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0화 〉제2부. # 15화. 포레스트 검프의 초콜릿 상자 (9)
180.
" 방금 먹고 올라오는 거야. 아아~ 아쉽다....... 조금만 기다렸으면 너네랑 같이 먹는 건데 말이야..... 진짜~! 아깝다. "
수민은 진심으로 아쉬운 듯 말했지만
그의 대답 덕분에 수진은 안도의 한숨을 남몰래 내쉬고 있었다.
" 다음엔 꼭 같이 먹자. 그땐 내가 한 끼 쏠게. 수진이 너도 꼭 같이 와."
콕 집어서 자신의 이름을 말하는 통에 수진은 어쩔 수 없이 입을 열었다.
" 그...그래."
고개를 들어보니 수민은 수진의 눈을 바라보며 말하고 있었다.
자신을 피하는 걸 눈치 채지 못할 리 없는데.....
그는 여전히 자신과의 거리를 좁히려고 하고 있었다.
그때.....
내가 너 좋아한 거 알았어?
귓청에서 맴도는 그날의 대화.
과거형이 아니었나봐.....
역시....
설마...
아직도?
숲을 거닐면서 그가 건네던 말이 귓가에 맴돌았다.
역시 명록을 생각하면 수민과 거리를 두는 게 맞지만,
환하게 웃으면서 친근하게 구는 그를 한칼에 잘라내듯 밀어낼 수 없었다.
거기에다가 다가오고 있다는 느낌도 어쩌면 그녀만의 오해일지도 모른다.
"뭐? 야~~ 너무한 거 아니야? 왜 여자애들만 사 줘? 우리는?! 야~~ 우리는!!! "
뒤에서 듣고 있던 수민의 친구들이 강렬하게 반발했다.
" 너희는 자기 돈으로 사먹어야지. 야~~ 내가 왜 시커먼 남자애들 밥까지 사줘야 하냐?"
" 뭐? 이런 나쁜 자식... 이런 걸 친구라고 해도 되냐?! "
수민의 웃음기 섞인 말에 뒤에 있는 친구들이 수민에게 장난스럽게 헤드록(headlock)을 걸고 있었다.
" 켁켁... 알았어... 알았어... 사줄게... 대신 너희는 밥 대신 술이나 사라~~ 켁켁!!! 야~~ 아파~~ 빨리 놔줘~!"
낄낄대는 남자애들의 목소리.
서로의 거래가 마음에 들었는지 금세 수민의 헤드록이 풀리고 어느새 서로 밀고 당기며 몸장난을 치고 있었다.
수민은 그 와중에서도 흐트러진 옷매무새를 추슬렀다.
영연과 설아는 서로 무엇이 좋은지 실실 웃으며 속삭이고
나희는 아무 말 없이 조용히 미소 지으며 쳐다보았다.
수진은 여전히 영연 뒤에서 서서 그런 수민의 모습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가까이서 보는 수민의 모습.
샤프하게 느껴지는 헤어스타일.
여자 못지않게 좋은 피부결.
아이처럼 해맑게 웃는 미소.
커다란 키.
마른 듯 하지만 탄탄해 보이는 몸매.
그리고 주변을 언제나 왁자지껄하게 만드는 말솜씨까지....
어디 하나 모자르는 것이 없어보였다.
또한 수진과 나이가 같아서 말도 잘 통하고, 교우관계도 좋고, 옷이나 가방 같은 것을 봐도 꽤 경제적으로 여유 있어 보였다.
아마...
이런 아이를 엄친아라고 하는 거 아닐까?
인터넷에서 쏠로를 다루는 유모들 가운데 얼핏 보았던 문구를 떠올리며
그를 바라보는데 수진의 시선을 느꼈는지 옷매무새를 만지던 수민이 고개를 돌려 그녀를 응시했다.
서로의 시선이 딱 부딪치며 눈이 마주쳤다.
수진은 자신의 생각을 들킨 것 같아 바로 얼굴을 돌렸지만
시야에는 웃고 있는 수민의 붉은 입술이 잔상이 되어 남아 있었다.
" 아, 밥 먹으러 간다고 했지? 잡고 있어서 어떻하냐.... 미안~ 미안~ 배고프겠다. 어서 가봐. 우린 과제가 있어서 먼저 가볼게. 아~~ 수진아, 나중에 꼭 연락해! 너라면 따로 얼마든지 밥이든 술이든 사줄 테니깐. 후후~ "
수민은 생각났다는 듯 벽 쪽으로 비켜서며 지나갈 수 있게 공간을 만들어주었다.
그리고 서둘러 무리와 함께 스쳐지나갔다.
하지만 은연중 수진에 대해 좀 더 친밀함을 보이는 수민의 말 때문에 후폭풍이 예상되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수민이 사라지자마자
영연이 바로 팔꿈치로 옆구리를 쿡 찔러오며 장난기 가득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 얘~ 쟤 진짜 너한테 관심 있는 거 아냐? 너만 특별대우잖아~ 한번 잘해보라니까. 나름 상큼하잖니.... 쿡쿡...."
" 응? 뭔데? 왜? 수민이랑 수진이랑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거야?"
영연이 그녀를 놀리자 사정을 모르는 설아가 무슨 일인가 싶어서 물었다.
엠티에 오지 않았으니 당연히 수민과의 일을 모르는 것이 당연했다.
오히려 그 뒤 벌어진 나희의 일이 더 큰 비중을 차지하느라 거기까지 얘기가 전개 될 새도 없기도 했다.
여기에 설아까지 끼어들게 되면 골치 아파질 게 뻔해서 바로 수진이 말을 가로막았다.
" 아냐! 영연이 괜히 심심해서 장난치는 거야. 어서 밥이나 먹으러 가자."
" 야? 누가 장난친다는 거야~~ 딱 봐도 쟤가 너한테 관심 있는 거잖아. 내가 절대 장난치는 게 아니라니깐? 아까도 우리 셋이 있는데, 수진이만 콕 집어서 부르고..... 다 보는 거 같지만 은근히 시선이 너한테만 가있잖아. 저러는데 모르는 사람이 이상한거지... 그치 나희야~ 아니 잠깐..... 그러고 보니... 너 쪼금 이상하다? 수민이랑 무슨 일 있었구나? 그치! 그치? 엠티 때도 갑자기 명록 오빠 불러서 가질 않나..... "
" 아이참! 아니라니깐. 이러다가 우리 밥도 못 먹어. 안갈 거야? "
영연의 눈매가 가늘어져서 바라보는 것을 보며
수진이 단호하게 잘라 말했지만 이미 설아의 눈매도 영연을 쫓아가고 있었다.
같이 가재 눈을 하고 수진을 바라보는 설아의 눈초리는
풀어질 생각을 안 하고 구석구석 수진의 표정을 염탐하기 시작했다.
" 아님 말지 왜 화를 내려고 해. 호호호~ 누가 보면 진짠 줄 알겠네. 아~ 맞다 흐흐..... 엠티 때 사진 찾아보니깐 재밌는 사진이 많더라? 너랑 수민이 사진도 있던데, 보내줄까? 완전 잘 나왔어~~~ 영화의 한 장면이야~ 히히히~ "
영연의 묘한 시선과 함께 들리는 웃음에 수진의 기분이 점점 나빠졌다.
거기에다가 수민과 같이 찍힌 사진이라니!
분명 좋은 사진은 아닐 게 뻔했다.
" 됐거든? 아, 무슨 식당이 이렇게 멀어! 파스타 먹으러 가다가 해 떨어지겠다! "
수진은 영연이 가자는 했던 식당에게 괜한 분노를 쏟아내며 앞서 걸어가기 시작했다.
어느새 앞서가는 그녀를 보며 뒤에 따라오고 있던 설아와 나희가 묘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영연은 수진 뒤에서 살짝 돌아보며 장난꾸러기 같은 손짓으로 입술을 가리고 킥킥 대느라 어깨가 춤을 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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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벌써 기말 고사야??? "
" 벌써 라니.... 오빠.... 6월이잖아..... "
침대에 누워서 통화하던 명록은
어느새 또 다가온 수진의 시험 소식에 화들짝 놀라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군대에서 휴가 나오는 동기 녀석의 연락 같았다.
어제 보고 잔뜩 술 마시고 떡이 돼서 들여보낸 거 같았는데 오늘 또 나온다고 하는 친구의 연락.
나중에 자신이 군대 가고 그게 얼마나 서운한 말이었는지 알게 되었지만
어느새 또 다가온 시험 소식에 눈앞이 캄캄해지고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요새 리포트 쓰느라 만나기 어렵다고 평일 퇴근 후 데이트마저도 점점 줄어들고 있었다.
전화통화 만으로 이어지는 것도 아쉬워 죽을 거 같은데 시험이라니!!!!!
그간 겪어왔던 수진의 행동으로 봐선 전화 통화마저도 맘대로 못할 것이 뻔했다.
아...
안 돼...
우리가 무슨 주말 부부도 아니고.....
아니....
주말 부부는 그래도 주말 덤으로 금요일 밤이라도 당겨서 볼 수라도 있잖아....
이건 완전 기러기 아빠가 된 거 같아!
명록은 숨을 크게 내쉬면서 생각에 빠졌다.
절대....
절대 같이 있을 거야.
이번엔 꼭 만나서 하룻밤 같이 있자고 하자.
섹스가 무슨 연인간의 보증수표가 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이렇게 만남도 줄고 같이 몸을 함께 하는 시간도 주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괜찮은 일이 아니었다.
순간 귓가를 스치고 지나가는 승필 선배의 목소리.
새로운 남자가 생겼을 때도 그러거든.
바람을 피울 때도 종종 그러니까...
명록은 바로 고개를 세차게 흔들며 속으로 외쳤다.
말도 안 돼!
수진이가 그럴 리 없잖아!
절대..
절대!
그럴 리 없어!
어찌 됐든 시험에 들어가면 만나지 못하는 건 이미 기정사실이었다.
통화도 눈치 보며 해야 하고 명록이 그녀의 목소리가 듣고 싶다고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만나자...
우선 만나서 같이 있자.
그 정도야 애인사이에 할 수 있는 거잖아.
" 오빠? 오빠 뭐해? "
수화기에서 수진의 목소리가 들렸다.
명록은 남몰래 숨을 들이쉬고는 나직하게 불렀다.
" 수진아...... "
" 으응? "
바로 대답하는 그녀의 목소리.
하지만 수화기 너머 수진의 목소리가 멀게만 느껴졌다.
거절의 대답을 들어야 할지 모르는 말을 해야 한다는 것은 힘든 일이다.
수진에게는 언제나 모든 것을 양보했던 명록이었다.
지금도 리포트를 잔뜩 앞에 두고 투정하던 그녀에게서
시험 전에 같이 있자는 말을 하는 것이 맞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할 참이었다.
어떻게 보면 순전히 자신만의 욕심을 채우는 일이었다.
그러나 이대로 있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든지 오래였다.
잠시 뜸을 들이던 명록은 입을 열었다.
" 수진아. 우리..... 그럼.... "
" 뭔데 오빠.... 무슨 말인데 이렇게 힘들어하실까? 헤헤.... "
" 우리.... 시험 전에 하룻밤이라도 같이 있자. "
마침내 말해버렸다.
입밖으로 내뱉자마자 가슴이 쿵 내려앉는 기분.
하지만 이미 쏘아버린 화살이었다.
" 응??? "
수진의 목소리가 조금 높아진 듯 싶었다.
분명 수화기 너머로 느껴지는 그녀의 감정은 당혹감이었다.
하지만 명록은 이미 내친걸음이었다.
빠르게 말을 이었다.
" 저녁때도 만나지 못했잖아.... 우리 마지막 본 게 언제인지 알아? 하룻밤이라도 느긋하게 너하고 같이 있고 싶은 걸..... 그러니까.... 만나서 하룻밤이라도 같이 있자. "
" 오빠도.... 참.... 내가 그렇게 보고 싶어? "
수진의 목소리가 아까의 감정을 감추며 밝게 말하고 있었다.
장난기 어린 목소리.
가벼운 농담 식으로 넘기려는 듯한 말에 명록은 목소리를 가다듬고 말했다.
" 응.... 많이 보고 싶어. 지금이라도 당장 보러 가고 싶은걸. "
" ........ "
수화기 건너 수진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침묵.
하지만 완전한 고요는 아니었다.
약한 숨소리 같은 것이 들리는 게 어쩌면 나지막이 쉬는 한숨 같기도 했다.
잠시 그녀의 반응을 지켜보다가 명록이 먼저 말했다.
갈증이 느껴지는 가운데 입술이 말라가는 느낌이었다.
" 수진아.... 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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