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취직하니 떡을 침. 이세계에서 (434)화 (434/454)



〈 434화 〉131. 그럼에도 엔딩은 다가온다.

[생각이 많다는 거지.]

팀장님의 대답은 간결했다.
스마트폰을 통해 음성 통화 중인데도, 목소리만으로 그녀의 표정이 훤히 짐작됐다.




“그건 맞죠.”

에드릭도 딱히 부인하진 않았다.




[그래도 저쪽에서 널 빼내려는 움직임을 보인 건 이번이 처음이지?]


“…왠지 좋아하시는 것처럼 느껴지는 걸요?”

[그만큼 능력도, 네 가치가 인정받고 있다는 거잖아? 자랑스러워 하라고.]

이상하다.
보통 이런 게 알려지면 허튼 생각 말라며 주의가 먼저 날아와야 하는 거 아닌가?




“본사의 배포가 큰 겁니까, 팀장님이 대인배인 겁니까?”


[둘 다?]


뭐 멜레니아 말을 들어보면 본사도 이번 접촉을 알고서 용인? 방임? 아무튼 그랬다는 모양이니.


[그만큼  가치를 올릴 기회기도 하고. 수틀리면 절로 가면 되잖아?]


“…그런 말이 참으로 쉽게 나오네요.”




에드릭은 스마트폰을 귀에 붙든 채 반사적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제가 여기 오게 된 계기도 그렇고, 여태 이곳에서 누려온 바가 있는데 저리로 갈 순 없지요. 본사가 절 죽이려 든다거나 토사구팽하려는 게 아니라면.”

[눈 돌아가는 조건에 혹해서 근본을 버리면, 다른 의미로 뒤가 없게 되지. 넌 그 정도는 잘 알잖아?]



…조선업을 비롯해 국내의 각 유망업계에서 중국 쪽이 국내 기술자에게 천문학적인 연봉과 대우를 약속하고 빼갔으나, 정작 단기간에 몰아치듯 기술만 갈취하고 먹고 버린 일화라던가, 계약조차 제대로 이행 안 하고 내쫓았다는 일화는 제법 유명하니까.


게다가 그들은 국내에 돌아와서도 배신자 낙인이 제대로 찍혀서 취업도 제대로 안 된다던가?



“어디가 됐든 줄은 잘 서야 하는 거죠.”




정치력을 판가름 짓는 건 이른바 줄타기.
어느 편에 서고, 어느 시점에 어디에 자리하느냐.
…딱히 본사와 신경전이라거나,  밖에 날 뭔가를 할 생각은 없다만.

[그래도 저쪽이 문제점을 잘 짚었구나. 네게 그런 문제가 있다는 걸, 무의식적으로 인식하고는 있었어도 정작 의식적으로 깨닫지 못하면, 나중에 가서 그 문제로 인생 전반에 발목이 붙들릴 수도 있는 거니까.]

“예, 그게 조금, 거슬리긴 하죠.”

행복하기 위해, 잘 살아가기 위해, 부유하기 위해, 남들에게 떠받들며 존경 받기 위해.
…그러려고 사는  아니다.
그걸 위해 산다면, 대체 삶이란 얼마나, 보잘  없는 촌극인가.


[너무 고뇌마라. 네가 상상하는 거 이상으로, 세상은 무궁무진하며, 가능성은 무한정이니. 단지 네가 아직 그걸 받아들일 준비가 안 됐을 뿐.]


“그런 가요?”

[태어난 이는 자신이 태어난 숙명, 사명, 의무를 앞서 처리해야지. 하루를 인생으로 비유하자면, 아침에 깨어나 준비해 직장으로 가서 일을 하고, 퇴근한 뒤 휴식을 취한다. 여기서 일터에 온 이가 멋대로 자기 일을 방치하고 의무를 져버리면 어떻게 될까?]

“여러모로 꼬이겠죠.”


[비단 너 자신만의 문제가 아니야. 세상 구조란 그런 거고. 그러기에 모두에게 책임과 사명이 부담되는 거지. 알든 모르든. 우리가 일상적으로 내는 세금들로 국가가 돌아가듯.]


“어렵네요.”

[어려울 거 없어. 이런 건 유심히, 자세히 생각하는 게 지는 게임이니까.]

“흠….”



맞는 말인 거 같다.




[그래서 언제쯤 돌아올 텐가?]


“며칠 뒤에요.  군데 좀 더 들리고요.”


[알았다. 이쪽도 남은 것들만 일부 처리하면 기본적인 건 다 끝날 예정이니, 편한 마음으로 복귀하도록.]

“그런데 정말 괜찮은 건가요? 카일론의 국왕 폐하께서 가만히 있는 게 솔직히 전 이해가 안 가는데.”

[당연히 그는 상황을 망가뜨리고, 박살 내기 위해 고군분투 중일 거다. 허나 안심해라. 우리 측에도 그 못지않은 이가 있지 않더냐?]


“그야… 그렇네요.”



카일론의 철왕이 어마어마하듯, 카일론의 패왕녀도 그 못지않게 어마 무시하단 의미일 거다.
둘 모두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걸 쥐어 짜내며 서로의 의도, 의중을 헤아려 수를 쓰고, 대응하려 들겠지.

…딱히 이쪽 도움이 필요한 게 아니라면 알아서 내버려두고 팠지만.
그래야 또 그게, 패왕녀 본인의 공적으로 작용해 그녀가 훗날, 이쪽이 허수아비 황제가  뒤 권력을 장악하는 토대이자 명분이 될 테니까.

에드릭은 상징성 있는 허수아비로 전락해주는 게 되려 도와주는 거다.
물론 에드릭이 주체적으로 황제 노릇을 하겠다면 그녀들도 그에 맞춰 행동할 테지만, 권력 욕구도 없고 야심도 없는 에드릭이 굳이 피곤한 일을 자처할 필요는 없지 않나.


워커홀릭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권력을 독점하고 권위로 배를 한가득 채우기 위해 버둥대는 건, 에드릭의 취향과는 거리가 아득히 떨어져 있는 문제며 건수.

‘사서 고생하는 취미는 없으니까.’



일은 고생하는 게 전제로 깔린 거니 그러려니 하지만, 이건 아무리 봐도 내가 자체적으로 추구할 고생 거리가 아니었다.



‘뭔가 엄청 거슬리는 건 줄 알았는데, 또 이렇게 쉽사리 넘어가 버리네.’




필시 멜레니아의 만남은  다른 분기점이자 국면이  수도 있었을 텐데, 본사도 그렇고 이곳 세계도 그러하며, 팀장님도 그렇지만… 뭔가 규격들이 달랐다.



‘…뭐 그런 막장 회사였다면 진작 때려치우고 싶다를 입에 달고 다녔겠지.’



우리의 소원은 퇴사. 꿈에도 소원은 퇴사!
이걸 입에 달고 살았을 거며.
어느 애니메이션 속 장면처럼, 서양 공주 차림새를 한 여학생이 안녕히 계세요 여러분! 저는 이 세상의 굴레와 속박을 어쩌구저쩌구… 하는 내용을 머릿속에 연신 재생하고 다녔을 거다.

“인생은 의외로 스펙타클하지 않을지도.”

아, 물론 내가 그걸 일일이 회피하기 위해 필사적이라 그럴 수도 있지만.


“스펙타클한 건 영화나 게임, 애니에서나 그러라지.”

난 그거 지켜보며 겪는 걸로 족하다.
무병장수해서 가상 현실 게임이라도 나오면 그걸로 간접 체험하면 될 테고.




“…….”



어쩌면 본사엔 그보다  쩌는 뭔가가 있을지도?
솔직히 지금 에드릭이 젊다는 거 하나는 부인할 수 없는 진실이긴 하다.
그런데도 어딘가,  이상 뭔가를 추구할 의지가, 여력이, 열정이 더 이상 솟아나질 않았다.



“할 만큼 했다는 건가, 여한이 없다는 건가.”


뭔가를 찾지 않으면 확실히 무기력해질 것만 같았다.
애초에 황제로 올려주겠다고 하는 마당에도 긴장감이나 뱃속에 저미는 걸 제외하면, 들뜨거나 기대되는 게 일체 없다.
마치 인생이 리스크 투성이라 그거 관리하며 평온하길 고대하는 게 최대 목표인 것처럼 살아와서 그런 건가, 싶기도 하고.



“여기서 완전히 다른 국면을 맞이하려면.”




결국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내가 새로운 곳에 발을 내딛거나, 손을 뻗어야만 한다.
그걸, 좀 전에 멜레니아의 제안을 접하고 나서야 깨달았다.




“공허한  아니라 썩어가는 거네.”



솔직히 떡 치는 것도 좋다구나 하며 하긴 하는데, 이것도 따지고 보면 내가 진실되게 추구하는 그거인가 아닌가, 이걸 논하게 되면 다시 헷갈려진다.

“그만큼 많이 했다는 거지.”


 음식도 질릴 만큼 먹으면 물리는 거고.
물렸다곤 하나 한동안  접하면 다시 찾게 되지만, 그것도 계속 반복되고 누적되면… 헷갈려진다.
다람쥐 쳇바퀴 도는 것도 아니고.


그러니까 지금 내가 떡을 치는  섹스로서의 즐거움보단 사랑…이라 단호하게 언급하긴 그렇지만, 어떠한 부담도 거부감도 없는, 신뢰하며 친애하는 그녀들과 교감을 나누며, 그녀들에게 이바지하여 기쁨을 안겨줄  있다는 것.
아마 이쪽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맞을 거다.
겸사겸사 간만에 하는 거니 육체적으로 즐기는 것도 그렇고.
 때야 빠져들지만 결국 이조차도 부수적인 거다.

즉, 나는 그녀들이 좋다.
그거 하나가, 건조하기 짝이 없는 내 삶에 유일하게나마, 색채를 선명하게 밝혀주고 있었던 거다.


 외엔?
딱히.
 추구하고 싶지가 않다.
다 귀찮다.

“중증이네.”



완전 중증이다.
그런 정신 나간 생각을 하며, 아르세이유를 맴돈다.
얼굴이며 모습은 감췄기에 딱히 신변이 노출돼서 귀찮아지는 일은 없었다.


“…그러네.”



이럴 땐 본래 초심을 되찾아야 하는 법.
그런 의미에서, 거길 가보자.
원래부터 갈 생각이 있긴 했음에도, 의도적으로 발길이 향하는 걸 자제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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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렬의 대지.
사막과 오아시스.
그곳에 자리한 환란의 도시 아즈라엘.

사치와 향락.
화려하기 짝이 없는 향연이 지속되는 이곳은, 일찍이 에드릭이 알리샤와 에우리에와 접한 뒤, 어쩐 영문인지 위선의 지시로 방문해 이것저것(?) 배움을 빙자한, 천국을 맛보여주었다.

하지만.
본래는 본사  인간은 에라힘 방문이 불가능하단다.
직위 고하를 막론하고.

여기에 적응하고, 익숙해지면 사람이 금세 망가지기에.
강렬한 쾌락은 마약 이상으로 사람을 망가뜨리기 일쑤.
그러기에 에드릭은 에라힘에 방문하는 목적을 달리했다.


우선….

“정말 오랜만이네요.”


가능할까 솔직히 걱정됐었지만, 막상 눈앞의 그녀를 마주하니… 안도인지 반가움인지, 혹은 수줍음인지 모를 감정이 치솟았다. 지금의 에드릭으로선 꽤나 생소한 감정이기도 했는데….

“오랜만이네요, 로메리스.”

구릿빛 피부가 인상적인 아름다운 육체미를 뽐내는 그녀.
지금도 중요 부위를 얇은 천과 황금으로 된 치장물로 가린 게 고작일 정도로, 그녀는 매우 노골적인 차림새를 하고 있었다.

재미있는  처음 봤을 때와 지금, 분위기며 외양의 변화가 크게 없다는 거다.
반면 에드릭은 한때 그녀를 올려다 봤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로메리스는 어색한 거 없이, 마치 며칠 전 헤어진 동생이자 친구를 맞이한  반갑게 웃어주고 있었다.

“정말로요. 다신 못 보는  알았네요. 그때는 금방 다시 볼 것처럼 떠나가시더니.”
“하하하….”


그저 웃지요.
뭔가 그 시절이 떠올라 잠깐은 설렜다.



“그래서 우리 귀중하신 분은, 무슨 일로 여기에 오셨을까요? 당연히 제 얼굴만을 보려고 오신 건 아니실 테죠?”
“음, 사실 별생각 없이  것도 있죠. 가장 큰 이유는 방금 말한, 로메리스 얼굴 보러  것도 있고요.”
“어머, 제 몸엔 관심 없고요?”
“매력적인 제안이지만… 그 부분을 제외하고, 순수하게 로메리스라는 여성이자 친구를, 마음 편히 보고 싶었기도 해서요.”
“감동적인 말씀을 주시네요.”


그녀도 직업이 직업인 이상, 에드릭 이후로도 아마 많은 남성 혹은 여성을 상대해 왔을 거다.
에드릭이 거기에 대해 배신감이나 서운함을 느낄 이유는 눈곱만치도 없었다.
원래 직업이 그런 거니까.
 그걸 가지고 안 좋은 내용을 입 밖에 내어 그녀의 심사를 어지럽히거나, 서럽게 할 이유도 없었고.


에드릭은 순수하게, 성욕을 배제한 채 반가운 마음으로 그녀와 대화라는 걸 나누고 싶었다.
왜인 줄은 모른다.
그냥 그러고 싶었다.
그리고, 그러고 싶었다는 게 중요했다.



‘매번 생각이 너무 깊어서 병이 된 거라면.’



가끔은, 아니 이제부턴 자주 머릿속을 비운 채 행동해보는 버릇을 기를 필요가 있었다.
괜히 삶이 퍽퍽하다고 느끼는 사람일수록, 힐링이랍시고 세간에선 시간 낭비라 부르는 짓들을 자처하는  아니다.
캠핑장에 가서 멍 때리며 졸고 있다던가, 불 피우고 멍하니 그걸 보며 두세 시간을 거저 흘린다던가.
사실 이게  하는 짓인가 싶지만, 그들에게 있어 그건 어지간한 사치 향락과 맞먹는, 그러나 그것들로는 채워지지 못하는 무언가를 채우는, 일종에 자구책이다.



‘그것도 다 살기 위해서 하는 거지.’



어떤 메커니즘으로 누구에겐 그게 힐링이 되는데 누구에겐 되려 스트레스가 된다거나.
이걸 일일이 헤아리는 것도 사뭇 피곤한 일이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 에드릭이 로메리스를 보러 온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여자 보러 온 게 캠핑장 온 느낌이라니, 나도 참 심각한 자식이구나.
근데 실제로 그러니 어쩌겠나. 그러려니 해야지.

“좀 걸을까요? 아니면 뭐 먹고 싶은 거라도?”
“좋네요. 데이트라는 거죠? 그러면 한 번 발길 흘러가는 대로 가보죠.”




역시나.
그녀는 정말로, 상대의 의도와 심중을 헤아리는데 탁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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