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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32 녹아버린 처제 (32/53)

00032  녹아버린 처제  =========================================================================

그... 그래. 씻어야지.

 내가 말했다. 나는 그렇게 말을 하고는 샤워실로 들어갔다. 샤워실에 들어가서 정은이의 모습을 생각하니 발기가 되었다. 자위를 한번 할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런 행동은 옳지 못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은이와 관계를 맺으려면 맺을 수도 있...나? 적어도 지금 전까지는 관계가 가능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때 나는 정은이를 밀어내지 않았나? 정은이와의 관계는 적절하지 않다. 옳지 못한 관계이다 싶어서. 그런데 지금은 내가 정은이를 상대로 자위를 한다? 이것 역시 옳지 못한 일이다.

 나는 자위를 하지 않았다. 하지만 구석구석 씻었다. 왜 그랬을까? 모르겠다. 하지만 뭔가...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구석구석 깨끗하게 씻었다. 그렇게 씻은 후에 나도 정은이처럼 목욕가운만을 걸치고 나왔다. 아까 입었던 옷을 입을 수도 있었지만 정은이가 목욕 가운만을 입고 나왔는데 나만 그렇게 입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어... 샤워 가운만 입고 나왔네요?

 정은이가 말했다.

 응. 너도 그렇잖아.

 나는 애써 태연한 척 말했다.

 아... 근데 나는 아까 입고 있었던 옷이 며칠씩 입은 옷이라서 그런 거였는데...

 정은이가 말했다. 괜히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 그냥 입은 거야. 이런 거... 원래 다 입는 거잖아.

 나는 당황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숨기려고 했지만 아마도 티가 났을 거다.

 우리는 그렇게 모텔에 있었다. 목욕 가운만을 걸친 채로 말이다. 물론 모텔에는 침대가 하나 뿐이었다. 정은이는 내가 샤워를 하는 동안 침대를 차지 하고 있었고 나는 괜히 그쪽으로 가기 싫어 쇼파 쪽에 앉아있었다. 우리는 그렇게 서로 약간의 거리를 유지한 채로 대화를 나눴다.

 집은 왜 나간 거야?

 내가 물었다.

 집을... 나간 건가? 그냥... 들어가기 싫었어요.

 정은이가 말했다.

 그러니까 왜 그랬냐고... 내가 묻고 싶은 건 그거잖아.

 내가 말했다.

 음... 이거는 질문이 좀 이상한 것 같은데요?

 정은이가 말했다.

 질문이? 질문이 뭐가 이상한데?

 내가 물었다.

 안 이상해요? 그런 일이 있었는데 그냥 집에 있는게 더 이상한 거잖아요. 그런데 왜 나갔는지를 물어보고 있잖아요.

 정은이가 말했다. 정은이의 말은 너무도 맞는 말이었다. 내가 잘못 물었다. 집을 나가는게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우리의 사이에서 일어났던 일은 너무도... 너무도 커다란 일이었다. 그러니까 견디기 힘들었겠지...

 그래... 그랬구나...

 나는 한숨을 쉬면서 말했다. 내가 죄인이다. 내가 무슨 말을 할 수가 있겠나.

 흠... 더 얘기할 게 있어요?

 정은이가 말했다. 어떻게 뭐를 얘기해야할지는 잘 몰랐으나 그래도 이야기를 계속 해야한다고는 생각했다.

 그렇지. 오늘 계속 얘기할 거야.

 내가 말했다.

 그럼 술 좀 마시면서 하면 안 돼요?

 정은이가 말했다. 나는 그 말에 조금 고민을 할 수밖에 없었다. 저번에 그 일... 그러니까 나와 정은이가 처음으로 관계를 가졌을 때도 술이 있었다. 술은 좀 위험하다는 생각을 했다. 정신이... 완전히 자기의 것이 아니게 되어버리니까. 하지만 지금 그걸 따지기도 애매했다. 지금와서 술은 안 된다고 할 수도 없는 일 아닌가? 그리고 어쩌면 그게 더 안전할 수도 있겠다. 지금 나는 겨우 목욕 가운만을 입고 있지 않나? 하지만 술을 사러 밖으로 나가면 적어도 옷은 입지 않나? 옷을 입으면 그래도 위험이 조금은 줄어들지 않을까?

 그래? 그것도 괜찮겠다. 그럼 얼른 옷 입고 술 사올게.

 내가 말했다.

 예? 옷 입으려면 귀찮지 않아요?

 정은이가 말했다.

 뭐... 금방이지. 옷 입는 거야.

 내가 말했다.

 그래도요. 그냥 시켜먹어요.

 정은이가 말했다. 아... 그제야 나는 술도 시켜먹을 수 있다는 걸 생각해냈다. 생맥주 같은 거야 배달도 되고, 소주도 배달도 된다. 그냥 시키면 되는 거였다. 그럼 옷도 못 입고 술을 먹는 건데... 하지만 여기에서도 거절을 할 수는 없었다. 이미 술을 마시겠다고 하지 않았나? 그런데 지금 와서 안 된다고 하는 건 말이 안 되지. 내가 옷을 입고 나가서 사와서 먹는 것은 괜찮고, 술을 배달 시켜 먹는 건 안 된다고 할 수 없으니까.

 그래... 그 생각을 못 했네.

 내가 말했다.

 오빠는 가끔 보면 바보 같은 면이 있어요.

 정은이가 말했다. 정은이는 나를 오빠라고 불렀다. 정은이에게 뭔가로 불러진 게 오랜만인 것 같다. 그러고보면 다시 만난 정은이는 나를 부르지 않았다. 평소에는 형부 혹은 오빠라고 불렀는데 다시 만나고 나서는 부르지 않고 그냥 말을 했다. 그런데 다시 정은이의 입에서 나온 호칭은 오빠였다. 형부라고 부르는 게 더 옳은 말이겠지만 나는 그걸 굳이 꼬투리 잡아서 뭐라고 하고 싶지 않았다.

 가끔이지. 아주 가끔.

 나는 웃으면서 말했다.

 에이, 뭐가 가끔이에요? 저는 자주 보는 거 같은데?

 정은이가 말했다.

 자주? 자주는 아니다. 오히려 네가 더 바보 같지.

 내가 말했다.

 에? 제가 언제 바보 같아요?

 정은이가 말했다.

 너 바보 같은 때 엄청 많아! 옛날에 그거 기억 안 나? 너 신발도 짝짝이로 신고 갔었잖아.

 내가 말했다. 정은이는 평소에도 좀 덜렁거리는 편이었다.

 에이! 그건 그냥 실수로 그런 거죠. 그냥 바쁜 와중에 급하게 현관에서 나가다보니까 짝짝이로 신은 거죠!

 정은이가 말했다.

 신발을? 신발을 짝짝이로 신어? 게다가 그거 하이힐이었어. 둘이 굽 높이도 달랐다고.

 내가 말했다.

 그래도 금방 알아차리고 돌아왔잖아요.

 정은이가 말했다.

 금방? 도대체 어디까지가 금방이야? 역까지 거의 다 가서 그때야 깨닫고 돌아온 거였잖아.

 내가 말했다.

 딱 거기까지가 금방이에요. 거기에서 더 갔으면 금방이 아니라고 인정을 하는데 거기까지는 금방이에요. 역까지는 안 갔으니까.

 정은이가 말했다. 나는 지금 분위기가 많이 좋다고 느꼈다. 지금은 아까처럼 무거운 분위기가 아니었다. 지금은 나와 정은이, 둘 다 웃고 있다. 이런 게 오랜만인 것 같았다. 그리고 이런 분위기가 반가웠다. 앞으로도 이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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