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6화 〉제2부. # 15화. 포레스트 검프의 초콜릿 상자 (5)
176.
" 아! 맞다. 내일 내야할 리포트도 있어."
" 응? 리포트? 그게 뭔데?"
" 설아야.,.. 낼 내야하는 리포트 그거 자료 가지고 있지? 그것 좀 나희 보여줘. "
당장 내일 내야하는 과제에 대한 언급으로
나희가 눈을 깜빡이며 바라보자 영연이 설아를 재촉하며 부산을 떨고 있었다.
언제나 활기찬 영연의 모습.
뚱한 설아의 표정.
옆에서 피식 웃으며 보는 나희의 얼굴이
예전 많이 보았던 시간의 모습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대화는 점점 일상적인 이야기로 돌아가고,
어느덧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간 것처럼 나희도 아무렇지 않게 수진에게도 말을 걸고 있었다.
마음을 졸이지 않고 친구들과 있었던 적이 언제였을까.....
얼마 만에 이런 시간을 다시 갖게 된 것일까.....
수진은 남몰래 숨을 길게 내쉬며 미소를 지었다.
네 여자의 수다에 어느새 해가 져버린 방에 밤이 찾아왔다.
" 얘들아~ 우리 같이 노래방이라도 갈래? 우리 오랜만에 이렇게 모였잖아."
" 아.... 미안. 난 약속 있어서 가봐야 돼. "
신이 나서 제안했던 영연의 말에 바로 찬물을 끼얹듯 튀어나온 설아의 대답.
김이 팍 샜다는 표정의 영연이 살짝 삐지는 목소리로 말했다.
" 야... 나도 오늘 울 오빠 약속 깨고 온 거거든. "
" 미안. 떠나간 버스 잡을 수 없고 지나간 남자 잡을 수 없는 법이다. 만날 수 있을 때 만나야 되는 게 남자라서 미안~ "
스님이 합장하듯 한손을 들어 고개를 숙이는 설아의 모습에 나희가 웃으며 말했다.
" 됐어. 나도 피곤해서 리포트만 쓰고 좀 쉬어야겠어.... 다음에 같이 가자. "
" 쳇.... 할 수 없지. 그래. 알았다. 대신 꼭 이다? 다음에는 꼭 뭉쳐서 같이 노래방에 가는 거야? "
" 그래, 딱 봐도 아파 보이는데 우리가 너무 오래 있었네. 가볼게."
날도 어두워지고, 피곤하다는 집주인의 말에
파하는 분위기가 되어버려 다들 짐을 챙기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 너네 집에 아무 것도 없을 것 같아서 요 앞에서 먹을 것 좀 사왔어. 냉장고에 넣어 놨다. 즉석식품이지만 안 먹는 것보단 낫겠지. 꼭 데워먹어. 그럼 우린 갈게."
작별의 인사말.
하나 둘 신발을 챙겨 신고 문밖으로 나가는데 나희가 수진을 붙잡았다.
" 수진아.... 잠깐 얘기 좀 할래? "
" 응? 나? "
문으로 나가려던 수진은 멈춰 서서 되물었다.
" 응. 할 말이 있어서. "
설아와 영연은 나희의 말에 서로 눈짓을 주고받았다.
그리곤 영연이 웃으며 말했다.
" 그래, 수진인 나희하고 단독 면담이나 해. 우린 먼저 간다. "
" 으응.... 낼 학교에서 보자. "
서둘러 먼저 가버린 설아를 뒤쫓아 손을 흔들며 바로 뛰어가는 영연을 향해 수진이 말했다.
둘이 나가버린 현관을 보며 어정쩡하게 서 있는 수진에게 나희가 말했다.
" 안으로 들어와. "
" 그...그래. "
다시 돌아온 방 안.
둘만 남은 상황은 아직 어색했다.
여전히 쭈빗거리는 수진을 보며 나희가 힘들게 입을 열었다.
" 수진이 너.... 애들한테...... 말 안했지? "
" 으응...... "
" 그래...... "
나희는 짧게 말하고는 침대에 털썩 걸터앉고는
한숨을 길게 내쉬자, 수진도 어쩔 수 없이 방바닥에 주저앉았다.
단 두사람이 빠져나갔을 뿐인데 잠깐 사이 방바닥이 싸늘해졌다.
아니 방 안이 처음 문을 열고 들어왔던 순간으로 돌아가 있었다.
짧은 침묵.
아니 나름 길었던 침묵이 깨지며 나희의 질문이 던져졌다.
" 날..... 경멸하니....? "
" 머? "
갑자기 뒷통수라도 맞은 듯한 말에 깜짝 놀라 수진은 나희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들려오는 말의 내용에 비해 너무도 평온한 표정의 나희.
담담한 어조의 그녀가 눈에 들어왔다.
" 유부남이나 만나고..... 칠칠치 못하게 임신이나 하고.... "
" 아니 그게...... "
" 유산이나 하는...... 아니 자기가 임신한 것도 모르고...... “
나희의 말은 꼬리에 꼬리를 무는 것처럼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그 말들이 얼음조각이 되어 가슴 속으로 박히는 것처럼
싸늘한 기운이 수진의 마음에 콕콕 새겨지고 있었다.
**************
경멸하니......?
나희의 말이 귓가에서 메아리치며 울리고 있었다.
정작 불편해야 할 당사자가 담담하게 뱉어내고 있는 이야기를
듣는 사람이 오히려 가시방석에 앉아있는 것처럼 어찌 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사실 여러 남자를 동시에 만나고 순정적인 사랑에 대해
부정적인 말을 하는 나희에 대해 수진은 그리 좋게 보고 있지 않았던 것은 사실이었다.
당연한 듯이 동시에 문어발식 연애를 하는 그녀가
그런 남녀의 관계에 대해 말하는 것들도 다 자기 합리화라고 여기고 있었다.
그리고 유부남을 만나고 있다는 사실에....
분명 한편으로는 경멸하는 마음을 가졌던 것도 사실이었다.
유부남과의 만남.
그것은 친구라도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여자의 적은 여자라고 했던가.
하지만 그것은 그것보다 더한 일이었다.
남들이 힘들게 꾸리고 있는 가정을 깨고 임자 있는,
그것도 법이라는 테두리에서 맺어진 인연을 깨는.....
악날하고 용서받을 수 없는 행위였다.
친구에 대한 걱정도 있었지만 그 남자 다른 편에 있는
부인에 대한 정의감으로 참견하고 싶었는지도 몰랐다.
나희가 말하는 건 조금 과장이 있었지만 전부 사실이었다.
마음 속 한구석에선 수진도 분명히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엠티 갔을 때 보았던 나희의 흐트려진 모습.
그리고 나직이 들리던 그녀의 울음소리.
설움과 아픔이 가득 느껴졌던 그 작은 울음 소리.
그것이 수진의 마음을 흔들었다.
한번도 약한 모습을 보인 적 없던 나희였다.
냉전으로 계속 이어지던 나희와 껄끄러워진 관계로 고민하던 그녀였지만
자신의 몸도 마음도 주체하지 못하던 그날의 시간이 분명 깊게 각인되어있었다.
그 기나긴 밤을 보내고 바로 함께 겪게 된 나희의 유산.
충격도 충격이었지만 채 생명도 피우지 못하고 사라져간 아이의 존재를 생각하면
수진도 마음이 꽉 뭉치는 것이 뭐라 잘라 말할 수 없는 뜨거운 감정이 가슴을 가득 채우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나희 만이 겪을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명록과 자신도 충분히 언제든 만날 수 있는 일이었다.
생명을 잉태할 수 있는 여자의 몸인 수진에게 그날의 일은 절대 그냥 단순히 지나갈 수 없었다.
" 그치만 말이야... 난 집에서 벗어나고 싶었어. 언제나 날 옭아매고 있는 집. 결혼을 하면 그 집에서 나올 수 있거든. 그런데 그 사람이 나타난 거야. 나이 차이는 좀 낫지만..... 언제나 날 넉넉히 받아주는 그 사람이 나도 모르게 의지되었나봐. 그래..... 이 사람 정도면 날 맡길 수 있겠다..... 집에서 벗어나서 그와 함께 행복한 생활을 꿈꾸며 평온하게 살 수 있을 것 같다...... 그렇게 생각했었어......"
마치 고해성사처럼 이어지는 나희의 목소리는 여전히 작고 담담했다.
수진은 입술을 살짝 깨물며 힘들게 입을 열었다.
" 그치만 그 사람.... 유부남이잖아..."
" 유부남이었던 거야. 나도 정말 몰랐어..... 그... 그 사람이 유부남이었으리라곤 정말.....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어. 난 어릴 때부터... 다른 사람 생각 같은 건 정말 잘 읽는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나봐. 그런 것도 눈치 하나 못 채고.....바보 같이.... 사랑 따위 믿지 않는다고 했는데 나도 모르게 사랑에라도 빠졌나봐..... 사랑에 눈 먼 장님..... 하하......그게 나였다니....."
나희의 웃음소리.
하지만 그것은 웃음이라고 할 수 없었다.
내내 담담하게 들리는 그녀의 말에서 수진은 위화감을 느낄 수 있었다.
슬프게만 들리는 내용을, 나희는 너무나도 평화롭게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평온한 어조가 수진의 마음을 더욱 불편하게 했다.
수진도, 나희도, 아니 누구나 마음 속 깊은 곳에 숨겨진 또 다른 자신의 그림자는 숨기고 살아간다.
하지만 그 그림자를 영원히 숨길 순 없다.
마음이 약하면 표정이 무너지고, 아무리 감추려고 해도 결국 그림자는 드러난다.
변검(变脸).
무려 24장의 가면이 계속 변하면서 이어지는 공연.
마치 그것은 우리 사는 삶과 같았다.
지금 수없는 가면이, 나희의 얼굴에 겹겹이 쌓여 있었다.
그녀가 상처를 받을 때마다 남겨진 방어흔(防禦痕, defense mark)들.
평범한 부모님.
평범한 가정.
그리고 남들과 다를 바 없는 평범한 성장 과정을 지나온
수진으로썬 과연 나희가 어떤 삶의 궤적을 그리며 살아왔는지 알 수 없었다.
아니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과연 그녀는 어떤 삶을 살아왔을까.
어떤 시간이었길래 저렇게 집을 떠나고 싶어 했을까.
오늘의 나희가 만들어지기까지 어떤 시간과 기억들이 쌓여있을지 짐작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역시 그날 밤 들었던 나희의 흐느낌 속에서 상처를 느낄 수 있었다.
언제나 강하게 보이고 한겨울에 도도히 피어난 장미 같은 모습만을 보이던....
나희가 자신을 가리고 있던 모든 것을 내려놓았을때 어떤지를 엿볼 수 있었다.
" 많이....힘들었지? "
어렵게 나온 수진의 말 한마디.
그리고 그녀는 뒷말을 잇지 못한 채 어렵게 나희의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침묵의 시간.
나희의 눈이 너무 맑다고 느껴졌다.
말없이 수진의 시선을 정면으로 마주하고 있던 나희는 천천히 고개를 돌리며 허공을 응시했다.
창문 쪽.
이미 어둠만이 가득 담겨 있는 유리창을 멍하니 보던 그녀가 한숨처럼 말했다.
" 내일... 학교에서 보자..."
흔들리는 목소리로 내려진 나희의 축객령.
수진은 더 이상 입을 열지 않고 조용히 옆에 내려놓은 가방을 챙기며 일어났다.
수진이 현관으로 걸어가 신발을 신을 때까지도 나희는 그 자리에서 창을 응시하며 앉아있었다.
" 내일 보자. 나.... 이만 갈게. 문 잘 잠그고..... 냉장고안 봉투 안에 보면 인스턴트긴 하지만 미역국도 있어. 꼭 챙겨 먹어."
수진은 현관문을 열었다.
삐익 하는 소리가 작게 들렸다.
하지만 그 날카로운 소리가 마음을 관통하는 느낌이었다.
" 고마워.... "
무거운 철물이 닫히는 소리가 나기 전.
열려있던 문틈 사이로 자신으로 바라보는 나희의 시선이 보였다.
허공으로 꺼질 듯한 그녀의 목소리가 수진의 귀에 들렸다.
고마워....
수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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