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6화 〉55화-게임 시작
55화-게임 시작
"...?"
순간 상황을 파악할 수 없었다.
마지막..내 눈이 기억하는 마지막 기억은 분명 성대하게 절정하는 아리아의 음부.
하지만 지금 이곳은 오직 어둠뿐인 공간이다.
본능적으로, 절대 평범한 곳이 아님을 알아차렸다.
사방에 기분 나쁜 신성력이 가득하다.
들이쉬는 숨에도 느껴질 정도라, 나는 그냥 숨을 참아버렸다.
"숨을 참으면 말을 못하잖느냐."
"...누구지?"
어둠 속, 한 줄기 빛과 함께 누군가 나타났다.
빛을 두르고 있는 아름다운 여인.
그 기분 나쁘고 강렬한 빛에 얼굴을 제대로 보기 힘들 정도였지만, 나는 그녀가 누군지 알고 있었다.
"레덴."
"역시 신기해."
내가 경계심을 끌어올리자 그녀가 피식 웃었다.
언젠가 한 번 만날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존재긴 한데, 설마 이런 식으로 만나게 될 줄이야.
하지만 나를 보는 그녀의 반응은 예상과는 너무 달랐다.
마를 증오하는 빛의 신으로써, 그리고 플레이어의 협력자로서 마에 속한 보스몹들을 죽이지 못해 안달이 난게 그녀였는데.
"어리고 상처 입은 마룡아. 그리고 그 안에 들어 있는 이방인아."
"...!"
그리고 그녀가 천천히 입을 열어 그렇게 말했을 때, 나는 크게 움찔했다.
"놀랐느냐. 내가 너의 비밀을 알고 있어서?"
"대단하시군. 나도 다 까먹어버린 내 비밀을 알고 있다니."
"나도 흔적만 알 수 있을 뿐이다. 그러니 별 의미 없는 것이긴 하지. 이미 완전히 융합되었으니 결국 마룡은 너니까."
애써 여유로운 척 해봤지만 통하지 않았다.
레덴은 시종일관 여유로웠고 나는 그녀에게 꿰뚫리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애초에 신격으로 인정 받는 존재, 아무리 최흉의 보스몹이라지만 결국은 그녀가 직접 나서지도 않고 퇴치되는 수준에서 직접 비빌 수준이 못되었다.
"내가 직접 나설 수 있다면 진작 나섰겠지. 하지만 그러지 못하니 이러고 있는 것 아니겠느냐."
"그래서, 날 여기로 끌고 온 이유가 뭐지? 당신의 귀여운 신도를 괴롭혀서?"
"그것을 그 아이가 견딜 시련으로 만든건 나다. 뭐, 마지막 순간엔 견디기는 커녕 다 잊어버리고 몇 초 되지 않아 절정하며 실패해 버렸지만."
나는 식은땀을 흘렸지만 레덴이 웃음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아리아를 건드려서 화를 낼 줄 알았는데, 의외로 그 부분은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다.
"그래서, 시련에 실패한 아리아는 버릴 건가?"
"어쩔까 고민중이지. 악마 글레트리아는 예정을 깨고 너무 빨리 부활에 시동을 걸었고, 그에 맞춰 격변이 일어나고 있다. 심지어 세상을 구원할 용사들은 대부분 아직 교습소를 수료하지도 못하고 있으니. 이번에 추태를 보였다 하더라도, 나는 그 아이를 높게 평가한다. 아직은 때가 아니야."
"잠깐, 용사들?"
결코 가벼이 넘길 수 없는 그녀의 말에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녀가, 여신 레덴이 용사라고 부르는 이는 딱 하나 뿐이었다.
게임의 플레이어. 게임에서는 보스몹들을 잡을 수 있는 유일한 존재.
그런데 용사들이라니? 교습소라니?
플레이어는 원래 평범하게 모험가에서 시작하는 평범한 현지인이었다.
"지구라고 불리는 곳에서, 내가 이계에서 부른 용사들이지. 바로 너 처럼. 물론 너는 내가 부른 것도 아니고 정체도 모르겠지만."
"...이런 미친."
나도 모르게 욕설이 나왔다.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내가 정말 게임 속 세상에 떨어졌다면 혹시 다른 유저들이 있지 않을까 했었다.
그래서 날 죽이러 오기 전에 둥지를 떠난 거고.
하지만 그게 이런 식으로 꼬여 버리다니...
"두려우냐? 내가 그들을 시켜 너를 토벌하게 만들까봐."
"..."
그런 내 반응에서 무언가를 오해했는지, 레덴이 웃으며 말했다.
나는 그 반응에서 두 가지 확신을 얻었다.
일단 신격인 레덴조차 이 세상이 게임 속 세상인 걸, 내가 그 플레이어였다는 걸 모른다는 것.
그리고 그것을 근거로 레덴이 소환했다는 지구의 지구인들은 본질적으로 나와 같은 지구에서 온 이들은 아닐 것이라는 것.
평행세계든 어쩌든 그딴 건 상관 없다.
그들의 지구에선 이 세상을 배경으로 한 게임이 없었다는 뜻이었다.
그렇다면 어쩌면, 내가 상상하던 것 보다는 조금 일이 쉬울지도 몰랐다.
"그렇다고 대답하면 어쩔거지?"
"으하핫! 정말 귀엽구나!"
레덴이 좀 깨는 경박한 웃음을 흘렸다.
하지만 원래 레덴이란 캐릭터가 이런 식이었으니 나는 눈 하나 깜짝 안 했다.
"나와 손을 잡지 않겠느냐."
"내가 당신이랑? 내가 왜?"
"글레트리아를 자극한게 누구 탓이라 생각하느냐? 글레트리아의 영향으로 깨어나기 시작한 다른 악마들은?"
본론을 꺼낸 그녀의 말에 할 말이 없었다. 좀 억울하긴 했지만 어쨌든 내 잘못이긴 했으니까.
"나도 마에 속한 존재인데, 손을 잡는게 가능한가?"
"너는 아직 어리고 미숙하지. 내면에 품은 진정한 힘을 다룰 줄도 몰라. 무엇보다 네 본질은 조금 바뀌었어. 그건 너도 알고 있을 텐데."
"쯧..."
부정할 수는 없었다.
어쨌든 내가 원작에 비해 조금 변한건 사실이니까.
오만하기 그지 없는 폭군에서, 필요하다면 머리를 쳐박고 신발을 핥아대는 음란하고 쾌락을 쫒는 개변태로...이게 좋은 건가?
"손을 잡으면 뭘 할건데."
"움직이기 시작한 마를 토벌해야지. 기본적인 수련을 마친 용사들이 곧 세상에 나가 그 임무를 수행할거다. 너는 평소처럼 그 조교사에게 앙앙거리며 안기다가, 내가 요청할 때만 몇 번 도와주면 된다."
"...무보수로는 절대 일 안하지."
"그럼 이건 어떠냐. 네 내상을 치료할 수 있는 방법."
예상 외의 보수에 순간 말을 잃었다. 짜증이 났지만 반박할 수는 없었다.
어째 레덴의 손아귀에서 놀아나는 기분이다.
"...그게 뭔데."
"그건 다음 번 만남에서 알려주도록 하지. 돌아가게 되면 아리아를 잘 부탁한다. 그 아이에게 꼭 말해주거라. 나는 그 애를 버린게 아니라고, 반드시 다시 빛을 되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다시 힘을 찾고 싶으면, 보다 솔직해지라고. 그 애는 너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으니, 네가 곁에 있다면 힘을 낼 수 있을 거다."
그녀에게서 뿜어지는 빛이 점차 밝아지며 공간 전체를 채우기 시작했다.
나는 괜히 끝까지 레덴을 노려보았다.
"흐아♡흐그으♡"
"리아, 정신 차리거라. 제발!"
암전한 시야가 다시 돌아올 때 즈음. 여러 소음들에 귓가가 울리기 시작했다.
여인이 쾌락의 여운에 젖어 헐떡이는 소리와, 걱정 가득한 마음으로 다급히 날 부르는 소리.
나는 눈을 떠, 내 어깨를 잡고 흔들고 있는 루카스를 볼 수 있었다.
"저, 정신이 드느냐..?"
"주인님."
그제서야 상황을 파악했다.
아리아를 절정시키다 그대로 뻗은 것이었다.
아리아를 매개체로 했다지만, 저항조차 못하고 그대로 레덴의 의식에 끌려갔다는 사실에 소름이 돋았다.
아무래도 최대한 빨리 내상을 회복 해야 할 것 같았다.
"큰 일은 아닙니다. 레덴과 접촉했었습니다."
"..뭐?"
"아리아는 어떻습니까?"
나는 화제를 돌렸다.
레덴의 마지막 말에 따르면, 지금 아리아도 정상적인 상태는 아니다.
"아..아아..."
마스크가 벗겨져 있는 아리아는 절정의 여운에 빠져 여전히 그 음란한 차림새로 바닥에 뻗어 있었다.
하지만 본인의 몸에서 이상을 감지한 듯, 갑자기 몸을 마구 더듬더니 이내 상실감 가득한 표정으로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여..여신께서...내가 무슨 짓을...."
그러더니 고개를 떨구고 울먹이기 시작했다.
레덴에 의해 신성력이 사라진, 아니 정확히는 봉인된 것.
레덴의 의도는 그것이 아니었지만 아리아는 그것이 견디는데 실패하고 음욕에 져서 타락한 자신의 탓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큼직한 금빛 눈에 눈물이 맺히기 시작했다.
"...돌아가자. 세나, 그녀에게 옷을 덮어 주거라."
끝내 정말 서럽게 흐느껴 울기 시작하는 그녀의 모습에 당황한 루카스는 일단 서둘러 주변을 수습하고, 우리를 데리고 자리를 떠났다.
"으음, 천벌은 아니지만 생각보다 일이 너무 커진 것 같은데."
"...죄송합니다. 제가 더 강했더라면 그냥 개무시하고..."
"아니다 리아."
사정을 대충 들은 루카스는 나를 껴안았다.
"네가 그런 상처를 품고 있을 줄은 전혀 몰랐다."
내 내상에 대해 알게 된 그는 진심으로 미안하다는 목소리였다.
미안하면 빨리 박아줬으면 좋겠는데. 차마 이런 분위기에 이렇게 말할 수도 없고.
결국 그가 나를 놓을 때까지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럼 성녀는 어찌된 것인지 아느냐. 정말로 여신에게 버림 받은 것이냐?"
"그건 아닐겁니다."
그가 방 한쪽을 흘끗거렸다.
그곳엔 정신을 잃은 아리아와, 그녀를 돌보고 있는 세나가 있었다.
"레덴은 그녀에게 진정한 시련을 준 것입니다."
나는 고의로 아리아에게 진실을 말하지 않았고, 루카스에게도 함구시켰다.
솔직히 무슨 소린지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레덴은 아리아가 이 위기를 이겨낸다면 진정한 각성을 이룰 수 있다 했다.
큰 그림을 그리고 있는 것 같은 레덴이 아리아 정도의 전력을 버릴리 없으니 사실일 것이었다.
"그럼 이제 내가 어찌해야 하느냐. 조교가 성공적인 건 좋지만 당장 성녀가 신성력을 잃었다는 소식이 퍼지면 곤란할 텐데."
"일단은...그녀의 의지가 중요하겠지요. 그리고 주인님이 허락해 주신다면, 제가 성기사들의 복귀를 늦춰보겠습니다."
당장 내일이면 성기사들이 도착, 그들이 와서 아리아의 상태를 확인하면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른다.
그러니 그들의 움직임을 최대한 늦춰야 한다.
"허락하겠다. 단."
사태의 심각성을 알고 고개를 끄덕인 그가 내 뺨을 어루만졌다.
"반드시, 어디 다치지 말고 돌아와라."
"알겠습니다."
나는 그 자리에서 창문을 박차고 허공으로 몸을 날렸다.
늦은 새벽의 어둑한 하늘에 떠오른 눈으로, 성기사들의 위치를 찾아내 그곳으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이제 어쩌지요? 말대로라면 성녀는 지금..."
"신성력을 모두 잃었고, 그것은 여신이 부여한 진짜 시련이지. 하지만 우리가 조금 도와주는 건 가능하지 않겠나."
리아가 떠난 자리, 루카스는 세나의 말에 착잡한 눈으로 한숨을 쉬었다.
'보다 솔직해지라고.'
리아는 분명 레덴의 말을 이렇게 전했다.
신의 말답게 모호하기 짝이 없었다.
솔직해진다는 말 뜻을 곱씹던 루카스는 이내 무언가를 결심한 듯 입술을 깨물었다.
"성녀가 깨어나면 조교를 계속한다."
"예?! 하, 하지만..."
"성녀에게 있어서 솔직해진다는게 나는 뭔지 모른다. 하지만 마지막 순간, 그녀는 분명 여신조차 잊어버리고 쾌락에 져버렸다. 어쩌면 그것이 단서일지 모르지. 한 평생 품어 온 신앙심도 이기지 못하는 음란함이."
루카스가 식은땀을 흘리면서도 히죽 웃었다.
솔직하게 신음하고 울게 만드는 건 그의 전문이었으니까.
'이왕 이렇게 된 것, 완벽하게 타락시킨다. 자신의 성녀가 바닥에 떨어지는게 여신의 뜻이라면 그렇게 만들겠다.'
그는 잠자는 것도 잊고, 곧바로 다음 계획을 짜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