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화 〉정리
클레온이 눈을 떴다.
몸 전체를 감싸는 푹신하고 부드러운 감각.
누워 있는 곳이 평소의 숙소나 사용인 방의 그것이 아니라는 것은 바로 알 수 있었다.
고개나 시선을 돌려보면, 자신의 옆에서 침대에 얼굴을파묻은 채 잠들어 있는 사샤의 모습이 보인다.
여긴 어디지. 약의 냄새가 코를 찌른다. 어디선가 맡아본 적이 있는 것이었다.
열려있는 창문으로 쏟아져 내리는 은색의 달빛은. 등불이 켜지지 않은 방을 충분히 밝게 만들어주고 있었다.
몸이 제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통각... 마비되지 않은 '아픔'의 감각이 전신에서 비명을 내지르고 있었다.
"... ..."
──천천히 생각을 정리한다.
분명 자신은─ 폐허위에서 알베인과 결투를 벌였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 폭주한 성검을 막기 위해 검의 핵을 사용했고─
─성검 칼리번을 파괴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클레온은 상반신을 벌떡 일으켰다.
쿵! 하는 소리가 들리며 클레온은 자신의 이마와 무언가가 부딪힌 것을 본다.
거기에 있는 것은 의원에서 진단서 등을 작성할 때 사용하던 판자였다.
"안됩니다. 안정을 취해주세요."
감정이 거의느껴지지 않는 목소리.
바로 얼마 전에도 들은 적이 있는 목소리이다.
클레온이 그곳으로 시선을 옮기면 그림자에서숨어있다 모습을 드러내는 '페르디아'가 서 있었다.
이전에 본적이 있는 '간호사'복장으로.
하지만, 이곳이 의원이 아닌 것은 확실했다.
넓은 방, 낡아빠진 가구, 그러면서도 호화스러운 인테리어.
클레온이 임시로 거처로 삼고 있던 '고르티안 백작'의 저택─그 백작의 방이었다.
"...페르디아. 이건 대체..."
그녀에 의해 다시 침대에 누운 클레온이 그녀에게 이 상황에 대한 상세한 설명을 요구한다.
그럼 그것을 알아든 것인지 페르디아는 조용히 주사기를 꺼내 그것을 클레온의 팔에 찔러 넣었다.
"전신 골절. 타박상에 열상. 골절상. 화상까지. 클레온님께서는 지금... 그야 말로 살아 움직이는 종합병원이십니다."
페르디아의 자비 없는 말에 클레온은 침묵한다. 아니, 분명 알베인이 마지막에 발산한 천사의 마력은 자신의몸 전체를 태울 정도로 강렬한 녀석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전신을 마력으로 감싸서 일시적으로나마 갑주처럼 사용해 그 충격을 견뎌낸 것이다.
설마. 자신도 모르는 마력 사이로 스며든공격이 자신의 몸을 그렇게나 망가트렸다고?
"...기억나지 않으시는 겁니까?"
"─뭐가 말이지?"
페르디아는 조금 신묘한 표정을 지으며, 창가에 기댄 상태였던 무언가를 가지고 클레온의 가까이로 온다.
─갈라테아.
하지만 이전과는 다르게, 손잡이나 크로스 가드 곳곳에 금색으로 된 부분이 추가되어 있었다.
어딘가 알베인의 성검을 떠오르게 하는 장식이었다.
"뭐지..."
하지만, 그녀가 그렇게 된 것에 대한 원인에 대해 아는 것이 없는 클레온은 조용히 고개를 갸웃한다.
그럼, 페르디아는 잠시 곤란하다는 표정이 되었다가─
"야-. 약만들어왔어."
백작의 방의 문을 열어젖히며 들어오는 붉은 머리의 소녀.
라일라 플레임워치가 손에 보기에도 위험해 보이는 형형색색으로 빛나는 약을 든 채.
며칠을 밤을 샌 건지 모를 정도로 얼굴은 퀭한 상태이다.
"라일라."
"─클레온. 일어났구나."
라일라는 그런 클레온을 보며 기력이 없다는 듯 잠시 눈을 마주치다.
약병을 테이블 위에 올리고 자신은 그 옆의 의자에 무거운 엉덩이를 내렸다.
"후-우."
한숨을 내쉬는 라일라.
손에 연초가 들려져 있었다면 어울렸을지도 모를 정도이다.
"─며칠 지난거지?"
그런 라일라에게 클레온은 물어보았다.
주변의 상황이 기억하고 있는 것과는 너무나도 상이했다.
"5일. 꼬박 자더라."
"정확하게는 115시간을 주무셨습니다."
두 사람의 대답을 듣고 잠시 사고가 정지된다. 그러면 다시 몸을 일으키려고 하고─
뿌드득-! 하는 소리와 함께 전신이 고통의 비명을 내지른다.
"...큭..."
어떻게든 입에서 나는 소리는 최대한 줄였지만, 아무리 클레온이라도 그 고통을 견딘 채 몸을 움직이는 것은 불가능한지 결국 침대로 몸이 떨어진다.
그 모습을 바라본 페르디아는 안타깝다는 듯이 어쩔 줄 몰라 하지만.
라일라는 배꼽을 잡은 채 깔깔 웃어댄다.
달빛이 들어오는 방에 한동안 여자의 울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한참을 그렇게 웃고 난뒤. 라일라는 눈가의 눈물을 닦아내며 이야기를 계속했다.
"알베인이라면 붙잡혔어. '길드'... 아니 '왕국'에."
"──그런가."
어느 정도 예상하던 바이다. 쿠온과의 약속에 따라 그를 죽이지 않는 것은 자신이 베풀 수 있는 자비임과 동시에 벌이기도 했다.
하지만, 길드와 왕국의 체면을 구긴 용사- 아니, 이제는 전 용사인 알베인의 경우.
어떤죗값을 치르게 되는 것일까.
"그리고─루티 시온스도 길드 마스터의 자리를 내려놓는대."
"──…."
클레온이 반응하지 않자. 라일라는 상세한 이야기를 전달한다.
"알베인을 막지 못한 사태의 책임이라는 것 같아.모험가 녀석들이 항의 했지만. 이미 결정된 사항이라고 하더라고."
클레온은 얌전히 누운 채 라일라의 이야기를 듣는다. 옆에서 약과 식사를 준비하는 페르디아의 모습이 조금씩 시야로 들어오지만.
그 약은 혹시 마셔야 하는 타입인 것일까─ 같은 불안한 예감이 머리를 내민다.
그런 반응을 본 라일라는 허리에 손을 올리며 클레온을 바라보았다.
"그녀에 대해서는 그다지 신경 안 쓰는 것 같은데?"
클레온은 조용히라일라를바라보며 대답한다.
"루티에 관해선 내 쪽에서 걱정할 필요는 없겠지. 그녀는 이 10년 동안 너무 많이 일했어."
유일하게 알베인이 도시에 끼친 긍정적인 영향일 수 도 있다.
"네가 여기 있단 건... 쿠온은?"
"주방이야. 네가 일어나길 기다린다면서 계속해서 반찬을 만드는데. 나를 냉동고처럼 사용하는 건 그만둬 줬으면 하는데 말야."
잠시 두 사람 사이에서 침묵이 흐른다. 이야기의 본질이 파악되지 않은 채, 라일라는 무언가를 숨기는 듯 하고 있었다.
클레온은 결국 참지 못하고 물어본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정확하게."
"... 하아. 어쩔 수 없네."
라일라는 다시 한 번, 의자에 걸터앉으며 입을 연다.
용사 알베인이 마검사 클레온에게 쓰러진 직후─
001
"하아... 하아..."
싸움의 여파로 완전히 폐허로 화한 일대.
빛의 기둥에 의해 바닥근처가 새까맣게 타 버렸고.
거기에서 몸을 지탱하고 서 있는 것은 클레온 혼자였다.
클레온은 지친 몸으로 지면에 꽂힌 갈라테아를 뽑아냈다.
비는 이미 그쳤지만 몸 전체를 적신 물의 무게가 너무나도 무겁게 느껴졌다.
아까 전─ 마력의 칼날을 만들어 냈던 알베인과 비슷한 처지.
폭주한 성검에 의해 전신을 불태우며, 천사와 하나가 되어 신성 마력을 내 뿜어대는 알베인과 그 성검에 가까이 가기 위해.
클레온은 마력을 모두 쏟아 부어 자신을 지키는 갑주를 만들었다.
그럼에도 갑주는 조금씩 조금씩 깎여 나가며.
전진하는 주인을지켜내는 것은 불가능 할 정도로 피해를 입는다.
단순히 비교하자면 신성마력과 흑마력.
그것도 인간이 아닌 천사로부터 발산되는 것이니 클레온의 흑마력이 밀리는 것은 상성 상으로도 어쩔 수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몸을 조금이라도 지키기 위해 미친 듯이 마력을 뽑아서 써댔으니.
마력고갈과 탈진이 일어나는 것은 당연한 수순다.
클레온은 한숨을 내쉬며 잡은 채로 부들부들 떨리는 한 쪽 무릎을 꿇어, 넘어지지 않은 채 몸을 지탱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후우..."
─끝났다.
여러 가지 강점이 마음속에 가득했지만 가장 먼저 든 것은 이 생각이었다.
알베인이 이 뒤에 어떻게 될지
자신은 어떻게 해야 할 지
생각해야 할 것이 너무 많았다.
허나 그러기엔, 클레온은 너무나도 지쳐 있었다. 모든 것을 전부 생각하기에는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그 순간- 그의 손에 닿는 무언가가 있었다.
땅 바닥을 굴러, 자신의 손에 잡힌 것은 '검의 핵'이었다.
"... ..."
클레온은 자신의 손을 내려다본다.
폐광에서 찾아내 자신과 라일라가 가동시킨 '검의 핵'이라면- 아까 전의 행위로 인해 이미 소멸했을 터.
그것은- 또 다른 핵─ 칼리번의 핵이었다.
정신이퍼뜩 들어 알베인의 성검을 보면, 서서히 소멸해가며 그 존재가 핵인 구슬의 안으로 흡수되어 가는 것이 보였다.
─백작 가에서 찾아냈던 용자의 수기.
자연스럽게 그 내용을 떠올린 클레온은 이 핵을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한다.
어쩌면, 또다시 성검의 사용자와 맞부딪힐지도 모른다. 이 앞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르니까.
─알베인에게 늘 말하던 준비에 관련된 자신의 철칙을 떠올리며. 핵을 잡으려 한 순간─
"클레온!"
그런 클레온을 부르며 다가오는 목소리가 있었다. 상냥하면서도 어른스러운 소녀의 목소리.
순간, 클레온의 정신이- 집중이 검의 핵으로부터 벗어난다.
그러면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그의 검에서부터 튀어나온 인영이─
보석과도 같은 '검의 핵'을 집어 삼킨다.
"... ..."
방금─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이지?
─두근.
클레온은 이전에는 없었던 파트너의 행동에 당황 하고. 다음 순간. 전신에 솟아오르는 고통에 의해 몸을 비튼다.
거부 반응이라고 해야 할까. 몸 안에 달궈진 철로 된 봉을 끼워 넣는 듯 한 감각.
이전에도 이후에도 이런고통은 느껴보지 못할 것이다.
결국. 싸움의 승자였던 클레온 역시 그 자리에서 정신을 잃었다.
002
"꽤나 화려했었지. 전신의 구멍이란 구멍에서 피를 뿜어내는 클레온."
라일라가 웃어 보이지만, 페르디아는 그런 라일라가 밉다는 듯이 한숨을 내쉬며 클레온의 이마에 손을 올렸다.
클레온 역시, 라일라의 혀가 너무 길다고 느꼈다. 좀 잘라주고 싶었다.
페르디아는 그런 클레온을 달래 듯 이야기를 계속한다.
"몸 전체에 흑마력영역이 전개되어 계십니다. 쿠온씨가 회복 마법이 들지 않아서 슬퍼하셨습니다."
과연. 그렇기 때문에 일단은 의술로 자신을 치료할 수 있는 페르디아가 와 있던 것인가.
누구의 배려인지는 몰라도, 한 숨 돌렸다고 생각한다. 막말로도, 라일라의 붕대 감는 솜씨는 칭찬할만한 것이 아니었으니까.
"그 뒤로는 네 마검도. 너도 죽은 듯이 잠들어 버렸고. 차라리 일어나서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알려줬으면 좋았을 탠데."
라일라는 어깨를 으쓱. 한다. 그녀에게도 모르는 것이 잔뜩 이라는 듯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은 채 잠든 클레온에게 불만을 표한다.
"그거 미안하군..."
클레온은 그게 자신의 탓인지 조금 의문이었지만, 우선은 몸이 움직이지 않으니 사과해 두기로 했다.
아마 여기까지 몸이 회복한 것 역시 그녀가 제조한 약의 덕분이리라.
라일라를 조용히 바라보면. 그녀는 잠깐 당황한 듯 시선을 돌린다.
그리고, 머뭇거리며 조금 홍조를 띄운다.
"──클레온. 몸이 완전히 나으면─"
조용히, 라일라가 이 뒤의 미래에 대한 이야기를 주제로 꺼내면 문을 박차고 들어오는 소녀.
"클레온이 일어났어!?"
에메랄드빛의 머리카락을 가진 성직자. 쿠온이, 일직선으로 달려와 클레온에게 달려든다.
풍만하고 부드러운 마쉬맬로 같은 가슴이 가장 먼저 쿠온의 상체와 접촉하면.
다음에는 조금 딱딱한 팔다리의 부분이다.
꽈득.
"아."
순간. 정지하는 방안의 공기. 다음 순간, 클레온이 비명을 내지르지 않은 것을.
라일라와 페르디아는 '초인적인 극복의 순간'이라고 말하며.박수를 치지 않을 수 없었다.
003
[피고. 용사 알베인에 대하여. 그 잔악한 성품과, 왕국에 대한 배신행위를 이유로 용사로써의 직위를 박탈하고 '영구 노동형'에 처한다.]
──행복의 바람. 루티 시온스에 의해 대신 낭독되는 왕국 기사단의 판결문.
몸을 밧줄로 묶인 채로 무릎을 꿇은 채, 한마디도 하지 않는 알베인에게 내려진 것은 남은 모든 인생을 왕국에서 관리하는 '노동시설'에서 봉사해야 하는 처벌이었다.
현재 왕국의 법상, 사형- 그 다음으로 강력한 처벌.
사실상 무기징역과도 다름없는 것이었다.
"어이어이. 사형이 아니냐고."
"젠장. 나는 절대로 사형이라고 생각했는데 말이야."
허나. 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다는 듯 생각 없이 웃으며 떠들어내는 길드의모험가들.
본래, 타인의 불행은 자신에게 있어 행복이라고 생각하며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이들이많은 이곳에서.
늘 거들먹거리며 자신은 다른 이들과는 다르다는 어필을 잔뜩 해온 '알베인'의경우─
몰락하고 나면, 술안주로 밖에 쓰이지 않는 것이었다.
루티는 그런 모험가들을 보며 조금 복잡한 심경이 되었다. 하지만 이내, 자신이 검토할 마지막 서류에 사인을 한다.
자신이 길드마스터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한 것은─ 비단 이번 일이 처음이 아니었다.
오히려, 10년 전부터 쭉 생각해 오던 것을 알베인의 폭주가 마무리 한 것이다.
그녀의 사퇴가 발표 되었을 때 길드의 남성진 들은 눈물바다를 만들었다.
우리들의 아이돌이~! 같은 말을 했지만 루티는 아이돌이 아니라 마스터다. 길드 마스터.
왕국에서 곧 새로운 길드 마스터가 파견되어 오겠지.
그 인물은 자신처럼 약점을 잡히더라도 사람을 상처 입히지 않을 수 있는 공정한 사람이리라.
오랜 세월을 함께 해 온 길드의 건물에 인사를 나누며 루티는 길거리로 걸어 나왔다.
"... ..."
그런 루티를 기다리던 것은 광장에 서 있는 흑발 흑안의 '여성' 모험가.
허리춤에는 조금 그 형태가 달라진 레이피어를 맨 채 길드 마스터의 도착을 기다리고 있었다.
"클─ 흐흠. 레오나!"
"... ... 뭐야 그 이름은?"
어색하게 노선을 변경하는 루티의 행동에 클레온은 조금 이상하다는 듯이 그녀를 바라본다.
루티는 그런 클레온을 바라보며, 머뭇거리며 대답할 뿐이었다.
"아니. 왜. 이름은 필요하잖아?"
"좀 더 제대로 생각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하고 덧붙이는 클레온을 바라보며, 이 남자가 슬슬 여장을 즐기고 있는 게 아닐까 걱정하는 루티였다.
두 사람은 잠시 서로를 바라보다 김이 샌다는 듯, 어색한 감각에 웃음을 흘리며 걸어간다.
"알베인의 판결문 낭독. 봤어?"
"그래. 사형이 나오지 않은 건 역시─"
루티는 어두운 얼굴로 어깨를 으쓱. 하고 움직인 뒤 이야기를 계속해 나갔다.
"성검이 없다고 하더라도, 용사로써 쌓은 경험이 있으니까. 뭐. 성검이 없는 알베인이 어느 정도 전력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기대할게 못 돼."
그런 상황에 얼굴을 찌푸리는 클레온. 물론 사형이 나오지 않은 것은 쿠온에게 있어서는 잘 된 일이지만.
어쩌면. 그 자리에서 자신이 마무리를 짓는 편이 알베인에게도 나은 결말이 아니었을까.
"아. 또 어두운 얼굴."
"... ..."
자신도 모르게 인상이 찌푸려지자. 그것을 루티에게 지적당한다.
"기껏 일이 모두 해결되었으니 좀 더 얼굴 펴자. 도시를 떠나기 직전인데. 자. 자. 웃는 얼굴."
양 손의 검지가 클레온의 입가를 위로 올린다. 옆에서 보면 서로 장난을 치는 미인들이지만.
실상은, 남동생 뻘의 남자를 놀리는 여성의 그림이었다.
클레온은 그런 루티를 잠시 내버려 두다가, 어느새 도시의 입구- 이면서 동시에 출구이기도 한 '관문'에 도착한다.
─어린 시절. 루티, 그리고 또 한명과 함께 이 도시를 찾아왔던 것을 떠올린다.
지금은 제대로 기억조차 나지 않는 그녀의 얼굴. 자신은 부끄럽지 않게 살 수 있었던 것일까.
루티 역시, 조용히 바람을 맞으며 도시를 돌아본다.
"가자. 루티."
"응."
두 사람은 도시를 뒤로 했다.
그와 그녀가 사랑했던 곳과의 작별이었다.
004
살아있는 숲의 가장 깊숙한 곳. 위험영역으로 지정된 곳에는─
지금은 사람이 살지 않는 버려진 저택이 위치한다.
'고르티안의 저택'. 허나, 모험가들에 의하면 최근 이곳에는─ 서큐버스와도 같은 음마와 그 주인이 자리를 잡아.
밤새도록 희생자로부터 정을 착취한다는 이야기가─
어째선지 도시의 모험가들 사이에 로망처럼 퍼져 있었다.
"몸이 안 움직이던 것을 빌미로. 하루 종일 매달려 있었으니..."
클레온은 머리를 긁적이며. 침대에 몸을 걸친 채 앉아 있었다.
위의 소문은 루티를 마중하여 이곳으로 데려오는 동안, 그녀에게서 들은 이야기였다.
짐작 가는 바는 있었다.
페르디아가 '방중술'이라는 수상한 치료술에 대한 이야기를 꺼낸 것이다.
남녀의 육체관계를 통해 치유를 증진시킨다는 이론.
라일라는 논리 자체는 틀리지 않았다면서.
곧바로 실험해 보자고 옷을 벗어 자신에게 달려들어 왔다.
그 뒤, 잠에서 깨어난 사샤나, 쿠온. 심지어 기능을 회복한 갈라테아까지.
번갈아가면서 그와 몸을 섞으니. 저택의 안팎으로 신음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그 덕분인지는 모르지만 몸은생각보다도 빨리 회복되어, 알베인의 마지막 모습을 지켜볼 수 있었다.
─알베인.
자신이 어떻게 했더라면 이 상황이 오지않았을까.
소년이소년인 채로 있을 수 있었더라면.
소녀가 신탁을 보지 않았더라면.
청년이 둘을 부추기지 않았더라면.
─좀더, 괜찮은 이야기가 나오지 않았을까.
그거야 말로 소년이 동경하여 마저 하지 않던 용사의 모험담이.
"... ..."
클레온은 읽고 있던 책을 덮고 눈을 감는다.
'제국의 드래곤 루티오스와 용사'
알베인이 언젠가 자신에게 말했던 용을 사냥한 용사의 이야기.
검을 높게 치켜들고 하늘로 날아올라 세상을 괴롭히던 용을혼내주는 어린이용의 동화 같은 이야기이다.
클레온 본인도, 이 이야기는 싫어하지 않았다.
─적을 멋지게 무찌르는 용사를 좋아한 것이 아니다.
용사와 마음을 나누고. 그럼에도 서로 충돌하였으나. 마지막에는. 서로를 이해하는 이야기.
많은 이들이 용사가 사악한 제국의 드래곤을 죽여, 세상을 구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다르다.
"후후..."
스물스물. 자신의 하반신 쪽의 이불에서 무언가가 기어 오르고 있었다.
클레온이 그쪽으로 시선을 돌리고, 이불을 걷어내면. 분홍색의 머리카락이 모습을 들어낸다.
"... ..."
본인은 이렇게나 멀쩡히 살아있는데.
"루티. 뭐하는 거야."
"아니. 나도 이 저택으로 불렸다는 건. 슬슬 그런 일을 할 때가 됐나 해서 말이야."
루티는 조금 얼굴을 붉히지만 웃음을 띤 채 클레온에게 몸을 밀착해 왔다.
팔을 감아 안겨오는 루티는 클레온이 들고 있던 책의 제목을 보더니 눈웃음을 지으며 그것을 방의 구석으로 던져버린다.
"앞으로 조금 만 더."
어리광을 부리며, 볼을 비벼오는 루티에게. 클레온은 조용히 중얼거렸다.
"... ...하아. 손이 많이 가는 건. 대체 누굴 닮은 건지."
"너야 말로. 그 시니컬한성격은 누굴 닮은 거야?"
동시에 떠올리는 것은 누구였을까. 조용히, 두 사람의 시선이 교차되며. 얼굴이 가까워져 갔다.
"클레온님. 오늘은 제가 밤의 시중을 담당하겠습니다. ─아."
문을 열며 들어오는 페르디아. 언젠가와 똑같이. 클레온과 루티의 몸이 멈춘다.
페르디아는 그 모습을 보더니 잠시 멈춰 있다가, 조용히 문을 닫고 안으로 들어오는 것이었다.
루티도, 그런 페르디아를 보더니. 입을 우물거리다, 그대로 클레온의 입술을 빼앗는다.
"방해였나요?"
"이번엔 아냐."
─밤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