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35화 〉131. 그럼에도 엔딩은 다가온다.(2)
혹시나 해서, 로메리스에게 후궁, 황비가 되고픈 생각이 있는지 묻자.
“흥미로운 제안이지만, 저는 아무래도 여기에 남는 게 맞는 거 같아요.”
“그런 가요?”
불가항력이랄까, 어쩔 수 없이 에라힘에 몸 담고 있는 게 아닌 건 확실했다.
야심이 부족하다? 그건 모르겠다.
누가 됐든 신데렐라가 될 수 있는 기회가 있다면, 이걸 걷어찰 이가 몇이나 될까.
남녀 구분을 딱히 단정 지을 필요가 없었다.
다만 그걸 수락함으로써 생겨날 파장과, 책임, 그 무게마저 이해한다면… 그건 그것대로 어떨까 싶지만.
물론 이건 배부른 상상이다.
당장 사는 거 자체가 답도 없는 이에게 그런 일확천금의 기회를 준다는데, 이걸 마다한다? 어지간한 신념, 자존심으로 똘똘 뭉친 자의식 과잉의 결정체가 아닌 한, 이건 무리지.
비유하자면, 신데렐라가 만약 왕자의 제안을 거절하고 남았다면 어땠을까?
계모가 착하다며 귀여워 해줬을까? 자매들이 좋구나 하며 친근하게 대해줬을까?
역으로 괴롭힘은 더욱 가속화됐을 거고, 꿈도 희망도 없기에 삶은 내내 그 이름처럼 잿빛으로, 잿더미로 전락해 단 줌의 불씨조차 얻지 못하고, 쇠락해 갔을지 누가 알리.
그러니까, 기회가 생겼을 때 그 기회를 낚아채지 않는다면, 그는 살만하다는 거다.
그냥도 아니고 엄청.
에드릭이 본사로 오게 된 것도 따지고 보면, 더 이상 길이 없고,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게 아니었다면, 그는 아마 현재 에드릭이란 이름으로 이곳 세계를 누비는 일이 없었을지도.
물론 그 절박함도 전부 그의 덕망에 의해 비롯된 건 맞다.
그가 만약, 천하의 개쌍놈이라, 부모님 등골 빨아먹는 걸 너무나도 당연시 여기며 죄책감조차 안 지니는, 그런 천하의 못된 호로 자식이었다면, 팀장님을 만날 수도, 제안을 받기도 어려웠겠지.
설혹 그런 운명이었더라도, 아마 지금과 같이 긍정적인 인상을 안겨주고, 그러한 것을 꾸준히 누적 시키고 쌓아가며, 지금처럼 맺어지는 흐름으로 이어지지도 못했을 테고.
“…….”
어쨌든 2번 이상 제안은 안 한다.
한국인도 아니고 2, 3번 체면상 거절 혹은 반드시 권유한다? 이건 그쪽 사정이지.
“그러면 이제 당분간 또 못 들리는 건가요?”
“크흠! 몇 년이나 됐는데 당분간이라….”
“우리에게 있어 시간은, 그렇게 한정적인 게 아니거든요.”
간과하기 어려운 소리를 들었지만, 에드릭은 그러려니 했다.
애초에.
엘프가 수백 살, 수천 살이니 저건 할머니다! 어쩐다 하는 그런 대응? 감상?
아무튼 에드릭에겐 그런 거부감이며 거북함이란 게 딱히 없었으니까.
‘눈이 즐거우면 그만이지.’
연령 특유의 그 분위기며 뭐시기를 느끼고자 한다면 못 느끼는 건 아니지만… 굳이 그럴 필요까지야 있나.
모두가 아름다움을 드러내고 싶어 하는데, 굳이 속에 있는 거까지 끄집어내고, 엿보고, 들추려 들 정도로 에드릭은 검증이랄까, 뭔가를 증명해 안심을 얻으려는, 그런 부류는 아니었다.
“만나면 할 말이 참 많을 줄 알았는데… 이상하게 할 말이 궁해지네요.”
“원래 그런 거랍니다. 뭔가를 하려고 하면, 좀처럼 되질 않죠.”
“…늘 그렇죠.”
에드릭은 쓴웃음을 머금었다.
“로메리스도 안 풀리는 일이 있나요?”
“누구나 그렇죠. 역으로 잘 풀리기만 하는 인생이라니, 그거야말로 경악스러운 일 아닌가요?”
“…….”
마치 누굴 대놓고 저격하는 듯한 표현인 거 같은데, 기분 탓이려나.
“저라고 늘 잘 풀리고 그런 건 아닙니다만….”
“어머, 그렇게 들렸나요?”
“하하하….”
그저 웃지요.
많이.
크게.
대강.
“뭐, 배부른 고민이라는 건 알겠습니다.”
“입맛에 안 맞는 음식도 있는 법이니까요.”
꽤 간단하게 정리해주신다.
주변은 여전히 요란 법석하지만, 그 속에서도 묘한 고요함을 느낀다.
공간도 넓고, 다들 자기 잘난 맛들에 사는 터라, 걷는 와중에 크게 서로가 관여하거나 참견하는 일 없이, 넓고 넓은 인공 공원을 거닐며 에드릭과 로메리스는 그럭저럭 회포를 풀어갔다.
“자리나 님은 안녕하시답니까?”
“나중에 출세하시면 뵈러 오시죠?”
“출세요?”
구 제국 황제가 예정돼 있는데, 여기서 뭘 더 어떻게 출세하란 거지?
웃음이 절로 나온다.
“에라힘이 아니어도 주변에서 편히 쉬고, 즐길 거리는 많으니 차분하게 머리를 식혀보시죠. 원하신다면, 제가 안내 겸 동행 차원에서 함께 해도 좋고요.”
“그건 또 대단히 매력적인… 제안이네요.”
“제안으로 들리셨나요?”
로메리스가 부드럽게 미소 짓는다.
“어느 쪽이든 좋겠죠.”
에드릭은 그게 제안이든, 요청이든 뭐든,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애초에 내가 원하느냐, 그녀가 원하느냐.
이 부분에 초점을 맞출 것이기에.
그런 의미에서 자신은 그녀를 원하는가? 갈구하는가?
음, 이러면 미묘해진다.
다만 성적 욕구를 토대로 판단하면…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그렇다고 그녀가 매력적이지 않냐 하면 그건 아니다.
오히려 아주 매력적이고, 간만에 만나 한다고 치면 그보다 더한 기쁨이 또 어디 있겠나.
그러나 한편으로, 에드릭은 현재 현타가 강하게 온 시점이기도 했다.
이게 다 바헬루스와 카멜린 탓이다.
어지간한 섹스론 이젠, 전혀 만족할 수 없는 몸이 됐기에.
사실상 욕구 배출 정도 밖에 안 되는데, 이건 이것대로 현자 타임 세게 오는 문제였다.
오죽하면 아르세이유 가서도 좆대가리 한 번 안 놀리고 며칠도 안 돼서 바로 이곳으로 왔겠나.
“여자 사람 친구 차원에서, 말동무 느낌으로 같이 보내는 거면 나쁘지 않겠네요. 아, 그래요. 애인과 친구 사이. 딱 좋네요.”
“욕구로부터 자유로워진 모습은 다른 의미로 보기 좋네요.”
“자유롭다기보다는… 음, 뭐랄까.”
질린 거지.
솔직히 생식기, 성기 하나만 박는 거 가지고 어떻게 만족을 해야할까.
그 주변 감각을 강화 시킨다 하더라도, 그래봤자 하나다.
이미 에드릭의 뇌는, 다수의 생식기를 형성해 이를 자극하는 것조차 충분히 수용이 가능해진 상황.
…이러면 인간이 아닌 거 같아 자괴감이 슬금슬금 들기도 하지만, 이미 맛을 봐 버렸다.
‘다른 의미로 금욕주의자 되게 생겼네.’
솔직히 섹스할 때 한정, 인간의 형체를 포기한다 치면 최소 네다섯에서 열댓명, 많게는 그 이상의 여성들과 부대껴도 전혀 하자가 없는 게 현재의 그였다.
다만 이러면 뭔가, 개개인 간의 극명한 애정 행각과는 거리가 먼, 쾌락 행위에 일환이기에, 인간적으로 자괴감이 엄청 세게 온달까.
이렇게 보면 아직, 양심이니 인간성 쪽 비중이 큰 것도 같고.
과연 인간성을 포기하는 쪽이 맞는가?
에드릭은 이 부분도 근래에 들어 꽤 크게 고민하고 있었다.
바헬루스가 몇 번 기웃거렸을 때조차, 쉽사리 떡을 치자며 제안하기는커녕 무덤덤하게 흘려넘긴 것도 그런 이유고.
그러니까 카멜린이 꿈으로 끌고 가서 바헬루스와 합을 맞추게 한 건, 시기상으로도 아주 적절한 바였다.
…덕분에 다른 의미로 현자 타임이 강렬하게 와버렸지만.
“너무 지나쳐서 정도를 모르게 된 거죠?”
“용케 맞추셨네요.”
의외라면 의외다.
애초에 로메리스가 자신에 대한 신변 정보, 사전 정보를 획득했을리는 없을 텐데, 그저 현재의 자신을 보고 이를 파악했다? 무슨 초능력이라도 있는 건가? 아니면 그쪽 능력, 기능이 과도할 정도로 발달했다던가?
그런데 생각해보면 발달하는 게 정상이긴 한 거 같은 게, 그녀의 직업 특성을 생각해보면….
“그건 그것대로 해결할 방법이 있지요.”
“그래요?”
“이미 다 알고 계시는데, 생각이 너무 많아서 미처 간과하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데, 확인해보시겠어요?”
“…저야 나쁠 건 없죠.”
빙그레 웃는 로메리스의 자신감이 깃든 표정에, 절로 동조하고야 만 에드릭.
그렇게 해서, 며칠간 에드릭은 그녀와 함께 지극히 사적인 시간을 보내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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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해보면 교양으로 인정 받을 만한 취미라는 게 딱히 없었다.
이건 뭐 본의 아니게 그렇게 된 것도 있는데, 막상 생각해보면 왜 여태 그런 취미를 떠올리지 못 했나 싶었는데, 한편으론 그럴 만하다 싶었다.
‘여유가 없었다.’
여기서 여유란 시간을 말하는 게 아니다.
시간과는 별개로, 내면을 마주하고, 이를 달래려는 의욕이, 의지가 부족했다.
그럴 여유가.
로메리스는 따로 에드릭과 분주하게 등떠밀지 않았다.
그녀가 선택한 건 그저….
“바이올린?”
“부는 게 좋으세요?”
“…뭐든 상관없긴 하죠.”
기타는 싫다.
뭔가 기타 음이, 내가 원하는 그런 음이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바이올린 켜는 음은 좋아한다.
사실 피아노 쪽이 조금 더 알맞지만….
“가지고 다니면서 키기엔 이만한 게 없죠.”
그 말 하나에 이걸로 결정.
어쨌든 차분히 배워보게 됐다.
몸은 잘 따라주니 금세 터득할 줄 알았는데, 이상하게 키려니 손이 꼬이고, 인식이 꼬였다.
“천천히 하세요.”
아주 천천히, 음서부터 하나하나.
그러면서 쉬운 곡부터 차근차근.
확실히 몸이 탁월하니 습득도 금세 이루어졌다.
그럼에도 이건 끝이 아니다.
“곡 난이도를 계속 올리고, 다양한 연주법을 익혀가면서, 나중엔 곡도 만들어보고, 여러 가지로 해보면 좋을 거예요.”
“그렇게 하니 끝이 없어 보이네요.”
“그게 좋은 거잖아요? 에드릭 당신이 왜 허무감을 느꼈는지 아세요?”
“…….”
“할 일이, 마땅치 않기 때문이에요.”
여기서 할 일이란, 일을 말하는 게 아니다.
깊이 있게 파고 들어, 몰입하며, 자신의 전부를, 노력도 의지도 의욕이든 뭐든.
집중해서, 모든 잡념을 거덜내는 한이 있더라도, 그거 하나에 꽂혀, 그것만을 추구하는, 바로 그러한 할 일.
그러니 교양이자 취미라지만, 사실상 그보다 훨씬 더 깊이 있으며, 나 자신조차 잊어버릴 정도로, 무언가 하나에 몸을 내던질 수 있는, 바로 그것.
그 행위가 뭔지 모르기에, 이를 대안 삼아 예술이란 ‘도구’를 택하라 로메리스는 조언을 해준 거다.
“피아노가 편하면 그것도 해보고요. 에드릭도 시간적 여유가, 부족한 건 아니잖아요?”
“…음, 노력하기 나름이겠지만, 숙지하겠습니다.”
그래도 정말 종일 연주 훈련을 하고, 머리 식힐 겸 고급 음식점을 찾아가 미식을 즐기고 환담을 나누는 등.
상상 이상으로, 힐링이 됐다.
뭔가 막막하던 것도, 엉킨 실타래가 풀린 양… 아무튼 이전보단 기분이 안정된 듯한 느낌을 받았다.
“생각나면 오세요. 어차피 일일이 걸어서, 날아서 오지 않아도 되는 시대잖아요?”
“그건 그렇죠.”
수일, 심하면 수주, 개월 단위로 이곳저곳을 오가던 시절은, 서서히 침몰하리.
뭐 그렇게 세상을 바꾸는데 한몫거든 에드릭이었지만, 거기에 대해선 별다른 감상은 없었다.
이 또한 다 미래로 향하는 과정에 일환.
내가 안 해도, 어차피 누군가는 했을 거다.
조금 늦든, 빠르든.
그러니 특별한 게 아니다.
그냥 남들보다 아주 조금, 몇 걸음 더 앞선 것일 뿐.
“좋아.”
나 잘 났다! 병이 발동 안 하고 저절로 패시브 마냥 겸손과 겸허가 앞서 머릿속에 안개 끼듯 자리 잡은 게 퍽 만족스러운 에드릭이었다.
마냥 과시하고 교만 떨다 발 헛디뎌서 뻘짓하고, 낭패를 보는 일은 줄겠지.
나 혼자만 욕 처먹는 것도 귀찮은 판에, 내 주변마저 낭패를 보는 일은 없어야만 한다.
‘너무 빡빡한 것도 같지만.’
일이 벌어지고, 미친 듯이 후회하는 것보단, 평소부터 뻑뻑하게 사는 게 훨 낫지.
“잘 놀다 갑니다. 다음에 보죠.”
“예, 천천히 있다 오세요.”
그녀의 배웅의 말은, 실로 철학적인 느낌을 주었다.
천천히 있다 오라는 건, 어떤 의미로 해석해야 하려나. 중의적? 이중적? 아님 그냥 표면적으로? 단편적으로?
‘아무렴 어떤가.’
좋은 게 좋은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