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1화 〉3부 막간
"진실하고 공정한 왕국 법도에 따라, 우드녹커 가문의 작위를 `후작`에서 `남작`으로 격하하고. 재산의 7할을 몰수한다."
무겁고 낮은 목소리가 사무실에서 울려 퍼졌다.
의자에 앉은 채로 왕실의 전령으로부터 판결을 전해 듣는 유스테스는.
어떤 불만도 표현하지 않고 겸허히 그 결과를 받아들였다.
본래라면 왕국에 지대한 피해를 줄 수 있는 조직과 사건에 연루된 범죄자.
휴즈 우드녹커의 만행으로 인해 귀족 작위는 물론, 연대책임으로서 가문 전체가 멸족될 수도 있는 사건이었다.
하지만 복귀한 길드 마스터 루티 시온스의 증언으로
그가 절계수 토벌에 많은 공을 세웠다는 것을 참작하여.
가문의 작위 강등과 재산몰수 외의 처벌은 면하게 되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3할밖에 남지 않은 재산으로는 가업인 사업을 이어나갈 수 없을 것이고.
사용인들이나 휴즈의 첩들 역시 더는 가문에 머무르지는 않겠지.
왕국 수도에 있는 본가 역시 지금쯤 왕실의 인간들에 의해 재산을 몰수당하고 있을 것이다.
왕실의 인간들이 돌아간 뒤.
유스테스는 텅 비어버린 저택을 정리했다.
아버지가 남긴 기분 나쁜 골동품들은 물론이고.
자신에게는 필요가 없어진 집안의가구들은 필요한 이들에게 나눠주기로 했다.
마지막으로 그에게 남은 것은.
구멍이 숭숭 뚫린 경갑옷.
그리고 은빛으로 빛나는 성검 미스틸테인.
절계수와의 싸움에서 힘을 많이 쓴 것인지.
그날 이후로는 마력이 약해진 것이 느껴졌지만.
유스테스에게는 여전히 과분할 정도로 가볍고 날카로운 명검이었다.
오늘부로 이 저택도 다시 소유주가 없는 건물이 된다.
유스테스는 작은 가방에 짐을 챙기고 마지막으로 수련장의 문을 잠가 걸었다.
귀족의 지위는 남아있지만 그런 것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
사업에도 재능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
아버지처럼 상인이 될 생각도 없었다.
"오! 왔구만."
저택을 나선 유스테스가 찾은 곳은.
이전, 자신의 갑옷과 검을 만들어준 `볼트`의 대장간이었다.
수염이 덥수룩하고, 전신의 근육이 유스테스의 두 세배는 되어 보이는 듯한 남자.
대장간의 주인인 볼트가 유스테스를 반갑게 맞이했다.
이전 유스테스가 보였던 거만한 태도는 별로 신경 쓰지 않는 다는 듯이.
입에는 웃음기를 띄우고 있었다.
"며칠 사이에 꽤 남자다운 얼굴이 되었군."
볼트는 그렇게 말하며 준비해둔 물건을 올렸다.
이전에 주문했던 것과 같은 형태의 `경갑옷` 그리고 `철제 장검`.
"갑옷은 새로 만드는 편이 낫다고 이야기했으니까 말이야. 뭐, 그 구멍 난 녀석도 일단은 고쳐주마."
그렇게 말하며 유스테스가 들고 있던 갑옷을 건네받는다.
"하지만. 이제 와서 내 검이 필요한가? 그 허리의 성검이 있다면 굳이?"
유스테스는 슬쩍 자신의 성검을 보더니 입꼬리를 올렸다.
"탈체크는 성검이 없어도 `검성`이었으니까. 나는 그 마지막 제자로서 그 가르침을 따를 뿐이다."
"크크. 멋진 척 하기는. 며칠 배우지도 못했으면서"
그렇게 말하며 검집에 들어있는 검을 건넨다.
유스테스가 주머니에서 값을 내려 하자 볼트가 손을 저었다.
"아버지의 친구의 제자에게 보내는 선물이라고 생각해라."
볼트는 그렇게 말하면서 경갑옷을 가지고 대장간의 안으로 들어갔다.
유스테스는 조금 멍한 얼굴로 그런 볼트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아무 말 없이 가방에서 아버지의 창고에 있던 술 한 병을 꺼내서 두고 그 자리를 떠나는 것이었다.
그 발걸음은 절대 가볍지만은 않았다.
이런저런 일을 겪고 성장했다고 하지만.
본인은 아직 일인분도 제대로 해내지 못하는 인간이었다.
그렇기에, 조금 더 나아가지 않으면.
어머니에게도, 티오에게도, 탈체크에게도.
언젠가 다시 만날 날에 면목이 없는 것이다.
그리고.
"레오나…. 언젠가 꼭. 당신의 귀에도 제 이름이 들어갈 수 있도록."
주먹을 꽉 쥐며.
청년은 모험가 길드의 문을 여는 것이었다.
001
루티와 페르디아는 천천히 걸으며 도시의 관문을 통과한다.
두 사람 모두 아직 업무가 시작되지 않을 정도로 이른 시간이지만.
"후~ 가버렸네. 모두."
루티가 조용히 한숨을 내쉬며 이야기하자, 페르디아는 옆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클레온님과 그 일행 분들이, 무사히 아카데미에 도착하셨으면 좋겠네요."
"응. 괜찮겠지. 모두강하니까."
이번에는 루티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다시 만나게 될 날이 언제가 될지는 모른다.
한 달, 어쩌면 1년. 어쩌면 그보다도 더 나중.
사람의 일이라는 건 어찌 될지 모르는 법.
물론, 클레온이 늙어 죽을 때까지 수명으로 죽을 일은 없는 루티로서는 괜찮았지만.
"괜찮아? 페르디아."
"네. 물론 클레온님, 라일라님, 사샤님,쿠온님과 떨어지는 것은 쓸쓸한 일입니다만…."
페르디아는 가볍게 손을 자신의 가슴 위에 올린다.
"이 도시에서 제가 해야 할 일이 있고, 언젠가 다시 만나게 될 테니까요."
페르디아 역시 모두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이곳에서 그들이 돌아올 자리를 지키겠다는 듯.
루티와 바라보며 웃음을 지었다.
"그럼 나중에 또 뵙겠습니다."
도시의 광장에 들어선 페르디아가 허리를 꾸벅 숙이며 몸을 돌리면.
루티도 길드가 있는방향으로 걸어간다.
하늘은 쾌청. 오늘도 기분 좋은 바람이 분다.
자신과 떨어져 있는 동안.
그들의 앞길에도 이런 바람이 불어주길.
"... ..."
다음 순간.
그녀의 옆을 스쳐 지나가는 돌풍이 있었다.
루티가 놀라면서 고개를 돌리면.
그곳에는- `그녀`가 서 있었다.
땅에 닿을 정도로 긴 보라색 머리는 커다란 줄기를 제외하고도 몇 가닥으로 엉망진창으로 땋아 있었다.
몸에 걸친 것은 꽤 활동하기 좋아 보이는 바지와 천 재질의 겉옷.
달라붙는 재질은 아닌 듯했지만바람이 불 때마다 흔들리는 옷에 드러나는 굴곡이 보였다.
가장 눈에 띄는 특징으로, 키가 굉장히 큰 편이었다.
클레온보다도 머리 하나는 더 크지 않을까.
그런 그녀의 머리에는 마치 옛날이야기의 마녀들이 쓰는 것과 같은.
챙이 넓은 남색의 모자가 씌워져 있었다.
그녀가 챙의 끝을 슬쩍 올려, 눈을 보이면.
그 눈은 마치 흘러넘치는 마력의 각인이 발현해 있었다.
보석의 호박과도 같은 색에 떠오른 십자의 불꽃.
그것은 `현자의 눈`이라는 특수한 각인으로.
세상에서도 단 한 명만이 가질 수 있는 마법이었다.
"오랜만이야! 루티!"
오랜 친구를 부르는 듯한 목소리.
루티는 침을 꿀꺽 삼키며 웃어 보였다.
하지만 내심, 그녀의 등장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검성 탈체크, 용사 레시아와함께 여행했던 4 영웅 중 한 명.
그들과 함께 자신을 꺾은 `대현자`.
"소, 소피아."
호쾌한 미소를 짓는 그녀의 이름이었다.
"클레온 어딨어?"
002
"루베라~"
산길을 종종걸음으로 걸어가며 주인의 이름을 부르는 소녀.
복장은 여전히 시종 용의 복장으로.
리본이 달린 여성용의 페도라를 눌러쓰고 얼굴을 가린 루베라가 옆에서 걸으면.
정말로, 귀족 아가씨와 그 시종인 소녀 메이드로 밖에보이지 않을 듯했다.
"이번엔 또 뭔가요."
벌써, 도시를 벗어나고 나서 하루를 넘게 걷는 동안.
자신의 성검- 바리사다는 몇 번이고 자신의 이름을 부르며.
이것저것을 물어온다.
무시하면 편하겠지만-.
"어째서 클레온과 함께 가지 않은 거야?"
"그건…. 저는 딱히 같이 갈 이유가 없어서입니다."
이런 식으로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만 해온다.
이유는 알고 있다.
바리사다의 몸을 구성하고 있는 마력 대부분은.
클레온과 몸을 섞으면서 받아들인 것이다.
바리사다의 현현체 역시 클레온에게 적지 않은 끌림을 느끼고 있는 것이겠지.
그것을 생각하면 조금 머리가 아프다.
자신 말고도 자신의 마검까지.
"핫."
헛웃음이 나왔다.
분위기에 휩쓸려선 안 됐다.
"물론. 도움을 받은 것도 맞고. 합이 잘 맞는 것도 인정하지만."
그런데도.
이렇게 쉽게 마음을 허락할정도로 자신은 쉬운 여자였던 것일까.
지금까지 자신을 닥친 모든 불행이.
그저, 그가 옆에 있어 준다면.
견딜 수 있을지도 모른다니.
그런 말, 절대로 그의 앞에서는 하지 못하지만.
루베라는 바리사다를 내려다보았다.
"언제까지도 그의 도움을 받고 있을 수는 없습니다. 저희는 저희가 해야 할 일을 하죠."
"응. 왕도에서 흑마의 일족의 창관을 운영하는 녀석들을 혼내주는 거지?"
루베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후작은 죽었지만, 그로부터 노예를 사들인 이들은 아직도 어둠 속에 남아있다.
지금의 자신에게는 그들을 처리할 힘이 있다.
그렇다면 행동으로 옮기지 않을 이유는 없었다.
그때.
부스럭. 하는 소리를 내며 복면을 한 남자 셋이 산의 수풀에서 걸어 나왔다.
"크크…. 왠 아가씨가 시종이랑 단둘이 이런 곳을?"
"보니까 어디 부잣집 아가씨 같은데…. 여러모로 즐길 수 있겠는걸?"
"작은 년은 내 거다! 너희는 건들지 마!"
보기만 해도 머리가 아파질 정도로 천박하고 멍청한 산적들이었다.
"...하아."
루베라가 손에 들고 있던 짐가방을 내려놓고 바리사다의 손을 붙잡았다.
"허튼짓을 할 생각은-"
다음 순간.
그녀의 몸이 그들의 위로 이동한다.
손에 쥐어진 것은 아름다운 흑도.
빙글- 하고 회전하는 그녀를 보며 남자들은 잠시 넋을 일었다.
"하늘 기둥."
003
아무것도 없는 듯한 검은 공간.
그 가운데에는 검은 로브를 뒤집어쓴 인물만이 서서.
조용히 무언가, 책과 같은 것을 읽다가.
느껴지는 인기척에 그것을 덮었다.
그가 양쪽 손을 들어 올리자.
그를 중심으로 바닥에 미리 새겨져 있던 마법진이 빛을 내며 떠오른다.
원을 중심으로 균일한 거리의 세 방향으로 뻗어 나가는 빛의 줄기를 따라가면.
어느 샌가, `석판`과도 같은 것이 허공에 떠, 각기 다른 색의 빛을 내고 있었다.
그 중, 푸른색의 빛을 내는 석판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라일라 플레임워치가 돌아온다."
목소리는 중년 남성의 것이었다.
인간의 모습은 보이지 않지만, 그 석판을 이용하여 얼굴을 보이지 않고 대화가 이루어진다.
"절계수의 토벌에 사용한 용언 마법인가. 흥미롭군."
다음으로 목소리가 난 것은 초록색의 석판이었다.
이쪽에서 난 것은 젊은 여성의 목소리였다.
"하지만 무엇보다 흥미로운 것은, 그녀와 함께하는 그녀의 일행들. 그중에서도 `클레온`이라는 인물이로군."
마지막으로 목소리를 낸 것은 붉은색의석판이다.
그 목소리는 남성인지 여성인지 잘 알 수 없는 중성적인 것이었다.
"라일라는 완전히 그들의 편이다. 아마, 배신 따윈 생각하지 않을거야."
푸른색의 석판이 내는 목소리에, 두 석판은 잠시 침묵했다.
그리고-
"상관없다. 그녀는 그녀대로 쓸 만한 곳이 있으니."
붉은색 석판의 이야기에 초록색 석판이 웃음소리를 흘렸다.
그럼, 그 순간까지 조용히 있던 검은 로브의 인물이 입을 연다.
"어찌하시겠습니까. 검은 교전이시여."
가르침을 구하는 제자와도 같은 목소리로.
세 석판에 질문한다.
그러자, 세 석판은 말을 멈추었다가.
그들의 유일한 제자에게 가르침과 시련을 내리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