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7화 〉제2부. # 13화. 바람이 분다. (18)
147.
"오빠~!"
늘 목소리를 들었지만 얼마 만에 직접 보는 얼굴인지
기억도 나지 않을 정도로 오랫동안 헤어졌다 재회하는 기분이었다.
명록도 수진을 발견하곤 그녀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는데 한손에 무엇인가 가득히 들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것은 보이지도 않았다.
아니 관심조차 끌지 못했다.
수진은 펄쩍 뛰어가서 그의 품 안으로 뛰어 들어가 얼굴을 파묻었다.
학교 안이라 그녀를 아는 사람들이 있을지도 몰랐지만 지금은 그런 생각은 전혀 할 수 없었다.
너무도....
그립고 좋아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파묻은 얼굴 아래 그의 정장 옷 아래 와이셔츠가 부드럽게 느껴졌다.
손바닥 아래 느껴지는 명록의 느낌.
탄탄한 그의 가슴.
그리운 향기.
그가 언제나 사용하는 스킨의 향이 은은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술내음이 그의 품 안에서 흘러 나왔다.
수진은 고개를 들어 명록을 올려다보며 웃었다.
" 오빠 웬일이야?"
그녀의 질문에 명록의 수줍은 듯한 미소가 흘러나왔다.
그의 대답도 그 미소 못지않게 서투르게 느껴졌다.
" 그냥 네가 너무 보고 싶어서...."
" 피이.... 그래도...."
아무 연락도 없이 온 그가 왠지 너무 무모해보였다.
그녀가 밤새 공부한다고 말은 했지만
혹시라도 짐을 정리하고 집에 갔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아까처럼 집중력이 계속 떨어져 있었다면 특히나.....
괜히 몸만 상할까 포기하고 집에 가고도 남았다.
명록이 헛걸음하는 것이 싫어 수진은 몰래 찾아온 그에게
다신 이러지 말라며 무슨 말을 해야 할 거 같았지만, 왠지 더 이상 말을 이을 수 없었다.
지금 솔직한 그녀의 마음은 오히려
갑작스런 그의 방문이 깜짝 선물인 것처럼
너무 놀랍고 기뻤다.
더군다나 그의 품에서 어렴풋이 느껴지는
술내음마저도 코끝을 시리게 만들고 있었다.
따스한 그의 체온과 느껴지는 알코올의 흔적.
수진의 그리웠던 것만큼 명록도 그리워했다는 걸까.
그래서 술로 그 빈 마음을 채우다가 이렇게 나를 보러 온 것일까.
명록은 그녀를 안은 채 손을 들어 꾸러미를 위로 올리며 말했다.
" 수진아.... 이거 먹고 공부해."
" 응? 이게 먼데......? "
수진은 그가 내민 종이가방을 건네받았다.
살짝 벌려서 안을 들여다보니 초밥도시락 세트가 차곡차곡 들어있었다.
종이 백의 두께도 그렇고 손에 느껴지는 무게가 제법 묵직한 것이 친구들 몫까지 사온 게 분명했다.
거기에다고 포장박스만 척 봐도 전혀 싸게 보이지 않는 것이 비싸보였다.
대체 명록은 이걸 사오느라 얼마나 돈을 썼을까?
수진은 잦아드는 목소리를 말했다.
" 멀 이렇게 많이 샀어.....?"
" 너도 먹고 친구들이랑 나눠 먹으라고..... 그래도 수진이 넌.... 애들 몰래 하나 더 먹어야해..."
" 풋.....! "
이 와중에도 자기는 따로 더 먹으라고 사온 명록 때문에 웃음이 터졌다.
그러고 보니 도시락 개수가 다섯 개였다.
명록이 자신도 먹으라고 사온 줄 알았더니 그것도 자신의 몫이었다.
조금만 생각하면 하나도 많아 보여서 굳이 하나 더 사올 필요가 없는데,
요령 없이 이렇게 잔뜩 챙겨온 그의 마음이 순수하게만 느껴졌다.
그 옛날.....
부모님 여행 중 아파서 문병온 그가 사온 죽이 생각났다.
세개나 되는 죽을 사가지고 온 명록.
지금도 자신이 먹기엔 충분히 많은 양이었다.
하지만.....
아주 작은 부분이지만 수진은 그녀를 생각하는 명록의 마음에 찡한 감동을 했다.
" 알았어. 내가 꼭 두 개 먹을게."
불끈 쥔 주먹까지 보여주며 수진은 생글생글 웃었다.
그렇게 명록에게 다짐했다.
사실 그녀가 모두 먹기엔 많은 양이었지만,
그녀를 위해 명록이 이렇게 챙겨온 도시락을 못 먹겠다고 할 순 없었다.
단순한 도시락이 아니라 그건 명록의 마음이었다.
차마 남기거나 버릴 수는 없는 일이었다.
" 그래 그래.... 근데 맛있는지 모르겠다...?"
명록은 여전히 자신이 없어 보이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왠지 술내음이 풍기는 그의 모습이 아빠 같다는 생각을 했다.
술 한 잔 걸치시고 집에 오시던 그녀의 아빠.
옛날 그렇게 벌게진 얼굴로 오실 때면
양손에 무언가 잔뜩 사가지고 오시곤 했다.
생각해보니 저녁도 부실하게 먹었다.
방금 전 허기진 배의 독촉에
음료수라도 먹어야겠다고 일어서던 중 아니었던가.
투명한 케이스 아래 맛깔나 보이는 초밥들을 보니
명록을 만난 반가움에 잊었던 허기가 되살아났다.
입 안에 침이 고이는 것이 느껴졌다.
그런 수진의 얼굴을 보았는지 그가 부드럽게 미소지으며 권했다.
" 그럼 여기서 우선 하나 먹어볼래?"
" 응, 오빠도 같이 먹자."
어차피 친구들이야 저녁을 먹었으니,
좀 늦게 가져다 줘도 상관이 없었다.
오랜만에 만난 명록을 이렇게 보내고 싶지도 않았다.
수다스런 그녀의 친구들이 오기 전에
얼른 자리를 옮겨 둘이서 함께 같이 있고 싶었다.
결국 두 사람은 도시락 먹을 만한 자리를 찾기 위해
그리고 오붓한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자리를 찾아서
슬쩍 사람들이 적은 곳을 찾아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
은은한 가로등이 비추는 대학교 캠퍼스의 아늑한 잔디밭.
밤의 풍경은 세피아 색으로 물들어 운치가 있었다.
늘 보던 학교의 풍경이었는데,
그와 함께 있어서인지 왠지 생경하게 느껴졌다.
회색의 딱딱한 학교 건물들이 명록이라는
한 사람으로 인해 몽환적인 세상으로 변해버렸다.
한 시간 전만 해도 명록과 벤치에 앉아 초밥을 먹게 될 줄은 전혀 상상도 못하고 있었다.
아니 애초 볼 수 있다는 생각을 못했다.
" 오빠, 근데 어쩌다 학교에 올 생각을 다했어?"
시험기간 내내 무겁게 짓누르던 공기가
명록의 깜짝 선물로 사라진 수진은 오랜만에 활짝 핀 얼굴로
명록을 바라보았다.
지금은 나희와의 일도,
집 안에 있는 걱정거리도 수진의 머릿속에서 사라져있었다.
그녀의 옆에서 같이 있어주고 있는 명록만이 보일 뿐이었다.
여전히 믿겨지지 않는 그의 방문이었다.
수진이 입에 넣어준 초밥을 먹고 있던
명록은 갑작스런 그녀의 질문에 눈을 꿈뻑꿈뻑 거렸다.
그리고는 그녀를 바라보며 머쓱하게 웃었다.
볼이 볼록하게 나와 있는 그의 모습이
왠지 더 수진의 미소를 깊게 만들어주고 있었다.
" 그냥 보고 싶어서..."
" 치이... 그냥 왔다가 내가 오빠한테 화내면 어쩌려고?"
" 하하... 그런 건 생각을 못했는데..... 그냥 보고 싶다는 생각 밖에 못했어... 하하...."
" 흥... 그래도 다음엔 꼭 연락하구 와... 몰래 왔는데, 나 없으면 어쩌려구 그래... 오빠.... 헛걸음 하는 거 싫단 말이야......"
이런 걸 기특하다고 해야 할지, 귀엽다고 해야 할지 말하기 어려웠다.
나이가 일곱 살이나 많은 명록이지만,
보고 싶다는 생각만 하며 왔다는 어린아이 같은 대답에
수진은 툴툴거리면서도 기분이 우쭐해지고 있었다.
단순한 그의 말이 왠지 더 사랑스럽게 느껴졌다.
그녀가 이 순간 지구에서 가장 행복한 단 한 사람처럼 생각되었다.
" 응... 담엔 꼭 연락하고 올게. 시험공부는 어때?"
수진은 그의 질문에 살짝 얼굴을 찡그렸다가 바로 표정을 폈다.
반가움에 시험을 잠시 잊고 있었다.
" 응, 잘 돼가고 있어. 이번 주만 지나면.... 이 지긋지긋한 시험도 끝난다? 오빠..... 시험 끝나면 우리 어디로.... 놀러갈까? "
다행히 살짝 말을 돌리는 수진의 말을
명록이 눈치 채지 못했는지 그러자고 말하며 웃고 있었다.
자존심 때문에 사실대로 모든 것을 말하지 못하는 게 미안했다.
그가 분명 소중한 존재이고
어쩔 때는 부모님보다도 가깝게 느껴지고 있었지만
그래도 아버지의 퇴직에 대한 이야기는 말할 수 없었다.
나희와의 일도 그랬다.
가장 친한 친구와의 일이 심장 가운데 콕 박혀 있는데도 말할 수가 없었다.
연인 사이엔 숨기는 게 없어야 된다던데
정말 이런 것들까지도 사귀는 사이엔 다 말하는 건지 수진은 알 수 없었다.
남들이야 어찌됐든 그녀는 말하기 싫었다.
이런 자신의 마음이 그에게 미안해서
괜히 앞에 있는 초밥 한 개를 더 집어서 명록의 입에 가져갔다.
그는 자연스럽게 입을 벌려서 수진이 내민 초밥을 받아먹었다.
아무 생각 없이 수진이 내민 초밥을 받아먹는 거 같았는데,
순간 명록의 입술이 초밥을 잡고 있던 그녀의 손가락을
함께 입속으로 넣어버렸다.
약간 다른 느낌에 수진이 화들짝 놀라
바로 손가락을 빼냈지만, 왠지 느낌이 달랐다.
뜨겁고 축축한 그의 입안에 아주 잠깐 닿았을 뿐인데
간질거리는 느낌이 정전기처럼 손끝을 타고 가슴 어귀로 올라왔다.
아무렇지 않았던 분위기가 작은 행위로 삽시간에 변해버렸다.
봄나들이를 온 기분으로 피크닉을 즐기던
두 사람의 시선이 알 수 없는 열기로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명록의 얼굴도 살짝 붉어진 거 같았다.
우선 그의 모습을 떠나서 손끝에 닿았던
뜨거운 명록의 열기가 서서히 그녀를 유혹하고 있었다.
수진의 눈동자가 명록의 입술을 바라보며 마른 침을 꼴깍 삼켰다.
갑자기 그와 키스를 하고 싶어졌다.
저 입술.....
너무 오랜만에 보는 명록의 입술.
그의 품에 안겨서 키스를 나누고 싶었다.
벤치에 펼쳐진 도시락만큼 떨어져 있던
두 사람의 얼굴이 조금씩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수진뿐만 아니라 명록도 어느새 그녀의 얼굴을 향해 가까이 다가왔다.
쪼옥.
살짝 닿은 촉촉한 입술.
콧잔등에 닿는 타인의 뜨거운 숨결.
눌리는 듯 부딪쳐서 금세 빨판이 된 것처럼 찰싹 달라붙었다.
이렇게 달콤한 걸 어떻게 이주일간이나 잊고 살았는지,
떨어지는 입술이 내는 촉촉한 소리와 함께
수진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려왔다.
가쁜 듯 급하게 움직이는 가슴의 움직임을 느끼며
명록의 입술을 받아드리며 살짝 감았던 눈이 다시 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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