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화 〉제1부 : # 2화. 헬륨가스 같은 그녀들의 우정 (3)
7.
아마도......
그때 내가 미쳤던 거 같다.........
수진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뻔히 그녀들이 어떻게 반응할지 알면서 어쩌자고 얘기를 꺼냈을까........
아주 후회막급이었다.
" 뭐? 그래서? 영화까지 본거야? "
" 어. "
" 그 남자 어떠디? 잘생겼어? "
" 아니. "
" 그럼? 못생겼어? 별로야? "
" 아니. "
" 미친년아 자세히 좀 설명해 봐. 이 언니들이 답답하다 야. "
영연이 수진에게 화를 내며 테이블을 쾅 쳤다.
덕분에 아슬아슬하게 채워 놓은 소주잔이 넘실넘실 하다가 조금 흘러내렸다.
그 순간 설아의 표정이 사정없이 구겨졌다.
목숨 다음으로 아끼는 소주가 몸이 아닌 테이블을 적시는 것은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으니까 당연한 반응이었다.
수진은 슬쩍 시선을 아래로 깔고 말했다.
" 그냥 평범해. 평범한 키에 평범한 체격, 평범한 외모, 성격. 그러고 보니 안평범한대가 없네. 그냥 평범한 사람. "
" 직장인? "
" 응, 명함도 주더라. "
" 호... 명함이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박나희 선생님? "
영영은 리포터 흉내를 내며 수저를 나희의 입술 앞에 가져갔다.
" 글쎄, 그 남자가 너한테 관심 있는 것 같긴 한데.... 잤어? "
나희가 휴대폰을 한참 만지다가 영연이 부르자 그제야 수진을 바라보고 대답했다.
수진은 기가 막힌 듯 소리쳤다.
" 뭐어? 그게 먼 소리야!? 이제 겨우 두 번 만났어! "
나희는 담담히 말했다.
" 두 번이면 두 번 잤겠네? 어때? 잘해? "
수진은 고함을 질렀다.
" 야!!! "
"나희야, 얜 천연기념물이야. 아직 예방접종도 안 맞았는데. 그런 고수위 대화가 될 리가 있냐?"
영연은 손가락을 까닥거리며 말했다.
마치 수진이 어린아이라도 되는 것처럼......
나희가 그제서야 고개를 끄덕이며 애들은 가라는 듯 훠이 훠이 손짓으로 수진을 쫓아내는 시늉을 했다.
수진은 약이 올라 말했다.
" 아씨 진짜? 자꾸 놀릴래? "
" 그 남자 명함 좀 줘봐. "
가만히 옆에서 멍 하니 메뉴판을 바라보던 설아가 수진에게 손짓했다.
아무 말 없이 조용하던 설아가 입을 열자 순간 시끄럽던 세 여자가 조용해졌다.
무언가 품어져 나오는 압박 속에서 수진도 꼼짝없이 그의 명함을 설아에게 내어줬다.
" 폰도 줘봐. "
수진의 폰까지 받아낸 설아가 번호를 꾹꾹 누르더니 전화를 걸었다.
"아 네, 저 수진이 친군데요. 수진이가 취해서 그런데..... 이리로 좀 와주세요. 네, 네. 여기 건대역이요. 네, 2번 출구로 나오면 연락 주세요. 네."
다들 그녀의 의외의 행동에 놀라서 벙찐 얼굴로 설아를 쳐다봤다.
하지만 설명해 줄 필요를 느끼지 못한 듯 설아가 직원을 불렀다.
수진도 그렇고 다른 두 명도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 뭐.....뭐하는 거야? "
" 설아야 너...? "
설아는 들리지 않는 듯 직원에게 주문하고 있었다.
" 육회 한 접시 가져다주세요. 그리고 술은 백세주로 두 병요. "
" 뭐? 육회? 너 미쳤어? "
수진은 화를 내며 메뉴판에 적힌 육회의 가격을 확인했다.
" 아, 저 죄송한데, 육회는 취... "
읍읍.
갑자기 영연이 수진의 입을 틀어막았다.
나희의 입술에도 미소가 감돌고 있었다.
" 하하. 아녜요 육회랑 술 가져다주세요. 얘가 좀 취해서요. "
그제야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판단이 된 수진이 자신의 입을 막고 있던 영연의 손등을 세차게 내리쳤다.
얼마나 세게 후려쳤는지 짝 하는 소리가 영롱하게 울려퍼졌다.
"아아. 아파, 이년아."
수진은 날카롭게 말했다.
" 그니깐 왜 입을 막아? 설아! 휴대폰 내놔. "
" 오키. "
짧은 설아의 대답.
이미 볼 일도 끝난 상황이니 쿨하게 수진의 폰 또한 돌려 주었다.
물론 수진 또한 설아가 전화를 가져간 이유를 알아챘다.
자신이 만났던 남자에 대한 호기심 충족과 동시에 불쌍한 한 남자를 홀랑 벗겨먹을 작정이었다.
" 안 돼. "
하지만 이 세 친구들은 수진의 말 따위는 이미 아웃오브안중이었다.
수진만 애가 타서 다시 소리쳤다.
" 아 진짜. 나 그 사람 잘 모른단 말이야. 그런데 잘도 술값 내주겠다! "
" 그럼 더 잘 됐네. 어차피 너하곤 상관없잖아? 근데 왜 화를 내? 만약 그 사람이 안내면 내가 다른 사람 부를게. 됐지? "
나희의 정리에 수진도 결국 아무 말 못하고 채워져 있는 소주를 들이켰다.
언제 가져다 줬는지 영연이 잽싸게 비워진 수진의 잔을 백세주로 채웠다.
이미 그 남자에게 전화도 걸어버인 뒤였다.
포기한 듯 수진은 잘 차려져 나온 육회를 안주삼아 술을 들이켰다.
배가 곁들여진 육회는 달달한 게 입안에서 녹았다.
" 그래서 넌 그 사람 싫어? "
나희가 조용히 수진에게 물었다.
" 아니, 좋고 싫고 할 만큼 만나질 않았다니깐? "
" 야, 안 해본 여자는 있어도 한번만 해본 여자는 없데. 그니깐 잘 됐네. 수진이 너도 그냥 이참에 그 남자랑 확! 해버려! "
다시 영연이 나희와의 대화에 끼어들며 수진의 잔에 자신의 잔을 부딪쳤다.
" 미쳤어? 난 아무하고나 안 잘 거야. 내 첫 경험은 내가 정말 사랑하고, 날 사랑하는 남자랑 할 거야. 환상적인 첫 경험을..."
수진은 다시 잔을 비웠다.
하아......
그나저나 이 육회.....
정말 맛있다.
차가운 게 입에서 녹아내리는 게 술이 술술 넘어가네.
술과 안주를 음미하는 사이 친구의 말이 훅 치고 들어왔다.
"풉, 환상적인 첫 경험? 그래... 환상적이긴 하겠지. 근데 너 그거 아냐? 첫 경험부터 널 뿅 가게 할 남자는 사실 엄청난 오입쟁이라고..... 정말 남자가 섹스광에다가 여자가 약을 하지 않는 이상 처녀를 뿅 가게 못할 걸? 넌 아마 아파서 죽으려고 할 거다."
놀리는 듯이 웃으며 말하는 나희의 말에 영연이 킥킥 거리며 수진의 잔에 술을 채웠다.
수진은얼굴이 붉어지며 반론에 나섰다.
"아니야! 할리퀸 로맨스 보면..."
그러나 더 이상 수진의 말을 듣지도 않고 바로 말을 자르는 나희.
"눈만 마주쳐도 여자들이 다리를 벌리고, 손가락 하나로 보내버린다지? 하하 웃겨.... 설아야 너 그런 남자랑 자봤냐?"
나희의 질문에 설아가 도리도리 고갯짓을 하며 육회를 입에 넣었다.
" 게다가, 엄청난 정력 왕이라 하루에 일곱 번도 한다지? 키스만으로도 여주가 약 빨은 것처럼 흐물흐물 녹아내리고? 영연아 너 그런 남자랑 자봤냐? "
영연은 푸하 웃으며 말했다.
" 일곱 번? 미친 거 아냐? 젊어서 그렇게 허리를 혹사하면 늙어선 여자가 수발들어야 하는 거 아니야? "
나희는 자랑스러운 표정으로 수진을 보았다.
" 거봐. 이래도 아직도 할리퀸인지 할리킹인지 타령할래? "
" 아냐! 있다고! 너네가 안 만나봤다고 없는 게 아니야! "
" 그럼, 석유왕인지 대기업 CEO라든지 어디 왕자라든지. 영국의 귀족이라든지 너랑 걔네가 만날 확률이 얼마나 될까? "
냉철하게 분석하며 조목조목 따지는 나희의 말에 수진은 다시 술잔을 비웠다.
-드르륵 드르륵
그런 수진을 구해주듯 테이블 위에 올려진 핸드폰이 사정없이 울렸다.
" 오셨어요? 네.. 네.. 거기서.... "
어느새 또 수진의 휴대폰을 낼름 받은 설아가 명록을 데리러 기려는지 시끄러운 가게를 나갔다.
**************
갑자기 야밤에 울려온 전화에 깜짝 놀랐다.
그도 그럴 것이 수진의 전화였다.
아리따운 여대생 배수진.
그리고....
헉~!!!
소리가 절로 나도록
명록의 엉덩이에 날카로운 추억을 남긴 그녀......
그러나 수진의 이미지는 뭐.....
대략 천사?
그런 모습이었다.
젊음......
아직 앳된 모습이 남아있긴 했지만 그런 것이 그녀를 빛내는 또 하나의 아름다움이 아닐까?
성숙한 아가씨의 모습에 은은히 깔려 있는 소녀의 향기.
그런 그녀가 이 저녁에 자신에게 전화를 걸어오다니 가슴이 두근두근 뛰고 있었다.
" 네. 방~ 명록입니다. "
아....
이노무 습관......
그냥 여보세요 라고 해도 될 것을.......
급후회가 밀려오는 사이 들려오는 목소리는 또 예상을 깨고 있었다.
" 아 네, 저 수진이 친군데요. "
어라?
수진 씨가 아니네?
하지만 그가 생각을 길게 할 새 없이 정체모를 여자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 수진이가 취해서 그런데 이리로 좀 와주세요. "
명록은 자신도 모르게 되물었다.
" 수진 씨가 취했다고요? 어....어디에 있는데요? "
" 네, 네. 여기 건대역이요. 네, 2번 출구로 나오면 연락 주세요. "
명록은 길게 생각하지 않고 말했다.
" 네. 알겠습니다. 한 삼십분 정도 걸릴 거 같아요. 지금 바로 가겠습니다. "
수화기 저편에서 네 란 대답이 들리고 바로 전화가 끊어졌다.
엉겁결에 대답까지 하고 말았는데 생각해보니 이상했다.
헛......
근데 왜 나한테 전화를 했지?
아니......
내 연락처는 어떻게......
설마 그녀의 휴대폰에 내 전화번호가 저장되어 있는 걸까?
순간 명록은 기분이 묘하게 떠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녀가 자신의 연락처를 휴대폰에 저장했다는 것은
자신에게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다는 뜻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면.......
흐흐.....
나의 매너와 매력에 남친감으로 한번 생각해보고 있는 거 아닐까?
역시 승필 선배의 작업노하우가 위력을 발휘 하는 걸 거야......
명록은 혼자 만의 망상에 빠져서 절로 입이 헤벌레 벌어지고 있었다.
어찌 됐든 전화번호가 저장되어있다는 건 충분히 긍정적이고 희망적인 징조로 생각되었다.
그리고 건대역 근처에서 자신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수진이 기다린다는 사실만으로도 바람처럼 달려가고 싶었다.
아니 가야만 했다.
가슴에 기사도의 정신이 물씬 피어오르는 것을 느끼며 바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나름 세탁소에서 갓 찾아둔 깔끔한 옷을 꺼내 입고 구두를 구겨 신은 채 밖으로 튀어나갔다.
지금 명록에게 필요한 것은 >
바로 그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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