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7화 〉제2부. # 14화. 평행선 (16)
167.
순간 유부남을 만나던 장면을 본 모습부터
새벽에 남몰래 울던 나희의 심각해 보였던 모습까지
모두 영연에게 이야기 할까 잠시 고민했지만, 여럿에게 오픈되어 있는 지금은 .....
시간도, 장소도 적당하지 않았다.
수진은 애써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말했다.
" 뭐... 나....나희가 그럴 앤 아니잖아?"
" 하긴. 하하.... 그렇긴 하지. 에이... 바보 같은 수민이. 그 정도면 뭐 좀 해볼 줄 알았더니 영 꽝이구만? 푸하, 그럼... 명록 오빠하고 좋은 여행 되고..."
갑자기 영연이 수진의 귀에 얼굴을 가져대고는 소근 거렸다.
" 피임 잘해라. 알지? 커플 여행이 허니문이 되는 수가 있어! 그러다 속도위반으로 발목 잡힌다? 우리 넷 중 네가 제일 빨리 결혼 할지도 몰라.... 흐흐..."
영연은 비밀스럽게 속삭이더니 무슨 상상을 했는지 혼자 웃음을 흘렸다.
그리고 마치 엄마가 된 듯 수진의 어깨를 툭툭 두들기더니 방을 나가버렸다.
영연의 짓궂은 농담 때문에 심각하던 수진의 마음이
잠시 가볍게 흩어지고 이제 명록을 만날 생각에 서둘러 나갈 준비를 시작했다.
수진이 머리를 말리고, 옷을 갈아입고 화장을 하는 동안
그간 시체처럼 방 안에 뻗어 있던 아이들이 쓰린 속을 붙잡고
하나하나 일어나기 시작했다.
밖에서 운영진이 식사 준비를 독촉하는 목소리도 들리고
모두들 나갔지만, 유독 나희 만은 일어날 생각이 없는지
계속 홀로 이불 속에 누워 있었다.
이제 11시 30분을 지나, 밖에선 여기저기서 아침 겸 점심을 준비하는 소리가 요란한데
둘만 남은 방안은 조용하기만 했다.
창을 넘어 들어온 밝은 햇빛이
요란스럽게 먼지들을 반짝이며 비추고 있었다.
수진은 잠시 노란 장판 위를 부유하는 먼지에 시선을 두다가
일어나지 않고 있는 나희를 내버려둘 수 없어서 다가갔다.
그리고 이불 아래 어깨로 생각되는 부분을 살짝 흔들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 저... 나희야..."
작은 목소리지만, 방안은 너무 조용해서 그 소리조차 묻힐 수 없었다.
하지만 힘들게 낸 목소리에 그녀의 대답은 없었다.
" 하...."
입에서 저도 모르게 깊은 한숨이 배어져 나왔다.
나희가 자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녀에게 뻗은 손이 거절당하는 느낌은
뭉개진 자존심만큼 수진의 가슴을 아프게 했다.
수진은 미모사처럼 마음을 웅크리고 다시 물러서서 가방을 싸기 시작했다.
드르륵.
드드드드.....
바지 호주머니에 넣어둔 휴대폰이 울렸다.
수진은 잠시 짐을 싸던 손을 멈추고 휴대폰을 확인했다.
명록에게 온 문자였다.
[ 조금 있으면 도착. 준비 다 했어?]
그의 문자에 굳어있던 수진의 입술에 웃음이 맺혔다.
그녀의 긴 손가락이 바쁘게 움직였다.
[ 응, 나가 있을까?]
빠르게 답장을 보내고 명록의 메시지를 기다리며
가방을 마저 싸는데, 곧 끊어질 실낱같은 작은 소리가 수진의 신경을 건드렸다.
방 안에서 들리는 소리.
그것도 얕게 깔린 신음소리였다.
지금 실내에는 수진과 나희 둘 뿐이었다.
그 소리의 임자가 나희라는 사실을 새삼 깨닫는 데엔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수진은 조심스럽게 나희의 옆으로 갔다.
좀 더 선명하게 들리는 소리.
나희의 소리임을 확인한 수진은 주저 없이 이불을 들췄다.
이불 안....
그곳에 나희가 웅크리고 있었다.
척 보기에도 아픈 모습.
안 그래도 하얀 그녀의 얼굴이 핏기 하나도 없이
하얗게 질린 채로 그렇게 나희는 새우처럼 허리를 굽히고
배를 감싸 안고는 누워 있었다.
진땀이 가득 어린 나희의 이마.
마치 빗방울을 잔뜩 맞고 갓 들어온 모습처럼 땀방울이 송글송글 맺혀 있었다.
심상치 않은 모습에 수진은 놀라
바로 그녀의 옆에 주저앉아서 어깨를 흔들며 물었다.
" 나희야... 괜찮아? 어디가 아픈 거야?"
" 아무것도 아니야.... 신... 신경.. 쓰지마..."
나희는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하고 인상을 쓰며 입을 열었다.
하지만 목소리조차도 힘을 잃고 가날프다 못해 여리게 공기 중으로 흩어지고 있었다.
그녀의 마른 입술은 가뭄에 갈라진 논바닥처럼 꼴이 말이 아니었다.
상처 입은 들짐승.
아마도 지금 나희의 모습은 딱 그 모양이었다.
다가오는 수진의 손길을 거부하듯 몸을 더욱 웅크리고는 힘없는 목소리에 가시를 세우고 있었다.
어젯밤 그녀의 울음소리를 듣지 않았다면
그냥 놔두고 일어섰을지도 몰랐지만 새벽 시간 나희의 모습을 생각하며
수진은 차분히 말을 받았다.
"야... 나도 신경 쓰기 싫어..... 근데.... 지금 너 너무 많이 아파보여서 그러는 거야.... 조금만 참아. 사람 불러올게."
나희가 자신과 냉랭한 관계임을 환기시켜주자
수진은 아무래도 불편한 자신보다는 다른 사람이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연이라도 말해서 데려와야겠다고 생각하고 일어서려는데
나희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수진을 붙잡았다.
" 불러오지 마!"
얼마나 힘주어 소리를 쳤는지
갈라진 입술이 찢어지며 핏기가 보이고 있었다.
그녀의 목소리에 놀라 뒤돌아본 수진은
그런 나희의 모습에 기가 눌리며 그 자리에 멈춰 설 수 밖에 없었다.
" 아무한테도..... 말하지 마.... 신경 쓰지 말라고! "
반쯤 몸을 일으킨 나희의 넓은 이마에 맺힌 땀이 또르륵 아래로 흘러내렸다.
으르렁거리는 듯한 그녀의 독기어린 목소리.
하지만 그에 비해 나희의 모습은 전혀 강해보이지 않았다.
미간 사이 잡힌 주름.
그 아래 눈동자에서 비수가 쏟아져 내리는 것처럼 날 선 시선.
그래서 오히려 더욱 위태로웠다.
아파서 곧 쓰러질 것 같은 가운데에서도
나희가 보여주는 느낌은 너무도 강렬해서
더욱 심장이 쿵쿵 뛰게 만들었다.
수진은 그녀의 말대로 돌아서서 그 자리에 그냥 주저앉을 수 밖에 없었다.
" 알았어. 알았으니까 그냥 누워있어..... 안 불러올게..."
그런 수진의 모습을 보자 나희는
파도에 무너지는 모래성처럼 바로 허물어지듯 이부자리로 쓰러졌다.
그리고 다시 웅크린 채 배를 끌어안고 고통스러워하고 있었다.
어쩔 수 없이 도로 나희의 옆에 앉아 있었지만
배를 움켜쥐고는 입술을 깨물고 눈을 꼬옥 감은 채
고통을 참고 있는 그녀의 모습이 위태해보였다.
그냥 바라만 보고 있자니 수진의 마음은 조금씩 불안해지고 있었다.
아무래도 그냥 체한 거라고 보기엔 너무 아파보이는 나희의 모습.
역시 그대로 내버려 둘 수는 없는 일이었다.
" 나희야 너.... 안되겠다... 너 병원 가야될 거 같아. 내가..... 영연이한테 말하고 올게. 너 이러다 죽을 거 같아."
" 괜찮아.... 싫어... 말하지 마! 그냥 몸이 안 좋을 뿐이야..... 내버려 둬.......“
낮은 목소리로 으르릉 거리듯 말하고 있는 거에 비해선
역시 고통에 제대로 몸을 가누지 못하고 있었다.
수진은 미련하게 아픔을 참는 그녀의 모습에 마음이 급해졌다.
혹시 맹장염이라면 큰 일일 수도 있었다.
급성 맹장염 같은 경우 빨리 병원으로 가지 않으면
죽을 수도 있다고 들었던 말이 생각나 급하게 소리쳤다.
" 이게 싫고 좋고 따질 일이야! 너답지 않게 왜 그래? "
" 나다운 게 뭔데.....?! 됐으니까..... 이불이나 덮어주고 저리가. 괜히 소란피우고 싶지 않아..... 그러기 싫어.....! "
수진은 막무가내로 떼쓰는 나희의 모습에 울컥하는 기분이 들어 쏘아붙였다.
" 지금 자존심 세울 때야! 그걸 말이라고 하니! 아파서 몸도 제대로 펴지도 못하면서.... 아프면 약을 먹던, 병원을 가던 어떻게 해야 될 거 아니야. 그리고 너 이러고 있으면 애들이 모를 것 같아? 미련하게 왜 이래? 어쨌든 난 영연한테 말해야겠어! "
이렇게도 저렇게도 안 된다는 나희의 말에 수진이 점점 화가 났다.
나희가 이렇게 미련스럽게 구는 것도 화나고,
이런 그녀의 상태를 몰랐던 자신에게도 화가 났다.
어제 울고 있을 때....
그때 바로 다가갔어야 하는 건데...
- 하는 후회를 하면서 수진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하지만 방문을 열고 나갈 수 없었다.
뒤에서 들리는 나희의 말 때문이었다.
" 싫어.... 싫다고...!!! 다른 사람들에게 말하면.. 너랑은 영원히 끝이야... 끝이라고....."
수진이 멈춘 것은 나희의 협박이 통해서가 아니었다.
마치 바람에 막 꺼질 것처럼 흔들리는 촛불과 같은 목소리.
그리고 그 안에 감춰져 있는 울음기 섞인 그녀의 절박함.
그것이 애원으로 들려서, 수진은 차마 무시하고 나갈 수가 없었다.
나갈 수도 없고.....
그렇다고 방에 앉아서 지켜만 볼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한숨.
답답함.
그저 수진은 문 옆 벽에 기대어 숨을 몰아쉬며 나희를 힘없이 노려봤다.
어떻게 해야 할까.
어쩌지?
수진이 막막함에 어쩔 줄 몰라 하고 있는 가운데
갑자기 바지에서 부르르 떠는 진동이 느껴졌다.
청바지에 넣어둔 휴대폰이 지금 주인의 상황도 모르고
예의 없이 진동으로 자신의 존재를 알려오고 있었다.
아차!
순간 수진은 나희 때문에 머릿속에서 잠시 잊고 있었던 명록의 존재가 떠올랐다.
벌써 도착했을까 놀라 휴대폰을 열어보니 문자메시지가 수신되어 있었다.
그것도 여러 통이 와있었다.
서둘러 내용을 확인했다.
[ 응 10분 후에 슬슬 나와.]
[ 나왔어?]
[ 어디야? 나 바로 앞에 왔는데... 들어갈까?]
[ 뭐해? 지금 바빠?]
명록을 잊고 있던 시간만큼 휴대폰에 누적된 메시지들.
아무래도 이리저리 움직이다가 미처 느끼지도 못했던 모양이었다.
지금이라도 당장 가방을 들고 명록에게 달려가야 하지만
그렇다고 눈앞에 아파하는 나희를 그냥 두고 갈 수는 없었다.
아니 발걸음이 떨어지질 않았다.
명록을 부르지 않았다면 그냥 옆에서 나희 병간호를 하겠는데 그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어젯밤 통화로 와달라고 한 건 자신이었다.
바로 숙소 앞에 와있는 명록에게 돌아가라 한다면
아마 아무리 마음 좋은 그라도 크게 화낼지 모르는 일이었다.
수진은 절로 한숨이 흘러나왔다.
하아....
왜 이리 꼬여버린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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