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5화 〉45화-합작
45화-합작
성녀가 온다. 교국의 성녀가 온다.
그 사실 하나만으로, 그녀가 어떤 존재인지 아는 이들은 격렬히 반응하기 시작했다.
누군가는 진심으로 기뻐하며 환호했고, 누군가는 재빨리 짐을 싸서 도망갈 준비를 했다.
고작 온다는 소식 하나만으로 도시 전체를 들썩이게 하는 존재.
혼자서 한 개 기사단 이상의 무력을 갖고 있다는 강자.
"저기 보이는군."
함께 성벽에 선 루카스가 저 너머 저 멀리 보이는 이들을 보고 손가락질 했다.
길을 따라 이곳으로 오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 그들은 성녀 아리아를 진심으로 믿고 따르는 레덴교의 신자들이었다.
그 중앙에 있는 성기사단 한가운데서 그녀의 모습이 보였다.
아직 그들의 모습이 점만하게 보이는 수준이지만 감각을 집중한 내 눈에는 그녀의 모습이 선명히 보였다.
차려입은 화려한 갑주, 찰랑거리는 단발의 은발과 번득이는 금안.
굉장히 아름다웠지만 게임에서 보던 보스몹의 이미지가 워낙 강력히 박혀 있다 보니 괜히 긴장되었다.
"어떤 방식으로 그녀를 조교하실 겁니까? 아름다운 모습 뒤에 숨겨진 광기와 강함은 쉽사리..."
"생각을 해봤다. 나보다 월등한 존재를, 네 도움 없이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 해답은 하나 뿐이다. 바로 약점을 잡는 거지."
점차 가까워지는 성녀를 보며 루카스가 자신의 생각을 말해주었다.
이치에 맞는 정석적인 대답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 약점이 뭔지, 그리고 어떻게 손에 넣어야 하는지가 핵심이겠지.
"하지만 그 약점을 어떻게 얻지요?"
"스스로 보이게 만들어야지. 일단 그 단서는 명확하고 확고한 것이 하나 있다."
그는 천천히 손을 들어 저 멀리 보이는 무언가를 가리켰다.
시선이 손가락을 따라간 나는, 그가 무엇을 가리켰는지 보고 예의에 맞지 않게 무심코 실소했다.
그가 가리킨 곳은 베셀의 레덴교 신전.
그는 지금 레덴교 성녀의 약점을 쥐겠다고, 레덴교를 이용해 먹겠다 선언한 것이었다.
"설령 신의 천벌을 받아도. 네가 막아 줄 것이라 믿는다."
"...레덴은 그렇게 전능한 존재가 아닙니다."
나도 이를 드러내며 히죽 웃었다. 갈수록 마음에 들어간다.
"어서 오시오."
"환대에 감사드립니다 각하."
성문 앞에서, 마중을 나온 헥트 백작과 성녀 아리아가 마주쳤다.
내 잘못이라 할 수 있는 글레트리아의 병력을 갉아주는 성녀를 보자마자 조교할 생각부터 하다니 좀 찔린다.
"내가 시킨게 아니오. 이들 모두 자신의 의지로 나온 것이지."
"모두 여신님의 은총 덕입니다."
아리아에 대한 사람들의 지지가 상당했다.
특히 정체를 알 수 없는 괴물들이 출몰하고 아리아가 놈들을 처단하고 다닌다는 소식이 퍼지자 더더욱.
레덴교의 충성도가 높아지는 이런 현상, 이 일대의 위정자인 헥트 백작은 당연히 좋아하지 않는것 같았다.
나는 일단 그녀를 주시하며 힘을 움직였고 곧 그녀의 상태창이 떠올랐다.
[아리아 폰 레스트펠트(19세)]
[성향: 독선, 집착, 광기]
[특성: 최상급 신성기(S)]
[특이사항: 남성혐오]
[*보스급 적을 열람할 때는, 상대방의 감각을 조심하십시오]
"..!"
그녀의 상태창을 채 다 읽기도 전에, 나는 숨을 들이켰다.
"왜 그러시오?"
"하."
갑작스레 일그러진 그녀의 표정에 헥트 백작이 의문을 가진 사이, 아리아는 그를 무시하고 주변을 두리번 거리기 시작했다.
들키진 않았다. 다만 좀 놀라긴 했다.
설마 알아차릴 줄은 몰랐는데.
"각하, 도시 내에 쥐새끼가 있는 것 같습니다?"
"그렇소? 나는 전혀 모르겠군."
"흐응..일단 가시죠."
코웃음을 친 아리아는 계속해서 주변을 경계하며 백작과 함께 멀어져 갔다.
그리고 나는 나름의 기준으로 정한 이번 조교 의뢰의 난이도를 더 올렸다.
"왜, 왜 그러느냐?"
내 분위기를 읽었는지 루카스가 긴장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에게 내가 본 이야기를 해주니, 그 역시 얼굴이 굳었다.
"정말 아무것도 없었지요?"
"그렇습니다. 근처 마법사들을 모두 탐문해 봤지만 말씀하신 수준의 마법사는 애초에 현장에 없었습니다."
"알겠어요. 나가보세요."
그녀는 부관을 내보냈다.
그리고 혼자 남게 되자, 굳은 얼굴로 생각에 잠겼다.
겉으로 보기엔 사소하고 짧았던 찰나의 틈.
그리고 그 틈새에 자신의 몸을 꿰뚫어 보듯 관통한 정체 불명의 힘.
"감히...이 신성한 몸을.."
그녀의 눈이 순간 번득였다.
대대로 성녀의 몸은 자신의 것이 아니었다.
조금의 가감 없이 온전히 여신 레덴에게 바쳐진 성체.
레덴을 위해 살고 레덴을 위해 싸우다 레덴을 위해 죽는 것.
그것이 그 자체로 한 자루 성검으로 벼려지는 성검교국 성녀의 삶이었다.
그런 몸을 건드린 것은 곧 레덴을 욕보이는 것.
누군지 알기만 하면 자신은 물론 성기사단 전체가 나서 찢어 죽일 것이다.
"성녀님. 백작이 보내온 정식 공문입니다.
그렇게 그녀가 속으로 좀처럼 가라앉지 않는 화를 삭히고 있기를 잠시.
나갔던 부관이 다시 돌아와 정중히 노크했다.
"...그래서요."
"거꾸로 드셨습니다. 제가 읽어 드리겠습니다."
공문을 들고 노려보던 아리아가 그 문서를 다시 부관에게 건넸다.
부관은 공문을 넘겨 받아, 그것을 읽어 주었다.
내용 자체는 별 것 없었다.
헥트 백작가와 교국이 정식으로 협력하여, 괴물 군대와 그에 협력하는 황금숲의 엘프들을 토벌하자는 내용이었다.
"어차피 저희가 결정할 수 있는 건 없군요? 그대로 교국으로 보내면 될 것 같네요."
"그렇게 하겠습니다."
"답답할테니 이제 투구 벗어요 엘라."
그녀의 명령에 부관은 면갑까지 덮여 있던 투구를 벗었다.
투구 안에서 드러난 얼굴은 단발 머리를 쪽져 묶고 있는 젊은 여기사였다.
"백작이 저녁 만찬에 초대했습니다. 가실 겁니까?"
"가기 싫지만, 가야겠죠. 어쨌든 한동안 머물러야 하고."
그녀가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내려진 명령은 정찰 및 헥트 백작과의 접촉.
싫어도 명령은 명령이었다.
"성녀님께서 오셨습니다."
"모셔라."
헥트 백작이 명령하자 문이 열렸다.
호화롭기 그지 없는 만찬장, 성녀 아리아가 직속 부관으로 보이는 여기사를 대동하고 들어왔다.
와, 저 갑옷. 진짜 보기만 해도 숨이 막힌다.
게임에도 입고 있던, 유저들의 원성을 사던 속칭 정조 갑옷.
갑옷이 아닌 슈트처럼 몸의 라인과 굴곡을 드러내지만 그럼에도 조금의 틈 없이 전신을 감싼 판금 갑옷에 드러난 곳이라고는 목 위 얼굴 밖에 없다.
"이거..생각지 못한 분들이 좀 있는 것 같습니다. 노먼 자작이나 게일 남작 같은 가신분들은 어디 가시고."
"우리에 대해 모르는게 없으시군. 그들은 지금 업무중이라 어쩔 수 없었소."
백작은 태연하게 받아 넘겼다.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이들은 백작과 루시안, 레아나와 루카스. 그리고 다른 하녀들과 뒤에 서 있는 나.
애초에 이 자리 자체가 고의적으로 만들어진 자리였다.
"엘프라니. 황금숲의 엘프들은 적이라 하지 않으셨습니까."
"모두가 그런게 아니오. 그들도 그들만의 사정이 있지."
레아나를 보는 성녀의 눈은 복잡 미묘해 보였다.
성녀가 입은 빈틈 없는 갑옷과 대비되는 레오타드 갑옷 덕분에 더더욱.
"레아나라 합니다."
"이종족에게 인간의 예법을 강요할 순 없는 노릇. 그냥 아리아라 부르시죠."
실제 엘프를 보는 건 처음이라던 성녀 아리아는 레아나와는 그다지 무리없이 인사를 나누었다.
시선 자체도 다른 이들을 볼때에 비하면 좀 부드러운 편이었다.
하지만 조금 부족한 반응이었다.
루카스와 함께 계획한 바를 이루려면 조금 더 격한 반응이 나오길 기대해야 하는데.
단순히 남성혐오라고 여자를 좋아하는 건 아닌건가?
"레아나는 내 아들의 연인이지. 그리고 자신의 자리를 되찾고 싶어하고 있소."
백작이 자신이 원하던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듣기로는 레아나를 이용해 관심을 이끌어내고, 엘프들과의 전쟁에서 협력을 이끌어낼 계획이라 했다.
"이런, 우선 식사부터 하지."
백작과 대담할 때는 아리아의 표정이 워낙 무감정해 백작의 계획이 잘 풀려가는지는 모르겠다.
대충 이야기가 진행되었을 때, 백작은 잠시 뒤로 밀렸던 식사를 진행시켰다.
"어쩌죠?"
"일단 지켜보는 수밖에. 남성혐오가 진짜 같기도 하니, 섣불리 접근했다간 큰 사고로 이어질 거다."
루카스에게 시중을 들며, 계획을 속삭였다.
우리가 세운 계획은 일단 전부 틀어졌다.
적어도 아리아가 조금의 틈이라도 보여야 뭔가 시도를 해볼 텐데.
"이런 추악한..!"
그리고 그 틈은, 우리도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서 터졌다.
"무슨 짓이오!"
"성녀님!"
만찬장이 뒤집어 졌다. 시종일관 여유롭던 헥트 백작도 얼굴을 굳히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날 정도.
루시안은 검을 뽑아 아리아를 겨누었으며, 그녀의 부관 역시 기겁해 아리아를 뜯어 말렸다.
"제 하녀에게 무슨 짓입니까?"
"닥쳐라 쓰레기야. 감히, 소녀에게 이게 무슨 짓이냐."
그러나 주변 시선을 모조리 무시한 아리아는 무시무시한 기운을 몸에 두르곤 살의를 숨기지 않고 루카스를 노려보고 있었다.
졸지에 손목을 잡혀 그녀의 품에 빨려들어간 나는 딱딱한 갑주에 머리가 부딪혔다. 이게 대체 무슨...
"도대체 무엇이 문제인지 모르겠군요."
"처음 부터 역했다. 네놈이 누군지 이미 알고 있어 조교사. 네놈이 업으로 삼는 그 추악한 짓거리를, 이런 무구한 소녀에게도 한 것이냐."
침착히 대응하는 루카스의 눈이 차갑게 굳었다.
나는 내 짧은 치마와 훤히 드러난 팔을 가리키는 아리아의 행동에 그제서야 상황을 이해했다.
확실히 빅토리아풍 정통 메이드복을 입고 있는 다른 하녀들에 비해선 코스튬에 가까운 내 차림새는 음란한게 맞았다.
하지만 그게 이렇게까지 반응할 일인가? 설마..설마 성녀 아리아는.
"단죄하겠..."
"성녀! 거기까지 하시오! 지금 이곳은 나의 영지, 그리고 벤 경은 나의 신하요! 그 이상 모욕한다면 교국에 정식으로 항의하겠소!"
아리아의 폭주는 기차 화통 삶아 먹은 것 같은 헥트 백작의 호령에 멈췄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입만 다물었을 뿐.
성향에 떡하니 박혀있듯 독선적이고 광기까지 가진 그녀는 여전히 나를 자기 품에 안은 상태였다.
적막이 자리한 자리에 진득한 기운이 번지고 있었다.
그 적막의 한가운데. 조용히 번득이는, 치켜뜬 아리아의 날카로운 시선은 모두 만만찮은 인물들인 현장의 모두를 움츠러들게 할 정도였다.
[저는 괜찮습니다]
루카스는 그 와중, 자신의 뇌리에 울리는 리아의 목소리를 듣고 움찔했다.
아리아의 품에 있는 그녀는 그에게 작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오해가 있는 모양입니다."
"오해? 이것에 오해가 있나?"
루카스는 그걸 믿고 입을 열었다.
그러자 아리아가 리아의 짧은 치마를 팔랑였다.
엉덩이의 낙인까지 본다면 더 큰일일 터.
"저는, 그 아이를 거둔 것 뿐입니다."
루카스는 선을 그었다.
갑작스런 말이었지만, 리아는 놀라지 않았다.
흔들리지 않는 그의 눈을 믿고 있었다.
"맹세코 손댄 적 없습니다."
"믿을 수 없다."
"그렇다면 확인해 보십시오. 그 아이를 빌려드릴 테니, 직접."
루카스는 연달아 파격적인 제안을 이어갔다.
그리고 그 순간 아리아의 눈이 움찔했다.
'찾았다. 약점.'
루카스는 그걸 놓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