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21화 〉127. 사람의 성품 중, 가장 뿌리 깊은 것은….
현재 신대륙, 파라메라 대륙에 가장 큰 영향력을 지닌 이를 꼽아보라 하면, 단언컨대 반드시 다섯 손가락 내에 들 법한 존재.
그렇게 손꼽기 이전, 아득한 옛날서부터 그리 여겨졌던 존재.
다만 우물 안 개구리 마냥 참교육 뒤 속세에 직접 몸담고 참여하기 시작함으로써 단순 상징성 및 공포의 대상이 아닌, 살아 있는 실질적인 신화적 존재로서 그녀는 확고부동한 위치에 놓이기에 이른다.
사실상 에드릭이 신대륙을 떠난 뒤로, 가장 강대한 영향력을 끼치며 입지를 다진 존재이기도 할 테고.
무엇보다 그녀는 처음 알그리타 대륙에 당도한 이래 이런저런 행보를 통해 자신에 대한 소문을 부풀려가기도 했었다.
나라 하나를 휘저었다던가, 도적 무리를 반나절도 안 돼서 일소해버렸다던가.
거대 괴수를 단독으로 굴복 시켜 수하로 만들었다던가, 자연 재해를 맨몸으로 감당해 무마 시켰다던가.
이 모든 게 알그리타에 당도한 이래 반년도 채 되지 않아 일어난 것들이라 의외로 소문은 빠르게 퍼졌다고는 하나, 대륙이 넓은 만큼 이에 대해 문외한 이들이 아예 없을 순 없을 거다.
다만 그녀의 일화가 온갖 설화며 노래로 퍼진 덕에, 다들 그 인상착의 정도는 짐작이 가능했는데, 심지어 그녀는 평민들보다 귀족들에게 훨씬 더 유명한 존재기도 했다.
본신의 힘이 막강한 것도 그렇지만, 신대륙 내에 사실상 지배자이자 기존의 토착 통치 세력의 주인으로 여겨지는 존재라는 게 소문으로 널리 퍼져갔기 때문.
물론 이 또한 의도한 바였고, 덕분에 그녀는 이런저런 협상이라던가, 평범하게는 얼굴 한 번 보기 어려운 이들과 쉽게 독대를 하거나 초대받는 등의 혜택을 누리게 됐다.
…파라메라 쪽에선 가당치도 않은 일이지만, 원래 타 세력권에 발을 들이면 그런 건 어느 정도 고려해야 마땅하다는 건 그녀도 훤히 아는 사실이기도 했고.
신수 바헬루스.
어쨌든 인간형을 하고 있지만 그녀는 순수한 인간이나 아인족과는 완전히 거리가 먼, 실질적으로 알그리타 대륙 기준에선 용족, 드래곤에 준하는 부류에 속한다고 봐야 했다.
알그리타 내에 용족들 수가 현저히 줄긴 했지만, 그렇다고 그들이 활동을 아예 안 하는 건 아니다.
거기다 관여된다거나 엮여봤자 좋을 것도 없고.
그런 의미에서 비교적 필멸자들과 친화적인 바헬루스의 존재는, 이전의 위압적이고 막연한 공포를 심어주던 폭력적인 그것과 달리, 현재는 철저히 속세의 눈높이에 맞추어 활동하고 있었기에, 나날이 평판이며 인망도 좋은 쪽으로 치솟고 있는 실정이었다.
…이러면 또 기어오르려는 족속들이 생겨나려 들 테지만, 그건 그것대로 방법이 있다 치고.
어쨌든 한창 상승 곡선을 타며 급변하고 있는 신대륙의, 가장 핵심적 존재가 뜬금없이 등장해 에드릭에 대한 지지를 선언해버리자, 판세가 다른 의미로 기울었다.
거기다 설상가상으로….
“우리 소브릴 정교회 측에서도 그가 황제 위에 오름으로서 제국 황실 복권에 대해 격렬한 지지를 표명하는 바입니다.”
또 간만에 본 시스터 카멜린의 경우도, 어째 이전과는 다른, 조금 화려한 복장으로 대뜸 회의실에 등장하더니, 뜬금없이 그런 선언을 해버리는 게 아닌가.
“프리스티스 카멜린….”
누군가의 놀란 듯한 혼잣말이 에드릭의 귀를 불쑥 건드렸다.
으응?
언제 시스터에서 여사제로 승진을, 클래스 체인지를 하셨는지요?
거기다 그녀는 본래 시스터 이상은 못 올라간다던가, 그럴 생각 없다는 식으로 들었던 것도 같은데… 아, 뭐… 옛날 옛적 일이라 지금 와서 그걸 논하는 거 자체가 너무 때늦은 소리려나?
아무튼 그 놈의 망할 종교 가운데, 현재 백성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으며 교세를 늘려가는 정교회 쪽까지 가세하니, 이건 이것대로….
심지어.
“본교 측에서도 그의 정통성에 대해 어떠한 의구심도 없음을 밝힙니다.”
…그리고 왕후장상, 귀족들 쪽에 편애를 아끼지 않는 기본 교회, 소브릴 교 측에서도 정교회와 반목하고 어쩌고 하는 관계임에도, 동일한 의사를 표명하기에 이르렀다.
아, 이건 끝났네.
에드릭은 참담함을 느꼈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 마치 서프라이즈 파티에서 난데없이 생전 알지 못했던 생일을 알게 되기 무섭게, 생일 선물 보따리를 받는 격이랄까.
문제는 그게 전혀, 이쪽이 원하던 그런 게 아니라는 게… 가장 큰 불안 사항, 불편한 사항이었지만.
이쯤 되니 다른 의미로 에드릭에 대해 반기를 들거나, 이의를 제기하는 게 바보 같아질 정도로, 상황 판도가 매우 괴이해졌다.
‘완전히 판을 다 깔아둔 거잖아.’
어쩌다 이딴 상황이 된 걸까.
에드릭은 자신의 전생에 뭔 죄를 지었길래 자신을 꼭두각시로 세우지 못해서 다들 안달인가 싶었다.
“…….”
그렇게 해서.
에드릭이 원하든 원치 않든.
사태는 아주 급박하게, 눈 몇 번 깜빡이는 사이 일사천리로, 뭔가 터무니없는 일들이 처리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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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고 이 소식은 당연하지만 알그리타 대륙 전역으로 퍼져 나가 어마어마한 충격을 가져다주었다.
말 그대로 기존의 판이 완벽히 무너지고, 새로운 법칙과 규칙이 생겨나게 생긴 판이다.
거기다 분쟁이며 전쟁이 끝난 것도 아니며, 일사천리 됐다 쳐도 불안 요소가 그대로 남은 상태로 사태가 급진적으로 굴러간 터라, 당연하지만 그에 해당하는 문제가 기하급수적으로 터져 나왔다.
구 제국 영토였던 권역 일대에 불어닥친 충격과 공포는 말할 것도 없지만, 역으로 그로부터 단절된 영역권에서의 혼란도 그대로 이어졌는데….
“…대체 어쩌다 이 지경이 된 게지?”
특히 카일론의 철왕으로선, 죄다 때려 부숴 저들이 최소 1세기 가까이 회복 및 복구에 전념하게 하여 자신의 후대, 그 이후에도 순순히 저들을 휘몰아쳐 대륙의 태반을 집어삼킬 대계를 꾸몄던 그로서는, 이 사태가 도무지 이해가 가질 않았다.
무엇보다 일이 이 지경이 되기까지, 왜 아무도 제대로 된 정보를 물어오지 않았는가, 하는 것.
냉정히 생각해보면, 실권을 죄다 장악하고 있던 자신조차 모르게, 실권이 이탈했다고 봐야 할 터인데, 대체 어디서부터, 어느 범위까지 일이 진행됐는지, 그로선 당장 파악할 방도가 없었다.
결국 그는, 믿을 만한 존재이자… 어느 의미로 지금 시국에 가장 신뢰하기 어려운 존재 중 하나를, 자신의 손으로 불러드려야만 했다.
“얼굴 보기가 좀처럼 쉽지가 않습니다, 폐하.”
“보고자 한다면 얼마든지 볼 수 있었겠지.”
한쪽이 의례적으로 하는 말에, 한쪽은 의도를 가지고 그런 게 아니냐는 식으로 완곡한 표현을 굳이 언급했다.
애초에 의도를 숨길 필요조차 없다고 철왕은 느꼈기에, 곧장 본론으로 들어갔다.
“어디까지 알고 있었나?”
“무얼 말씀이시온지요?”
“…….”
철왕의 침묵에 플로란테 공작도 그를 바라보며 차분히 침묵을 고수했다.
그렇게 1분, 2분, 3분.
그보다 배의 시간이 흐른 직후에야.
“그렇게 오래되진 않았습니다.”
“…….”
의미심장한 속내를 털어놓은 플로란테 공작.
철왕은 자신의 동생이 하는 말을 구태여 의심하지 않았다.
“자네가 그걸 받아들여야 할 이유가 있다면… 이거겠군.”
철왕은 손가락으로 지면과 천장을 한 차례씩 가리켰다.
“녀석은 중앙에 틀어박히고자 할 테고, 자네는 이곳의 주인이 되어 후원자이자 조력자로서 협력함과 동시에, 또 다른 기회를 맞이한다.”
“현명하십니다.”
공작은 부인하거나 따로 변명하지 않았다.
“왜지? 가만히 눌러앉아 있으면 알아서 카일론과 구 제국 영토가 고스란히 네 손아귀에 들어앉았을 텐데.”
“아시겠지만 저는 딱히 권력이라던가, 영토 욕심이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이 또한 형님의 부탁도 있고 하니 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거지, 제가 언제 이러고 싶다 털어놓은 적이 있긴 하온지요?”
“하면 뭔가? 이 사태는? 자네는 조상신과 선조들에게 대체 뭐라 변명을 늘어놓으려고 수십 년간의 준비를 이토록 처참하게 무너뜨린 겐가? 어디 말이나 한번 들어보게 속 시원히 털어놔 보게나.”
철왕에게 있어 동생인 플로란테 공작은, 어느 의미로 기적 같은 존재였다.
왕으로부터 가장 가까운 혈통이자, 위치에 자리한 이가 권력욕이 딱히 없다는 것.
철저히 속내를 감춘 것일 수도 있지만 애초에 그걸 잘 감추고 있다는 거 자체가 유능한 거다.
예컨대 흐름이나 세태 파악에 능하면서 그 본질이나 구성을 헤아리면서도, 이를 탐하지 않는 것.
혈통이 고귀한 존재들에게 있어 이보다 더한 재능이 또 있을까.
무능하다 할지라도 혈통을 유지만 할 수 있다면, 그 가문에게 있어 이는 강대한 재산에 해당하리라.
혹여 정식적으로 혈통을 이을 수 없다 치면, 그 갈래이자 대안으로서 그 핏줄을 대체할 수 있으니.
개인이 아닌 가문으로서, 왕실의 일원으로서 플로란테 공작의 존재는, 그 자체로 유의미한 걸 넘어 그 이상의 가치를 지녔다 봐도 무방했다.
그럼에도 심지어 일 처리도 탁월하며 유능하기까지 하다.
예컨대 유능하기에, 굳이 권력의 구차함에 목을 매거나 그 유혹에 현혹되지 않고 있다는 것.
…이건 다른 의미로 자신이 누락 되거나, 자신의 딸이 이 세상에서 지워진다 쳐도, 그가 그 자리를 대체할 수 있는 대안이기도 했다.
그러기에 왕녀를 대놓고 죽던살던 전장에 내몰고, 전투의 화마 속에 내던져 성장의 기회 및 환경을 제공할 수 있었던 거고.
“카일론이란 나라 하나만 본다면 어떨지요.”
“정치와 외교를 바탕으로 주변을 흡수 병합하는데는 한도가 있다. 우위를 점하는데 있어선 전쟁을 바탕으로 철저한 위아래를 구분 짓고, 이를 구축해 정착시켜야만 훗날 강대한 제국이 형성되는 거다. 넓은 영토를 지배하기 위해선 공포가 선행되어야 하며, 통치에 있어 경외가 뒷받침되어야만 한다.
세상엔 어디든 간악하고 간사한 것들이 널려 있기에 선정을 베풀고, 더 나은 공공의 편의와 합리를 제공한다 하여, 모두가 만족할 순 없는 법이거늘. 녀석이 복권된 제국 황실의 황후이자 후대에 그 핏줄로 제국을 이어 가게 만든다 쳐도, 과연 그게 얼마나 가겠느냐? 네가 조력하고 어쩐다 쳐도 결국, 그건 우리 카일론의 뿌리가 아니라 다른 무언가로 변질될 거다. 몇 세대만 지나보면 결국 네 후손과 녀석의 후손들이 치고 박고 작은 영토, 작은 이권, 같잖은 자존심과 체면 때문에 수천수만을 떼죽음으로 내몰겠지. 이걸 정녕 바라는 게냐?”
“형님 폐하 말씀엔 저도 동의하는 바입니다.”
“그런데도 저쪽에 손을 들어줬다 이 말인가?”
“영원한 제국은 존재할 수 없잖습니까.”
“그러나 장기적으로 존속되어 이어지는 제국은 있을 수 있지. 혼란과 난세의 시기가 줄어야 백성과 평화에 찌든 버러지들이 그나마 서로 피 튀기지 않고 공존할 수 있을 테고.”
“그건 불가하지요.”
“그래, 불가능하지.”
그러나.
“우리의 의도, 목적, 의지를 관철시킬 수 있다면, 그러한 부조리와 불화, 불의로부터 우리의 지배권 내부에 한에선, 확고하게 지켜내 평화를 이어갈 수 있을 테지. 평화가 아니더라도, 최소 방황하거나 패망하는 일은 없을 거다. 먹고 숨 쉬는 것조차 불가능해 짐승보다도 못한 사태에 빠져 세상을 원망하는 개 같은 사태를 백성들에게 제공하지 않는 거야말로, 통치자의 기본적 의무거늘. 그걸 유지하려면 결국, 외세를 우리 뜻대로 주무를 수 있어야 한다고, 내 과거에 밤낮을 세어 가며 이야기하지 않았더냐?”
“예, 기억하고 있사옵니다.”
“…….”
거기서, 방금 전까지 격정을 토하던 게 거짓인 양, 철왕은 냉정한 얼굴로 자신의 눈앞에 놓인 공작을 가만히 응시했다.
“말해보게. 내가 납득할 수 있는 답을. 그게 아니라면, 너라면 잘 알 것이야. 내가 무슨 조치를 취할지. 어떻게 행동할지도.”
“힘든 과제를 안겨주시는군요.”
철왕, 자신의 형님은, 눈앞의 사내는 주체성, 자기 주도적인 면이 극에 이른 존재다.
그러기에 어지간한 이야기론 그 의중을 흔들기란 무리.
애초에 자신의 의견 및 계획, 이론조차도 철저하게 자체 검증을 바탕으로 나날이 검수하고 검토하며 완성도를 계속 늘려가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음을 어찌 동생인 자신이 모르겠나.
하지만.
“과거와 미래를 모두 철문으로 닫고, 오늘이란 테두리 안에서 살아라.”
“…뭐라?”
플로란테 공작이 철왕을 향해 재차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