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49화 〉136. 괜찮아! 그 정도로 안 죽어!
유격의 꽃은 무엇인가.
당연히 PT체조다.
사실 다른 거 다 빼놔도 이거 하나로 한정된 공간에서도 충분히 유격의 참맛을 느껴볼 수 있을 거다.
그럼 이걸 왜 하느냐?
멀쩡히 마음 편히 있을 수 있다는 게 얼마나 행복한지를 알아야, 괜한 뻘짓들을 안 할 테니.
나처럼.
에드릭은 뿌듯한 표정으로 한창 황궁 내에 마련된 황제 전용 훈련장, 연병장을 구르는 소녀며 여성들을 보며 이 망할 제국의 앞날이 밝을 거란 자뻑에 빠져 들었다.
그리고….
“끄으으!”
“모, 못 하겠어요!”
“뭐라? 못 하겠다? 못하는 건 없습니다! 뒤쪽으로 열외!”
열외돼서 따로 불리면 그때부턴 더 힘들다.
“끄아아앗!”
“사, 살려….”
“아직도 상황 파악이 덜 되셨습니까, 전하! 이런 식으로 하면 전원 처음부터 다시! 다시 이 모든 과정을 똑같이 경험하시게 될 것입니다! 쓰러지셔도 소용 없습니다! 기절하거나 혼절해도 다시 깨울 겁니다! 몸이 망가지는 걸 두려워 마십시오! 궁중 어의와 고위 사제들이 대기하고 있나이다! 안심하시고 본 시련과 마주하십시오!”
“흐윽… 흑!”
내가 전생에 무슨 죄를 져서 이런 말도 안 되는….
“울지 않습니다! 울음 소리 한 번 당 동작 100회 추가!”
신기할 정도로 울음 소리들이 뚝 꺼졌다.
어설프게나마 끅끅 거리는 소리는 들렸지만, 그 정도는 봐주기로 했는지 조교들도 약간의 융통성을….
“말이 말 같지 않게 들렸습니까! 100회 추가!”
“아아악!”
……아무래도 내 예상보다 훨씬 앞뒤 분간 없는 FM이었나 보다.
박수!
참고로 이거, 아직 30분은커녕 15분도 채 안 된 상황이다.
그나마 평소 몸을 단련한 여성들은 어찌 버티고는 있는 모양이지만….
“마나 운용하지 않습니다!”
“순수 신체 능력에 의지하십시오! 요령을 피우면 횟수로 인정되지 않습니다!”
“마지막 구령은 넣지 않습니다! 100회 실시!”
“크윽!”
“크윽 누굽니까?! 구령 안 붙입니까?! 핫 둘! 다시 처음부터! 실시!”
여전히 통일감 제로인 구령들이 이어지지만, 몇 번 반복 시키니 어찌 형태는 갖춰진다.
그래봤자 6번인 발 벌려 뛰기라 100회든 200회든 크게 어렵지도 않을 텐데 말이지.
일부 동작은 처음이니 생략하고, 순서조차 조절해서 해주는 편이다.
4번을 저런 식으로 시켰다면 아주 입에서 쉰내가 막 나왔겠네.
그나저나 8번 가면 어쩌려고 다들 저걸로 죽을 상들을 짓는 걸까.
개인적으로 9번 11번은 무릎에 썩 좋지 않으니 이건 생략.
대신 다른 동작을 추가로 도입해뒀다.
그렇게 체력 좀 붙인 뒤 14번 풀 코스 겪어보면 아주 재미난 반응들이 나올지도.
이거 전부 우리 제국군에서 기초 훈련으로 써먹는 것들이기도 했다.
‘훈련하는 훈련병이며 병사들에게 연약한 황비들도 했는데 너희들이 징징대면 그게 사내 새끼냐? 라는 명분 주기도 좋겠고.’
동기 부여로도 나쁘지 않을 거다.
시대가 시대다 보니 그런 대단한 분들도 했다? + 아니, 그런 분들도 했는데 우리가 못하면 무슨 면목이 서냐?! 라는, 뭐 이런저런 요소들을 추가적으로 일깨워주는 것도 퍽 나쁘진 않을 테니까.
귀한 존재에 대한 신비감은 대폭 줄고, 존귀한 존재에 대한 경외심은 나락으로 처박힐 수도 물론 있지만, 당연히 거기서 끝낼 속셈은 아니었다.
‘모름지기 윗사람은 모범을 보여야지.’
존경은 타고 나서 주어지는 게 아니라, 만들어 가야 후환이 두렵지 않은 법.
거기다 근거 없는 존귀함, 고귀함에 취해 편협적이고 뒤틀린 선민 사상에 빠져들 여지가 있다면 그건 목을 쳐버려야지.
어딜 감히 버러지들이 고귀한 흉내를 내려고.
적어도 황궁 내에 그딴 새끼가 존재하는 꼬락서니를 용납할 생각은 눈곱만치도 없다.
하물며 어떤 식으로든 내 부인 소리 듣는 여자가 그런 정신 나간 사고 방식으로 주변에 괜한 염병을 떨 걸 생각하면, 자다가도 눈이 번쩍 떠질 것만 같았다.
‘절대, 그 꼴은 못 보지.’
썩어 문드러진 뇌며 몸뚱아리를 가지고 여기 왔다곤 하나, 내 곁에 온 시점에 그거 개조 안 당할 거면 목이 잘려 나가든, 비참하게 정신이 망가져 나가든,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지.
그게 아닌 이상, 너희들은 못 빠져 나간다.
내 눈에 띄었다는 건 그런 거니까.
사이코 악녀가 세상에 나가 민폐 끼치는 꼬락서니라니, 오우 소름 돋네.
거기다 잠깐이라도 나하고 연관이 있었다 치면 그거 그대로 내 치부로 올 텐데.
하물며 그녀가 사이코고 정신 나가고 선 넘어서 내쫓겨서 악녀며 몹쓸 년 취급 받는 것도, 솔직히 가슴 아픈 이야기가 아닌가.
나는 버리지 않는다.
죽일 지언정, 내쫓지는 않을 거다.
…라는 내 의도가 잘 전달 됐으면 싶지만, 어떠려나.
뭐, 정 말귀를 못 알아먹으면 직접적으로 말해주면 되겠지.
그거 공포스러우면 이승을 하직하고 탈출을 하는 선택지도 있을 테니까.
정치적 입지? 외척 가문 눈치? 꺼져라 새끼야.
정 수틀리면 내가 가서 다 초토화 시키거나 갈아 엎으면 그만이지.
이래서 힘이 있어야 한다.
권력이고 나발이고 실권이고 이딴 거 없어도, 하고픈 걸 다 할 수 있으니까!
“구령 소리가 작습니다! 다시 100회!”
“아아아아악―!”
“흐음! 멋진 광경이야!”
인간 개조의 용광로에 발을 들인 걸 환영한다! 귀한 집 처자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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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1주일이 흘렀다.
얌전히 눈 감은 채 숙면에 빠져 있던 황비 중 하나인 데자리아는, 갑작스러운 소음에 눈이 번뜩 떠졌다.
위이이이이이잉―!
후욱! 후욱!
침대 옆에 자리한 통신 수정구에 불이 번쩍 들어오더니, 갑작스러운 음성이 들려오기 시작한 것도 그쯤.
[아아, 당직 사령이 전파한다. 제1부, 현 시간부로 화스트 페이스. 화스트 페이스 발령. 2부, 금일 4시 30분을 기….]
데자리아는 몸을 뒤집으며 신음했다.
속으로는 비명을 토하며.
대체 그게 뭔데?!?!
화스트 뭐?
그보다 황제 폐하? 당신은 잠도 없으십니까?! 아직 밖도 어두운데 도대체?!
문이 벌컥 열림과 동시에 복장을 정비한 황실 근위 장교가 들어선 것도 그쯤.
장교 뒤를 따르는 시종이며 시녀들의 표정들이 창백함을 넘어 퍼렇게 질려갔지만, 얼굴에 철판을 박아 넣은 듯한 근위 장교는 아무렇지 않게 신분 격차가 까마득한 황비의 무방비한 모습을 보면서도 냉정하게 할 말을 정석대로 읊어댔다.
“전하, 현 시간 부로 발령권자, 황제 폐하의 명에 따라 이후 상황 전개에 관해 설명 드리겠습니다. 1번만 설명 드릴 테니 정확히 새겨 들어 되묻는 우를 범하지 않으시기 바랍니다.”
뭐?!
말 그대로 첫 경험.
다른 의미로, 정말 황당하기 그지없는 첫 경험의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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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끄윽!”
내가!
“허억!”
이따위 짓을! 일을!
“빨리빨리 움직여! 적이 코앞에 와서도 굼뱅이처럼 늦장 부릴 참인가?!”
이유는 모르겠지만 갑자기 병장기를 보급 마차에 실어대고 있었다.
아니, 이게 대체 무슨 일이란 말인가.
거기다 지금 명령조로 그녀들을 몰아붙이는 건 무려….
황후 폐하.
본래라면 황후 전하라 불러야 마땅하나 황제 본인께서 나와 그녀를 부름에 한 치의 우위며 비교를 금한다 하여 황후조차 폐하로 칭하도록 정해뒀기에, 사실상 전하라 불리는 황비들로선 그녀와의 격차는 상징적으로든, 공식적으로든 확고하게 굳어진지 오래였다.
거기다 의도적으로라도 황제는 황후하고만 잠자리를 가진다 하였기에 총애 받는 면에서도 더더욱!
무엇보다 황후가 실질적인 통치 및 제국 경영의 실권자인 게 가장 무서운 점.
즉, 그녀 눈에 엇나간 시점에 과거 패왕녀로 불렸던 그 흉악한 악명에 걸맞은 참사가 자신들에게 도래할 수 있다는 것에, 많은 황비들은 공포와 전율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일개 병사들만도 못한 모습들이라니! 그러고도 너희들이 어엿한 황비들이라 할 수 있겠느냐!”
‘황비가 무슨 만능권자인 줄 아십니까?!’
당연히 몸 쓰는 일은 병사며 기사며 일꾼들이 더 잘하지, 자신들이 그보다 뛰어날 리가 없지 않나!
이건 불합리를 넘어 끔찍한 부조리다!
그녀들은 당장 자신들의 가문에 이에 대해 폭로를 하든 어떤 식으로든 고자질을 하지 않으면, 도저히 견딜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여태껏 어찌어찌 참았지만, 이렇게 지쳐서 혼절하듯 곪아 떨어진 상태에서조차 급작스레 깨워 이런 고문 아닌 고문을 행하다니. 도대체 자신들이 황비로 온 건지 노예로 온 건지 분간이 가질 않았다.
“불만들이 있으면 말들 해보거라.”
스르릉!
저기, 황후 폐하? 어째서 검을….
그보다 주변에 근위병들은 왜 갑자기 창들을 겨누고 있는 걸까?
“10분 주겠다. 마차 안에 이것들 다 쑤셔 넣지 않으면 너흰 여기서 전부, 죽는다.”
―?!??!?!?!?!?!?!?!?!?
흉악한 웃음을 짓는 황후.
뭐라 따지거나 불만을 토하거나, 한계에 달해 이판사판으로 달려들어 따지려던 이들 모두가, 일순 하던 일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집중 뿐인가. 발악하듯 물건을 날라대기 시작했다.
‘좀 빨리빨리 움직여!’
‘니들만 힘드냐?! 나도 죽겠는데!’
‘뭐가 이렇게 무거워!’
‘아 좀 비켜!’
그리고 그 모습을, 황후와 또 먼 곳에서 안주와 술잔을 기울이며 지켜보던 황제의 표정은 실로 동일했다.
뿌듯함, 흥겨움 등.
역시 애들 굴리는 게 제일 재미있다는 건, 동서고금, 시대고하를 막론하고 틀리지 않는 유희거리가 아닐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