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22화 〉127. 사람의 성품 중, 가장 뿌리 깊은 것은….(2)
“그 아이가 그렇게 말하더군요. 폐하께서는, 당장 오늘날 살아가는 이들의 피가 강이 되어 지면을 가득 붉게 물들이는 걸, 당연한 과정이자 필요한 희생으로 여기신다고요.”
하!
철왕이 기가 차다는 듯 거칠게 코웃음을 쳤다.
“…이 내가! 짐이 바라지 않아도 결국 세상의 이치적으로, 구조적으로 그렇게 되어 있거늘! 내가 안 하면 누군가가! 크든 작든 길든 짧든! 결국 인간의 과욕과 악의적 욕망 등이 그들을 그리 내몰겠지. 아님 짐승처럼 살다 짐승처럼 가길 바라는 건가?”
“빠르든 늦든… 우리가 일으키지 않는다 쳐도 결국 사태를 도래한다, 그 말엔 저도 긍정하는 바입니다.”
“그런데도 그깟 눈앞의 희생에 발목이 잡혀 그런 쪽으로 자기합리화를 하시겠다?”
“우리가 하지 않아도, 어차피 그렇게 된다 치면, 우리가 그 역할을 할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그 말에 철왕이 손을 뻗어 공작의 말을 제지했다.
“그거야말로 궤변이지. 우리가 하지 않으면 결국 누군가가, 더한 악의적 목적을 실현하고자 모두를 불구덩이 속으로, 칼날 밭으로 내몰겠지. 내가 그 꼬락서니 안 보자고 내 백성, 내 사람들을 위해 적대적인 것들로 하여금 희생양들을 선별하겠다는 건데, 그게 불만이라 하더냐? 우린 카일론 사람이다! 당연히 우리 백성 이외에 나머지를 희생양으로 삼고! 우리 조국과 조국에 헌신, 협조하는 이들을 위해! 그들을 헌신하고 희생하게끔 만드는 건 지극히 당연한 상식이다!
모두의 평화, 모두의 공존, 모두의 헌신!
이딴 게 정상적으로 가능했다면 태어날 적에 나라며 가문이며 지역이며 시기며! 이딴 거와 상관없는 어떤 법칙에 의거해 태어나고, 자라고 그래야지! 안 그러더냐? 나는 이 혼란의 시기에, 이 나라의 왕족으로서, 왕이 되어, 왕으로서의 의무와 책임을 가지고 죽었어야 했다! 말해봐라, 짐의 말이 틀렸느냐? 다 같이 인간으로 태어나야지 왜 종족의 구분이 있고, 남녀가 구분되고, 나이 고하가 구분되며, 하늘과 땅이 나누어졌고! 위아래가 정해지는 거더냐? 이딴 걸 논하는 거 자체가 그러니 잘못됐다는 거다! 자기 위치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최고의, 최상의 노력과 선택을 통해 결실을 낳는 것. 자연의 이치가 그러하고, 순리가 그러한데! 대체 너희들은 뭣들 하자는 거야?!”
“…….”
그의 격노는 충분히 이해가 갔다.
만백성이 고기로 배를 채우기란 불가능하다.
그러나 적대국, 타국, 외지인들의 그런 기회를 박탈하면, 만백성에게 주어질 기회를 늘릴 수가 있게 된다.
그는 카일론의 왕으로서, 이 부분을 철저하게 지키고자 했던 거에 불과했다.
아마 여느 시대에 따라선 명군, 성왕, 군왕이 됐을 테지.
아니, 이미 그리 불리고도 있고.
어쩌면 자신과 같은 기질을 지닌 왕이 부왕으로서, 현재의 왕녀와 같은 지원을 주었다면, 패왕녀라 불리는 그녀의 자리엔 이미 그가 눌러앉아 확고부동한 업적을 꾸려가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는 철저하게, 자신의 처지와 주제, 입장에 맞게 행동해왔다.
그리고 그것이 옳다는 것에 대해, 결코 뒤돌아보거나 부인하거나 부정하는 경우는, 있을 수가 없다는 것처럼 전진해왔다.
그것이 바로 왕의 삶이며, 패왕의 질주.
단순히 주변을 쓸어버리고, 앞을 가로막는 걸 모조리 쳐부수어야만 패왕이 되는 게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패왕이 맞았다.
애초에 패왕녀라는 그녀를 그렇게 만든 게 누구인가.
자질, 재능은 필수적이라 하여도, 그게 있다 하여 모두가 그와 같은 위치에 올라서는 게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제왕 교육조차 성공적으로 해낸, 왕이자 왕실의 주인, 가문의 주인이자 일국을 수호하고 발전시켜야 마땅한 국왕으로서, 그는 필시 완벽한 존재에 가까울 터였다.
다만.
……너무 앞을 뚫어져라 본 탓에, 정작 주변을 헤아리질 못했다.
아니, 그조차도 잘 헤아렸다지만….
“형님 폐하께서 간과하신 것이 결국, 지금에 와서 뿌린 씨가 싹을 틔워 자라나, 이번 사변을 일으켰다고, 소신은 생각합니다.”
“……간과한 것?”
“아마 조만간 아시게 될 테지요. 이에 대해 제가 논하는 건 가당치 않다 여기니, 기다려보시지요. 곧 만족스러운 답을, 얻으실 수 있을 겁니다.”
답은 만족스러울지 모른다.
그러나 결과가, 현실이 만족스럽지는 못하겠지만.
적어도 왜 일이 이 지경이 됐는지, 그 인과 여부는 확실하게 알게 될 테니까.
“네가 아는데, 짐이 모른다, 라. 그건 그것대로 심각한 노릇이군.”
드물게 장탄식을 터트린 철왕은.
“이만 가보게.”
“…….”
맞은편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수그린 플로란테 공작.
“내 발목을 잡을 게 있다면… 아마도….”
이 사태에 놓이고서야, 그리고 어설프게나마 지적을 받고서야.
“그래, 어쩌면….”
조금은, 짐작되는 철왕이었다.
골칫거리.
아니, 이건 그런 하찮은 문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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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예로부터 불합리, 불공평, 불균등. 모든 건 질서에서 혼돈으로. 제대로 가고자 할수록 어긋나고 빗나가는 게 또한 이치지.”
애초에 완성되지 못한 존재가, 자신의 기준으로 완성, 완벽을 추구하는 시점에 목표치에 근접은 할지언정, 그 행보며 행로 자체가 완전할 리가 없지 않나.
이를 간과하는 시점에 문제는 어디서는 터져 날 수 있는 거고.
노인이 지팡이를 짚은 채 나직이 혀를 찼다.
“그래서, 만족하십니까?”
그런 그의 뒤편에 차분히 서 있던 윤미라가 무난한 어조로 물었다.
“단정 짓기엔 아직 이르지 않더냐?”
“여기서 수를 쓴다면 그거야말로 같이 죽자, 파멸하자는 것밖에 안 되잖습니까? 그거야말로, 그가 가장 꺼릴 법한 방식이겠지요.”
“사람을 얕봐선 아니 되지. 구석에 몰린 쥐는 고양이를 물 수 있는 법이다.”
“얕잡아본 적이 없는데 어쩌겠습니까. 저나 그녀나, 그런 적은 단 한 차례도 없었습니다.”
단언까진 아니다.
그러나 애초에 그럴 여지 자체가 없었다는 것처럼, 그녀는 말을 끝마쳤다.
“그럴 처지도 아니었고요.”
이윽고 자리를 뜬 그녀의 자취를 차분히 응시하던 노인도, 연기처럼 흩어져 자취를 감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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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드릭은 여러 가지 의미로 곤란한 처지에 놓여 있었다.
“도망치고 싶다.”
“그러고 싶다면 말로 내뱉어선 안 되지.”
눈앞에 자리한 바헬루스가 다리를 꼰 채 차를 음료처럼 벌컥벌컥, 원샷을 때려버린다.
“이리될 거라 정말 예측하지 못하셨는지요?”
“…….”
예측하는 게 이상한 거지.
애초에 다 된 밥 내오듯 들이밀 거라 어찌 예측했을까.
시스터… 아니 프리스티스 카멜린의 말에 에드릭은 더 큰 한숨으로 응답했다.
“아, 싫은데.”
“남들을 못 해서 안달인 걸 뭐가 그렇게 불만이랍시고 탄식하는가?”
“그럼 할 녀석한테 넘기고 싶은데. 이 짓을 내가 왜 해야 합니까?”
여느 때와는 달리, 겉치레도 완전히 내던진 채 늘어져 한탄하는 에드릭.
어느 의미로 이게 그의 진면목이었지만, 좀처럼 볼 수 있는 모습은 아니었다.
표정 관리도 안 하며 똑바로 앉는 것도 아니고 소파에 반쯤 파묻듯 늘어져 자칫 잘못하면 미끄러져 바닥 위로 엉덩방아를 찧을 것처럼 위태위태하게 걸터앉은 모습.
어느 의미론 누워 있다고 봐도 무방한 모습으로 양손을 곱게 자신의 배 위에 포갠 채 천장과 허공을 절묘하게 노려보는 그 자태엔 권태감과 태만이 진득하게 묻어나 있었다.
예컨대 에드릭은 이후 일어날 일들을 떠올리는 것만으로 벌써 지쳐버린 거였다.
‘입헌군주제 한다니까 이걸 또….’
황제라 해도 말이 황제지 사실상 병풍이며 석상 급 존재.
다만 군권을 비롯해 몇몇 실권을 황후인 패왕녀 측이 사로잡는다 치니, 사실상 이쪽은 병풍이며 부인이 실권을 장악해 권력을 휘두르는 기묘한 상황이란 건데, 이건 이것대로 좀 비정상적이지 않을까 싶었다.
그래도 주변이 개판 날 여지가 다분했기에 강력한 힘으로 주변을 억제하고 억압하고, 균형을 잡게끔 만드는 그게 필요한 건 확실했다.
평화적인 시기였다면야 좋게좋게 정치질로 끝낼 수 있다지만, 지금은 언제든 주변에서 들고 일어서도 이상할 게 없는, 난세이자 군웅할거에 직면한 시기. 그럴싸한 이벤트나 명분 등이 없어서 다들 크든 작든 인접한 영지며 영토를 두고 땅따먹기를 비롯해 신경전을 벌이고 있다뿐이지, 그게 아니었으면 아마 하루 사이에 수십 곳에서 무차별적인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을 거다.
“혼란한 시국에 중심을 바로잡기 위해서라면, 이러한 과정이 필요한 법이지요. 백성들은 의지할 것을 필요로 합니다. 위로는 그분을, 아래로는 영웅을. 선도자와 선지자의 필요성은 언제 어느 때고 존재했습니다. 눈앞이 보이지 않는 맹인을 안내할 안내자가 있어야 그들이 넘어지거나 구렁텅이에 발이 미끄러져 떨어지는 참사를 면할 수 있을 테지요.”
“아, 네….”
카멜린의 그럴싸한 말에도 에드릭은 무성의한 태도로 일관했다.
좋은 취지인 건 아는데, 굳이 내가 왜 그래야 하냐 이 말이지.
나 말고도 잘난 사람 지천에 깔렸는데 왜 나냐?
“귀공께선 충분히 그 역할을 감당하실 수 있을 겁니다.”
“그거 감당하기가 싫다는 건뎅….”
늘어진다.
이러다가 액체가 돼서 슬라임 마냥 푸스스 하며 녹아버리는 건 아닐까.
아, 실제로 그렇게 될 수도 있긴 하다만….
에드릭은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아졌다.
현재 중요한 안건이며 구체적인 사항 등을 비롯해, 조율하고 검토해야 할 그런 것들은 패왕녀며 윤 팀장의 입과 손을 통해 형성되고 있었다.
자신은 말 그대로 얼굴 마담 겸 간판으로 취급 당하는 상황.
물론 에드릭이 솔선수범이랄까, 적극성을 가지고 이런 일을 처리하고자 업무에 뛰어든다 치면 그녀들이 마다하는 일은 없을 거다.
이조차도 나름 그녀들 입장에선 에드릭을 이해해주는 취지로 부담을 넘겨받겠다는 취지로 일을 처리하고 있었던 셈이었으니까.
실제로 업무 효율도 차원이 틀리기에, 여기선 에드릭이 개입하는 게 되려 방해가 될 수 있었다.
“그대가 황제가 된다는 소식은 파라메라 대륙에서도 이런저런 연유로 회자되게 될 터. 이를 통해 그대에게 성은을 입거나, 이것저것 실권을 넘겨 받은 이들 간에 정통성이며 같잖은 이유로 주도권을 쥐고자 하는 부류가 나타날 수 있으니, 그에 대한 조치도 취해야 할 것이다.”
“이건 이것대로 골치네요.”
아무래도 본의 아니지만 신대륙 내에서도 일부, 에드릭의 영향 덕에 제후국으로 사전에 입후보해서 저쪽 대륙 주도권을 쥐려는 족속들이 생겨나려는 모양이다.
아니, 이건 어느 의미로 의도적으로 그런 소식을 퍼트려, 일종에 줄을 세운 걸 테지.
그런데도 말을 저렇게 하는 거 보면… 의도적으로 물을 먹이려 드는 건지, 부담을 줄여주겠답시고 다른 의미로 실권을 장악하고자 하는 건… 아니려나? 신수가 굳이 그럴 필요는 없…겠지만 또 혹시 모르는 거니.
‘아, 생각을 말자.’
이런 건 그냥 잘나신 분들께 맡겨야지.
“그보다 정교회며 소브릴 본교 쪽에선 허파에 바람이 든 것도 아니고, 무슨 생각으로 지지 성명을…?”
“반대하겠다면 전쟁을 방관하고, 방임하겠다는 것밖에 되지 않으니까요.”
“…….”
동시에 새로운 제국에 주류로서 자리잡기 모호해지는 경향이 있을 터.
제아무리 종교적 권위가 어마어마하다지만, 결국 이 또한 권력의 한 축일 뿐.
작정하고 종교적 박해를 비롯해 온갖 처사가 벌어지고, 이러한 과정이 한두 세기만 집중적으로 발생하면, 특정 종교의 성세가 단숨에 바닥을 치는 건 일도 아닐 거다.
거기다 대체제는 얼마든지 있고.
소브릴 교, 본교의 타락과 퇴락을 통해 정교회가 생겨났듯.
이 정교회도 현재 개판이라면 개판이지만 적어도 쇄신한 이후의 본교보단 여전히 낫다는 반응들이다.
어쨌든 정교회는 백성들과 약소민족, 종족들에게 친화적이고, 본교는 여전히 권력의 주체라 여겨지는 왕후장상, 귀족, 부호들에게 친화적인 만큼, 작정하고 이쪽 판이 갈려버리면 얼마든지 미운털 박히거나 타겟 잡혀서 다른 의미로 화살 받이며 고기 방패 되기 쉬운 타겟이기도 했다.
또 전체가 합심해도 어려운 판에 내부에서 균열이 생기면?
본교가 찢기는 시점에 이들의 힘은, 목소리는 더욱 작아질 테고, 이런 식으로 하나하나 분열과 압박 등을 잘 이용하면 세력 하나 조지는 건 일도 아니다.
그 반대되는 걸 본교나 정교회 측도 충분히 가능하다지만, 힘의 균형를 인위적으로 조절 가능한 쪽은 아무리 생각해도….
‘카일론과 다종족 연합이란 위험 부담을 쉽사리 적대할 순 없으니까.’
그냥 작정하고 다 뒤져라 하고 전쟁 내서 밀어버리면 대륙의 반절이 초토화되는 건 일도 아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