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42화 〉133. 황제라 해서 바쁘라는 법은 없다.(3)
나는 왜 여기에 있는가.
에드릭은 고심했다.
우선 평야다.
주변에 눈에 띄는 구조물 자체가 없다.
자연이 빗은 경관들은 널려 있지만, 그것에 경이를 느낀다거나 감탄하고 탄복하는 일따위는 전혀, 있을 수 없는 일.
이미 저쪽, 파라메라 대륙에서 자연의 이질적인 경이를 신나도록 맛본 이래, 나란 놈은 자연에 대한 생소함을 접어버린지 오래였다.
동굴인 듯하여 들어가니 오색찬란한 빛깔을 내뿜는 똥을 본 적 있는가?
어느 짐승 무리의 똥이 썩어서 그렇게 됐다는데, 처음엔 뭐 이런 보물들이 널렸나 싶었다.
만져보니 바로 역한 냄새와 함께 벌레가 윙윙… 알고 봤더니 겉만 뭔가 코팅된 것처럼 번쩍일 뿐 안쪽 내용물은 아주 그냥… 어우.
그 외에도 자줏빛 물을 내뿜는 자연 온천이라던가, 허공에 덩그라니 뜬 거대란 구릉이라거나.
신수 알헤디나를 처음 목도했을 때의 그 충격과 공포도 그렇고, 지금에야 익숙해 그러려니 싶지만 바헬루스를 처음 볼 당시에도 그 주변의 화산 및 용암이 들끓는 고열 지대에 방문했을 때쯤엔, 정말로 자연의 경관 정도로 마음이 설레거나 복잡해지거나 들뜨는 일 따위는, 눈곱만치도 없어졌다.
그래도 카일론에 있던 당시, 설산? 아무튼 극지방 비슷한 환경이 조성된 고지대는 조금 감탄스럽긴 했지.
그것도 잠깐이었지만.
“…….”
그러고 보니 루넨브리스는 여전히 소식이 뜸하네.
바닷속에서 지상으로 복귀한 뒤 헤어지긴 했는데, 그때만해도 금방 다시 보게 된다는 식으로 이야기했는데, 여태 못 봤다.
벌써 한참이 지났는데.
“카일론에서 떨어져 나와서 그녀도 덩달아 원래 있던 곳에 머물게 된 건가.”
짐작일 따름이지만.
어쨌든 평야 지대에서 서서 가만히 생각에 잠기자, 아주 멋 곳으로부터 분주한 울림과 진동 등이 차츰 이쪽과 가까워져 가는 게 실시간으로 느껴졌다.
“폐하아아아!!”
“…….”
훈련 상황 보러오긴 했는데 설마 훈련이 아니라 실전일 줄이야.
그거냐? 훈련을 실전처럼이니 진짜 실전이다! 라는 그런 컨셉이냐?
날 발견하기 무섭게 목청 터져라 외치는 사내.
거리도 상당한데 여기까지 메아리치듯 음성이 들려오는 그 발성력이란.
황제 직할군이라 하여, 사실상 황실 근위대에 가깝지만 이쪽은 정식 근위대라기보다는 사설 부대에 가까웠다.
기사와 병사, 마법사를 포함한 소대.
기사와 마법사가 주를 이루고 병사들이 이를 보조하는 식.
이러한 소대 다섯을 묶어 중대로 정했는데, 숫자가 적은 만큼 병사 단계서조차 정예병 느낌이 물씬 풍기는 이들로 채워지니, 숫자가 적어도 기세들이 남달랐다.
거기다 이들에겐 여러 아이디어들로 재탄생한 각종 병기들이 보급되기에 실전을 겸한 실험 부대에 가깝기도 했다.
“오신다면 말씀을 주시지 그러셨습니까아―!”
귀가 아팠다.
“일정을 전달하면 짐의 눈치를 보아 제대로 임무에 충실치 못했을 터. 하여 불시에 위무하고자 몸소 찾아왔건만, 큰 부담이 되었나 보군?”
“다, 당치도 않사옵니다!”
“편히들 있게. 황제고 뭐고 짐은 그딴 거 사실 귀찮아서 때려치우고픈 심경인데, 황성 밖에서까지 일일이 그런 걸 따지고 싶진 않네.”
“어, 어이하여 그런 송구한 말씀을?!”
아, 귀찮다.
조용히 어딘가에 은거하면 안 될까.
“거두절미하고 경과는 어떠한가? 단순 훈련이 아닌 주변을 청소하러 오갔다고 전달 받았건만.”
“예! 문제없이 주변을 어지럽히는 도적 무리, 마물 등을 포함해 눈에 걸리는 모든 것들, 앞을 가로막는 모든 것들을 하나도 남김없이 전부 처리했나이다!”
“흠, 그런가.”
다들 행색이 썩 좋지 않았는데, 이유가 그럴싸해 보였다.
자기는 말 타고 있는 주제, 왜 병사들은 발로 뛰게 하는 걸까. 이놈이 바로 우리의 주적은 간부의 표상과도 같은 존재인가?
“젊어서 고생은 사서 한다지만, 그렇다고 몸을 험하게 쓰는 건 이롭지 못하니, 하려거든 효율적으로 하게.”
“지당하신 말씀이시옵니다!”
정말로 알아듣긴 한 거냐?
워낙 당당하게 이야기하는 터라 재차 추궁하기도 좀 그랬다.
뭐, 이건 그렇다 치고.
“전대장은 어디 있는가?”
“전대장이시라면, 이곳이 아닌 다른 지역에 계시옵니다만?”
아무래도 괜한 곳에 왔나 보다.
오기 전까진 지도상으로 이쪽 인근이라 들었는데.
“아, 수 시간 전까진 저희와 동행하며, 주변을 정리하는 광경을 지켜보다 가셨습니다.”
“만족스러워하던가?”
“조금 더 분발하라는 당부를 하고 가셨지요.”
의례적인 소리인 거 같은데, 확대 해석해서 병사들 험하게 안 굴렸으면 싶었다.
“훈련이 피가 되고 살이 된다지만, 그냥 열심히만 하라고 하면 의욕이 서질 않는 법이지.”
에드릭이 뒤쪽에 시켜 자그마한 자루를 건넸다.
“고생한 기념으로 마음껏 먹고 마시도록 하게. 그 정도 금액이면 충분하다 하니 며칠간은 그러고 회포를 풀도록.”
“성은이 망극하나이다!”
군기가 잡혀 있던 병사들조차 자진해서 외쳐대기 시작했다.
정당한 보상, 합당한 보상!
그리고 보너스는 부하들을 춤추게 만드는 최고의 보약!
의욕 안 나고 피로했던 몸조차 활기를 치솟게 하니 보약이 아니겠는가.
어쨌든 몸을 띄워 그들로부터 이탈했다.
이때도 그냥 날아가면 뭐가 아쉬우니 몸이 대기 중에 흩어지는 식으로 적당히 이펙트를 추가했다.
부가적으로, 더럽혀져 있던 몸들도 싹 다 세척해주자 멀어지는 와중에 환호성이 빗발쳐댔다.
내가 잘 알거든. 몸 험하게 굴렸는데 묵직한 옷 입고 있을 때의 그 개쩌는 기분을.
정령체가 되고서 제일 좋았던 게 그 문제로부터 영구적으로 해방될 수 있게 됐었다는 거다.
‘여행 느낌이라 딱 좋긴 한데.’
당일치기로 복귀해야 한다니.
갑자기 불우해진다.
기체화, 대기의 풍향을 일부 조절, 흐름을 조장해 원하는 방향으로 마치 배가 돛을 펼쳐 나아가는 식으로 허공을 난다.
이때 몸의 형상을 유지하느냐, 유지하지 않느냐에 따라 속도며 안정성은 판이하게 다르기에, 이럴 땐 대체로 육신을 유지하지 않는 형편이었다.
…그래야 또 누군가 눈에 띄어서 괜히 어그로 끄는 일도 없을 테고.
긍정적인 관심도 사양이다.
그냥 없는 사람인 척해주는 게 가장 좋은 흐름이다.
그렇게 한참 나아가니, 나무가 무성한 숲지대가 시야를 한가득 차지하기 시작했다.
위에서 보면 한계치가 명확했지만, 숲 초입에 들어서면 세상천지가 나무로 뒤덮인 듯한 느낌을 받았으리라.
크어어엉!
덩치가 산 만한 멧돼지와 정면에 선 갑옷 차림의 기사.
…애초에 기사 아니면 저따위로 풀플레이트를 끼고 있을 리도 없지.
그나마 갑옷이 여리게 느끼는 건, 저 장본인의 체구가 그렇게 투박하거나 건강미가 과하게 넘치지 않기 때문일 거다.
때문에 어느 정도 형태가 변이된 멧돼지 마물과 마주한 기사의 전신은, 마치 사마귀가 마차 앞에 팔을 치켜든 것과 같은, 실로 무모하기 짝이 없게 보였지만….
쿠직!
지면에 틀어박힌 발이 우직하고 파고든다.
동시에 질퍽한 바닥이 완충 역할을 단단히 해준 덕일까.
쿵!
기사가 포구에서 튀어나온 대포알처럼 마물을 향해 튀어 나갔다.
그 결과는?
굵직한 코가 그대로 짓뭉개졌다.
무려 니킥이다.
충격량이 워낙 강대한 탓일까. 멧돼지의 코부터 얼굴 주변이 함몰돼서 그대로 복구되는 일 없이, 안쪽으로 말려 들어가버렸다.
그쯤 되니 괴물이고 마수고 마물이고 할 거 없이, 동정심이 치민다.
‘그래도 고통을 느끼기 전에 두개골째로 파괴됐을 테니….’
인간의 두개골도 엄청 단단한데, 저런 괴물딱지 수준이면 그 이상일 게 자명함에도, 단숨에 부서졌을 거란 점에 에드릭은 결단코 어떤 의구심도 발휘하지 않았다.
‘나하고는 상성이 최악이지, 실질적으론 괴물 맞지.’
이쪽은 물리력 자체가 무의미한 존재니까 그렇다지만, 그게 아닌 놈들에게 저 인간은 재앙 그 자체다.
…그나마 이쪽 편으로 끌어 들여 얼마나 마음에 안정을 얻었는지.
그 왕녀 마누라조차 실체를 전해 듣곤 잔뜩 경계했던 존재였으니까.
“전대장, 여전한 실력이로군.”
멀쩡한 나무 한 쪽 가지에 발을 걸친 채 모습을 드러내자.
콰직!
의지하고 있던 나무가 단숨에 부러졌다.
어느새 내가 안착하고 있던 나무를 팔뚝으로 후려쳐, 능숙한 나무꾼이 수십, 백여번 이상 도끼질을 해도 안 패이는 그걸, 단방에 날붙이도 아닌 팔뚝으로 패버린 그 솜씨란.
“어이쿠.”
나무가 쓰러지고 있음에도 이쪽 몸엔 흔들림이 없다.
오히려 쓰러진 직후, 흩어진 육신이 다시 지면 위에 형체를 재구성하기까지.
“진정하게. 날세.”
“…폐하?”
투구가 씌워진 곳으로부터 얇은 음성이 들려왔다.
재빨리 투구를 벗어 옆구리에 끼자.
“기별도 없이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좀 전까지 흉폭하게 날뛰던 게 의심될 정도로, 가련한 인상의 소녀가 모습을 드러냈다.
창백한 피부에 색감이 옅은 갈색 머리카락.
특이한 건 연두색에 가까운 눈동자.
부조화가 상당했지만 그녀의 특성을 알기에 에드릭은 크게 개의치 않았다.
“뭐 겸사겸사 와봤네.”
수분 뒤, 수행원들이 헐레벌떡 당도했는데, 쉴 시간을 줄 겸 그녀와 좀 더 대화를 나눠보기로 했다.
“이쪽은 따로 불편한 건 없나?”
“저야 건강해서 탈이지요. 그러니 만약을 위해 지금처럼 단련을 이어가는 게 제 소임이라 생각했습니다.”
“본인만?”
“당연히 전대원 전부죠.”
“훌륭한 마음가짐일세.”
본래는 왕녀 마누라가 후궁으로 끼라 했는데, 에드릭이 보기에 그녀는 그런 쪽으론 적성이 안 맞을 듯 해서, 일단 하고 싶을 걸 최대한 보장해주고자 했다.
…나중에 참가할지는 모르겠지만.
“병사들을 위무하고 계시는 건지요?”
“그런 목적도 있고.”
“절 보러 오신 건 아니실 테니 시키실 일이 따로 있으시온지요?”
“왜 짐이 경을 보러 온 게 아니라 의심하는고?”
“그, 그야… 저 같이 끔찍한 여자를 누가….”
“어허, 이 사람아. 그러지 말라니까 그러네.”
타고난 재주 탓에 가문에서 최종 병기로 키워졌던 소녀다.
처음엔 문답무용으로 이쪽을 때려죽이려 해서 얼마나 식겁했는지.
에드릭이 아닌 황실 핏줄로 활동하던 때, 거짓 하나 안 보태고 인간이었다면 실력이고 나발이고 진심 죽을 뻔했다.
그러나~ 나는 정령체지요.
심지어 물이라네~!
주먹질을 백날 해봤자, 안 죽죠?
어쨌든 그 특성 덕에, 이길 수 있었고 이를 바탕으로 붙들어 이리저리 설득한 끝에, 역으로 가문을 쳐부수게 유도했다.
…그리고 자연스레 에드릭 자신에게 의지할 줄 알았건만, 그녀는 충심으로 자신을 보필한다며 검이자 방패가 된다는 기특한 소리를 해줬지만….
‘그렇게까지 안 해도 되는데 말이지.’
다른 의미로 왕녀 마누라의 눈총을 샀다. 설득을 하랬더니 누가 후리랬냐? 하며.
아, 그게 그건가 하며 결국 마누라 본인도 납득했지만.
…그나저나 이제 왕녀 마누라가 아니라 황후잖아? 익숙해진 건 역시 고치기가 쉽지 않네.
“헨델.”
“예, 말씀하시지요.”
“언제나 고생이 많네.”
“모든 건 주군을 위해.”
…왜일까.
묘하게 힐링되네.
뭐라 형언하기는 어렵지만.
……생각해보니 내 창이자 방패를 자처한 존재가 이곳 세계에 온 이래 그녀가 최초였네?
어? 나 혹시 인생 헛 살고 있었나?
갑작스런 의문에 기분이 야리꾸리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