하나.”
장난기가 다분 느껴지는 표정이다.
“아니, 알려주셔야 제대로 돕고 합세하고 어쩌고 할 거 아닙니까.”
이 시점에 와서 통수 및 이용 도구로 써먹고 팽! 해버릴 리는 없을 테고….
아닌가? 안심하는 이 시점이 사실 제일 위험한 시국이라던가?
“우선 그 전에 알아둬야 할 게 있거든.”
“뭔데요?”
“간단히 설명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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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륙의 정세가 혼란에 접어드는 가운데, 폭동 및 반란을 진압하고 제압하려는 무리들의 움직임도 서서히 윤곽을 갖춰가기 시작했다.
이 시점에 일부 국가들은 자신들이 이러한 혼란을 바로 잡을 정당한 구 제국의 후예이자 계승자임을 천명해댔는데, 이런 어처구니없는 발표는 내륙을 다른 의미로 혼란에 밀어 넣는 계기로 작용.
마치 등 떠밀리듯, 일부는 다급히 자신들이 진정한 후예며 계승자를 선포하기에 이른다.
당연하지만 이러한 움직임은 가뜩이나 분열돼 있던 구 제국 관할권, 영역권 내의 국가며 영주들에게 무수한 혼란을 야기하도록 이끌었다.
하루 이틀 사이 나라가 수십 개가 생겨나고, 한 달 사이 수십 개중 일부만 살아남는 등.
이 와중에 고통받고 시달리는 건 백성 및 시민들.
그러던 중, 은밀히 구 제국 황족의 핏줄이 남아 있으며, 그가 곧 이 혼란을 종식 시키리라는, 묘한 소문이 맴돌기 시작했다.
“예측대로 흘러가는군.”
카일론의 현 주인이라 일컬어지는 왕은, 그러한 대륙의 정세를 살피며 흡족한 미소를 띄웠다.
“제 살들을 깎아 먹고 있는 줄 모르고. 가만히 기다리면 피폐해진 것들만 남겠지. 우린 이를 통해 재정을 축적해 추후 저것들의 목덜미를 겨눌 창칼을 만들어 저것들에게 시달린 백성이며 노예들에게 쥐어만 주면, 없던 병력도 멀쩡한 병사로 바뀌어 저것들의 심장을 찌르는, 가장 맹렬한 충견이 될 테지. 어차피 저것들에게 백성이니 뭐니, 중요한 건 자기들의 보신. 그 낱낱을 확실하게 눈과 귀로, 뇌리에 새겨주어 증오를 양식하기만 한다면, 수백만 정예 대군이 없더라도, 저들을 허무는데는 전혀, 문제 될 게 없겠지.”
“…지당하십니다.”
집무실이 아닌 작전 회의실엔 테이블 위에 널린 지도와 무수한 서류와 양피지 등이 판에 꽂혀 주요 정보들을 여실히 나타내고 있었다.
그리고 일부 핵심 인사들은, 그런 철왕의 말을 들으며 그가 오랫동안 준비해온 계획이 차근차근, 단계대로 실행되어 예측대로 흘러가는 걸 보며, 마른침을 삼키고 있었다.
“전쟁을 너무 빈번하게, 오래 일으킬 필요가 없지. 그러면 위아래가 고생이니까. 거대한 대회전을 일으키고, 거기서 주도권을 확실히 잡아 적들의 모가지를 쳐 전쟁을 빠르게 종식 시킨다. 점령 이후엔 어차피 다수의 종족들이 들어섬으로써 기존의 주인들이 텃세를 부리고, 저항 의식을 불태울 여지를 없앤다. 당장 중요한 건 보금자리에 침입한 외적이지, 우리 카일론은 아니란 말이지.”
“그런 식으로 저들이 혼란을 바탕으로 정착 및 발전, 적응과 통치가 어렵사리 이루어지는 사이, 저희 카일론은 확보한 영토를 굳히는데 전력을 기울인다….”
“쳐서 점령하는 건 쉽지. 그러나 세대를 거쳐 그곳을 자국 땅으로 만들어, 그들의 정신과 사상, 민족적 의식을 우리 카일론과 동일 시 여기게 만드는 건 매우 어려운 일. 그러나 그것만 가능하다면, 나머지는 문제 될 게 없지.”
굴복당하지 않는 세대는 저항할 수 없도록 무력화시킨다.
그렇게 최소 2세대 길게는 4세대만 지나면, 그 기간 동안 통치를 잘 이루어가면 그 자체로 동화 정책은 성공적으로 이루어질 거다.
그리고 이에 대한 거부감이 없도록 이전서부터 다양한 종족들을 받아 들였고, 이를 통한 화합을 구축해 나간 거니까.
당연하지만 이건 쉽지가 않다.
그러나 철왕은 이를 해결했다.
사실 그의 가장 큰 역사적 업적을 추후 역사가가 읊는다면, 바로 이 점을 들 수 있을 거다.
종족 차별, 인종 차별, 신분적 격차로 인한 극단적 갈등이라던가.
하나의 차별은 다양한 차별을 잉태한다.
그러나 허용할 선을 확고하게 구축해 정해둔다.
폭력을 민중에게, 백성에게, 온갖 잡것들에게 쥐어주면, 신뢰보단 무력과 폭력으로서 생활권을 영유하려 드는 게 민중이란 이름의 폭도들이다.
그러기에 폭력을 국가가 소유하고 독점한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공익과 정당하면서도 올바른 통치 체계를 실현한다.
국가 이외의 무력 및 폭력의 행사를 용납지 않는 것.
이를 바탕으로 폭력이 전부가 아님을, 폭력으로는 해결할 수 없다는 인식이 틀어박히면, 상업을 비롯해 온갖 문화가 안정적으로 활성화되며 정착을 이루어갈 거다.
이를 위해 법을 어기고, 폭력을 무차별적으로 행사하거나 남용, 악용한 것들에 한에선 철저한 처벌을 이어가는 게 필수적 요소.
여기서 폭력의 행사자가 이를 남용하는 일 또한 철저히 제동을 걸고, 감시 감독을 해야만 한다.
가진 자는 언제나 그렇듯 이를 악용하고, 남용하기 바쁘니.
이를 방치하면 이들이 새로이 특권층이 된다.
그것은 부패를 가속화 하고, 뒤틀린 문화 형성을 이루어갈 터.
예컨대 음식이 썩는 것과도 같다.
기구며 도구가 녹이 스는 것과도 같고.
쇠가 녹이 슬면 금세 망가진다.
하물며 도구조차 그럴 진데, 유기적으로 굴러가는 국가, 사회가 안 그럴까.
그러기에 안정권에 이르면, 사실상 외적과의 전쟁보단 내적과의 전쟁이다.
그러기 위해서, 외적이 허투루 달려들 수 없도록, 앞서 기회가 온 시점에 확실하게 외부를 다져놔야 하는 거고.
이는 모두 계획돼 있다.
심지어 철왕, 그가 죽은 이후의 계획조차도.
“그러니… 가장 먼저 그것들을 쳐내야지.”
장수족.
엘프들.
인간의 잔꾀와 썩어빠진 거짓과 더러움이 몸에 잔뜩 밴 그것들.
그것들이 제일 문제다.
나머지는 제어가 가능하지만, 이것들은 아니다.
그러니 이 혼란한 시국에, 마저 청소하는 김에 이것들 또한 동시에 갈아엎어 놓는 게 무척 중요했다.
“그걸 위해선….”
그때였다.
문이 열리고 차분히 내부로 들어선 대신 중 하나가, 난감한 얼굴로 땀을 닦아내며 말했다.
“폐하, 급보이옵니다.”
“…….”
급보라.
급보라고 할 게 과연 뭐가 있을까.
계획에서 벗어났다던가, 변수라는 건 늘 있는 일이지.
그러니까, 하찮은 일로 동요할 필요는 필시 없다고 본다만.
“말해보아라. 무슨 일이더냐?”
“구 제국의 황족이란 자가 제국의 후예랍시고 나라를 건국해 지지 세력을 끌어 모으고 있다는 소식입니다.”
“…또 어디 시답지 않는 놈이 수작을 부리는 걸 테지. 그런데도 그걸 급보랍시고 가져왔다면, 무언가 차이가 있으렷다?”
“그가, 구 제국의 옥새를 가지고 있다고 하옵니다.”
“…그거야 만들어내면 그만이고, 어떤 머저리가 가지고 있다가 써먹을 수도 있고, 하기 나름이지. 그런데 그게 끝은 아닐 테고, 또 뭐가 있더냐?”
“…하나가 아니랍니다.”
“제대로 말해라. 뭐가 하나가 아니란 것이더냐?”
“…구 제국의 황족이, 하나가 아니라 둘이라 하옵니다.”
“둘?”
“그 둘이… 합심해서 세력을 끌어모으고 있다는 소식입니다.”
“흐음….”
철왕이 손을 뻗자 대신이 입을 다물었다.
“그래서 분열되고 각자도생하려던 것들이, 눈치 보다 그쪽 세력이 합세하는 식으로 상황이 바뀌었다, 이걸 말하고 싶은 게냐?”
“…그러하옵니다.”
“죽여.”
“……?”
“회유해보고 말귀를 못 알아먹으면 죽여야지. 우리 측에서 소유하고 있는 게 이미 있는 마당에, 방해거리를 굳이 방치하고 늘릴 필요는 없겠지. 아… 그렇군. 이걸 되려 이용할 수만 있다면….”
그 뒤로 몇 분간 걸으며 생각에 잠긴 철왕이 즉각 명했다.
“내 몇 자 적어줄 테니 왕녀에게 이를 은밀히 전하라 일러라.”
말이 끝나기 무섭게 미리 준비라도 하듯 양피지를 넘겨받은 철왕이 곧장 금으로 된 촉펜을 잉크에 꽂아 빠르게 내용을 적어가기 시작했다.
“패란 사용하기 나름인 거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