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38화 〉도망 (38/72)



〈 38화 〉도망

"하앗!"

텅! 하는 소리가 울렸다.

땅바닥을 몇 번이고 구르는 몸.

붕 하고 떴다가 떨어지는 목검.

"크하하! 몇 번이나 말했지! 정면으로 덤빌 거면 죽일 각오로 오라고!"

"젠장... 이 고릴라가!"

흑발의 소년은 떨어진 목검을 쥐어틀고 다시 자세를 잡았다.

전신이 땀으로 범벅이 되어 있는 소년이지만.

그에게 검을 지도하는 거한은 어느 한 군데에도 땀을 흘리지 않은 채.

가만히 서서 그가 잡기에는 이쑤시개처럼 보이는 목검을 휘두르는 것뿐이었다.

"방금 맞은 곳을 베이면 고통 없이 갈  있다."

"...필요 없는 정보야!"



이번에는 소년이 붕! 떠오른다.

그리고 머리 위에서 아래를 향해 내려치는 검격.

자신의 무게를 실어내면 이 남자라고 하더라도 한 손으로 막을  없으리라.

그렇게 생각한 것은 오판이었다.



그대로 팔을 뻗어와 클레온의 검을 붙잡고.

휘릭! 하고 벽을 향해 던져버리는 남자.

남자는 턱에 손을 올린 채 재밌다는 듯이 이야기했다.

"뭐냐 그거.  녀석의 흉내냐?"



소년은 그 말에 정곡을 찔렸는지 고개를 돌린다.

"관둬라 관 둬. 그 녀석의 검술은 타인이 따라 할 수 있는 게 아니야."

"다, 당신이야말로. 나에게 따라 할 수 없는 검만 가르치잖아. 한 번의 베기로 바위를 베라니…."

남자는 크게 웃으며 소년에게 다가갔다.

일어서려고 하는 소년의 등 위에 앉으면 소년은 무게에 짓눌려 일어날 수 없게 된다.


"멍청아! 사람은 연습하면 검으로 바위를 벨  있어."

"비, 비켜..."

남자는 그렇게 말하며 자신이 들고 있던 목검을 옆에 있는 단단한 돌 벽에 던졌다.

수평을 유지하며 날아간 목검은 그대로벽에 틀어박혔다.



"하지만. 그 녀석의 검술은 그런 게 아니야. 그 녀석이베어내는 것은 `인간`이나 `마물` 같은 것이 아니라 거기에존재해선 안 될 `악` 그 자체다."

"...그게 무슨 뜻이야?"

"용사의 검술은 일반인의 것과 다를수밖에 없다는 거야.  정도로 힘을 가진 녀석이라면 더더욱."

남자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본다.

오랜 세월 함께 싸워온 전우의 방해가 되지 않겠다는 일념으로 쌓아올린 단 하나의 검술.

검으로 돌을 깎는 수련.

검으로 바위를 베는 수련.

검으로 성벽을 깨는 수련.

검으로 산을 꿰뚫는 수련.

어느샌가 거창하게 검성이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지만.


그 녀석이 마법을 사용하지 않은 채 순수한 검만으로 맞붙더라도.

남자는 자신이  녀석을 이기는 모습을 떠올릴 수 없었다.

"너는 그 녀석처럼되려고 하지 마라."

남자는 소년에게 말했다.

언제나처럼바보취급 하는 것이 아닌 진심에서 우러나온 조언이었다.

소년은 잠시 침묵한 뒤.



"끄...아아앗!"

그 가느다란 팔로 땅을 밀면서 상체를 들어 올린다.

그러면, 남자는 조금이라지만 자신이 들어올려지는 감각에놀란 뒤, 평소의 사악한미소를 띤다.



"크하하하! 몸에 힘이  붙었나 보군! 기분이 좋아졌으니 다음을 하자고!"

그렇게 말하며자리에서 일어나려 한순간-



"큰일이야! 녀석들이 루티에 관한걸 알아서…! `레시아`씨를…!"

끝은 갑작스럽게 찾아왔다.

001

마법을 사용하지 않은 채 순수하게 검을 휘두르는 클레온의 머릿속에 과거의 일이 떠오른다.

전투 중에 몰려오는 잡념을 떨쳐내지 못하는 것은 모험가로서 바람직하지 못하지만.

"하앗!"

옆에서 자신과 같이 싸우는 이오나의 모습을 보면.

그 절도 있고, 날카로운 검술의 틈으로 어린 시절의 스승의 검기가 엿보였다.

그리고 한없이 무력했던 자신도.



오크들은 클레온과 이오나라는실력자를 경계하여 상대적으로 약한 유스테스와 티오를 표적으로 삼는다.

3층에서 이곳으로 전이해 온 만큼 지능도 전술도 어느 정도 갖추고 있는 개체들.

분명 유스테스가 일반적인 동레벨의 모험가였다면 살아남을 수 없었겠지.

티오도 마찬가지였다.


"운이 좋은 것인지…. 나쁜 건지."

클레온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오크의 심장에 꽂혀있던 갈라테아를 뽑아낸다.

유스테스에게는 대검으로 머리를 지키고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말라고 지시해 두었다.

녀석이 입고 있는 갑주는 대검과 비슷한 강도를 가진 최상품.

오크가 들고 있는 이가 빠진 도끼나 검으로는 흠집 하나 낼 수 없는 물건이다.

게다가 찬란하게 빛을 내고 있으므로 오크들의 주의를 끌기에는  좋았다.

[Krrrrr]

멧돼지의 울음소리와도 같은 소리를 내며 침을 질질 흘리며 다가오는 오크의 얼굴은 흉악함 그 자체였다.

유스테스는 난생처음 보는 괴물의 모습에 잔뜩 검에 질려 클레온이 말한 대로 대검으로 몸을 막고 있었지만.

아무리 갑주가 단단하고 검이 좋다고 하더라도 그걸 잡은 인간은 레벨이 1밖에 안 되는 잡졸이었다.

"레, 레오나! 빨리 어떻게든  봐!"

"기다려! 수가 많으니까…."

차원문은 아직 열린채.

이오나의 말대로 던전의 기분이 좋지 않은 것일까.

하나를 줄이면  하나가.

둘을 줄이면 또 둘이.

이런 식으로 차원문에서 쏟아져 나오는 오크들의 수는 아무리 봐도 정상이 아니었다.

계속해서 적이 보충된다면 결국에는 클레온이 마검사의 힘을 해방해야 할지도 모른다.


`뭐에 이끌리고 있는 거지?`

냉정하게 상황을 분석하는 클레온.

던전의 상태가 이상할 때는 보통 던전의 핵을 자극하는 물건이 반입되었을 때의 일이다.

예를 들면 고대의유물.

성검이나 마검도 그 부류에 들어가지만.

던전에 있어서 그 둘은그리 자극적이지 않은 것일까.

지금까지의 던전 탐험에서 딱히 커다란반응을 보인 적은 없었다.

그렇다면-

"어이! 너희, 이상한 물건 가져오지 않았겠지!?"

클레온이 목소리를 높여 일행들에게 묻는다.

"이, 이상한 물건!?"

"그래! 고대의 유물이라던가!"

그렇게 말하자 우선 티오가 손을 들어 고개를 젓는다.

"저,저는 없어요!"

"저도, 그런 물건은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이어서 부정하는 이오나.

그럼 유스테스는 경직된 얼굴로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낸다.



""편익의 반지...!""

동시에 입을 여는 이오나와 클레온.

특히 이오나는 `아차`하는 얼굴이었다.

아마 루베라가 가지고 있던 원본과 쌍을 이루는 것이겠지.



"그걸 버려!"

"뭐!? 이게 얼마짜린 지 알아!?"

클레온의 말에 무슨소리냐는 듯 반항하는 유스테스.

하지만 클레온의 째려보는 눈빛을 받자 금세 움츠러든다.

"던전이 원하는 게 바로 그거야! 던전의 핵은 고대의물건을 동족으로 인식해서 모으려고 한다고!"



그럼 유스테스는 반지와 오크들을 번갈아 본다.

`루베라에 이어서 이것마저 잃어버리면, 분명 아버지에게 곤죽이 되도록 맞을 거야…!`

머릿속을 지배하는 공포.

유스테스의 몸이 벌벌 떨린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

그렇게나 틈을 보인다면 적에게 자신을 죽여 달라고 말하는 것과 다름이없었다.

결국, 오크는 손에 힘이 빠진 유스테스의 대검을 쳐내 옆으로 치워낸다.

"어?"

얼빠진 소리.

이어서 위에서부터 휘둘러지는 녹슨 도끼.

유스테스는 어제에 이어 다시 한  죽음의 공포를 느꼈다.

다음 순간-

촤악!


그런 유스테스를 밀쳐내고 대신 상처를 입은 인물이 있었다.

파티의 성직자 `티오`.

다행히 머리를 찍히는 것은 피했지만 등을 커다랗게 베인다.

붉은 피가 그녀로부터 튀어 올라 유스테스의 갑주나 얼굴에 달라붙었다.


[Krrrraaaa!!]

피를 보고 흥분하는 오크들.

잠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파악하는 데 시간이 걸린 클레온이 땅바닥에 쓰러져 피를 흘리는 티오를 보고 눈을 크게 뜬다.

"유스테스!!!"

다음 순간, 클레온의 노호가 던전에 울리자.

유스테스는 깜짝 놀라서 손에 들고 있는 편익의 반지를 땅에 떨어트렸다.


그러자, 땅에 흡수되듯 사라지는 반지.

차원문이 닫힌다.


"...큭…. 이오나! 티오씨의상태를 봐 줘!"

"알겠어요. 나머지는 맡길게요."

클레온의 말에 티오에게 달려가 치유 마법을 사용하는 이오나.

하지만 그녀의 상처가 깊으므로 이오나의 치유 마법 정도로는 상처를 완치시키는 게 불가능했다.


"나, 나는..."

망연자실한  그 모습을 바라보는 유스테스.

그의 얼굴에는 공포나 놀람, 당황함이 뒤섞인 채였다.

이오나는 잠시 그를 바라보지만 이윽고 고개를 돌려 다시 티오의 치료에 전념한다.

그 사이, 클레온이 적의 사이를 질주한다.

원래라면 마법은 물론 마력을 사용하는 것도 감추려 했지만 이제는그런 것을 따질 시간이 아니었다.

다리, 팔. 그리고 시야에 집중된 마력.


차원문이 사라져 더는 보충되지 않는 오크들의 수는 5마리.

대부분이 피를 흘리며 쓰러진 인간 여성... 티오에게 시선이 집중되어 있었다.

`하나의 검.`

손에  레이피어-갈라테아를 가장 가까운 오크의 목에 찔러 넣는다.

가볍게 관통된 구멍에서 피를 쏟으며 자리에서 고꾸라지는 오크.

`하나의 베기`

이어서 물 흐르듯 뒤를 돌아보며 다음 오크의 상체를 사선으로 베어낸다.

얇고 가느다란 마검이 갑주 째로 몸통을 절단했다.

`하나의 몸.`

그런 클레온을 보며 양쪽에서 달려드는  마리의 오크.

재빠르게 공중으로 뛰어 올라 녀석들의 머리를 밟고 검을   휘둘러 목을 떨어트린다.



`하나의 `경지`.`

마지막으로 순식간에 동료들이 모두 당해 겁을 먹은오크의 옆을 스쳐 지나가는 클레온.

다음 순간, 오크는 팔다리를 절단당해 그 자리에서 쓰러지며 완전히 목숨을 잃었다.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는 유스테스.

이것이 진정한 강자의 경지.

그가 지금까지 알고 있던 가장 강한 검사였던 루베라와 동등, 아니  이상.



몸에 단 한 방울의 피도 묻히지 않은 채 검을 허리로 되돌리는 레오나의 모습은.

유스테스의 망막에 강하게 각인되었다.

이윽고 검은 재가 되어 사라져 가는 오크의 시체들.

전리품이 땅에 남지만, 클레온은 그것에 눈도 주지 않고 유스테스에게 다가갔다.

"괴, 굉장해."

감탄사를 날리는 유스테스.

그리고….

퍼억!!

하는 소리가 울렸다.

클레온은  조절을 하지 않고 유스테스의 얼굴을 때렸다.


강렬한 충격과 함께 땅을 구르는 유스테스.

정신이 멍해질 정도의 아픔과 동시에 눈물이  돌았다.


"그런 물건을 던전에 들고 오면  된다는 것을 몰랐다는 것은 그럴 수 있어. 너는 초보자고 진심으로 하는 것도 아니니까."

"나, 나는 진심으로..."

"하지만. 너의 판단이 느려져서 동료가 상처 입고, 심지어 죽을 뻔했다."

"... ...큭..."

유스테스는 티오를 보면서 주먹을 쥐었다.


"오늘의 의뢰는 여기까지야. 도시로 돌아가서 티오씨를 치료해야 해."

클레온의말에 이오나는 고개를 끄덕인다.

"의뢰는…. 미완수네요. 1층을 모두 답파하고 돌아가는 것이 목적이었으니."

그리고 덧붙이듯이 말하면 유스테스는 분하다는 듯 고개를 떨어트렸다.



"소꿉놀이 같은 생각으로 모험하는 건 인제 그만 둬. 너 때문에 죽는 녀석이 생긴 다음에 그걸 짊어질 각오도 없으면서."

"나는..."

무언가 변명을 하려는 듯 입을여는 유스테스.

클레온은 그런 유스테스에게 다가가 멱살을 잡는다.

"부족하다는 거야. 각오도. 실력도."

그렇게 내뱉은 뒤 쓰러진 티오를 업었다.

출혈은 멎었지만 안의 상처는 아직 남은 상태.

서둘러서 신전으로 옮길 필요가 있었다.


클레온은 고개  번 돌리지 않은 채 왔던 길로 돌아간다.

이오나 역시 자리에서 일어서서 유스테스를  번 내려다보고.

그대로 클레온의 뒤를 따라나서는 것이었다.



"...젠장…."

분한 목소리만이 그 장소에 남아 맴돌았다.

002

"상태는 조금씩좋아질 겁니다. 이대로 신전에 하룻밤 묵게 하세요."

신전의 성직자가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클레온과 이오나를 안심시켰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사람.

서둘러서도시로 돌아온 덕분에 늦지 않고 그녀를 치료할 수 있었다.



"... ..."

이곳에서 치료의 결과를 듣기 위해서 기다리는 동안 유스테스의 모습은 나타나지 않았다.

클레온은 조금 전 그에게 했던 소리를 곱씹는다.


"... 파티는 해산이군."

그리고 결론을 내린 것이었다.

"... ... 그럴까요?"

그의 말에 의문을 표한 것은 이오나였다.



"어차피 유스테스가 나에게 관심을 가졌던 것은, 아이가 새로운 장난감에 흥미를 느낀 수준이다. 이번 걸로 완전히정이 떨어졌을 수도 있어."

답지 않게 흥분하여 언성을 높인 것에부끄러움을 느끼는클레온.

부디 이오나가  이야기를 다른 이들에게 퍼뜨리지 않아 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뿐이었다.



"하지만. 당신이 말한 것은 틀리지않았어요. 모험은 위험하고, 사람의목숨도 중요한 법이죠. 그것을 모두 짊어지기에는... 유스테스는 너무 부족해요."

임무를 망쳤다는 것을 자책하는 듯한 클레온을 위로하는 이오나.

클레온은 그런 이오나를 잠시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머…. 클레온?"

그때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

클레온은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왜냐하면, 자신은 아직도 여검사 레오나의 모습을 취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곳에 있는 것은 오랜 세월 이 신전에 소속된 성직자였다.

쿠온이 한사람 몫을 하기 전에 알베인이나 클레온의 상처를 몇 번이고 치료해 주었다.

쿠온에게는 자신이 알고 있는 치유술의 비법을 가르쳐주기도 한 스승과도 같은 사람이다.



그런 그녀는 조용히 고개를 갸웃거린다.

나이가 지긋하고, 인자한 미소를 띠고있었지만.

눈앞이 보이지않는 맹목의 여성이었다.

"아, 아뇨…. 저는 레오나입니다."

클레온은 당황하여 말을 더듬었다.

이오나도 무언가 눈치를 챘는지 조용히 아무 말 없이 두 사람의 사이를 바라보았다.



"어머. 그랬군요. 죄송해라…."

맹목의 성직자는 부끄럽다는  웃으며 이야기를 계속했다.



"...그러고 보니 클레온은 이미 이 세상에 없었죠. 현상수배라니…. 그 아이가 그런 짓을 할 아이가 아닌데."

"... ..."

"알베인도 왕국에 잡혀가고.  때문인가, 쿠온도 요즘 보이질 않던데."

걱정된다는 듯 알고 있는 이름을 꺼내는 성직자.

클레온은 켕기는 많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



"아이고. 나이를 들으니 주책없네요. 관계없는 사람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다니."

"아, 아니요…. 소문은 들었으니까요."

그러면 맹목의 성직자는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고는 더듬더듬. 손을 움직여 클레온의 손을붙잡았다.



"혹시라도 쿠온…. 죄송해요. 제가 눈이 보이지 않는 터라 그 아이가 어떻게 생겼는지를 몰라 이야기를 해 드릴 수는없는데…."

"...초록색 머리카락이 인상적인 귀여운 여자아이죠."

"어머! 쿠온과 아시나요? 그러면, 쿠온에게 전해주세요."

마침 잘됐다는 듯이 환하게 웃는 성직자.

"마음에 상처를 입었다면, 언제라도 이곳을 찾아와달라고. 늙은이가 해줄 수 있는 건 이야기를 들어주는것밖에 없지만요."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번이고 클레온의 손을 잡고 흔들며 부탁해 왔다.

클레온은 알았다고 이야기한 뒤 그녀를 떠나보내고 자신의 손을 내려다본다.


"...좋은 분이시네요."

"... ..."

클레온은 무언으로 긍정했다.

동시에, 이런저런 감정으로 머릿속이 가득해진 것이었다.

"...오늘은 이만 해산해요. 당신도 휴식이 필요할 것 같네요."

그렇게 말하며 이오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클레온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고개를 끄덕인 클레온 역시 그녀의 뒤를 따라 신전을 나섰다.

몇 번이고. 자신의손을 붙잡은.

상냥하면서도 굳은살 박인 주름진 손의 감촉이 그의 손에서 떠나질 않았다.

003


"... ..."

유스테스는 머리에 물을 뒤집어쓴 채 부어오른 얼굴을 문질렀다.

편익의 반지를 잃었다는 것을 보고하자 먼저 물컵이.

그다음에는 아버지의 따귀가 날아왔다.



하지만 어째서일까.

어제와 같이 아버지에 대한 분노나 분함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것보다도  큰 것은.

자기 자신에 대한 분노.



`부족하다는 거야. 각오도. 실력도.`

레오나의 말이 몇 번이고 머릿속에 맴돈다.

던전에서 이곳으로 돌아올 때까지.

자신이 그때 주저하지 않고 반지를 버렸다면.


티오라는 평민이 다칠 일도 없었을 것이고.

자신이 레오나에게 얼굴을 맞는 일도 없었을 것이고.

지금쯤, 다 같이 승리의 노고를 풀며길드에서 잔을 기울이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지 못한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

모두 자신에게 있었다.

"젠장…."

난생처음 느껴보는 자괴감.

유스테스는 너무나도 늦은 나이에 후회를 겪고 있었다.

이 분노를어떻게 풀어야 할지.

주변에 있는 아무도 가르쳐 주지 않았다.

"어엉? 뭐냐. 바보 아들놈 아냐?"

그때, 하늘이 뚫린 저택 내의 정원에서 들려오는

자신의 귀를 거슬리게 하는 남자의 목소리.

한 손에는 고급스러워 보이는 포도주병을 든 채. 다른 손에는 고깃덩어리를 안주 삼아 술을 기울이고 있는 거한.


"...검성, 탈체크...!?"

유스테스는 그런 남자의 모습을 보고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그 역시 왕국 수도에서 지내면서 탈체크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적도 있고, 그의 얼굴을 본 적도 있다.

하지만 직접 이렇게 대면하는 것은 처음일뿐더러 그가 왜 자신의 저택에 있는지 알 길도 없었다.

"왜 그리 죽상이야? 여자한테 차였느냐?"

"시, 시끄러워! 술 냄새 나니까 얼굴을 들이 미지 마!"

유스테스는 바로 전에까지의 고민을 묻어버리고  자리에서 벗어나려 했다.

"에잉…. 도망가기는. 사내놈이 겁이 많아서."

탈체크가 그 말을  때까지는.


...도망.

생각해보면. 루베라가 있을 때의 자신도 언제나 도망쳐왔다.

뒤를 쫓아오는 위험을 루베라가 베어냈을 뿐.

그리고 그렇게 쌓아올린 업보가 오늘 자신에게돌아왔다.



경멸하듯 바라보던 레오나.

이오나의 동정심 어린 시선.

그리고…. 자신을 안심시키려는 듯 손을 뻗었던 티오.


유스테스는 손을 꽉 쥐었다.

그리고 자신을 무시한 탈체크를 돌아본다.

"검성 탈체크. 부탁이 있다."

"부탁? 하하, 뭐냐. 누구를 베어줄까? 사랑의 라이벌이냐?"

유스테스의 말에 그를 놀리는 듯한 대사를 내뱉는 탈체크.

하지만 이내, 그 표정이 진지하다는 것을 본 그가 눈빛을 바꾸었다.

"나에게 검을가르쳐다오! 검성 탈체크의 검이라면 조금은 강해질 수 있겠지!"

침묵이 흘렀다.

유스테스는 탈체크를 바라보며소리친 상태로 몸을 굳힌 채.

탈체크는 그런 유스테스를 보며 들고 있던 육포를 떨어트렸다.


"... ... 하, 하하. 하하하하하하. 하하하하하하하하하!!!"

그리고 집안이 흔들릴 정도로 웃음소리를 울리는 탈체크.

그 눈은 광기와도 같은 것이 보일 정도였다.

한참을 웃어 재끼는 탈체크를 보며 얼굴을 찌푸리는 유스테스.


"뭐냐! 그 태도는!"

"아니, 아니…. 미안하군. 크크…. 그래. 나에게 검을 배우고 싶다고?"

"그래!"

탈체크는 턱을 괴며 생각했다.



 녀석의 아비는 똥 덩어리 같은 인간이다.

타인의 가치를 실력과 숫자로만 판단하고, 깔보고 무시한다.

절대로 남을 인정하지 않으며 모든 것을 지배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인간이었다.



하지만 눈앞의 이 바보.

바보에 겁쟁이에 무능하지만.

`똥 덩어리`는 아니다.



솔직하게 타인에게 가르침을 구할 수 있다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 인간이었다.

탈체크에게 있어 누군가를 가르치는 데에 필요한 것은 그가 선인이냐 악인이냐 따위가 아니었다.

간절하게 검을 배우고 싶다는 마음과 그 이유가 엿보이는지.



오직 그 기준만이 절대적이었다.


"좋아! 가르쳐주지. 하지만 우선.  멍청이 같은 갑옷과 쓸모없는 대검을 팔아치우고 와라."

"뭐!? 하지만…."

이게 얼마짜린데 라고 말하려는 유스테스를 탈체크가노려본다.

"검을 배우고 싶지 않은 거냐?"

"큭... 아니. 알겠다."

그럼 유스테스는 어쩔 수 없다는  고개를 끄덕인다.

"그리고 도시 남쪽에 있는 상점가에 오래된 대장간이 있다. `볼트`라는 녀석이 2대째로 경영하고 있는데. 거기서 철제 장검과 경갑옷을 마련해 와라."

"장검과 경갑옷!? 그 정도면 우리 창고에도…."

"한 번  토를 달면 수업은 없다."

다시 한  탈체크의 안광이 빛나면 유스테스는 조용히 그 말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제, 젠장…."



`...일이꽤 재밌어졌지 않느냐. 감사한다 클레온. 이게 모두 네 덕분이다.`

탈체크는 진심으로 즐겁다는 듯이 웃어 보이는 것이었다.


004

집에 돌아온 클레온은 도시에서 있던 일을 모두에게 공유했다.

"그럼 오늘은 온종일 여자의모습으로 있던 거야?"

우선 거기에 의문을 표하는 루티.

클레온이 루티를 살짝 바라보면 `아하하` 하고 멋쩍은 얼굴로 고개를 돌린다.


"티오씨…. 라고 했지?"

쿠온이 조심스럽게 물어보면 클레온은 고개를 끄덕인다.

"도시를 떠나기 전에  번 이야기 해 본  있어. 굉장히 상냥하신 분이신데…."

그런 일이 일어나서 안타깝다.

라는 얼굴이지만 입 밖으로 내지 않는다.

자신이그렇게 말하면 클레온이 신경을 쓸 테니까.


하지만 클레온도 쿠온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사람 사이에 묘한 기류가 흐르면…. 라일라가 한숨을 내쉰다.



"클레온. 내일 장 좀 봐 와."

"벌써 식량이 다 떨어졌나? 그래. 알았어."

"어? 하지만 아직 재고가…."

쿠온이 무엇인가 말하려 하면 라일라가 쿠온을 향해 잠시 눈길을 보내고

쿠온은 어째선지 모르지만 그 눈초리에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쿠온도 같이 갔다 와."

"...나도?"

눈을 동그랗게 뜨며 라일라를 돌아보는 쿠온.


라일라는 고개를 끄덕이며 쿠온을 가리켰다.

"그래! 나야 조용히 연구할 수 있으니까 여기가 맘에 들지만. 쿠온은 벌써 며칠이나 도시에 돌아가지 않았잖아."

"그건….  혼자 가봤자 따로 할 수 있는 게 없기도 하고. 혹시라도 누가 모두의 행방을 물어오면…."

쿠온이 걱정스럽다는 듯 고개를 떨어트리면 라일라가 `훗`하고 웃는다.

"체인질링!"

그리고 갑작스럽게 발동하는 마법.

쿠온과 클레온이 동시에 대상이 돼서 발동하면.

 자리에는 조금 수수해진 얼굴과 체형이  쿠온과 머리색이 금색으로 바뀐 벽안의 클레온이 있었다.

"... ... 뭐야 이건?"

"루티의 비... 아니, 마법을 조사하면서 얻은 연구의 성과물이야. 일단은 환영마법이니까 실체가 변한 건 아니고. 어디까지나 타인, 자신에게 그렇게 보일 뿐이지."

라일라는 자랑스럽다는 듯이 손가락을 빙글빙글 돌리면 쿠온과 클레온은 서로를 바라본다.


"... 라일라 너…."

그리고 루티가 입을 열자.

"거기까지! 나는 마법의 실험을 하고 싶었을 뿐!"

후우- 하고 검지의끝을 손으로 불며 자랑스럽다는 표정을 짓는 라일라.

그런 라일라를 보며 쿠온은 고개를 숙인다.

"고마워…. 라일라."

"뭘 이런  가지고."



클레온은 그런 라일라와 쿠온을 바라보며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의 가슴 한편에 내일에 대한 자그마한 기대가 싹을 틔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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