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 회: 재회, 그리고 첫 경험 -->
마리아교수님의 고민 상담부터 시작해서 괴물, 아니 마수(魔獸)와의 대면, 상상속의 존재들로만 여겼던 천사와 악마의 실존, 소꿉친구의 구출, 그 소꿉친구의 하나뿐인 언니의 결혼사실 그리고 조금이라도 방심하면 집안을 난장판으로 만들고 어린애보다 더 철없이 구는 혜영누나의 ‘꼬장(?)’ 덕분에 눈 깜짝할 사이에 사건사고가 많았던 한주가 끝나고 그나마 평화로운 주말이 찾아왔다.
20여년 전 초등고교의 수업이 모두 주 5일제로 바뀐 후부터 주말을 마음 놓고 쉴 수 있는 ‘축복받은 세대’인 나는 오늘도 변함없이 집안을 난장판으로 만들며 출근준비를 하는 혜영누나를 배웅하고 있었다.
“히이잉~! 나도 주말에 좀 쉬고 싶다고~!”
병원에서 간호팀장을 맡고 있는 혜영누나는 병원이라는 직장을 가졌다는 죄로 주말엔 어지간해서 쉬는 일이 없었고, 오늘도 역시나 편안한 차림으로 혜영누나를 배웅하는 나를 바라보며 부럽다는 표정을 지으며 투정을 부렸다.
나는 그런 혜영누나의 모습에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하아...! 그러니까 일 그만두라니까? 내 통장에 있는 돈이면 일 안나가도 되잖아?”
“우웅~! 그야 그렇지만...! 진우 너도 알잖아. 나 어릴때부터 간호사가 꿈이었던거...!”
마치 학교가기 싫어하는 어린애가 엄마 품에 안겨서 투정을 부리는 것처럼 내 품에 안겨서 투정을 부리며 볼을 부풀리는 혜영누나의 모습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지독한 불면증 덕분에 비상식적으로 높은 지식을 가지고 있는 내가 논문이나 새로운 이론을 어둠의 루트로 팔아넘긴 돈으로도 평생을 호의호식하면서 살 수 있는 돈이 있음에도 자신의 꿈을 들먹이며 일을 그만둘 수는 없다고 말하는 혜영누나의 모습이 참 모순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럼, 그만 투덜거리고 일이나나가. 벌써 몇 분째야. 기껏 일찍 깨웠더니 평소나 지금이나 다를 게 없잖아!”
“우웃! 하,하지만 부,부러운 건 부러운 거라고! 주말에 집에서 쉬는 건 모든 간호사들의 로망이야!”
“예이, 예이 그러셔요. 잘 알았으니까 얼른 출근이나햇!”
-찰싹!
“꺄앗!”
간호사들의 로망이라는 둥, 서비스업계 종사자의 희망이라는 둥 말도 안돼는 소리를 늘어놓으며 시간을 지체하는 혜영누나를 더 이상 봐줄 수 없어 혜영누나의 탱탱한 엉덩이를 찰싹! 소리 나게 때리자 혜영누나가 귀여운 비명을 내지르며 두 손으로 황급히 엉덩이를 가렸다. 행여나 내가 더 때릴까봐 였다.
‘정말이지 어린애도 아니고 꼭 이렇게 맞아야지 말을 들어요...쯧쯧!’
사랑의 맴매(?)가 효과가 있었던지 내 품에서 떨어져 두 손으로 엉덩이를 가리고 뚱한 표정을 짓는 혜영누나의 모습에 속으로 혀를 찬 나는 어젯밤 늦게까지 혜영누나가 준비하던 보고서를 챙겨주며 입을 열었다.
“하여간 누굴 닮아서 이렇게 땡깡이 심한건지 원...!”
“아앗! 맞다! 보고서! 헤헷, 고마워. 진우야!”
“하아아...좀 알아서 챙길 수는 없는 거야?”
“그건 무.리!”
“정말이지 누나는...!”
“어머!? 지각하겠다! 진우야, 나 출근할 테니까 집 잘 보고 있어! 그리고 집에서 너무 책만 보고 있지 말고, 운동도 적당히 하고! 그럼 다녀올게~!”
내가 챙겨주는 보고서를 발견하고서 아차! 하는 표정을 짓는 혜영누나에게 알아서 좀 챙기라는 말을 하자 일초의 망설임 없이 ‘무리’라고 말하는 혜영누나의 모습에 잔소리를 하려고 하자 누나가 황급히 시계를 확인하고 부랴부랴 구두를 신고 현관문을 나섰다.
그런 혜영누나의 행동이 정말로 늦은 것이 아니라 내 잔소리를 피하기 위해라는 것을 잘 알지만 더 이상 누나를 붙잡아두고 잔소리를 했다간 정말로 늦어 버릴 수 있기에 나는 그냥 모르는 척하며 혜영누나를 배웅했다.
-철컥!
-스르륵...!
“헤헷! 그럼 저녁에 봐~!”
-쪽!
“아,아...! 늦지나 마셔."
“알았어~!”
현관문을 나서기 전에 혀를 살짝 내밀고 귀엽게 웃은 혜영누나가 내 볼에 살짝 입을 맞추며 총총걸음으로 엘리베이터를 향했다. 나는 그런 누나의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엘리베이터가 올라오자 환하게 웃으며 ‘저녁메뉴는 불고기!’라고 말하고는 손을 흔드는 혜영누나의 모습에 피식 웃으며 얼른 가라고 손을 내젖고는 혜영누나가 엘리베이터 속으로 사라지자 조용히 현관문을 닫고 집안으로 들어왔다.
-스르륵...철컥!
“하아아! 정말 출근시키기 힘드네...!”
엄청난 중노동을 하고 온 것처럼 극심한 피로를 느끼며 굳게 닫힌 현관문에 기대서 깊은 한숨과 함께 작게 중얼거린 나는 혜영누나의 부드럽고 촉촉한 입술이 닿았던 볼을 쓰다듬으며 피식 웃었다.
“정말 아직도 어린애인줄 안다니까...”
출근을 하면서 내 볼에 입을 맞추는 것은 내가 어렸을 때. 자신을 경계하는 나를 안심시키려고 혜영누나가 하던 행동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내가 21살이 된 지금도 습관처럼 유지되고 있는 것이었다.
짧은 입맞춤이었지만 그것으로도 충분히 나를 생각하는 혜영누나의 마음을 느낄 수 있는 나는 작게 미소 짓고는 집안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하아아...! 이걸 언제다 치우지...?”
내가 학교를 안 간다는 핑계로 평소보다 더욱더 집안을 어지럽히고 출근한 혜영누나의 흔적을 바라보며 나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보고서 발표가 있다면서 이 옷, 저 옷 꺼내서 몸에 대보고 거울에 비춰보다가 아무렇게나 던져버린 정장과 옷가지들, 씻으러 들어가면서 허물 벗듯이 벗어던진 앏은 캐미숄과 속옷, 그리고 씻고 나와서 몸에 두르고 있던 샤워타월과 머리 말린 수건, 헤어드라이기, 빗등등 정말 난장판도 이런 난장판이 없을 정도였다.
나는 그 엄청난 흔적(?)들을 하나하나 치우며 아까의 그 행복한 마음을 깨끗하게 잊어버리고 이미 출근하고 없는 혜영누나를 떠올리며 ‘집에 오면 각오해...!’라고 중얼거리면서 어지럽혀진 집안을 치우기 시작했다.
“우우...! 다 끝났다...!”
그렇게 장장 30여분간의 힘겨운 사투(?)를 벌인 끝에 집안을 말끔히 정리한 나는 쇼파에 털썩 주저앉으며 이마에 송글송글 맺힌 땀방울을 닦아 냈다. 그리고 그 순간...!
-띵동! 띵동!
“응...? 이 시간에 누구지...? 올 사람은 없는데...누나가 뭘 또 놓고 갔나?”
아직 오전 9시도 되지 않은 이른 시간에 울어대는 초인종 소리에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렇게 이른 시간엔 다들 출근하기 바쁘고 이웃집 아주머니들도 집안일 때문에 바쁜 시간이기에 올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결국 우리 집에 초인종을 누를 사람이 혜영누나 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혀를 차며 현관문으로 걸어갔다.
“하여튼...이번엔 또 뭐 놓고 간거야?”
내가 아무리 혜영누나가 옷 입는 것부터 먹는 것, 씻는 것까지 챙겨준다고 하더라도 개인적인 부분까지는 다 챙겨줄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래서 이 덜렁쟁이 혜영누나는 가끔씩 뭔가를 빠뜨리고 출근하기 일쑤였고, 나는 이번에도 그럴 것이라고 생각하며 현관문을 열었다.
-철컥! 스르르...!
“오늘은 또 뭘 놓고간...!”
하지만, 그런 내 예상은 빗나가고 말았다. 초인종을 누른 사람은 혜영누나가 아니라...
“오,오랜만이야...진우야...!”
“혜,혜림...누나...?”
내가 씻을 수 없는 죄를 저질렀던 혜림누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