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화 : 최상병 외박 나가다 (1)♠♠
추여사가 하마터면 약수터 불량배들에게 윤간 을 당할 뻔했던 충격적인 사고가 잊혀져 가고
있던 토요일이었다. 그 동안 유격장에 있다 귀대한 오대령은 최상병에게 외박증을 발급해 주
었다.
"사모님요, 그 카면 내일 저녁에 들어오겠심더."
최상병은 일단 오대령을 관사에까지 퇴근을 시 켜 준 다음에 외출복으로 갈아입었다. 그 다음
에 안방에 있는 추여사에게 외박 보고를 했다. 오대령은 모처럼 주말을 집에서 푹 쉬겠다며 샤
워를 하고 있는 중이었다.
"응, 그래. 이거 약소하지만 용돈이나 해."
추여사는 돈 오만 원과 함께 무선 호출기를 건 네주었다. 최상병은 돈을 주는 이유는 알겠는데
왜 호출기까지 주느냐는 듯한 표정으로 추여사 를 바라보았다.
"후훗. 내일 11시쯤 호출할게 알았지?"
귓속말로 빠르게 속삭이고 난 추여사는 얼른 최상병의 뺨에 입술을 찍었다.
"뭐라꼬 예?"
최상병이 추여사의 입술 자국이 묻은 얼굴을 문지르며 반문했다. 그는 오늘 오후에 희숙이란
여자를 만날 예정이었다. 올해 스물 두 살인 회 숙이는 작년 겨울에 행정반 오일병의 소개팅으
로 만난 여자 였다. 그리고 그날 저녁 여관으로 직행했고 그 후에도 외박을 나갈 때 마다 틈틈
이 여관을 들락거리며 꽃잎이 잘 있었는지 확인을 하고 있는 상태 였다.
문제는 그 놈의 가스나가 요즘 쌀쌀 맞게 굴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래서 오늘은 만나는 즉시
단판을 지어야겠다고 단단히 벼르고 있는 중이 었다. 이런 상황에서 추여사가 호출을 한다고
했으니 그 말이 곱게 들려 올리는 없었다. 오늘 회숙이가 용서를 빌게 되면, 다른 때처럼 내일
도 회숙이와 같이 지내게 될 테고, 그 귀중한 시간을 추여사 때문에 허비하고 싶지가 않아서
였다.
"아이! 자기 갑자기 왜 그래. 그때 못한 거 내 일 해야 되잖어. 안 그래?"
"알겠습니더. 그 카면 내일 호출해 주이소."
최상병은 내키지는 않았지만 제대할 때까지는 연대장 다음으로 잘 모셔야 할 사모님의 부탁인
지라 마지못해 응낙을 할 수밖에 없었다.
이카다가 사모님 세컨드 되는 거 아인가 모르 겠데이.
바깥 날씨는 외박하기 딱 좋을 만큼 환장하도 록 좋은 날씨 였다. 그 따스한 봄볕 밑을 걸어
가는 최상병의 가슴에는 먹구름이 우중충하게 끼어 있었다. 그러던 것이 희숙이와 만나기로
한 커피숍이 가까워지기 시작하면서 조금씩 개 이기 시작했다. 이유야 어떻든 여자를 만난다는
즐거움이 있기 때문이었다.
가스나 우짜든 오늘 쇼부를 봐야 할 낀데.....
최상병은 출입구가 잘 보이는 창가 자리를 앉 아 맹물을 홀짝이면서 담배를 피웠다. 무료한
표정으로 앉아 담배를 두 가치 정도 피웠을 때 시계를 보니까 약속 시간이 이십 분이 경과 해
있다는 것을 알았다.슬그머니 화가 났다. 이 가 스나가 죽을려고 빽을 쓰나....최상병은 공중전
화 가 있는 곳으로 갔다.
"우리 앞으로 만나지 말아요."
지금쯤 커피숍을 향해 달려와야 할 희숙이가 집에 있다는 사실을 안 최상병은 기가 막혀 말
이 나오지 않았다. 더구나 용가리 통뼈를 삶아 먹었는지 겁도 없이 이별을 고하고 있는걸 보
고, 내가 뭘 잘 못 들었는 가 하는 생각이 들기 도 했다.
"니, 참말 이가?"
"전 솔직히 최상병님 멋대로 행동하는데 지쳤 다고요."
"햐!"
최상병은 머리 꼭대기까지 화가 치밀어 오는 것 같아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그의 사전에는
여관이나, 호텔에서 알몸으로 땀을 흘리며 심판 없이 풀 타임으로 레슬링을 했던 여자가 유일하
게 희숙이란 여자 한 명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사타구니에 거뭇거뭇한 털이 나기 시작했었을 때부터 대통령이 몇 번 바뀌는 동안 많은 여자
들을 품에 안았었다. 그렇기 때문에 희숙이 정 도는 성냥갑을 채우고 있는 한 개의 성냥개비
같은 존재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 그녀가 자 신이 이별을 통고하기 전에 먼저 이별을 통보하
다니. 이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좋데이. 그카모 일단 만나서 이바구 해 보자. 만나서 니가 와 그런 생각을 했는가 차근차근
이바구나 들어보자. 됐나?"
최상병은 내 사전에 여자에게 체였다는 말을 기록하지 않기 위하여 치솟아 오르는 화를 짓누
르며 목소리에 기름을 줄줄 부어 넣었다.
"그럼 거기서 만나요. 정말 이번이 마지막이에요. 아셨죠?"
어쭈구리, 꼴에 다짐까지 하고 있데이.야가 못 먹을 걸 처묵었나 와 이리 콧대가 쎄졌노?
"육군 상병 최상병이 한 입으로 두 말 할까봐, 몬 믿는 기가. 이래봬도 박력 하나로 똘똘
뭉친 경상도 싸나이다. 그케도 몬 믿겠나?"
최상병은 전화통을 집어던지고 싶은 충동을 신의 힘을 빌어 억제하며 갈대가 속삭이는 음성으
로 부드럽게 말했다.
"알았어요. 준비하고 나갈께요."
전화는 끊어졌다. 그러나 최상병의 가슴에 지른 불은 꺼지지가 않았다.
후.....화!
화를 몰아 쉬느라고 심장이 버둥거릴 지경이었다. 일단 가슴을 태우다 못해 두 눈으로 뿜어져
나오는 분노부터 꺼트리고 볼일이었다. 커피숍을 나오는 즉시 구멍가게로 갔다. 이 홉들이 소
주 한 병을 단숨에 꼬르륵 마셔 버렸다.
"웬일이대유? 초지녁 부텀......"
주인 여자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안됐다는 얼굴로 쥐포 반쪽을 서비스하는 걸 와작와작 씹어
먹으며 신촌에 있는 상류 시대로 갔다. 그녀가 거기 라고 말한 장소는 여자나 남자의 거시기를
말하는 게 아니고 레스토랑 상류 시대 였다.
최상병이 오일병의 소개로 희숙이 처음 만난 장소도 신촌이었다. 그러고 보니 그녀를 만난
것도 신촌이고, 그녀와 이별을 하는 장소도 신촌이 되는 셈이었다.
"우리 서점에 갈래요. 책 한 권 사 드릴 테니까요."
커피잔을 사이에 두고 서먹서먹한 시간을 야금 야금 베어먹고 있을 때 였다. 최상병이 듣기에
희숙이가 기가 막힌 제안을 했다. 그렇다고 최상병이 평소에 독서를 잘 하는 편이 아니었다.
독서라면 김상병이 일가견이 있을 뿐이었다. 그 럼에도 불구하고 서점이 좋은 것은 책을 보고
있노라면 그럴듯한 화재 꺼리를 찾아 낼 것 같은 예감 때문이었다.
최상병은 희숙이에게 시집을 한 권 사 주었다. 그리고 희슥이가 어떤 책을 사고 싶냐고 물었을
때 '고장난 시계' 란 우화집을 사고 싶다고 했다.
책을 한 권씩 사이좋게 사 들고 간 곳은 남들 처럼 커피숍이나, 레스토랑에서, 아니면 분위기
죽여주는 카페가 아니었다. 최상병의 수준에 맞 는 중국집 밀실에서 자장면을 사이에 두고 얼
굴을 마주 댔다. 그만큼 희숙이는 최상병 관심 을 끌 만한 여자가 아니라는 말도 성립됐다. 오
일병의 말에 의하면 희숙이란 여자는 가을 날 갈대밭에 서 있는 코스모스 같은 여자라고 했
다. 그러나 최상병이 보기에 코스모스가 아니고 들국화 같은 여자 였다. 자연스럽게 그녀에게
대하는 말투도 부담이 없는 말로 이어지고 있었다.
"내는 이 책을 읽었습니더."
최상병은 자장면 한 그릇을 눈 깜짝 할 사이에 해 치우고 책장을 펼치며 넌지시 말했다.
"어머, 읽은 책을 왜 골랐어요. 이왕이면 안읽은 책을 사 달라고 하시지?"
희숙이가 자장면 그릇 속에 휴지를 던져 놓으며 눈꼬리를 치켜 떴다.
"내무반 에 있는 걸 우연히 읽었는데 너무 재미있다 안 합니꺼. 그케서 언젠가 서점에 갈 일
이 생기면 꼭 한 권 구입해서 두고두고 읽을 계획이었습니더."
최상병은 사실 고장난 시계를 읽지 않았다. 대 충 내용이 뭔가 알고 있을 뿐이었다. 또, 그 책
을 본 장소도 내무반이 아니고 행정반에서 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짓말을 한 것은 희숙
이에게 자신의 독서량이 많다는 것을 은근히 내 보이고 싶어서 였다.
"어쩌면......"
희숙이는 최상병의 그 말 한마디에 꿈꾸는 숙녀로 변해 버렸다. 그리고 곧장 신촌 시장 옆에
있는 창고란 호프 집으로 직행을 했다.
"우리 소주로 마십시더."
최상병은 자신이 용돈이 궁한 군인임을 내세워 호프집이라는 것을 무시해 버리고 소주를 시켰
다. 소주 두 병을 시켜 놓고 안주는 노가리 한접시를 시켰다.
"한 병씩 사이좋게 나누어 마시는 겁니더."
"좋아요. 술이라면 자신 있어요."
최상병이 소주 두 병을 시킬 때 말없이 지켜보던 희숙이가 자신 있게 잔을 내밀었다.
"잠깐, 이 쏘주 잔 좀 맥주 잔으로 바꿔 주입시더. 암만케도 여긴 호프집 아입니꺼? 맥주
잔이 영 안 어울리네 예."
"저도 맥주 잔으로 할래요."
최상병은 생각과 다르게 희숙이와 뽕짝이 잘맞는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녀도 자신만큼 술
을 마시는 줄 알았다. 최상병은 주량이 많은 편은 아니지만, 두 병 정도는 눈 깜짝 할 사이
에 마셔 버리는 스피드를 자랑하고 있다. 그후는 은근하게 밀려오는 취기를 즐기는 편이다.
"자 우리의 인연을 소중하게 간직하기 위하여 건배합시더!"
"최상병님과 의 만남을 축하하며!"
최상병과 희숙이는 맥주 잔 가득히 소주를 따 라서 단숨에 마셔 버렸다. 노가리를 씹으며 한
참 노가리를 풀다 보니 담배가 떨어졌다. 주인은 담배는 없다고 한마디로 짤라 말했다. 매상
도 안 올려 주는 주제에 담배 심부름까지는 못해 주지라는 눈치 였다.
그 카면 하는 수 없지. 아니꼽다고 담배를 안 피울 수도 없고......
최상병이 밖에 나가서 담배를 사가지고 왔을 때 였다. 두 눈에 알전구를 박는 상황이 날 기
다리고 있었다. 그것도 햇볕은 쨍쨍 모래알은 반짝 하는 찬란한 대낮에 벌어진 일이었다.
"희숙씨, 와이라십니까. 빨리 일나요. 여기가 안방인 줄 압니꺼?"
최상병은 인사불성이 된 희숙이를 깨우느라 어깨를 흔들었다. 어깨를 흔들 때마다 티셔츠 속
의 젖가슴이 출렁출렁 말을 탔다. 겉에서 보기와 다르게 벗겨 놓고 보면 글래머 일거라는 생
각이 잠깐 들기는 했지만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잘못하다가는 개망신 당할 우려
가 있기 때문이었다.
우야꼬, 이렇게 대책 없는 가스난 줄 알았다면 술을 안 먹이는 건데.......
하는 수 없었다. 최상병은 일단 그녀를 여관까지 끌고 가기로 했다. 그렇다고 도끼눈을 뜨고
있는 주인의 눈총이 무서워서가 아니었다. 순전히 부대에 귀대하면 오일병에게 자신의 인격을
내세우기 위해 서 였다. 막 말로 그냥 가 버리면 당장 주인 녀석이 그녀를 어찌해 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없진 않아 있긴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