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5화 〉64화-난적
64화-난적
"너무 많습니다 성녀님..!"
"전부 죽이는 건 애초에 불가능하니, 길을 뚫죠."
일대 전체가 이미 놈의 수중에 들어가 있었으나, 그걸 무시하고 주파할 수 있었던 건 순전히 아리아의 힘이었다.
같은 보스몹 수준의 힘에, 심지어 지금은 작중 보다 더욱더 성장한 상태.
백작이 갇혀 있는 성 안을 포위하고 있는 병사들은 그녀를 막을 수 없었다.
"이럴 수가...윽."
루카스도, 성기사들도 찬란한 날개를 펴고 날아 오른 그녀가 뿜어내는 강렬한 빛에 눈을 찌푸렸다.
단순한 방출만으로도 레스트리아의 정신지배를 날려버리는 힘.
마치 또 하나의 태양이 뜬 것 같은 강렬함이었다.
물론 레스트리아놈도 하낱 병사 하나에게 공을 들여 정신을 조작하진 않았겠지만 카운터에 가까운 상성덕에 놈의 힘은 생각 이상으로 무력하게, 파도에 쓸려가는 것 처럼 단번에 사라져 버렸다.
"어서 움직이는게 좋지 않겠습니까."
"그, 그렇게 하..."
루카스가 멍하니 하늘에 떠 있는 아리아를 지켜보던 엘라를 독촉했다.
아리아의 활약으로 수백 이상의 병사들이 정신을 잃고 쓰러졌고, 뻥 뚫린 길이 성문까지 이어져 있었다.
우리는 곧바로 말을 달려 그 길을 가로질렀다.
제정신을 차린 병사들은 어쩔 수 없었다.
깨어나면 알아서 잘 도망가길 바래야지.
"상상치도...못했군. 그보다 어떻게 알아냈단 말이오?"
꽤 오랜만에 만난 헥트 백작은 강자답지 않게 초췌해 보였다.
하긴 이 요새 안에서 뭘 해보지도 못하고 가까스로 버티고 있었으니.
"처음엔 무슨 오해가 있는 줄 알았지. 하지만 나의 신하, 나의 병사였던 이들은 이미 사악한 무언가에 의해 조종당하고 있던 상태였소. 나를 유인하기 위한 함정이었지. 난 그제서야 그들이 제정신이 아님을 알 수 있었소."
"사악한 악마가 맞습니다. 사람의 마음을 현혹하고 조종하는 놈이지요."
아리아는 설명을 우리에게 맡겼다.
정확히는 루카스에게. 백작의 눈이 그를 보고 크게 놀랐는지 휘둥그레졌다.
"자네가 어떻게 여기 왔는가."
"적들의 정체를 밝혀내고 각하의 신변에 이상이 생겼다는 걸 알아챈 것이 자작입니다."
아리아는 루카스를 추켜세웠다. 노예로서 당연한 행동이었지만 다른 사람들은 알턱이 없었다.
"놈의 이름은 레스트리아라고 하는 고대의 악마입니다."
한 순간에 자신에게 집중된 시선을 느끼며, 루카스는 태연하게 말을 시작했다.
그 내용 대부분이 내가 알려 준 것들이지만 그걸 그대로 말할 수는 없으니까.
덕분에 루카스는 고대 악마들에 대해 해박한 지식을 가진 학자가 되어야 했다.
"실제로 눈치챈 건 놈이 부린다는 병사가 베셀에 난입했기 때문입니다."
"괴물 군단도 그렇고, 제국이 흔들려서 그러는지 세상이 점점 미쳐가는 군."
루카스의 말을 듣고 허탈하게 중얼거린 백작이 의자에 쓰러지듯 주저 앉았다.
그러더니 그는 뜬금 없이 우리에게 수정구 하나를 건넸다.
"이, 이건..."
"그 악마놈에 대한 말이 사실이라면 이 영상 역시 거짓이겠군. 라시안마저도 꼭두각시가 되었다는 뜻이니까. 차라리 다행이라 해야 할지!"
씁쓸하게 웃은 백작이 고개를 떨궜다.
영상 안에는 장남 라시안이 자신의 아버지이자 상관인 헥트 백작에게 보내는 일종의 선전포고문이 담겨 있었다.
명분은 의미 없는 전쟁을 일으키고 혼란만 가져온다는 자신의 아버지를 막겠다는 내용과 함께, 이미 완벽하게 장악한 성의 모습이 보이고 있었다.
굳게 믿었던 자기 자식이 자신을 비난하며 처단하겠다고 말하고 있어서 그런지, 평소 늘 강인한 모습을 보여주던 백작의 어깨는 축 늘어져 있었다.
"그 악마의 숙주가 공자일 가능성은 없습니까?"
아리아가 그걸 보고 루카스에게 물었다.
[놈의 본체는 몸에 숨길 수 없는 끔찍하게 생긴 목걸이입니다]
"놈의 본체는 목걸이입니다. 공자님의 목에는 보이지 않는군요."
슬쩍 눈치를 본 루카스는 내 말을 앵무새마냥 따라했다.
어차피 레덴과도 협력관계고 아리아에게는 정체를 밝혀도 상관 없지만 나는 의도적으로 숨기고 있었다. 그 편이 더 재밌는 것 같았으니까.
"성녀께서는, 그 악마를 처단하는 것이 목적으로 보이오만."
"맞습니다."
수정구를 집어넣고 넌지시 물어보는 백작의 의도는 뻔했다.
아리아도 그걸 아는 것 같았지만 딱히 반응하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우리도 힘을 보태겠소. 성을 되찾고, 그 악마놈을 토벌하겠소. 그러니...부디 내 아들들을 치유해 주시오."
"교국은 뜻을 같이 하는 '친구'를 도울 것입니다."
아리아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백작은 침음했지만 지금은 방법이 없겠지.
그녀의 도움이 없다면 아들들은 물론 세력의 기반을 모조리 잃어버릴 참이었으니까.
결국 백작은 아리아의 제안을, 교국과의 협력을 받아들였다.
"결정 난 것 같으니, 이쪽에서도 소개해 줄 사람이 있소."
그때 한시름 놓았다는 듯한 얼굴인 백작이 이야기의 주제를 바꾸었다.
"공격 당하고 포위 당해 영락없이 죽을 위기에 처했을 때. 그들이 없었다면 포위를 뚫고 나오지 못했을 것이오."
그는 자신이 큰 신세를 졌던 사람이며 뛰어난 실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며 누군가를 불러 우리에게 소개시켜 주었다.
곧 문이 열리고 한 무리의 사람들이 들어왔다.
열 명 정도로 구성된, 행색은 마치 용병단 같은 이들이었지만.
"성녀께서 어떻게 생각하실지 모르겠군. 이들은 자신들이 여신께 은혜를 입었다고 말했소."
아리아의 눈치를 보던 그는 그들을 그렇게 소개했다.
"돌조각 하나를 들고 뭐 하느냐?"
"...갑자기 생각이 났습니다."
그날 밤, 루카스는 작은 조약돌 하나를 들고 있는 나를 보며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나는 다시 그걸 집어넣었다.
한 번 만났던 '플레이어'에게 주었던 돌과 연동되어 있는 돌이다.
현재 그의 위치는...베셀성 인근으로 보였다.
오랜 시간 그 자리에서 미동도 없다. 죽었다는 것인지, 아니면 버린 것인지.
"으읏.."
"그 용병들에 대해 아는게 있는 것 같은 눈치였다."
옆으로 누운 나를 껴안은 그가 지금 내 안에 넣은 물건을 더 깊숙히 넣으며 귓가에 속삭였다.
"그들은 레덴이 불러들인 이계의 사람들입니다."
나는 이참에 그에게 플레이어들에 대해 이야기 해줬다.
물론 그들이 진짜 게임의 플레이어는 아니었지만, 어쨌든 레덴은 그런 역할을 해주길 바라면서 그들을 들였으니까.
보스몹들을 사냥할 존재를.
"우리에겐 도움이 된다는 것 아니냐."
"그건 확신할 수가 없습니다."
슬슬 끓어오르는 쾌락에 뜨거운 숨을 토해낸 나는 고개를 저었다.
레덴이 간접적으로 그들에게 간섭할 수 있는 건 사실이나, 그들을 완벽히 제어하는 건 불가능해 보였다.
5명 중 1명은 쓰레기가 있다고 했던가.
강제로 이 세상에 빨려 온 플레이어들이, 과연 얼마나 레덴의 뜻대로 움직여 줄까.
이곳은 힘이 있으면 법도 무시하고 무엇이든 할 수 있는 혼란한 세상이었다.
손쉽게 강한 힘을 손에 넣어가며 그 힘을 올바른 정의에 쓸 확률이 높을까, 아니면 욕망에 져서 악용할 확률이 높을까.
지금 생각하지만 레덴 그 여자도 생각보다 허술하기 짝이 없었다.
"병사들이 모두 제정신으로 돌아왔단 말입니까?"
"나도 당황스럽네."
새벽잠에서 강제로 깨어나 듣게 된 소식은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헥트 백작 본인도 크게 당황한 것 같았다.
"없습니다. 이들은 조종당하는게 아닙니다. 정말로 깨끗하게 사라졌습니다."
병사들을 검사하고 온 아리아의 말이 쐐기를 박았다.
하룻밤 새, 성을 포위하고 있던 병사 전원이 정신지배가 풀렸다.
그들은 아리아가 치유할 때와는 달리 기억을 온전히 가지고 있었으며, 자신들이 반란을 일으켰다는 사실에 큰 충격을 받아 이도저도 못하고 있는 처지였다.
"우리 존재를 알고 있겠지. 그러니 대비하기 위해 힘을 회수한 것 아니겠소."
"하지만 놈의 힘은 아직 불완전 할 터인데..."
백작의 말에 루카스가 나를 흘끔거렸다.
안타깝게도 나도 놈의 의도를 모른다.
분명 아직 충분한 힘을 모으지 못했다는 건 사실이다.
무슨 숨겨둔 방법이 있는 건가? 아니면, 도망쳐서 후일을 도모한다던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나는 혀를 찼다.
[아무래도 도주할 생각인 것 같습니다]
"도주?"
[놈의 힘은 그 특성상 어디서든 금세 세력을 불릴 수 있습니다. 자기 몸만 빼서, 새로운 곳에서 다시 시작하려는 것 아닐까요]
"도주라니요?"
내 말을 듣고 무심코 중얼거린 루카스의 말에 주변 사람들이 반응했다.
특히 아리아의 반응이 격했다.
"놈 같은 악마가 다른 곳에 둥지를 틀고 세력을 늘리면 큰일입니다."
아리아도 사태의 심각성을 눈치챘다.
헥트 백작이야 사실 상대가 알아서 영역에서 도망쳐 준다면 고마운 입장이었지만, 그녀는 제 1 목표가 악마를 토벌하는 것이기에 더더욱.
"...아무래도 최대한 빨리 가봐야 겠습니다."
"위험합니다!"
부관 엘라가 혼자서라도 가겠다는 그녀의 말에 기겁했으나, 아리아는 단호했다.
그녀는 먼저 날아가서 놈을 감시하고 여차하면 시간이라도 끌겠다는 입장이었다.
"그럼 우린 최대한 빨리 뒤쫒겠소."
지금은 그녀에게 주도권이 있으니 백작도 별 수 없었다.
결국 도망치려는 것 같은 레스트리아를 추격하기로 결정이 난 가운데, 아리아는 먼저 가겠다며 준비를 하러갔다.
"저도 가겠습니다. 성기사들이랑, 백작이랑 함께 안전히 오십시오."
"...그렇게 하거라."
그러면 이렇게 될 수밖에 없었다.
루카스는 혀를 찰 뿐, 아리아와 함께 가겠다는 나를 말리지 않았다.
하지만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게 있었다.
레스트리아는 분명 레아나의 입을 통해 내 정체를 알아냈으며, 나에 대해서도 자세히 알고 있다.
그런 주제에 자기 하수인을 보내 나를 도발했다.
무슨 뜻일까. 나와 싸워서 이길 수 있다는 뜻인가?
아직 본체가 없는 놈의 가장 강력한 힘은 정신지배고, 그 정신지배는 내게 통하지 않는다.
그러니 무슨 수작질을 가지고 있는 것 같은데 그것도 아주 자신만만한 수작질을.
"성녀님이..."
"성녀님이다!"
그러나 놈도 이건 몰랐을 것이다.
아리아가 빠르게 청명하고 푸른 하늘을 가로질렀다.
그 밑에 있던 사람들은 그 모습을 보며 환호했다.
"차, 차라리 도망가는게 낫지 않겠소..?"
[시끄럽다. 너는 그저 내 의도대로 따르기만 하면 된다]
"하지만 빛의 성녀에게 정신지배는 먹히지 않는다 하지 않았소."
[정신지배? 그딴 건 상관 없다. 무릇 현실과 꿈에서 나 혼자만이 이곳을 꿈이라 여긴다면 아무 소용 없지. 현실은 곧 꿈이되고 꿈은 현실이 된다. 정신을 지배할 필요도 없다. 이 성에 들어오는 순간 성녀에게 이 성은 꿈의 공간이 될 테니]
안토니오는 레스트리아의 말에 불안한 듯 주변을 흘끔거렸다.
암만 봐도 여기저기 난교와 착정이 일어나는 음탕하고 음란한, 평소의 성이었다.
단지 이 성을 두르고 있는 검붉은 돔만이 유일하게 달라진 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