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37화 〉제2부. 13화. 바람이 분다. (8) (137/195)



〈 137화 〉제2부. # 13화. 바람이 분다. (8)

137.

거절의 말.

어떤 경우든....
언제나 들을 때마다
거절은 사람을 쑥쓰럽게 만들었다.
특히나 수진의 거절은 그 무게가 더 무겁고 강력했다.

힘들게 꺼낸 말이었는데 그녀의 대답이 명록의 입을 다물게 만들었다.
수진은 왠지 자신만큼 보고 싶어하지 않는다....
-라는 느낌에 다시한번 깊은 곳에서 잠들어 있던 섭섭함이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 흐음.... 그래. 알았어. 너무 힘들면 좀 쉬고 공부해. 피곤한데 억지로 앉아있음 잘 들어오지도 않더라. "



명록은 목소리에 혹시 자신의 서운함이 담길까 신경써서 말을 이었다.
괜히 수진의 거절에 금새 토라지는 쪼잔한 남자로 보이고 싶진 않았다.
이미 예전에 심술에 툭 던진 말로 수진을 마음 상하게 한 것도 있었고.....


사실...
따지고 보면 그때 서운함을 아직도 가지고 있는.....
쪼잔함까지 들통 날 것 같아 더욱 신경을 쓰고 있었다.

수진의 대답은 그런 복잡한 명록의 마음과는 달리 간단했다.

" 응. 알았어. "


" 밥 잘 챙겨먹고 쉬엄쉬엄 공부해. 슬슬 나도 사무실로 들어가야겠다. "




사무실 핑계를 꺼내며 전화를 끊기 위한 말을 던졌다.
그런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수진은 아까보단 조금 가벼워진 듯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응. 고마워, 오빠. 오빠도 힘내고  못보는 사이 아프면 안돼."



" 하하.... 나야 튼튼하잖아. 그럼 이따 문자 보낼께. "


" 응, 나두. 오빠..... 사랑해. "

그래. 나도...... "



뚝.


전화가 끊어졌다.
어느새 대기화면으로 돌아와버린 휴대폰 액정을 보면서
손에 든 종이컵으로 시선이 옮겨졌다.
아직도 그 안에는 커피가 반이나 남아있었다.


 반도 마시기 전에 끊어진 수진과의 전화 통화.
차라리 수다를 길게 떠느라 마시지 못한 거면
마음이라도  허전할텐데 그러기엔 아직 종이컵에 느껴지는
온기가 생생했다.


실로 입사하고 얼마 만에 온 한가한 시간이던가.

사무실에 가도 여유롭게 일을 보는 직원들의 얼굴엔
희희낙락거리는 미소가 감돌고 있을  뻔했다.
특히나 정미와의 시간으로 신바람이 나있는 승필 선배의 모습이
바로 자신의 자리  앞에서 보이는 터라 더욱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승필 선배는 정말 정미씨와 잘 되가는 모양이었다.
전설답지 않게 여자와의 만남에서 들떠 있는 그의 모습이
이젠 과거를 씻고 정착하려는 거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아니면.....
오랜만의 작업이라 들떠 있는 건지 알 수는 없었지만
수진과 만나지 못해서 하루하루가 지겨운 명록에게 그의 모습은 일종의 재앙이었다.

으.....
싫다 싫어.....
차라리 외근이라도 나가고 싶다.....

그가 안보이는 길거리로 휙 나가버리고 싶었지만
그마저도 일이 없어서 나가지 못하고 있었다.


핑계거리도 없고.....
일거리도 없고.....
따분함에 미쳐버릴 거 같은 오후.
집에서라면 차라리 들어 누워서 잠이라도 청하겠는데
회사는 그것도 할 수 없었다.

생각과 달리 회사에 나와도
시간이 가지 않는건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처음 알았다.
할 일 없이 회사 안에서 시간을 죽치고
버리는  또한 고문이라는 것을.

고개를 들어보니 휴계실 커다란 창문으로 맑은 하늘이 눈에 들어왔다.
푸르름이 하나가득 담긴 쪽빛 하늘에
둥실 떠있는 구름마저 예쁘게 빛나고 있는 늦봄의 오후였다.

하아......

명록은 주체할 수 없는 허전함에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


나희는 오늘도 아무 일 없던 것처럼
책상에 고개를 숙이고 공부에 한참 열을 올리고 있었다.

그날, 그렇게 나희가 화를 냈던 그 날에도 그녀는 아무렇지 않게 굴었었다.
도서관에서는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
평상시의 표정으로 공부하고 있는 그녀를 보며
수진은 그냥 아까는 잠시 울컥하는 마음에 감정을 쏟아낸 것이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날 저녁식사 때, 수진의 생각은 여지없이 깨져버렸다.


나희는 대놓고 표를 내는 것은 아니지만
은근히 수진을 그 자리에 없는 사람인 양 무시하고 있었다.
말을 걸거나 설아와 영연의 대화 속에서 수진이 끼는 경우엔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말을 하고 있었지만 그전에는 절대
수진에게 말을 걸거나 시선을 마주치지 않고 있었다.

어쩌다 서로 단둘이 보게 되는 날이며
찬바람이 불듯  지나가버리는 나희의 모습에서
한겨울 동장군의 싸늘함이 느껴졌다.
그렇게 나희와의 어색한 냉전이, 며칠이 지난 오늘까지도 이어지고 있었다.



역시....
괜한 참견이었을까?
화가 많이 난 것 같은데 어쩌지...

여전히 오늘도 영연과 나희는 수진의 옆자리에 앉아있었다.
처음 자리를 잡지 못한 설아는 멀리 떨어져 있는
가운데 내일 있을 시험을 준비하는 중이었다.

하지만 수진은 책에 집중할  없었다.
간신히 시험을 보고 나왔다.
나름 준비한게 있어서 잘 보긴 했지만 앞으로가  문제였다.
보다 까탈스런 교수님의 과목이라
족보와 조교가 찍어준 예상 범위 만으로는 부족함이 많은 과목이었다.


신경써서 공부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지금 마음을 잡지 못하고 있는 수진이었다.
자리에 앉아서 몇줄 보며 외우다가도
옆에 앉은 나희가 공부하는 모습을 힐끔힐끔 훔쳐보느라 진도를 나갈 수 없었다.



이럼 안되는데......
하아.....
아직 한번 밖에 못봤잖아....


나희를 의식하지 않으려고 애써 고개를 반대편으로 돌리자,
이번엔 영연의 등이 눈에 들어왔다.
이미 시험을 치룬 두 과목의 성적이 영 좋지 않았는지,
나머지 과목들로 만회해 보겠다며 아침부터 호들갑을 떨던 그녀였다.
말만큼 이번엔 각오를 다지고 앉았는지, 지금은 머리를 한갈래로 질끈 묶고
요점정리한 노트에 머리를 박은채 열심히 공부에 집중하고 있었다.

흐음...
차라리 애들이랑 이야기 해볼까...

수진은 턱을  채로 영연의 등을 째려보고 있었다.
나희와도 틀어지고, 혼자만 알게  비밀 때문에
이렇게 고민을 하고 있는 것이 외롭고 힘들었다.
가슴이 너무 답답해서 누군가에게 털어 놓고 이야기하고 싶었다.

지금  순간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고 외치던 이발사의 마음이 십분 이해가 갔다.

얼마나 답답했을까?
분명 말  수 없는 현실이 더욱 그의 입을 간질거리게 만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고민한다고 뾰족한 수가 나오는 것은 아니었다.
수진이 나희의 친구이듯 영연과 설아도 그녀의 친구들이었다.
나희가 처한 사실에 대해 알고 서로 도와줄 방도는 찾는 것이 당연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한 사람보단 세 사람의 머리가 모이면 더 좋은 방법이 나올 것만 같았다.


하지만....

나희가 유부남과 만난다는 것을
다른 사람에게 알린다는 게 왠지 꺼림직했다.

아무리 친구 사이라고 해도 넘지 말아야 할 선이 있는 법이다.
그날 휴게실을 박차고 나가버린 나희의 반응으로 봐서는
알리고 싶지 않은 게 틀림없는데, 스스로 자신의 입으로 털어놓는 것도 아니고,
다른 사람의 입에서 자신의 이야기가 전해진걸 알게 된다면
그냥 화를 내는 걸로는 끝나지 않을 것 같았다.
지금과는 전혀 급이 다른 분노로 절교라도 선언할지 모를 일이었다.

결국 영연과 설아에게 말하고 싶다는 것도
혼자만 이렇게 무거운 짐을 가지고 있는 것에 대한
도피라는 생각이 들었다.
남들에게 짐을 넘겨버리고 싶은 마음이란
생각이 들자 수진은 작게 한숨을 쉬었다.



하아....
역시 말하지 않는게 좋을 거 같아.....



옆자리 나희에게 들릴까 크게 쉬지도 못하는 한숨.
혼자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고개를 숙였다.
핸드폰 액정에 표시된 시간이 눈에 들어왔다.




안돼.....
공부.....공부.....
전체 장학금이 달렸잖아.....
집중하자, 배수진!



수진은 나희의 일을 가슴 속에 묻어두기로 결정하고 자세를 고쳐 앉았다.
나희에겐 미안한 소리였지만 역시 당장 닥친 시험이 수진에게 더 중요했다.
당장 아버지가 퇴직이라도 하게 되면
역시 수백만원의 등록금이 집안에 미칠 영향을
떠오르며 가슴이 저려왔다.


엄마의 걱정어린 목소리.
아빠의 한숨.

작은 효도라고 생각하며 받았던
장학금이 이렇게 절실해질 줄은 생각도 못했는데....
그녀는 입술을 지긋이 깨물고 다시 전공서적을 펼치고
요악한 부분을 보며 외우기 시작했다.
그렇게 얼마나 공부하고 있었을까.


흰색  연습장을 채우던 그녀의 손길이 점점 느려졌다.
수진의 눈은 분명 책을 읽고,
손은 열심히 노트에 쓰고 있었지만,
어느새 나희에 대한 고민이 다시 고개를 쳐들고
지워버렸다고 생각했던 상념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점점 머리를 채워가고 있었다.

마치 미로에 빠져 헤메는 여행자처럼
머릿속에서 맴도는 생각에 어느새 공부에서는 점점 멀어져만 가는 그녀였다.








**************








수진아 너.... 왠지 힘이 없어 보인다. 많이 힘든가보네....? 몸은 괜찮아? "




그녀의 심리적 불안이 티가 났을까.
전화기 너머로 목소리만 전해졌을 뿐인데
명록이 귀신같이 수진의 상태를 알아맞히고 있었다.

아이참....
티  나게 한다고 했는데......



순간 수진은 그에게 나희의 일을 말하고 싶어졌다.
혼자서 끌어안고 있기는 너무도 무거운 짐이자 고민거리.

오빠에게 말하는 건....
괜찮지 않을까?

자신과 부모님을 빼면 가장 가까운 존재.
언제나 듬직한 울타리 같은 그.


하지만......


나희와 명록의 접점은 수진이 아니면 제로나 마친가지였다.
그런 그에게 나희의 일, 그것도 좋지 않은 일에 대해 말한다는 것이 달갑지 않았다.
자신의 친구에 대해 안 좋게 말하는 것도 싫었고
그로 인해 또한 자신에 대한 이미지가 깎이는 것도 바라지 않았다.

수진은 말할까 말까 잠시 고민을 했지만, 자신의 일도 아니고 유부남과 만나는
친구의 치부를 말하는 건 가벼운 뒷담화와는 분명 다르다는 생각이 들자
목구멍 바로 아래까지 올라왔던 말을 침 한모금과 함께 삼켜버렸다.



힘들긴..... 괜찮아. "



결국 명록에게 작은 거짓말을 했다.

사실 아빠의 퇴직 문제도, 시험도, 나희의 일도
그녀를 괴롭혀서 많이 힘들지만 명록에겐 모두 말할 수 없었다.
너무 가깝기에....
말을 할 수 없는 것이 있다는 것을 새삼 깨닫고 있었다.

겉도는 말 속에서 수화기 너머 명록은 여전히 걱정스러운 듯
말을 잇고 있었지만, 한번 시작한 그녀의 거짓말은
자연스럽게  다른 거짓말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런데....




" 저기..... 내가 맛있는 거라도 사가지고 갈까? "



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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