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38화 〉132. 나는 노파심이 많다.(2)
-------
시간이 흘러 대관식 날짜가 코앞까지 다가왔다.
“으에….”
죽고 싶다.
아니아니 죽고 싶은 게 아니라 어딘가에 파묻히고 싶다.
조용한 곳에.
더없이 조용한 곳에.
최후로 애인들 보랍시고, 혹은 데려올 이들 보러 나갔다 오라 했던 그 시기를 제외하면, 크게 자유로운 구석이 없었다.
거기다 외교적 측면에서 이런저런 혼담이 들어오는 터라, 일부 여식을 맞이하기까지 했는데, 이건 이것대로 뭐랄까.
‘마누라가 적극 밀어주는 혼담이라니.’
상상도 못 했다.
물론 거기엔 확고한, 자신이 1순위이자 0순위라는 자신감이 기인했기 때문이겠지.
‘애초에 여색은 이제….’
뭐랄까, 귀찮고.
그냥 하는 소리가 아니라 정말 귀찮다.
그렇다고 최음을 비롯한 미약 같은 약물 활용이라던가, 세뇌, 최면 같은 게 걸릴 리도 없고.
어지간한 미색은 사실 왕녀 마누라 쪽에서 걸러지고, 팀장님 쪽에서도 걸러지며, 그 외에 기존에 그녀들로부터 이미 걸러지기 마련.
그렇다 쳐도 새로운 여성들이 매력적이지 않냐 하면 그건 아니다.
다만.
‘괜히 정치적으로 원치 않은 혼인을 한 게 아닐까 싶기도 하고.’
고르고 고른 와중에 뽑힌 여성들인 만큼, 집안도 빵빵함은 물론 비주얼도 최상급.
거기다 여태 접하기 힘든, 꽤 고풍스러우면서도 예법이 착착 몸에 밴, 완전 귀족이자 왕후장상의 정석과도 같은 여식들이다 보니, 다른 의미로 색다른 매력을 느끼고 있었다.
‘거기다 인간만 있는 것도 아니지.’
몇몇 이종족, 아종족도 포함됐는데 일종에 우호인 동시에 동맹으로서 아주 단단하게 엮고자 하는 의지들이 강했기에, 별수 없이 받아들이게 됐다.
궁녀, 시녀로 부려도 괜찮다는 모양이지만, 그래서야 다른 의미로 욕될 수가 있기에 그냥 받아들이기로 했다.
딱히 합방을 하지 않더라도 명목상 황제의 후궁이라는 타이틀은 그럭저럭 먹혀줄 테니까.
“입헌군주라지만 그렇다고 마냥 짱 박히는 건 아니라니까.”
애초에 제대로 된 제국식 입헌군주 자체가 현 대륙에, 세계엔 존재하질 않는다.
전제주의가 기본 베이스며, 공화정조차 자그마한 규모, 일부 정치 및 지역 사정에 따른 영지나 군주가 없기에 대체하듯 떠넘기는 정도로 형성되는 흐름이기에, 공화정조차 제대로 성숙된 형편이 아니었다.
투표만 한다고 공화국이며 공화정이 마냥 성숙하다 착각하면 오산이다.
투표라는 건 사실, 작정하면 얼마든지 조작이 가능한 거고.
‘실제로 독재자들은 투표라는 이름의 조작을 심심하면 해왔지.’
그 나폴레옹도 뭔 투표만 하면 99%였다지 않나.
어쨌든.
“제도를 정했다곤 하나, 새로이 도시며 성채 등, 제국에 걸맞게 이를 정비하고 다듬고 확장하는 건 결코 쉬운 문제가 아닙니다.”
“그렇다곤 해도 하지 않을 건 또 뭡니까?”
“황제 직할 상단이라니… 이 무슨 끔찍한!”
“아니 시대가 어느 때인데 직할 상단이며 직할령에 대해 거부 반응을 보인답니까? 당신은 뭔 고대적 이야기를 할 속셈입니까?”
“그 말이 아니잖습니까!”
“구역의 개발 순서는 여기 지도에 표시된 방향으로….”
“제도의 일부 구역은 결코 사적으로 매입, 획득, 확보가 불가능 하도록 만드소서!”
“뭔 당연한 소리를! 그러면 감히 제도에서 땅 장사를 하도록 방치라도 할 속셈이었나?!”
“그 전에 제도 부근에 땅 매입해둔 놈들은 전부 각오들 하라고!”
“개발 구역은 특히!”
“아 거 시끄럽네! 일 이야기 해야 되는데 왜 자꾸 땅 이야기야!”
“구역을 넓힘에 따라 도로며 상하수도 정비도 잇따라야 할 텐데 이에 대핸 청사진은 따로 있는지요?”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 내 담당 아니니까 다른 놈한테 가서 물어봐!”
“뭐?! 놈! 너 뭐하는 새끼야?!”
“뭐긴 임마! 자작이시다!”
“어딜 자작 따위가 눈을 부라려! 네놈 가문명이 뭔데?! 가훈은 뭐고?!”
하이고, 개판이 따로 없네.
그 속에서 분주히 서류 작업에 종사하는 나란 놈은, 과연 얼마 뒤 황좌에 앉을 황제가 맞긴 한 건가.
이래서야 권좌에만 앉을 뿐 사실상 노동자가 따로 없지 않나.
‘일 안 하고 싶은데.’
후궁을 정치적인 목적으로 여럿 끼게 된 명목으로 우리 왕녀 마누라는 신나서 날 그 명분으로 부려 먹어대고 있었다.
인간적으로 자기가 이래라 저래라 해놓고, 그걸 들먹여 강제 노역을시키다니. 이게 말이나 되는 소리인가.
그래도 한편으론 그녀들을 떠올리면 조금, 음… 뿌듯하기도 하고.
조금 전까지 여색은 질린 거 같다는 생각을 품었던 자신이 실로 어처구니가 없게 느껴지는 걸 보면, 여러모로 감정 변화가 심상치 않게 느껴졌다.
‘번 아웃 증후군인가.’
서류를 봐도 눈에 들어오질 않으며, 펜을 쥔 손이 부들부들 떨려대는데, 그냥 쓰면 되는데, 서명을 하면 되는데, 그게 정 귀찮으면 도장이라도 꽝꽝 찍으면 되는데!
……끔찍하게 하기 싫었다.
노동 싫어요.
노동을 할 바엔 떡을 치고 말지.
“…….”
아니, 뭔 떡 치는 걸 노동의 대안으로 생각하는 걸까. 이건 이것대로 제정신이 아니네.
그러던 중 때마침 에드릭 앞을 지나던 패왕녀 왈.
“손이 쉬고 있질 않느냐.”
“…계속합니다만?”
그럼에도 따지지 못하는 이유.
우리 왕녀 마누라도 이 전장을 방불케 하는 일터에 편한 옷차림으로 한 자리 꿰자고 주변을 휘젓고 있기 때문.
뿐만 아니라….
“내, 내가 왜 이런 짓을….”
“저, 저기… 이 부분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죠?”
우리 왕녀 마누라는 요번에 후궁으로 온 여성들을 작정하고 부려 먹어대고 있었다.
이쯤 되면 인력 착취?
적재적소도 아니면 그냥 시켜대고 있다. 모르면 배워라. 모르는 게 자랑이냐. 어리광 부릴 거면 그냥 본가로 꺼져라. 이것도 못 버티면서 어딜 귀하신 몸이 되겠다고, 염치도 없냐? 부모님은 건강하시냐? 라는 식으로 욕은 아니어도 대놓고 매도에 가까운 폭언을 쏟아대는데, 왕녀 마누라 본인은 눈치를 전혀 안 보는 반면, 그녀들은 주변을 휘젓는 공무원이며 대신, 대관들의 눈치를 살피기에, 거의 불가항력으로 변변찮은 저항도 못 하고 능력을 개발 당하며 착취 당할 준비에 여념이 없는 모습들이었다.
물론, 드물게 잘 적응하는 케이스도 있었다.
“살펴보시겠어요?”
“응? 예, 줘보세요.”
은발적안.
뿔이 인상적이지만 사실 그걸 제외하고서도 눈부신 외모를 뽐내는 여성.
아말리온 가의 루다나 또한 후궁으로 합류하게 됐다.
그녀를 보고 권한 결과, 그녀는 한순간의 거절도 없이 순순히 내 의중에 따르겠다는 의견을밝혀, 곧장 합류했다.
내심 황실에 속하니 두렵지 않을까 싶어 물었으나.
“그래도 여기선 더욱 자주 볼 수 있지 않을까요?”
라는 소리로 괜스레 에드릭의 가슴에 평지풍파를 일으켰는데.
“음, 제법이야.”
어쩐 영문인지 왕녀 마누라도 꽤 마음에 들어하는 눈치였다.
…뭐지, 설마 우리 마누라, 양성애자라 내 애인이랍시고 후궁들마저 후려칠 속셈인 건가?
라는 실없는 생각을 할 정도로, 그녀는 아름다운 여성, 예쁘고 귀여운 여성에 상당한 호의를 보이곤 했다.
물론….
‘개념이며 인성이 파탄 나 있으면 금세 갈려 나갔지만.’
바뀔 수 없는 인성은 없다.
심지어 일부 가문에선 답이 없는 대신 외모는 되니 받아만 주면 적극 지원 및 충성을 아끼지 않는다는, 괴상한 요청에 대한 거래까지 낚아챘는데, 그래서 몇몇 후궁의 경우는 임시 거처로 마련된 별관을 거닐 때마다 늘 시녀들처럼 뒤를 따르게 만들고 있었다.
지켜보다 보면 언제쯤 폭발하겠구나 싶었는데, 실제로 폭발한 뒤 그 버르장머리를 고치겠다고 비 오는 날 먼지 나도록, 그러나 몸은 상하지 않도록 수 시간을 지쳐 혼절할 때까지 패버렸다는데, 덕분에 위계 질서는 굳어진지 오래.
‘황제잖아요! 황후가 저러면 황비인 우리는 어떻게 보호해주고 그래야 하는 거잖아요!’
심지어 몰래 자신에게 다가와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울먹이며 호소해대기도 했지만.
‘서열 1위가 그녀랍니다.’
라며 산뜻하게 무시해주니, 기이하게도 얼굴이 창백하게 질리더라.
남자가 줏대도 없냐! 황제라면서 왜 황후 눈치를 보냐! 이런 황제가 세상천지에 어디 있냐!
라는 원망조차 웃으면서 넘겨주니, 다른 의미로 기겁을 했는데, 왜 그렇게까지 반응했는지는 아직도 미스터리.
“루다나, 차 한 잔 달라고 말 좀 해줘요.”
“차 마시면 화장실 들릴 수가 있어서 자제하시라는 황후 전하의 명이 있으셨는 걸요?”
“…전 그런 거 마신다고 화장실 들락거리지 않는데요.”
거기다 루다나는 순진한 것처럼 보여도 의외로 이런 감각을 뛰어난지, 곧장 왕녀 마누라에게 충성 아닌 충성을 맹세한 상황.
덕분에 그녀도 믿고 에드릭을 감시(…이걸 인정하면 너무 슬퍼지지만)를 허락해줬단다.
뭐 그러면서 겸사겸사 굿도 보고 떡도 치라는 거겠지만.
실제로 루다나의 외모며 매력 포인트가 너무 강렬해서, 후궁으로 온 여타 황비들도 절로 기가 죽을 지경.
그나마 흠을 잡을 구석이 뿔이 달렸다는 건데, 이런 걸 흠잡거나 뒷담화로 안 좋은 소문을 내고, 유언비어며 까대는 게 발각될 시, 왕녀 마누라가 작정하고 또 정신 교육이랍시고 설교와 체벌 시간에 공을 들이니, 이쯤되면 교육이란 이름으로 스트레스를 왕창 풀어대는 게 아닐까 하는, 그런 의구심이 들 지경이었다.
‘그냥 풀만 먹고 살아도 좋으니 조용하고 아담한 곳에 처박히면 안 되나.’
아님 과거 알리샤 누님 집처럼 탁 트인 곳도 좋다면 좋겠지만….
어째거나 여러모로 바쁜 나날이었다.
그만큼 충실했지만.
그런 식으로 다시 한창 일에 종사하길 한참.
정말로 다 다음날, 대관식 날이 다가오고야 말았다.
‘뭐 일만 하다 끝난 거 같은데.’
지금은 뭐 영화며 방송 찍는 것도 아닌데 리허설을 해대고 있다.
“신호를 드리며 오른발서부터 입장하셔서, 이때 걸음 간격은 여기서 여기까지. 그렇게 딱 서른일곱 걸음….”
아니, 그런 거까지 정하는 건 좀 선 넘은 거 아니냐? 누구 숨 막혀 죽게 할 일 있으신가.
‘토 나올 거 같아.’
부담스러워서라기보다는, 꽉 막혀서.
답답하다 체하면 이건 다 네놈들 탓이다.
빌어먹을 궁중 예법 같으니라고. 아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