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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29 처제, 가출하다 (29/53)

00029  처제, 가출하다  =========================================================================

잘 된다고 해도... 그래도 문제는 마찬가지야. 내가 정은이 너랑 잘 된다고 생각해봐... 그럼 어떻게 되겠어? 내가 정연이랑 헤어져야 하는 거 아니야? 그런데 정연이가 누구냐고... 정연이는 네 언니야. 언니 남편 뺏었다는 소리를 평생 들어야 될 거라고. 물론 이런 사실을 모르는 사람들 틈에서 살 수도 있기야 있겠지. 그럼 그걸로 끝날 것 같아? 너는 이제 다시는 너네집 식구들 보지도 못하는 거야. 부모님 얼굴을 평생 안 보고 살아야 된다고... 이게... 결론이잖아. 잘 되거나... 못 되거나... 최악의 경우만이 있어.

 내가 말했다. 정은이는 울고 있었지만 차라리 울 때 더 강하게 말을 해서 확실하게 해두는 게 더 좋겠다.

 몰라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모르겠어요. 저한테 최악은 그게 아니에요.

 정은이가 말했다.

 그럼? 네가 생각하는 최악은 뭔데?

 내가 물었다.

 제가 생각하는 최악은 아무것도 안 하는 거에요. 그냥 아무것도 안 하고... 어차피 최악일 거라 미리 단정짓고... 혼자 속만 썩이는 거에요... 왜... 왜 오빠는 내 마음 몰라줘요? 제가 그냥 어린애로만 보여요? 제가 그냥 어린애여서... 순간의 감정을 컨트롤 못해서 그러는 거 같아요? 그래서 오빠가 알아서 단정짓고 이렇게 해도 된다고 생각해요? 저도 아주 오랫동안 생각했어요... 이러면 안 된다 생각하고 노력도 해봤다고요! 오빠도 어느 정도는 알고 있잖아요. 그런데 왜 그래요? 어떻게 나한테 그래요?

 정은이는 계속해서 울면서 내게 말했다. 나는 그런 정은이에게 뭐라고 해줄 말이 없었다. 정은이는 자리에서 일어나 나갔다. 나는 그때 정은이를 붙잡았어야 했을까? 하지만 나는 그러지 못했다. 나는 그저 정은이의 멀어져가는 뒷모습을 바라보았을 뿐이다.

 집에 와서 정은이를 기다렸지만 정은이는 오지 않았다. 정연이가 와서 무슨 고민이 있냐고 물었을 때야 나는 하루 종일 정은이의 생각을 했다는 것을 알았다. 내가... 좋은 선택을 한건가? 내가 실수를 한 건가? 분명한 건 나는 잘한게 없다. 내가 만약 정은이를 그렇게 생각했었다면 애초에 그런 짓을 했었어는 안 된다. 나는 정은이의 처녀성을 받았다. 나는 그런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정은이에게 이래라 저래라 어떻게 충고를 할 수 있겠나? 나도 공범인데...

 나는 왜 이렇게 갈피를 잡지 못할까... 왜 그럴까... 차라리 한쪽으로 딱 정했으면 좋겠다. 정은이는 적어도 그렇게 하지 않았나? 오랜 시간 고민을 하다가 나를 만나는 걸로 딱 정했는데 나는 그저 고민을 할 뿐이다. 얼마나 오랜 시간 고민을 해야하나? 정은이와 접점이 있을까? 어쩌면 나도 정은이처럼 될 수도 있다.

 정은이는 오랜 시간 고민하다가 결정을 내렸다. 정은이가 결정을 내렸을 때 나는 고민을 시작했다. 내가 오랜 시간 고민을 하다가 어떠한 결정을 내리고 나면 정은이는 어느새 다른 결정을 내렸을 수도 있다. 그러면 어떡하지? 우리는 이렇게 영원히 엇갈리고 말 운명인가?

 어... 생각은 무슨...

 나는 정연이에게 이렇게 대충 얼버무릴 수 밖에 없었다.

 오늘 정은이는 집에 안 들어온다고 하네...

 정연이가 말했다.

 아... 그래?

 나는 살짝 당황스러웠지만 딱히 뭐라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무슨 일 있었어?

 정연이가 말했다.

 응? 뭐가?

 내가 물었다.

 내가 저번에 정은이 이상한 것 같다고 한번 말이나 해보라고 했잖아. 혹시 무슨 말 나눈 것 없어?

 정연이가 말했다.

 어... 그러니까 한번 대화를 나누기는 했는데...

 내가 말했다.

 뭐라고 했는데?

 정연이가 물었다.

 그러니까... 나도 뭐... 똑같이 얘기를 했지. 만약에 끝이 어떻게 날지 뻔히 보이는 거라면... 그냥 처음에 시작부터 하지 않는 것이 맞지 않겠냐... 뭐 그런 내용으로...

 내가 말했다. 거짓말이 아니라 진실이었다.

 그래... 그랬구나. 걔가 지금 집에 안 들어온다고 하는 건 아마도 그 말이 스스로 맞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거야.

 정연이가 말했다.

 그런가? 내가 잘 한건가?

 내가 말했다.

 응. 잘 했어. 어른이 되어서 그렇게 말을 해야지. 잘 한거야.

 정연이가 말했다.

 나는 내가 잘한 건지 잘 모르겠다. 잘한거라면 도대체 뭐를 잘한 거지? 그냥 뭐라고 몰아붙인 거? 그래가지고 정은이가 집에도 안 들어오게 만든거? 그게 잘한 건가? 물론... 내 말이 틀렸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좀... 그렇다. 나는 이미 정은이의 처녀성을 거뒀기 때문에 할말이 없다.

 그 다음날... 정은이는 여전히 오지 않았다. 그리고 그 다음날에도 정은이는 마찬가지였다. 나는 걱정이 될 수 밖에 없었다. 정은이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 정연이의 말에 따르면 친구집에 있는 거라고 했지만... 그건 정확히 모른다. 친구에 집에 있더라도 오래 머물게 된다면 친구로서는 불편할 수 밖에 없다.

 나도 옛날에 친구가 우리집에 놀러온 적이 있다. 그 친구와는 매우 친했고, 관심사도 같고... 그러니까 같이 아무리 있어도 불편할 것 없을 것 같던 친구였다. 그런데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서 바로 트러블이 생기더라. 제일 문제는 생활패턴 문제였지. 늦게 자는 나보다도 더 늦게 자는 그 친구는 밤이면 컴퓨터를 했다. 조용히 컴퓨터를 하면 문제가 없겠지만 타자를 두드리는 소리가 계속해서 신경에 거슬렸다.

 나는 결국 그 친구와 얼마 지나지 못해서 따로 살게 됐다. 물론 그 친구가 다른 집을 얻어서 나간 것이었지만 만약에 그런 기한이 안 정해져있고, 갑자기 와서 우리집에 살았다면 내가 내쫓았을 것이다. 우리는 둘도 없는 친한 친구였는데도 말이다. 그런데 처제는 그것보다 더한 상황 아닌가?

 아마도 정은이는 그날 아침까지만해도 집을 나갈 생각이 없었을 거다. 그냥 평범한 하루의 시작이었으니까. 하지만 나를 만나면서 일이 틀어졌겠지. 집에 돌아가기는 싫고 그랬겠지. 그래서 친구집에 갔다고하면 정은이는 아무런 짐도 없다. 옷도 없고... 뭐 아무것도 없다. 그런 상태로 다른 사람의 집으로 갔다. 그리고 며칠째 묵는다. 그 친구가 과연 좋아할까? 그럴리 없다. 절대로 그럴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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