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취직하니 떡을 침. 이세계에서 (439)화 (439/454)



〈 439화 〉132. 나는 노파심이 많다.(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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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일이 생각하고 싶지 않다.
판타지 세계에 들어선지 얼마 안 됐다면 이거 참 대단한 경험하는구나 하면 속으로 두근두근 거렸겠지만… 지금은 솔직히 민폐 그 자체였다.


‘죽고 싶다.’


토 나올 거 같아. 속이 울렁거려.  때려치우고 싶다.
침대에 드러눕다 잠기다 못해 내려앉아 흡수돼서 어딘가로 사라지고 싶다.

연기를 비롯해 애써 외워둔 대사 읊듯 분위기 잡고 어쩌고 저쩌고.
거추장스러운 옷 입고 지리멸렬하게 큼지막한 건물 내부에서, 무수히 많은 인파들이 보는 앞에서 괴상한 짓하며 왕관 넘겨 봤고.

‘이 짓을 누구 좋으라고 하냐.’

싫다. 너~무 싫다.
황제따위, 정말 하기 싫다고.

이딴 개고생 민폐 짓 관종 짓을  내가 해야 하냐고. 수지타산에 안 맞아. 남들 머릿속에 눈도장 찍는 수준이 아니라 황제란 타이틀이 각인되는 이 빌어먹을 사태를 나는 왜 불가항력 마냥 받아들여야만 하는가.

 부조리,  불합리함. 세상이 멸망할 징조가 아니고 뭐냐. 희망 고문하지 말고 빨리 나타나라. 대마왕이나 저기 뭐 운석이라거나 마신이라거나 뭐 아무튼 많잖냐. 뭐라도  나서서 판 좀 깨봐라. 고전적으로 마녀가 등장하는 것도 충분히 허용해줄 테니까….

“표정 좀 펴라.”
“…….”


무표정을 고수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었음에도, 우리 왕녀 마누라는 금세 이쪽 심정을 파악한 모양이다. 아니아니 표정을 피라 했으니 얼굴에 대놓고 드러난 건가? 머릿속이 뒤죽박죽이다.


“남들을 못해서 안달인데 뭐 그렇게 죽을 상이냐? 누가 보면 억지로 명부로 끌려온 것처럼 보이는구나.”
“차라리 그게 나을지도.”


토 나올 것 같은 그건 진정됐는데, 이젠 위가 당긴다. 심장도 왠지 엇박자를 띠는  같고. 이거  위험한 거 아니냐? 심부전 전조 아냐? 지금이라도 혼절하거나 쓰러진 다음 의무실… 아니 아무튼 어딘가로 실려가고서  잠든 사이 땡 하고  끝내주면 좀 안 되나?

정치적으로 이 대관 행사를 만천하에 드러내는 게 중요하다는 건 아는데, 그게 나하고 뭔 상관이냐고.

빌어먹을 놈들. 누구냐, 이깟 더럽고 추잡하고 귀찮기 그지없는 행사를 최초에 펼친 빡대가리는. 과시욕이 목구멍을 튀어나와 성층권을 뚫고 넘어간 새끼신가. 대체 왜 이런 화려한 짓을 해대? 그냥 무력으로 죄다 죽여서 공포로 군림하라고! 쓸데없이 명분이니 정치질을 위해 괜한 짓하지 말고!

“…….”

결국 내 불편함, 거북함은 과한 기대와 눈치, 일종에 시선들 때문인가.
아, 모르겠다.
그냥 빨리빨리 끝나라.
가급적 눈 뜨니 이미 끝나있습니다, 하는 전개가 제일 좋겠는데.

하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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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고 싶다.”

의자에 떡하니 앉아 늘어지고 있자.


“다 끝나지 않았느냐? 뭘 그렇게 호들갑이더냐?”


왕녀 마누라도 화려한 겉옷을 궁녀들에게 내맡긴 채 내 맞은편 자리에 앉아 핀잔을 준다.


“말로만 싫다는 게 아니라 정말 싫다는 게 아주 진득하게 느껴지는구나.”
“…그럼 거짓인 줄 알았쑤?”


평소처럼 능글맞은, 예의 넘치는 가식을 내보이기도 어려웠다.
내 멘탈 수치는 제로가 아니라 이미 마이너스 네자릿수는 아득히 돌파했소이다.


“다들 그깟 왕관, 권좌, 황위를 잇고자 간이고 쓸개고 양심이고 인간성이고 다 내버리고, 인생 전부를 걸어대는 판국에, 너는 여전히 특이해.”
“…쓸모가 없잖쑤. 황제 돼서 뭐할 건데. 부귀영화, 권력의 정점이란 이름으로 남들을 내멋대로 부리고 어쩌고… 근데 그거 때문에 결과적으로 남들 눈치 죽을 때까지 보며, 경쟁자며 정적들 견제하고 알력 다툼하고 물어뜯지 못하게 일일이 관리해야 하고… 아, 귀찮네. 입헌군주 아니었으면 바로 대대적으로 숙청 때릴 뻔했어.”
“…그런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해대는 거 보니 긴장이 완전히 내려앉은 모양이로구나.”

본래라면 어디서 누가 녹음할지 모른다, 라는 지독한 편집증이 패시브와 같이 동원되는 터라 가급적 그런 헛소리나 뻘소리는 일체 입에 담지 않는 주의였지만, 지금은 예외다.
정신 상태가 말이 아니다. 뭔가 단  먹고 싶고, 가슴도 만지고 싶고, 기왕 위로 받는 김에 정말 드물지만 오랄도  받고 싶어진다.

……크흠!

확실히 미쳤나 봅니다.
과도한 스트레스가 섹스 욕구를 비롯해 자극적 체험, 경험을 갈구하게 만든다는 예를 많이 들어봤고, 매번 과한 스트레스에 노출돼서 그러려니 싶었는데, 이번은 아주 이색적이었다.
뭔가 눈앞에 구멍만 있으면 냅다 박고 싶은 기분이다.


“크흠.”

클릭 몇 번으로 억 단위를 날리는 주식 야바위꾼(직업명 뭔지 몰라. 생각 안 나!)들이 과한 스트레스 탓에 일부는 마약을 빨고, 일부는 가벼운 음주를, 심하면 포르노를 보면서 주식 차트를 보며 작업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는데, 지금은 그럴 수 있겠다 싶었다.

‘황제며 왕이라는 것들이 매일  여자 여럿 끌어안고 떡치고 난봉질하는 것도 따지고 보면 그런 이유일지도?’


명분도 좋지. 자식 좀 낳겠다 어쩐다 하니.
물론 조선은 조금 예외다.

떡칠 때도 주변에서 즈어언하! 흥분이 과하십니다. 숨소리를 조절하시옵소서, 움직임이 격렬하오니 부디 자중하심이… 이딴 소리 들으며 대체 어떻게 떡을 치라고! 서려던 물건도 줄겠다!
그러니 걔들이 후궁들을 그리 좋아했다던가? 그런 규제며 통제로부터 자유로웠다고 하니. 맞아 틀려?  몰라!

대가리가 빙빙 돈다.
이쪽 세계에 온 이래 지금처럼 정신이 오락가락한 적이 있었나 모르겠다.

“진정해라.”
“…….”


왕녀 마누라 앞에서  정도로 망가진 것도 처음인 것도 같고.
음, 이러다 시작부터 매리지 블루 오는 거 아냐? 실망감이 극에 이른 나머지….

아니, 매리지 블루는 결혼 전에 있는 심리 불안 증세잖아. 이미 했는데 뭔 매리지 블루냐. 이 경우엔 그러니까… 뭐였더라?

…몰라. 때려쳐.
생각을 포기하자.
그러면 해방될  있어.

거북이며 토끼며 아무튼 짐승들이 지면에 대가리를 처박고, 눈앞을 어둠으로 물들이는 것처럼.
그로서 보이지 않으니, 모든 문제와 갈등, 시련과 절망도  어두운 장막처럼 싹  사라져주는 거다!

세상은 이토록 합리적이다!
눈만 감으면 세상의 모든 고민과 걱정이 씻은 듯이 검게 물드니까!

“…….”


알아요. 안다고요. 나도 내가 미친 거 잘 알아요.
그래도 여러분들이 황제 돼보세요. 아주 시벌… 돌아버리겠다니까요?

“더 이상 나가기 싫어. 애초에 사교회 무도회 만찬회 다 싫어. 그딴 거 개나 주라지.”
“하아.”
“아, 마누라. 가슴  만져도 돼?”
“…….”

확실하지만, 이 시점에 나는 조금… 아니, 많이 망가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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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어리광을 피우는 게 정답이었어.”

무릎 베개를 받으며 가슴을 만지작대니 이보다 더한 지복이 없다.
덩달아 고개를 돌려 그녀의 복부 부근에 코를 박으니 이 또한 행복.

아, 인생이란 이토록 단순한 행위만으로 행복감이 부풀고 팽배해 모든 걱정을 씻겨 내려주는구나.
고대적 왕후장상들이 왜 여색에 빠져 인생을 탕진했는지 조금 더 확실히 실감됐다.
안정감이 차원이 달랐다.

“…황제가 돼서 본색을 드러냈다고 하기엔 이건 좀, 복잡하구나.”
“본색이 아니라  지금 아무 생각도 하기 싫은뎁쇼.”


그럼에도 응애, 나 애기 황제. 가슴 줘. 이렇게 말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게, 그나마 이성의 끈을 조금이라도 붙들고 있다는 방증이겠지.
장하구나, 정말 자랑스럽구나 에드릭!


“…….”

스스로 떠올린 망상과 발상 덕에 자괴감과 황망함이 드는 건 무슨 이유일까.
아, 몰라. 가슴이나 만지고 배에 코나 박자. 아, 귀로 느껴지는 그녀의 단단하면서도 왠지 모르게 부드러운 허벅지가 넘나 좋은 것!

“하아. 이성이 망가지는 부분이 남들하곤 전혀 다르니, 가끔은 짐작조차 되지 않는구나.”
“응애? 뭐라고용?”
“……됐으니 그러고나 있어라.”

손으로 뒤통수를 바짝 당겨오는 터라, 더욱 행복하게 그녀의 복부에 코를 박아댈 수 있었다.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는 있는데, 그건 그것대로 좋았고.

사실 오늘 하루만 황제 즉위식, 대관식? 어쩌고 저쩌고를 하는 거라면 이렇게까지 멘탈이 깨지진 않았을 거다.
오늘을 시작으로 향후 3주간이다.

3주.
7 곱하기 3.
21일.

그리고 오늘이 1일째.
아직도 20일이나 남았다.

아니 시바 장난하세요? 뭘 그렇게 오래 해요? 뭐예요, 돌려줘요 3주.
심지어 제도로 정해진 이곳을 나사서, 제국 영토를 순방해야만 한다.

아 제발 그러지 좀 맙시다. 저 싫어요 그런 거.
여기서 사람들 앞에서 하하호호 웃는 것도 짜증나는 판에 전국, 아니 대륙을 돌며 그딴 짓을 하라고? 이런 뻐킹할….


“좋아. 대역을 내새우고  여기서 방구석 생활을 즐겨볼까 하는데….”
“쓰레기 같은 소리 말아라. 뒤지게 맞는 수가 있다.”
“……옙.”


어지간하면 이런 험한 말조차 고풍스럽게 포장하시는 분이 대놓고 저작거리에서 할 법한 막말을 토해낸다.
음, 화낸 것도 예쁘고 늠름해. 아주 좋아.

그녀가 나를 대신해 권력의 노예가 될, 훌륭한 노동 착취 인력인가. 열심히 권력자란 이름의 중노동에 시달려 내 대신 뼈 빠지게 일하다가 내 아이를 낳아주는 훌륭한, 위대한 황후가 되길 나는 열렬히 기대하고 고대하는 바다!


“불순한 생각을 하는 건 아니겠지?”
“저는 뒷방에 앉아 있을 테니 권좌에 앉아서 할 거 다 하시라고요.”
“…귀찮을 일을 떠맡긴다는 투구나.”
“아, 좋아서 하겠다고 하셨으면서요. 안 하겠다는 사람 앉혀두셨으니 책임져야죠.”
“…왜 그 말을 하는데 이토록 위화감이 느껴지는 걸까.”

이쯤 되니 왕녀 마누라도 조금 질렸나 보다.
아, 이제 황녀 마누라? 황후 마누라? 그냥 마누라?

몰라, 배째.
난 그냥 가슴이나 더 만지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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