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3화 〉제1부. # 10화. 오빠를 돌려줘! (7)
63.
다음 그녀들의 목적지는 "옷" 이었다.
크리스마스이브에 입는다며 최신 트렌드의 옷 구경에 정신이 없었다.
그녀들 애초의 목적이기도 한 터라
서로 이상한가 봐주면서 백화점 곳곳을 누비고 있었다.
연말이라 세일과 갖가지 옷들이 화려하게 전시되어 있었고 그 사이사이를 누비며 쇼핑을 즐겼다.
어?
어라......?
옷들을 구경하며 돌아다니다 보니 수진도 모르게 남성복 매장까지 흘러왔다.
친구들은 어디에서 헤어졌는지 보이지도 않고,
친구들을 찾는 수진의 눈에 마네킹이 입고 있는 짙은 청색의 스웨터가 들어왔다.
왠지 서글서글 해 보이는 명록에게 잘 어울릴 것 같았다.
백일 기념일에도 받기만 하고 어영부영 지나가서 크리스마스 선물을 고민하던 차였다.
넥타이 핀, 커프스 단추.
넥타이.
지갑.....
이것저것 살펴봤지만, 딱히 이거다!
-라는 느낌이 들지 않아 머뭇거리고 있던 찰나에 스치듯이 보이는 스웨터가 그녀의 눈을 사로잡았다.
수진은 마네킹 앞에 멈춰 서서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보들보들한 촉감 하며 사무실에서도 입기 좋게 너무 두껍지도 않은 게 딱 인것 같았다.
" 남자친구 선물? 그거 예쁘죠? 이번 시즌 신상품인데 안 그래도 색깔도 적당히 밝게 나오고, 라인도 괜찮아요. 디피 반응도 괜찮고요. "
수진의 걸음이 멈추자마자 점원이 유창한 말솜씨로 바로 가게로 인도했다.
그녀가 직원의 말을 쫓아 가게로 들어가 한 바퀴 쭉 훑어봤지만 처음 본 스웨터만큼 눈에 딱 들어오는 건 없었다.
" 언니, 이거... 나이 들어 보이지 않을까요? "
화려하거나 파스텔 색도 아니고 스웨터 자체가 조금 나이가 들어 보인다고 생각하고 있던 수진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내자 그녀의 말에 직원이 눈썹을 찌푸리며 정색을 했다.
" 아니, 언니~ 이거... 아이돌 협찬도 들어간 거에요. 컬러가 밝아서 나이 안 들어 보여요. 아이돌이 늙어 보이는 옷 입으려고 하겠어요? 이건 라인이 일단 예술이라 몸이 라인이 엉망이면 모를까 그럴 일은 없어요....."
직원의 눈이 수진을 보며 그녀의 남자친구를 상상하는 것 같았다.
마치, 네 남친이 몸이 안 좋으니 옷을 탓하는 거지!
-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직원의 발언에 수진이 속으로 발끈하며 명록을 떠올렸다.
우리 오빤 몸 좋단 말이야!
넓은 어깨, 탄탄한 가슴. 매끄러운 허리, 그리고....
수진이 마른 침을 목으로 넘겼다.
모텔에서 보던 명록의 몸을 떠올리던 그녀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갑자기 얼굴이 붉어졌다.
" 이...이거! 주세요!! "
직원의 눈과 마주치자 민망해진 수진은 붉어진 얼굴을 가리며 스웨터를 가리켰다.
분명.....
오...오빠에게 어...어울릴 거야...
이상한 수진의 반응에 직원이 영문을 모르는 얼굴을 했지만
다년간 판매업에 종사하는 그녀는 오랜 경험으로
더는 수진의 행동에 큰 관심을 보이지 않고, 노련하게 본연의 임무로 돌아가서 스웨터를 포장했다.
아무도 수진을 주목하지 않는데 괜히 혼자 민망해진 수진만 다른 애꿎은 옷들을 만지작거리며 계산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
참 뭐라고 말을 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배우 섭외가 뜻밖에 빨리 수배가 돼서
촬영이 곧 들어갈 때만 해도 금세 일을 마치고 상경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고 있었다.
부풀어오는 기대감 속에서 승필 선배도, 박 과장님 보다도,
더 빨리 끝나는 거 아닐까 하는 생각에 혼자 히죽 웃기도 했었다.
그런데......
하늘이 명록을 버리고 있었다.
야외촬영을 해야 하는데 날씨가 도와주지 않고 있었다.
거기에다가......
40년 만에 내린 폭설이라니......
이건 완전 날벼락이었다.
설경을 배경으로 찍는 컨셉으로 서둘러 바꾼다고 해도 이건 우선 촬영이 불가했다.
눈이 너무도 많이 내려서 영상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뭐 배경이 보여야 살리든 꾸미든 할 거 아닌가......
세상을 온통 덮어버리는 흰 눈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으니 야회 촬영으로 살릴 영상이 없었다.
그리고......
40센티 미터 넘게 쌓이고 있는 눈은 그칠 낌새도 없었다.
사람도 걸어 다니기 힘들게 쌓여버린 눈 속에서 차들도 올스톱이었다.
거리에 눈을 치우던 사람들도 대충 자기네 집 앞만 치우다가 포기하는 기색이었다.
강원도 산 한가운데도 아닌데 이렇게 엄청난 눈을 보게 될 줄이야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하루....
이틀.....
실내촬영으로 목표 삼은 분량은 이미 충분히 찍었다.
정말 야외촬영을 해야 하는데 아직도 눈은 계속 내리고 있었다.
이건 장마도 아니고....
연이어 내리는 눈을 뭐라고 불러야 하는 걸까?
촬영팀.
감독.
미팅을 해도 뽀족한 수가 없었다.
결국, 그간 강행군으로 밀어붙였던 일정을 여기서 잠시 멈추기로 했다.
휴식.
이건.......
일정이 그만큼 뒤로 밀려버린다는 얘기였다.
우선 업체와 본사 측에 현장 상황을 알리고
컨셉을 변경해서라도 다른 대안을 찾기로 하고 회의를 끝냈다.
일정에 맞추려면 비상수단이 필요한 시점이었다.
회의장을 나서며 명록은 입맛이 씁쓸해지는 것을 느꼈다.
이미 가슴은 한없이 추락해서 암흑이었다.
수진과의 약속......
크리스마스이브.....
그날의 약속은.....
지킬 수 없게 되어버렸다.
명록은 하얗게 쏟아져 내리는 눈을 보며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모든 것이 무너지는 심정.
한없이 쏟아지는 한숨.
그리고 1번 단축키를 눌러서 수진에게 전화를 걸었다.
**************
" 미안..... 아무래도 수진아...... 크리스마스이브 때 나...... 못 갈 거 같다. "
충격적인 명록의 발언.
그리고 말이 없는 수진.
하아.....
정말 미안한데......
그녀에게 뭐라고 말을 더 이어갈 수 없었다.
처음 맞는 크리스마스이브.
명록과 수진이 함께 사귀기로 하고 맞는 첫 이브였다.
그런 날에 연인으로서 그녀의 곁에 있지 못하는 게 너무도 미안했다.
가느다랗게 들리는 수진의 숨소리.
수화기 건너편 그녀의 말은 없었지만
이미 충분히 그녀의 기색을 전달해주고 있었다.
뉴스마다 기록적인 폭설량을 매시간마다 경신하고 있는
이곳의 소식을 대대적으로 전하고 있어서, 이미 수진도 이곳의 폭설 얘기는 들었을 것이다.
뭐 따지자면.....
물론 전국적으로 눈이 내리고 있었지만,
뉴스 화면에서는 <<폭설주의보>>라고 크게 붉은 글씨가
아래 자막으로 지나가고 화면은 연신 명록이 있는 이곳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 할... 수 없지.... 머....... "
오랜 시간 끝에 수진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이미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역시나 못 간다고 하니
수진의 목소리에서 실망한 듯한 숨소리가 가득 차 있었다.
완전...
기죽은 듯한 목소리가 기어들어가는 중이었다.
하긴 명록 자신이 생각해도 그럴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하아아......
한숨이 이순간 아니면 어디서 나올 수 있으랴.
하지만 명록은 수진에게는 들리지 않도록 애써 속으로 삼키며 말을 이었다.
" 정말 미안해.....수진아.... 미안해. 회사 일이라 내 맘대로 안되네. 하아.....미안해...."
벌써 오십 번은 넘게 미안하다는 말을 반복하고 있었다.
하지만 달리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천 번이라도 미안하다고 말을 해서 수진의 마음이 조금이라도 나아진다면 계속 말할 수 있었다.
수진은 낮게 말을 이었다.
" 아니야. 괜찮아 오빠..... 어쩔 수 없잖아. 그럼.... 눈 많이 왔다는데 조심하고...... 나.... 너무 신경 쓰지말고......피곤할텐데 어서 자..... "
" 그래. 수진이 너도 감기 걸리지 않게 조심하고 어여 자렴...... "
뚝.
통화종료.
하지만 그에게 드는 기분은 찜찜함이었다.
속이 타는 기분에 냉장고에 있는 캔맥주를 꺼내 벌컥벌컥 들이켰다.
시원해야 할 맥주가 쓰게 느껴진다.
사다 놓은 캔맥주를 다 꺼냈다.
다 마시고 확 손으로 캔을 우그러뜨리고는 또 다른 캔을 집어 마셨다.
어느새 안주도 없이 사놓은 맥주 캔을 다 비워버리고 옷도 갈아입지 않은 채 침대에 누워버렸다.
알딸딸한 기운과 함께 피로가 몰려왔다.
명록은 어둠 속에 휘말려 들어가는 느낌과 함께 잠이 들어버렸다.
**************
마침내 그날이 오고 말았다.
크리스마스이브......
차라리.....
지구 멸망의 날이면 좋겠다.
" 수진아 우리 간다~! 문 잘 잠그고! 물고기 밥 주는 거 잊지 마! "
" 어~ "
" 배고프면 뭐라도 시켜먹어. 청승맞게 찬밥 먹지 말고. 여기다 돈 두고 가마. "
크리스마스이브인데 이게 무슨 꼴인지......
집 지키는 개도 아니고 집 지키는 수진이 되어버렸다.
크리스마스 공연을 본다며 잔뜩 신이 난 엄마의 목소리에
수진은 소파에 누워 심드렁하게 대꾸하자
아빠가 수진을 놀리는 건지 위로를 하는 건지 그녀를 툭 건들고 갔다.
치이......
수진은 여전히 심드렁한 표정으로 티브이만 보고 있었다.
탁 하는 소리와 함께 현관문이 닫히고,
열쇠 부딪히는 소리와 함께 넓은 집에 수진이만 덩그러니 남았다.
예전 이브에는 친구들도 만나고 했는데, 이번엔 남자친구가 있다는 걸 알아서 그런지 친구들조차 같이 놀자는 말을 꺼내지 않았다.
결국, 명록과의 데이트도 파토가 나고, 엄마, 아빠마저 크리스마스이브에 집에서 딩굴 거리는 수진을 약 올리니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런 기분이니 이브 특집이니 하는 개그 프로그램 따위를 보고 있어봐야 하나도 재미가 없었다.
꾹꾹 리모컨으로 채널을 돌리자 화면이 바뀌고 몇몇 채널이 지나갔다.
대여섯 개 지나간 화면엔 영화들이 상영되고 있었다.
그런데 해주는 영화들이 다......
로맨스.
로맨스.
로맨스!!!!!
크리스마스는 예수님이 태어난 날인데 왜 로맨스 영화만 하는 건지
순간 그녀는 관자놀이에 혈관이 튀어오르도록 혈압이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차라리 꼬맹이 하나가 집이나 지키는 영화나 틀어줄 것이지......
수진은 괜히 심통이 나서 티브이를 꺼버리고는 방으로 들어갔다.
다들 외출을 했는지 늘 쿵쿵거리던 윗집 꼬맹이들의 소리마저도 들리지 않았다.
조용한 아파트.
널따란 집 안에 자기 자신뿐.
이런 날 혼자라는 기분이 싫어 평상시는 잘 듣지도 않았던,
오디오에서 시끄럽게 떠들어 줄 라디오를 켰다.
크리스마스라고 라디오에선 신나는 캐럴이 흘러나왔다.
침대에 누운 수진은 노래를 따라 흥얼거렸다.
" 자, 노래 듣고 왔습니다. nerizel 님의 신청곡이었는데요. 지금 그녀랑 명동에 나왔습니다. 사람이 너무 많아서 손을 꼭 잡지 않으면 놓칠 것 같아요... 우리 헤어지지 않게 해주세요~ 라고 하셨네요. 네~! 오늘 거리에 사람 정말 많겠지요. 두 분 헤어지지 않게 꼬옥 손잡고 다니세요~ 영원히!"
이브라 그런지 DJ가 읽어 주는 사연 하나하나마다 연인의 이야기거나 솔로라 슬프다며 한탄하는 내용이었다.
그들은 쏠로라서 슬프다고 하소연 한다 쳐도
수진은 연인도 있는데도 만나지도 못하고, 솔로도 아닌데 혼자 방구석에 처박혀 있으니
들으면 들을수록 자꾸만 우울해져서 결국 라디오마저도 꺼버렸다.
오빠...
수진은 명록이 미친 듯이 보고 싶어졌다.
미안하다며 못 갈 것 같다고 말하는 그의 목소리엔 진심이 담겨 있었다.
수진은 아까 온 명록의 문자를 다시 확인했다.
[ 옆에 있어주지 못해서 미안해. 내년엔 정말 꼭 같이 있자. 사랑해. 많이 보고 싶다.]
휴대폰을 내려놨다.
통화라도 할까 했다가 괜히 아까 보낸 문자처럼 그에게 투정부릴까 연락도 하지 않았다.
그의 잘못이 아니라는 걸 알지만, 이제 얼굴을 못 본 지 한 달이 다되어 가는 기분이었다.
이렇게 오래 보지도 못하자 명록이 일에 매여있는 것처럼 느껴져 서운함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바보..... 오빠.......
크리스마스이브 때는 꼭 올라온다더니.....!!!
순간 마음이 토라지며 휴대폰 자판을 꾹꾹 힘주어 누르고는 전송을 눌렀다.
[ 친구들하고 클럽 가서 노는 중. 걱정 마. 오빠도 좋은 시간 보내.]
괜히 서운한 마음에 투정을 부린다고 클럽에서 논다고 거짓말을 해버렸다.
발송을 누르는 순간 아차 했지만 이미 활시위를 떠나버린 화살이었다.
<<전송>>이 끝난 문자를 취소할 방법은 없었다.
수진은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오빠를 돌려줘!(7)>> 끝 => <<오빠를 돌려줘!(8)>> 로 고고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