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7 회: 만남, 그리고... -->
송유라의 집을 나와 조심스럽게 현관을 들어서자 눈에 들어오는 것은 역시나 예상했던 대로 아무렇게나 벗어던진 혜영누나의 하이힐이었다. 마치 초등학생이 벗어놓은 것처럼 한 짝은 저쪽, 한짝은 이쪽에 떨어져있는 하이힐을 보며 한숨을 포옥 내쉬곤 혜영누나의 하이힐을 가지런히 놓은 다음. 집안으로 들어왔다.
“흐음... 혜영누나, 꽤나 많이 취했나보네.”
그리곤 평소와는 다르게 너무나 멀쩡한 집안 상태를 보곤 혜영누나의 상태를 짐작해냈다.
아니나 다를까. 조심스럽게 내 방문을 열자 내 침대위에 그대로 쓰러져 잠든 혜영누나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에효! 항상 이렇다니까...”
간호팀장이라는 직책 때문에 세미나인지 뭔지가 끝난 후, 뒤풀이에 가서 술을 많이 마신 날이면 항상 이렇게 만취해서 집에 들어오자마자 내 침대에서 잠이 드는 혜영누나의 행태를 알고 있기에 나는 작게 한숨을 내 쉬며 불까지 다 켜놓은 채 엎어져서 자고 있는 혜영누나에게 다가갔다.
엎어져서 자는 걸 그대로 방치하면 다음날 가슴이 뻐근하다는 둥, 몸이 찌뿌둥하다는 둥의 투정을 받아줘야 하기 때문이다.
“자,자...! 혜영누나, 잠은 똑바로 자야지? 읏차!”
“우으으응...! 진우야...?”
“그래, 그래.”
엎어져서 자는 혜영누나를 살짝 안아들어 똑바로 눕히자 혜영누나가 내 품에서 어린 애처럼 칭얼거린다.
나는 그런 혜영누나의 칭얼거림을 능숙하게 받아내며 혜영누나의 옷가지를 벗겨내곤 잠옷으로 갈아입힌 나는 혜영누나에게 이불을 덮어주고 방을 나왔다.
“으응...!”
“참나...! 누가 혜영누나고, 누가 자식인지 모르겠다니까...”
방을 조심스럽게 빠져나오며 불을 끄자 그제야 몸이 편해져 고른 숨소리를 내며 자는 혜영누나의 웅얼거림을 들은 나는 피식 웃으며 구겨진 혜영누나의 정장을 들고 거실로 나왔다.
그렇게 거실로 나온 나는 혜영누나의 정장이 더 이상 구겨지지 않게 옷걸이에 걸어 놓는 한편, 습관처럼 집안을 손걸레로 청소하고 나서 송유라와의 결렬한 정사로 더러워진 몸을 씻기 위해 욕실로 들어갔다.
-쏴아아아...!
“후우우...! 최면술이라...”
그렇게 들어간 욕실에서 따뜻한 물을 맞으며 나는 오늘 내가 얻은 최면술에 대해서 생각했다.
아직 모든 것을 내 것으로 만들지 못했지만 그 일부분만으로 송유라를 정에 굶주린 여인으로 만들고 나에게 절대복종하는 여인으로 만든 그 힘에 대해서.
“내가 한 짓이 과연 옳은 일일까...?”
그리고 이내 그런 의문을 떠올린다.
내 개인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송유라를 그렇게 만들었다는 죄책감이 뒤늦게 드는 것이다. 하지만 이내 이미 엎질러진 물이라 생각하며 그런 생각을 떨쳐버렸다. 그리고 여차하면 최면술을 이용해 오늘의 기억을 지워버리면 된다는 생각을 하며 스스로를 합리화했다.
“그래...어차피 내 머릿속에 있는 양기를 중화시킬 때까지만 이니까...그 다음에는 뭐, 기억을 지우면 되겠지.”
그렇게 좋을 대로 생각한 나는 문득 욕실에 딸려있는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봤다.
“...뭐랄까. 좀 한심한 몸이네...”
그 거울을 통해 비친 내 몸을 바라보며 한숨을 쉬었다.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해 왜소하다 못해 말랐다고 할 수 있는 내 몸이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다행히 꾸준한 운동으로 뱃살은 없지만 수면으로 인한 육체회복과 성장이 없으니 운동을 해도 남들보다 근육이 붙지 않고, 성장이 느린 것이다.
그래도 175정도의 키에 탄탄하진 않아도, 잔근육이 조금 있는 편이지만...
“이왕이면 키도 좀 크고, 건장한 체격이면 좋겠는데.”
우락부락까지는 아니어도 장신에 탄탄한 몸을 가지고 싶었다.
그런 마음을 담아 이리저리 몸을 둘러보고 있을 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가만...? 자기최면이나 자기 암시라는 것도 있잖아...?”
최면이 반드시 남에게만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 사실을 떠올리기 무섭게 머릿속에 잠들어 있던 지식이 깨어나며 자기최면에 대한 것들을 토해냈다. 나는 그런 지식들을 떠올리며...
“아,아...! 그래, 그렇단 말이지...!”
씨익 웃었다.
******
자기최면, 또는 자기암시와 같은 것은 타인에게 최면을 거는 것과는 달랐다.
아무래도 자기 자신에게 최면을 거는 것이다 보니 생각을 읽을 필요도, 사고를 주입시킬 필요도 없었다. 필요한 것은 단 두 가지. 자신을 비출 거울과 자기 자신에 대한 확신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자신의 사고를 스스로에게 염사 시켜 진실로 받아들이게 하는 것이다.
즉, 이런 거다. 번지점프를 할 때 자신의 내면에 도사리고 있는 두려움을 이겨내기 위해 ‘나는 할 수 있다.’라고 중얼거리다가 마침내 두려움을 극복하고 뛰어내리는 것처럼 자기최면 또한 그와 비슷한 맥락이다.
키가 크고 싶다면 거울에 비친 자기 자신을 바라보며 ‘나는 아직 성장기다. 아직 키가 자라고 있다.’라는 사고를 끊임없이 염사해서 그것을 ‘진실’로 받아들이게 만드는 것이다.
뭐, 말은 간단하지만 실상은 그렇게 쉽지만은 않다.
첫째로 거울을 보며 그런 생각을 하고 있으면 내가 지금 뭐하는 짓인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둘째로 이런다고 키가 클 리가 없다는 부정적인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미친 짓 같아 보인다는 소리다.
하지만 그런 것들을 이겨내고 자신의 사고에 대한 확신을 갖고, 그것을 진실로 받아들이게 되면 그것으로 게임오버. 기적이 벌어진다.
“뭐, 자기 자신한테 거는 것이라서 틈틈이 거울을 보며 이 짓을 해야 하는 게 문제지만 효과는 확실하지.”
그 때문에 나는 벌써 2시간째 거울을 보며 이런 저런 사고를 ‘진실’로 받아들이고 있다.
뭐, 내가 여러 가지 사고를 ‘진실’로 받아들일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내 머릿속에 이것이 통한다는 기억이 있기 때문이고, 내가 강렬한 염파의 소유자이기 때문이다.
즉, 남들보다 빠른 시간 안에 여러 가지로 변화할 수 있다는 소리다.
샤워를 하다가 문득 생각난 자기최면으로 거의 ‘육체개조’에 가까운 최면을 스스로에게 건 나는.
“아차! 아침 준비를 해야겠구나!”
어젯밤 술을 진탕마시고 온 혜영누나와 그런 혜영누나를 출근시켜야한다는 사실을 떠올리며 서둘러 부엌으로 달려갔다. 그리곤 북어를 넣은 콩나물국을 끓이고, 밥을 한 다음. 혜영누나를 깨웠다.
뭐, 보통은 5시 50분에 깨웠지만 오늘은 해장을 해야 하니 일찍 깨우는 것이다.
“자,자 혜영누나! 일어나봐. 해장국 끓였으니까 좀 먹어.”
“우으응...!”
“얼른!”
“히,히잉...! 알았어...!”
집에 없어서 혜영누나가 들어온 게 정확히 몇시인지는 모르지만 대략 세네시간만에 일어나려는 아주 죽을 맛 일거다. 그 덕분에 오늘따라 유난히 힘겨운 모습으로 일어나는 혜영누나를 강제로 밥상머리에 앉힌 나는 손수 끓인 해장국을 내밀었다.
“자, 속이 좀 풀릴테니까 얼른 먹어.”
“우웅...!”
하지만 혜영누나는 여전히 비몽사몽.
나는 식탁에 앉아 턱을 괴고 졸린 건지, 숙취로 괴로운 건지 모를 표정으로 울상을 짓고 있는 혜영누나의 모습에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아무래도 해장국은커녕 회사에 지각할 것이 눈에 선했기 때문이다. 그 모습을 본 나는.
‘에효! 하는 수 없지...!’
송유라 덕분에 이제는 나름 익숙해진 독심술로 혜영누나의 사고를 빠르게 읽었다.
잠에 취하고 술에 취해서인지 뒤죽박죽에 엉망진창인 혜영누나의 사고에서 <정신을 차려야한다.>, <술이 깨야한다.> 그리고 <출근해야한다.>라는 사고를 찾아내 <진우가 끓여준 해장국을 먹으면 숙취가 말끔히 해소되니 그걸 먹고, 정신을 차려서 출근하자!>라는 사고로 변형해 혜영누나에게 강하게 염사시켰다. 그러자...!
“우우웅...!”
-달그락 달그락...!
비몽사몽 하던 혜영누나가 천천히 수저를 들고 해장국을 떠먹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렇게 혜영누나가 천천히 떠먹는 해장국이 줄어들면 줄어들수록...
“헤에~! 역시 우리 진우가 끓여주는 해장국이 최고라니까! 술이 확 깨네!”
“으이그! 말은 잘해요...”
“헤헤헤!”
혜영누나의 정신이 또렷해졌다.
그 모습을 보며 속으로 실소를 지은 나는 지금 당장은 멀쩡할지 몰라도 출근하면 숙취로 힘들어할 혜영누나를 생각해 예전에 혜림누나에게 했던 것처럼 오늘 하루동안 신진대사가 활발하도록 암시를 걸어주었다. 그 덕분에 아침엔 밥 반 공기도 먹는 둥, 마는 둥 하던 혜영누나가 해장국은 물론 밥한 공기를 뚝딱해치우는 기염(?)을 토해냈고, 나는 그런 혜영누나의 모습에 종종 이런 식으로 혜영누나에게 최면술을 써먹어야겠다고 생각하며 혜영누나의 출근준비를 도왔다.
“그럼, 다녀올게 진우야~”
-쪽♡
“잘 다녀오세요. 아! 그리고 오늘은 어제 못 먹은 불고기 해줄테니까. 일찍 들어와요.”
“응! 응! 알았어~!”
그렇게 ‘최면술을 이용한 출근준비’ 덕분에 평소보다 여유롭게 혜영누나를 출근시킨 나는 오늘도 어김없이 혜영누나가 초토화시켜 놓은 집안을 말끔히 청소하고 여유롭게 거실에 앉아 커피를 즐겼다.
아니, 즐기려고 했다.
-띠리리링-!
“누구세요?”
[저,저기 진우님...! 저 유란데요...아,아직 식사 전이시면 저랑 같이 아침식사를 드시러 와주세요.]
아파트내의 인터폰을 통해 나를 부르는 송유라만 아니었더라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