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화 〉제1부. # 5화. 그녀를 적시는 방법 (5)
19.
그가 얼마나 당황스러워할지...
저 갑갑한 인형 탈 안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민망해 하고 있을지......
순간 명록의 얼굴이 상상됐다.
어떤 말이라도 건네야 하는데, 수진은 망설이고 있었다.
지금 주변에서 그녀와 그의 모습을 보면서
킥킥 거리는 사람들의 시선 때문이 아니라
민망해 하고 있을 명록을 위로 할 말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괜히 어설픈 말을 건넸다가 그의 자존심에 상처라도 줄까봐.......
수진은 명록에게 다시 기회를 주듯이 가만히 서있었다.
" 색~ 새액~~~ "
명록이 목을 가다듬어 다시 흘러나온 소리 역시 나아지지 않았다.
쉬어버린 목소리에 수진의 뒤에 서있던 세 친구들 마저 낄낄 웃으며 자기들끼리 옆구리를 찔러댔다.
어서 말해요.......
노래가 아니라 말이라도 해요.......
수진은 명록이 한 마디만 더 해주길 바라고 있었다.
어차피 노래 따위 수진의 귓가에 들리지도 않았다.
아니 세 친구들.....
그녀들의 비웃음과 주변 타인들의 속닥거림도 수진에게 들리지 않았다.
이런 일을하기 위해서 그가 얼마나 자존심을 구겼을지,
또 그간 얼마나 용서를 구하기 위해......
그녀 자신을 위해 그가 노력했다는 걸 알기에
지금 이 순간 만은 수진에게 그 어떤 할리퀸 로맨스의 장면보다도 로맨틱한 상황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상황이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인형 옷을 입은 명록이 갑자기 일어나서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쌩하고 도망가기 시작하는 것 아닌가!
뒤돌아 도망치는 원숭이의 모습에 딱딱하게 표정이 굳어버린 수진.......
그리고 자신들이 심했다고 생각했는지 깔깔낄 큰소리로 웃던 웃음을 멈춘 그녀의 친구들.
또한 그녀들 주변 사람들도 무슨 일인가 멍 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순간 어색해진 분위기가 모두를 감쌌고
어느덧 헛기침을 하며 다들 각자 제 갈길을 가기 시작했다.
흩어지는 인파 속에서 수진 그리고 세친구들만이 어색하게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
아휴.....
죽을 맛이었다.
노란 원숭이 인형이 가장 귀여워 보여서 골라 입었는데 이거 완전 땀복이었다.
시야도 별로 인데 통기성은 머라 말할 수 없이 최악이었다.
그리고......
오늘따라 왜 이리 더운 거야!!!
땀이 줄줄줄 흐르고 있었고 자신의 체온으로 덥혀진 인형옷 안은 웬만한 사우나 보다 훨씬 더웠다.
열기로 숨이 탁탁 막히는 것 같았다.
그나마 위안이 되는 것은 낄낄 웃으며 지나가는 학생들.....
행인들의 시선이 커다란 가면으로 가려져서 쪽팔림이 덜하다는 점이었다.
아~~~
시간표를 모른다는 것이 이렇게 사람을 힘들게 할 줄이야.
다음에 수진과 잘 되면 무조건 일단 수업시간표부터 얻으리라 수천 번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학교정문 앞에서 수진을 기다리고 있는지 3시간 째 넘어가고 있었다.
퍽!
으악!
명록은 무릎 뒤에 강렬한 발길질을 느끼며 휘청거렸다.
뒤돌아보니 저 멀리 아이 하나가 아하하하하 웃으며 도망치고 있었다.
그 뒤를 만세 부르며 쫓아가는 또 일단의 아이들.
아니.....
이런 귀엽고 예쁜 원숭이 인형이
왜 아이들에게 공격 목표가 되는 건지 이해를 할 수 없는 명록이었다.
기다리는 시간동안 꼬리를 휙 잡아당기고 도망가는 아이.
K1 격투기를 봤는지 로우킥으로 있는 힘껏 걷어차고 가는 아이.
심지어......
손가락을 모아서 떵침을 날리는 통에 죽는 줄 알았다.
떵꼬를 움켜쥐며 교문을 집고 부르르 떠는 원숭이........
그게 바로 명록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가만히 서있기만 한 상태에서 이미 파김치가 된 상태였다.
지옥의 3시간을 보냈는데 아직 끝도 알 수 없는 상황이었는데 괴롭힘에 완전 돌아버릴 지경이었다.
으으으.......
나 죽는다.......
이건 완전 계산 밖인데...
좋은 아이디어라고 생각했던 방법이 이런 미친 난관이 있을 줄은 생각도 못했다.
아니 처음 들었을때는 사실 좋은 아이디어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거기에다가 고통의 시간......
그것뿐이 아니었다.
치명적인 문제가 있었다.
마지막 하일라이트.
밤새 안젤로의 <용서>를 연습했다.
[수진 앞에서 인형 옷을 입고 무릎을 꿇으며 안젤로의 <용서>를 부르면서 자신의 죗값(?)을 사죄하고 용서를 구한다.]
이것이 명록이 상규한테 조언 받은....
미친 짓이었다.
그것도 그녀가 다니는 학교 정문에서!!!
풍선 이벤트만 잘되었어도 이런 미친 짓을 안 해도 되는 건데.......
흑흑흑......
명록은 속으로 눈물을 펑펑 쏟아내고 있었다.
역시 처음 듣자마자 돌았냐....
-하는 이성의 판단을 믿었어야 했다.
지금 쪽팔린 짓거리를 해야 하는 자신이 정말 한심하고 처량했지만 그래도 이미 시작된 비극이었다.
또한 수진의 아리따움을 생각하며 참을 인자를 수천번 쓰며 버티기로 했다.
순간......
그날밤 보았던 그녀의 눈부신 나신도 전혀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고는 말을 못하겠다.......
그러나 이 이벤트의 고난은 전혀 예상 못했던 부분에서 나오고 있었다.
기다림.
아이들의 공격.
그리고
모르는 노래를 맹연습하며
준비했던 시간이 오히려 독이 되어 점점 목이 아파오고 있는 중이었다!!!!!
아니......
안젤로의 용서는 왜그리 목에 힘주고 불러야 하는 것인가~!!!
성악 톤으로 분위기 잡기 좋다고 생각해서 골랐던 노래인데
연습을 하며 보낸 시간이 오히려 목을 조르며 아파오고 있었다.
그리고 점점 현기증도 몰려오는 느낌이었다.
이러다간 수진을 보기 전에 기진맥진해서 정문에서 쓰러질 지경이었다.
@@대학교 교문.......
28살 직장인 방명록 씨.
인형 옷을 입고 3시간 넘게 학교 정문에서 쌩쇼하다가 탈진해서 긴급히 응급실로 이송.
여친에게 용서를 구하려다가 혼절.......
주변사람들을 안타깝게 하고 있다고 합니다.
악!!!!
대체 내가 무슨 상상을 하는 거지?
명록은 머리를 세차게 흔들었다.
정신 차리자......
오늘이 진짜진짜....
마지막 기회야......
이번에도 수진이 한테 용서를 못 받으면
과거....
암울했던 모쏠로 돌아가야 해.
그리고 생각해봐....
다시는....
아니 평생 수진 같은 여자는 만나지도 못할 거야.
니가 무슨 그런 연예인 뺨치는 여자를 만나겠냐......
할수만 있으면 귀싸대기라도 갈기며 자신을 채찍질 하고 싶었다.
정신 차려.
정신!
그는 눈에 힘을 빡 주고 앞을 바라보았다.
그순간 교문으로 다가오는 수진의 모습이 보였다.
그녀가 걸어 나오기까지 기다리지 못하고 명록은 달려갔다.
수진의 얼굴에 놀라는 기색이 역력했다.
하긴.....
원숭이 인형 옷을 입은 사람이
그녀에게 다다다 달려오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명록은 숨이 목까지 차는 것을 느끼며 헉헉 숨을 몰아쉬었다.
마침내 멈춰선 수진 앞에 도착해서 철푸덕 무릎을 꿇었다.
무협영화에서 무릎에 깨지도톡 털썩 앉고는
양손을 쫘악 그녀를 향해 펼치며 노래를 시작했다.
안젤로의 <<용서>>
낮게 울리는 저음으로 부르는 노래.
멋지게 부르리라!
" 너를 지키지 못한~~~~ 나를 용서해 줄래....... "
으엑~~~!!!!!
이 목소리 뭐야~~~~
왜.... 왜~~~
할머니 톤의.......
맛이 팍 가버린 소리가~~~~~~
순간 막 노래를 시작하던 명록은 자신의 목소리에 당황해서 어찌 해야 할 바를 몰랐다.
주변에서 킥킥킥 웃는 소리가 들렸다.
원숭이 옷을 입은 남자가 미인 앞에 무릎을 꿇고
어디 돼지 멱따는 소리보다도 못한 음성으로 노래를 부르고 있으니
도저히 웃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수진의 얼굴도 완전 빨개져서 명록을내려다보고 있었다.
다시 목을 가다듬고 노래를 부르려는데 아무리 해도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 색~ 새액~~~ "
마음만 급하지 몸이 따라오지 못했다.
무슨 바람 빠지는 소리만 나고 노래를 부르지 못하고 있었다.
수진 뒤에 서있는 세 명의 친구들은 이미 박장대소를 하고 있었다.
배를 껴안고 낄낄낄 거리며 허리가 부러져라 웃고 있었다.
그리고.....
수진은 얼굴이 붉어진 채 기묘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녀의 표정은......
비웃음?
어이없음?
어처구니없음???
그 순간 마지막 용기가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도저히 그녀의 얼굴을 더 이상 볼 수 없었다.
원숭이 인형 탈을 쓰고 있는데도 얼굴이 화끈거리며 쪽팔려서 죽을 것 같았다.
명록은 다리가 풀려서 힘껏 일어나지도 못한 채 비실비실 일어나서 뒤를 돌아 뛰었다.
으.....
오후 내내 시달리며......
힘든 것을 참으며.....
기다렸던 단 한 번의 찬스였는데.........
절망으로 시야가 휘청거렸다.
아니 세상이 빙빙 도는 듯한 느낌이었다.
아아......
이렇게 허무하게 망가질 줄이야......
이제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도망....
빛처럼 빠르고 신속하게 도망치는 것이었다.
그렇게 수진의 얼굴이 점점 멀어졌다.
그리고 다시 모쏠의 길로 돌아갈 자신의 신세가 밀어닥치고 있었다.
그녀와의 첫 만남.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그녀를 골리며 즐거웠던 시간.
그리고 영화를 같이 관람하던 기억.
날카로운 똥꼬의 아픔.
그리고......
모텔에서의 시간.
이젠 나와 인연이 아니구나했을때
그녀가 눈물이 글썽이며 자신에게 어서 사귀어달라고 말하라고 윽박지르던 장면........
아아아.....
이렇게 허무하게 추억의 한 장면으로......
갈색빛 기억으로 변하게 될 줄은 생각도 못했다.
길가 제일 먼저 보이는 골목으로 들어가서는 철푸덕 주저앉았다.
인형 머리를 양손으로 감싸 안으며 흔들며 좌절하고 있었다.
으으윽.......
왠지 정말 눈물이 쏟아질 거 같았다.
숨도 막히고 땀으로 완전 젖어버렸는데
인형 탈을 벗어야 된다는 생각도 못한 채
어둠의 바다 깊은 절망 속으로 잠겨들고 있었다.
그런데.....
그의 귓가에 들리는 목소리.
천사의 구원 같은....
목소리.
" 명록 오빠지? "
수진의 목소리.
간드러지는....
듣기 좋은 이 목소리는 분명 그녀의 것이었다.
아니...
명록은 착각 속에 빠진 것 같았다.
정말 그녀의 목소리인가?
하지만 거짓도 환상도 아니었다.
명록은 덤으로 자신의 어깨에 부드럽게 손이 얹져지는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 여자의 음성이 계속 이어졌다.
" 치이....... 그간 왜 전화 안했어? "
그리고 명록의 인형머리 쪽에 통하는 소리와 함께 울림이 전해졌다.
" 명록 오빠. 이제..... 나 함부로 다루면 안 돼....... 알았지? 나..... 소중히 대해 줘......."
헉.
명록은 심장에 찌르르 울리는 진통이 느껴졌다.
아니 지금 막 기능을 멈추고 멎을 것 같았다.
하지만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열심히 끄덕이고 있었다.
마치 고장 난 인형이 고개만 끄덕이듯 연신 위아래로 끄덕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인형머리를 감싸 안는 손길이 느껴졌다.
인형 속이었지만 부드럽게 안는 수진의 모습이 온몸으로 느껴지고 있었다.
" 이번만이야......? 한번만...... 봐줄게. 다음엔 절대..... 용서안할거니까...... "
아아~!!!!!!!!!!!!
대한독립만세!!!!!!!!!!!!!!!!!
이 얼마나 듣고 싶었던 말인가.
왠지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느낌이었다.
아니 심장도 울고
양 눈꺼풀도 촉촉히 젖으며
입술마저 떨리는 기분이었다.
그와중에서도 헤~ 하는 수진의 웃음소리가 들리는 듯 싶었다.
명록도 가슴이 탁 풀리며 입가에 절로 웃음이 떠올랐다.
눈시울은 뜨거운 가운데 그래도 웃음이 피어나고 있었다.
그런 그를 안은 채 수진이 속삭였다.
" 용서해주는 대신 꼭 오빠가 해야 할 일이 있어. 용서해 줄 테니까..... 대신 나하고....."
대신..... 뭐???
명록은 순간 흠칫 했다.
엄청난 걸 해야 되는 건 아니겠지?!
수진의 말이 이어졌다.
" 대신 나하고 남산에 같이 올라가자. 내가 연락할 테니까 무조건 같이 올라가야 하는 거야? 알았지? "
그녀의 속삭임은 더할 나위 없이 부드럽게 울려 퍼지고 있었다.
<<그녀를 적시는 방법(5)>> 끝 => <<제6화 남산 투 파 (Namsan too far)(1)>> 로 고고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