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52화 〉137. 마침내!
살다보면 하루라 열흘 같고 영원한 것처럼 느껴지는 시기가 있다.
대표적인 게 전역을 앞둔 말년 병장이 그런데.
“…….”
이때 괜히 건드리면 지루함을 해소할 콘텐츠 대상이 될 여지가 있기에 다들 봐도 못 본 척, 들어도 모르는 척하는 게 보통이다.
이때는 얌전한 사람조차 때때로 흉포함을 내비치는데, 자연스러운 현상이니 방치하는 게 최선, 엉겨오면 거저 넘기는 게 최상이다.
근데 그게 안 되면?
…재수 옴 붙었구나 해야지.
“후우.”
그런 의미에서 나는 관대하고, 자비롭다.
지루하다고 누굴 괴롭히는 취미가 따로 없고, 남 싫은 일 안 한답시고 얌전히, 잠자코 있으니까!
그래도 사람인 이상 위안이 필요한 법이다.
“저, 폐하?”
실내 소파 위에 앉은 채로, 내 무릎 위에 몸을 돌려서 앞게 한 루다나를 앞에 두곤 오른손으론 그녀의 허벅지를, 왼팔로 허리와 함께 뱀처럼 감아올린 왼손으론 그녀의 양 가슴 부근을 원없이 만지작대며, 아무쪼록 인생의 지루함을 감내해본다.
굳이 박지 않더라도 세상은 이토록 풍요로워질 수가 있다.
매끄럽고 부드러운 허벅지는 만지작대면 마음의 안정감을 가져다준다.
혹자들은 애완 동물을 쓰다듬는 걸 훌륭한 멘탈 치유법이자 힐링 요법으로 정의 내리지만, 여자는 잘 생긴 남자가 자신에게 엉기는 게 아마 최고의 힐링일 테고, 남자로 말할 거 같으면… 비슷은 한데 소유 대상을 마음껏 다루는 것에 가장 큰 만족감과 위안, 즐거움을 느낄 터인데… 이렇게 말하면 조금 억지성이 느껴지니, 이 경우 여성이 자신에게 아양을 부리고 엉기는 거 이상으로, 자신의 손길에 저항 않고 이를 맞이해주며 즐거워해주는… 음, 자꾸 말이 꼬인다. 허벅지 윗면의 부드러움이 뇌의 사고력 저하를 불러오는 건가 싶었다.
아닌가. 허벅지보단 가슴 쪽이 문제?
그도 아니면 허벅지를 만지작대다 무심코 비집고픈 충동이 살짝 들고야마는, 사타구니며 그 주변과, 기껏 만지면 부드러우면서도 말랑대게 와닿는 치골이며 그 주변 둔덕이라던가….
……이쯤 되면 이거 애무잖아? 여기까지 갈 생각은 없었는데?
다시금 마음을 가다듬고, 허벅지 쪽으로 동선을 옮긴다.
“으음!”
아무래도 만지작대니 살짝 애가 타는 모양인데, 안 할 거다. 나는 만지작대며 힐링을 누리고플 뿐이니.
침대가 아니고 약간 불편해도 소파에 앉아 이러는데도 다 이유가 있는 거다.
침대였다면 무심코 선을 훅 넘을 수 있으니.
내 이성이 아무리 굳건하다 하더라도, 남자가 눈깔이 돌아가면 또 모르는 거다.
내가 나 자신을 믿지 않듯, 어설픈 자비심과 허튼 수작으로 그럴 여지 자체를 만들지 않는 나야말로, 자기 관리의 대가!
…라는 헛된 생각을 품는 거 자체로, 이미 맛이 간 듯도 느껴지지만, 어쨌든 손에서 느껴지는 위안거리들이 아무쪼록, 부정적으로 치밀려는 사고며 감정을 차분히 정리해주고 있었다.
허벅지는 위대하다.
가슴도 위대하다.
다리와 무릎을 한가득 채워오는 그녀의 체구도 당연 훌륭하고!
손으로만 즐기는 게 아니다. 안긴 이상 전신이 즐기는 것!
그래도 무릎 위에 앉아 있기에 또 키스를 하긴 어렵다. 그래서 또 좋고.
나야 얼굴을 그녀의 가슴 혹은 옆허리며 겨드랑이 혹은 등허리, 날갯죽지에 파묻을 수 있으니 좋고, 그 외에도 어깨라던가 쇄골 부근이라던가 목덜미에도 충분히….
체격 차이가 있다 보니 마음만 먹으면 키스도 물론 가능은 한데, 그건 자제해두자.
그녀의 은발에 가까운 회색 머리칼에서도 좋은 향기가 풍겨난다. 몸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이러고 한 시간은 아무렇지 않게 날려버릴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명상이며 참선도 이러고 하면 집중 쩔 거 같은데, 이게 잡념이 되는 연유는 뭔지.
아, 물론 이러고 있으면 성욕 쪽으로 저울추가 기우는 건 맞긴 한데, 되레 그걸 버텨내는 게 참된 수행이 아닐지.
욕구를 막연히 절제하고 참고 인내하는 것보다, 욕망하는 것 자체는 의지와 의도에 걸맞게 배제하고 억제할 수 있는 게 더 탁월한 걸 텐데.
뭐 대부분은 그게 힘드니까, 못 참으면 어디 조용한 곳에 가서라도 자기 위로를 하는 걸 테지만.
…이건 좋고 나쁨의 문제는 아니다. 어차피 다 본능에서 비롯된 거고, 그게 있으니까 인간이란 종족이 번성하지 않았겠나.
하나 같이 모두 성욕이 배제된 존재들만 있어 봐라. 종을 어떻게 늘리겠는가.
거기다 그걸 적극 늘리는 녀석들이 개체수를 불리면 그 자체로 경쟁에서 제외되는 건데, 이런 것들은 실제로 역사 상에서도 도태되어 멸종하거나 멸종 위기종으로 분류되지 않았는가.
즉, 이것도 그럴 듯한 의미가 있다는 거다. 지나치면 개인을 망치는 지름길이 될 테지만.
“그보다 슬슬 준비하셔야 하지 않으신지요?”
“…그건 그렇긴 한데.”
장군께옵서 도착하셨다! 어서 나가봄이 옳지 않느냐!
……싶겠지만, 앞서 그녀는 황후 마누라와 용건이 있고, 그게 또 공식적인 일이라 여기서 뒤에 눌러앉아 있어야 하는 내가 슬쩍 들이대면 이건 다른 의미로 정치 문제로 확대될 여지가 다분했다.
그러니 여기선 잠자코 그녀가 오길 기다려야지.
아마 마누라와 함께 오지 않을까 싶었다.
또 그녀도 온 김에 채비로 정리하고 몸가짐도 챙기고 이러다 보면, 사실상 해가 떨어진 이후에나 볼 수 있겠지.
…괜히 시간이 안 간다는 생각이 드는 게 아니다.
어찌됐든 에드릭은 그런 식으로 본의 아니게 지루함을 달래고자 했다.
그런 의미에서 여체는 매번 쑤시고 박는 행위를 하지 않더라도, 충분히 깊은 진미라 할 수 있을 터.
거기에 술이라던가 정신에 영향을 주는 약물이 필요없는 건 더더욱.
쾌락에 미쳐 그쪽까지 손대면 훅 가는 거지.
그래도 루다나에게서 떨어지는 건 내심 아쉬움이 들었지만, 더 나은 내일… 아니, 이후 이벤트를 위한 잠시간의 아쉬움이란 명목으로 간신히 참아냈다.
내 경우, 몸가짐을 정비한답시고 괜한 짓을 안 해도 되니 그건 좋다.
‘목욕을 순수하게 즐기지 못한다는 건 조금 슬프지만.’
뜨거운 물에 몸 담그는 그것과, 그냥 빠르게 능력을 다뤄 신체를 말끔히 정리하는 것. 어느 쪽이 메리트가 있는지는 불 보듯 뻔한 거니.
조급하게 황후니 팀장님 둘 모두에게 이런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도 퍽 좋아할 법하지만, 때때로 목욕은 그 자체로 힐링 행위기에, 시간이 부족한 게 아니라면 가급적 황후든 팀장님이든 이걸 훼방 놓는 걸 그렇게 반기지 않는 형편이었다.
그런 것까지 전부 고려해서, 나는 홀로 독수공방하는 아련한 기분은 이따금 만끽하며, 그럭저럭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다지고 있었다.
신바람이 나는 듯하면서도 우울해지고, 그러다가도 슬금슬금 기어오르듯 기대감이 물씬 터져 나오니, 아주 변덕이 들끓어대는 이 심경, 어찌 가눠야 할까. 그만큼 기대하고 있음인가, 아님 그냥 간만에 있을 이후의 즐거움 덕에 내심 춤이라도 추고 플 정도로 감정이 달아올라 있는 걸까.
‘헷갈리네.’
좋은 건 맞는데, 막상 이렇게 들뜰 필요는 있을까 싶었다.
냉정히 따지고 보면, 이건 그녀들이 왔을 때, 마치 귀여운 강아지가 꼬리를 미친 듯이 흔들며 반기는 그 예처럼, 그녀들로 하여금 재회의 기쁨을 만끽하게 해주고자 하는 무의식적인 의도가 다분 포함된 게 아닌가, 냉정히 이런 점을 유추…해보려다 말았다.
‘알 게 뭐냐.’
이럴 땐 머리를 복잡하게 할 필요가 없었다.
그냥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만끽하면 되는 문제니.
루다나를 돌려보낸 뒤, 간만에 뜻 모를 고요함을 벗 삼아 차분히 침묵의 현장 속에 몸을 내맡긴다.
폭풍 속의 고요인가, 고요 속의 폭풍인가.
음, 재정신이 아닌 것만큼은 확실하군.
그러나 그 시간도 길지 않았다.
외부에서 누가 왔음을 고하기도 전, 소파에서 몸을 벌떡 일으켜 세웠다.
이윽고 문이 열리며….
“오래 기다렸느니라.”
황후 마누라가 앞서 들어서더니.
“예상보다 훨씬 출장이 길어졌네.”
눈치껏 대기하고 있던 시종이며 시녀들이 알아서 방을 나서기 무섭게, 팀장님이 평소 고고해 보이는 표정을 살짝 풀어낸 채, 친숙한 미소로 빙그레 이쪽을 향해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녀도 옷을 갈아입은 탓에 현재는 제복 겸 예복에 가까운 복장이었는데, 그게 또 무척이나 잘 어울렸다.
하의는 백색에 상의는 적색 바탕에 금색으로 테두리가 치장된 걸로 그 안에 와인빛에 가까운 상의가 다시금 자리하고 있었다.
황후가 흑적색 드레스로 몸을 감싸고 있는 것과 비교하면, 조금 더 밝은 느낌을 준달까.
“고생 많으셨습니다. 후후….”
“그댈 기다린답시고 이 몸에게 한 차례도 손을 대지 않았으니, 그 점만큼은 썩 기뻐해도 좋을 것이다.”
“그런 거 신경 안 써도 된다니까 그러네.”
“뭐라 말거라. 반쯤은 착각 때문에 그런 거지만, 그래도 자기 신념을 지킨답시고 고집을 부리는 게 그의 매력 아니겠느냐.”
“음, 그건 그렇네요.”
황후를 대하는 태도도 비교적 가벼워진 상황.
사실 둘은 친구라면 친구며, 절친이되, 군신의 관계인 동시에, 다른 의미로 자매라 하여도 이상할 게 없는, 실로 복잡한 관계였기에 그만큼 저러한 친근감 넘치게 서로를 대하는 모습이, 나로서는 무척이나 인상적일 수밖에 없었다.
“회포도 풀 겸, 이야기거리도 많을 터. 우선 배를 채우고, 환담을 나누는 것에서부터 시작해보자구나.”
“저도 이때를 위해 하루종일 입에 무엇 하나 대지 않았죠. 아주 기대하고 있습니다.”
“…….”
음, 이게 아닌데.
날 보러 온 게 슬슬 해도 좋다, 아니 하자! 이런 의도로 온 게 아니었단 말인가?
“아쉬워하는 얼굴이군.”
에드릭의 속내를 훤히 읽었다는 듯 짓궂게 웃는 황후.
“초조해할 거 없어. 그렇다고 안 도망치니까.”
“여태 한창 도망치셨잖습니까?”
“다 사정이란 게 있는 법이니까.”
제국의 살아남은 황녀인 척했었으니까.
지금이야 다시 외모가 바뀌었지만.
황녀인 채로 우리가 혹여라도 맺어졌다간, 이건 다른 의미로 큰 사건이 될 텐데, 나나 팀장님이 그런 우를 범할 이유가 없지.
하물며 내가 아니어도, 팀장님의 경우 황녀의 탈을 쓴 상태로 누구하고 맺어지는 낌새라도 보였다간? 다른 의미로 난리가 날 수도 있는 문제였다.
원래 귀하신 분들의 몸은 그만큼 귀하게 대접하는 경향들이 있는데, 그 신성성? 아무튼 그게 부서지는 시점에, 욕 퍼먹기 일쑤지.
…참으로 같잖은 것들이지만.
오히려 잘난 부류일수록 남녀 할 거 없이 즐길 거 다 즐긴 건, 역사가 증명해왔거늘.
에드릭은 불평불만을 속에 파묻었다.
지금 그런 걸 끄집어 내는 거야말로, 어리석고 몰상식한 짓이지.
아무튼 귀환한 그녀를 반갑게 맞이하고, 즐기고….
그래, 일단 그쪽만 생각하자.
딴청 피우지 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