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아이가 좋겠어"
그렇게 세 사람이 장난스럽게 걸어가는 뒤편, 한 명의 여자와 한 명의 남자가 골목의 그림자에 몸을 숨기고 세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한참을 그들을 지켜보던 두 사람은 김태연을 향해 의미심장한 눈빛을 교환하고는 어디론가 사라져갔다.
김다연 김태연 자매와 헤어져 본가로 돌아온 이지헌은 자신을 찾아온 반가운 손님을 맞고 있었다.
"흠,, 그러니까 대략 한 달 만인가?"
"아아,, 그런 것 같네요,, 오랜만이죠?"
눈부시게 빛나는 하얀 은발,, 그리고 상아빛의 잡티 하나 보이지 않는 매끈한 피부, 햇살처럼 상냥한 미소, 이지헌은 간만에 보는 지서연을 묘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뭐 요샌 새 앨범이 나온다고 해서 꽤나 바쁠거라고 생각했는데,,"
"아하하~ 정말 바빠지기 전에 시간을 낸거죠, 사장님도 재밌게 놀다 오라고 하셨구요"
"훗,, 그래서 내가 서사장을 좋아하는거지,"
이지헌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지서연은 이지헌의 미소 띤 표정을 보며 살짝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여보였다.
똑똑,,
"누구야"
이지헌은 노크 소리에 고개를 돌려 말했다. 문 밖에서는 이내 조신한 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샤를입니다."
"들어와,"
이지헌의 지시가 떨어지자 메이드 복을 입은 샤를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샤를은 이지헌과 즐거운 표정으로 담소를 나누고 있는 지서연을 보며 살짝 미소를 짓고는 들고온 쟁반에 놓인 차와 과자를 테이블에 놓았다.
"그럼, 즐거운 시간 되시길"
샤를은 공손히 고개를 숙여보이고는 밖으로 나갔다. 이지헌은 샤를이 내온 차를 한 모금 마시고는 마찬가지로 차를 마시고 있는 지서연을 바라보며 말했다.
"다른 멤버들은 별 일 없지?"
"물론이에요, 다들 기억조차 못하는걸요"
"그렇겠지."
이지헌은 만족스럽다는 표정이 되었다. 이지헌은 결국 지서연의 계약이 파기되어 버리자 지서연의 최면 각인을 모두 풀어버리는 대신 마스터 직위를 자신에게로 이전시켜 지서연을 샤를과 같은 자신 자택의 인형들처럼 자신의 인형으로 만들어 버렸다. 역시 각인을 풀어버리는 것이 원칙이었지만 지서연은 꽤나 아까운 인형이었기에 버릴 수 없었던 것이었다. 지서연을 제외한 나머지 멤버들은 모두 최면 흔적을 말끔히 지워 예전과 다를 것이 없는 상태로 돌려놓았다. 다만 처녀가 아니게 되었다는 것은 예전과 같지 않지만...
"저어,, 요즘도 의뢰를 받고 계시나요?"
"으응? 오, 그렇지,, 요새는 정말 재미있는 의뢰를 받아서 말야,, 모녀에 자매.. 어때? 어쩌면 이런 패륜적 의뢰가 들어올 수 있는지 정말 즐거워서 견딜 수 없어"
"아아..."
지서연은 즐겁다는 듯한 이지헌의 표정에 어쩐지 시무룩해지는 모습이었다. 이지헌은 그런 지서연을 보며 놀리듯 말했다.
"뭐야, 설마 질투라도 하는건가?"
"에에?? 서,, 설마요,, 저는 그저 주인님의 인형일 뿐인데.. 질투라니요..."
지서연은 이지헌에게서 시선을 피하며 중얼거렸다. 이지헌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풋, 거짓말을 하고 싶으면 조금 더 연기 연습을 한 다음에 하도록 해. 그래서 어디 삼류 드라마라도 나올 수 있겠어?"
"치이.. 주인님은 너무 짖궂어요"
이지헌은 얼굴을 붉히며 칭얼거리는 지서연을 보며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이지헌은 손을 내밀어 지서연의 가슴을 만졌다.
"아앗,,"
"흠,, 역시 아직은 성장기인 모양이야, 지난번 보다 더 커졌어"
"그.. 그런.."
지서연은 물기어린 눈빛으로 이지헌을 바라보며 수줍은 표정을 지었다. 이지헌은 피식 웃고는 지서연에게서 손을 떼었다.
"아아..."
"훗,, 적당한 방을 하나 골라서 자고 가도록 해"
"네,, 네에??"
지서연은 당황한 눈빛으로 이지헌을 바라보았다. 이지헌은 어딘가 애타는 듯 아련한 지서연의 눈빛을 살짝 외면하며 말했다.
"미안해, 모처럼 시간을 내주었지만 오늘은 기분이 영 아니군"
이지헌은 딱딱한 목소리를 내뱉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나가버렸다. 지서연은 그런 이지헌의 뒷모습을 망연히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하아아..."
밖으로 나온 이지헌은 복도의 끝으로 걸어가 그 곳의 큰 창문을 열었다. 초저녁의 아름다운 석양이 서편 하늘에 펼쳐져 있었고 드넓은 대지는 그 붉은 광선의 아래에서 천천히 어둠속으로 잠들어가고 있었다. 이지헌은 타는 듯 붉은 석양을 바라보며 묵묵히 생각에 잠겼다.
"손님은 돌아가신 겁니까?"
"......"
이지헌은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뒤를 돌아보지도 않고 말했다.
"아니, 여기서 자고 갈거야"
"허면,, 침실에 준비를 해놓을까요?"
이지헌은 정중하게 물어오는 세바스찬의 목소리에 짜증을 내며 말했다.
"아니, 나랑 잘 건 아니야, 오늘은 아무도 들이지 마,, 그녀에겐 적당한 방을 알아봐 주도록 해"
"후후,, 알겠습니다."
세바스찬은 만족스럽다는 듯한 웃음소리를 흘리며 답했다. 이지헌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당신.. 설마 또 건드릴 생각이야?"
"...... 지시하시는 대로 따르겠습니다."
이지헌은 눈살을 찌푸리며 입술을 깨물었다. 이유없이 속에서 분노가 타오르고 있었다. 다시 떠오르는 과거의 아픈 기억들... 사실 과거의 일이라는 것도 따지고 보면 세바스찬에게는 잘못이 없었지만 이지헌은 세바스찬에 대한 맹목적인 적대감을 지워버릴 수 없었다.
죽이고 싶을 정도의 적대감...
핏빛에 물든 석양을 배경으로 이지헌이 천천히 돌아섰다.
"아아..."
세바스찬은 심상치 않은 이지헌의 분위기에 살짝 움츠러들었다. 하지만 이내 체념한 표정으로 온 몸의 긴장을 풀어버렸다. 이지헌의 처분에 맡기겠다는 듯한 태도.. 이지헌은 무서운 눈빛으로 세바스찬을 바라보며 천천히 다가왔다.
뚜벅..
뚜벅..
뚜벅..
적막한 복도에 이지헌의 발자국 소리만이 울려퍼지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세바스찬의 앞에 도달한 이지헌은 부들부들 떨리는 입술로 말했다.
"당신.. 마음대로.... 해..."
"분부대로..."
이지헌은 손톱이 파고들 정도로 꽉 움켜쥔 주먹을 떨며 빠르게 세바스찬에게서 지나쳐갔다.
세바스찬과 헤어져 자신의 방으로 돌아온 이지헌은 침대 위에 늘어져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았다. 어느덧 해가 저물었는지 방 안에는 무거운 어둠이 내려앉고 있었다.
"차라리 이게 아버지에게는 더 나은 것 일지도 모르지.."
이지헌은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얼굴을 침대 시트에 파묻었다. 상쾌한 향기를 내는 침대 시트는 이지헌의 얼굴을 받아들이며 심하게 구겨졌고 이지헌은 그 안에서 점점 숨이 막혀가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가슴이 타오르듯 답답하게 느껴지고, 온 몸의 근육이 경련하며 괴로운 고통이 전신에 닥쳐오고 있었다. 그리고 드디어 머릿속이 하얗게 탈색되며 정신을 잃을 것만 같은 위기감이 닥쳐오는 순간.. 이지헌은 크게 숨을 몰아쉬며 침대에서 떨어져 나갔다.
"하아아,,, 하아,, 후우우,, 하아아... 후,, 후후훗,, 으하하하하!!!"
바닥에 널브러진 이지헌의 입가에서는 호탕한 웃음소리가 터져나왔다. 적막이 내려앉은 어둠 속에서 울려퍼지는 그 웃음소리는 기괴함마저 느껴질 정도로 소름끼치는 것이었다.
"죽음의 느낌이란거... 이런거일까? 채희... 너도 이런 고통을.. 후후훗"
이지헌은 입가에 미소를 띄우며 천천히 일어나 창가로 향했다.
"일레븐, 다리안, 초이... 트리플 싸이코즈,,, 곧 나타날 때가 되었지... 너희들은 포기라는 걸 모르니까,, 하지만.."
이지헌의 눈자위가 붉은 빛으로 물들었다. 그리고 이지헌의 입가에서 저승에서 울려오는 듯한 스산한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다시 나타난다면 그날이 바로 제삿날이 될 거야.."
그렇게 노기를 터뜨리던 이지헌은 울분이 담긴.. 우울한 표정이 되어버려서는 다시 힘없이 뒤의 의자에 걸터앉았다.
트리플 싸이코즈...
몇 년 전만해도 대한민국의 암중세계에서 가장 큰 이름을 떨치고 있던 일루져니스트의 최고 술사인 4인방 중 삼인이 떨어져 나가 만든 작은 단체... 이지헌과는 젊음을 함께 나누던 같은 대학 동기였으며 함께 최면술과 정신술을 연구하던 경쟁자이자 조언자였으며 가장 믿을 수 있는 친구이자 동반자였다. 또한 대한민국의 최고 술사 4인방으로서의 자부심을 공유하는 사이이기도 했다.
하지만, 한 여자 때문에... 안채희라는 한 여자 때문에 이지헌은 나머지 셋에게서 버림받았다. 아니, 스스로 그들을 버렸다. 그리고 이제 그들과 이지헌은 양립할 수 없는 운명에 놓이고 말았다. 이지헌은 자신에게서 첫사랑이던 여자를 빼앗아가고 아버지는 성욕에 미친 짐승으로 만들어버렸으며 어머니는 행방조차 알 수 없게 만들어버린 그들을 결단코 용서할 수 없었다. 자신의 모든 것을 파멸로 몰고간 그들은 이지헌에게 더 이상 친구도 뭣도 아니었으며 그저 단죄의 대상일 뿐이었다. 그들에게도 이지헌은 더 이상 친구일 수 없었다. 다만 멸살의 대상일 뿐...
창 밖을 바라보는 이지헌의 눈빛은 어딘가 쓸쓸한 빛깔을 띄고 있었다.
"여기인가요?"
"그렇습니다."
세바스찬은 직접 방문을 열어 지서연을 안으로 안내했다. 꽤나 넓찍한 방 안에는 고급스러운 침대와 가구들이 놓여 있었고 은은한 달빛이 새어들어와 몽환적인 분위기를 뿌리고 있었다. 지서연은 입을 살짝 벌리고는 멍한 눈빛으로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음에 드십니까?"
"아,,, 에, 에예!! 너무 마음에 들어요!!"
"다행이군요"
지서연은 두 손을 모아쥐고는 천천히 방 안으로 걸어들어갔다. 반짝이는 두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는 지서연의 눈빛은 영락없는 소녀의 그것이었다. 세바스찬은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지서연의 뒤를 따라 안으로 들어섰다.
찰칵,
"응?? 문은 안 잠그셔도 되요, 아, 이만 가보셔도 되는데? 어,, 어라?"
세바스찬은 지서연의 말을 모두 무시하며 성큼성큼 앞으로 다가서서는 거칠게 지서연을 밀어붙여 침대에 눕혔다. 지서연은 비명을 지르며 세바스찬을 밀어냈다. 세바스찬은 거친 저항을 보이는 지서연을 보고 눈살을 찌푸리며 지서연의 최면 코드를 말했다.
"최면 코드,, 춤추는 요정!!"
"아아..."
그리고 그 순간,, 지서연의 눈동자에 섬찟한 붉은 기운이 떠오르며 지서연의 전신에서 뭐라 말할 수 없는 불길한 기운이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세바스찬은 좋지 않은 예감을 느끼며 지서연에게서 급히 떨어져 나갔다.
"코드 발동... 멸살"
"며,, 멸살?"
지서연은 완전히 붉어진 적안을 부릅뜨고 천천히 세바스찬에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언제 꺼내든 것인지 지서연의 손에는 새햐안 빛을 발하는 단검이 들려 있었다. 세바스찬은 식은땀을 닦으며 급히 문으로 달려가 문을 열려고 했다. 하지만 이 저택의 모든 문은 일단 잠그면 여는데 꽤나 귀찮은 과정이 필요했다. 작업중인 인형이 혹시나 도망가는 것을 방해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지금의 경우에는 뭔가 상황이 반대로 흘러가고 있었다. 세바스찬은 식은땀을 흘리며 문을 열기 위해 침착하게 과정을 밟아나갔다.
츠팟!!
"흐어어억!!"
세 번째 잠금쇠를 풀기 위해서 손을 뻗던 세바스찬은 기겁할 수 밖에 없었다. 세바스찬의 떨리는 눈이 자신의 손 바로 앞에 박혀서 부르르 떨고 있는 새하얀 단검을 바라보고 있었다. 세바스찬은 입술을 굳게 다물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방금 단검을 던져버려서 이제 지서연은 무장 해제인 상황, 세바스찬은 성난 호랑이처럼 지서연에게 달려들었다.
"으헛!!"
막 달려들어 지서연을 걷어차려던 세바스찬은 갑자기 날아든 새하얀 섬광에 흠칫하며 몸을 바닥에 굴렀다. 그 즉각적인 반응 덕분에 세바스찬은 지서연의 단검 공격을 가까스로 피해낼 수 있었다. 지서연은 여전히 무표정한 눈빛으로 다시 양 손에 단검을 들고 천천히 세바스찬을 노리며 돌기 시작했다. 세바스찬은 어디서 자꾸 단검이 나오는 것인지 궁금했지만 몇 개가 더 있는지 알 수 없었기에 함부러 움직이지 못하고 지서연의 눈치를 보며 잔뜩 긴장하고 있었다.
"대체 이게 무슨..."
세바스찬은 입술을 깨물며 머리를 굴렸다. 분명 이지헌이 가르쳐 준 최면 명령 코드는 춤추는 요정이 맞았다. 그런데 난데 없이 멸살 코드의 발동이라니... 서,, 설마?
세바스찬의 몸이 부르르 떨리며 그의 눈이 의혹의 그림자에 사로잡힌 순간, 다시 지서연의 양 손이 세차게 뿌려지며 새하얀 섬광이 허공을 수놓았다.
"여기가 확실하지?"
"물론, 세 번이나 사전 조사를 마쳤어, 나를 의심하는거야?"
"훗,, 그럴리가"
"잠자코 따라와"
적막이 내려앉은 어두운 밤.. 한산한 인가를 조심스럽게 걸어가는 두 사람의 그림자가 있었다.
투박한 몸집에 어딘가 음침한 기운을 흘리고 있는 한 남자의 그림자..
그리고 매끈하게 떨어지는 곡선의 한 여자의 그림자.
그들은 빠른 발걸음으로 한 집의 마당으로 뛰어들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집의 정문으로 걸어가 문을 열기 시작했다.
"응? 열려있는데?"
"뭐지? 아, 사람이 온다"
두 사람은 갑자기 느껴지는 인기척에 당황하며 급히 주위에 수상한 가루를 뿌렸다.
"여보 나왔어!"
두 사람은 정문으로 다가와 문을 열고 들어서는 한 중년 남자를 보며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중년 남자는 바로 곁에 두 사람이 서 있음에도 전혀 그들을 인식하지 못하고 지나쳐서는 정문을 열고 들어서려 하고 있었다. 그 순간 두 사람의 몸이 중년 남자의 뒤에 달라붙듯 가까이 다가섰고 중년 남자와 함께 자연스럽게 집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남자는 재빠른 손놀림으로 중년 남자의 몸에 푸른 가루를 뿌렸다.
"어머 여보, 뭘 그렇게 묻히고 다니세요?"
"응?? 어, 어라? 어디서 이런게 묻은거지?"
안으로 들어선 중년 남자는 자신의 몸에 묻은 푸른 가루들을 툭툭 털어내기 시작했다. 중년 남자를 맞이한 젊어 보이는 여자는 입술을 삐죽거리며 투덜거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아아,, 그렇게 막 털어버리면 어떻해요,, 잠깐만요, 청소기 가져 올게요,,"
"어라? 아버지 오셨어요~??!"
"오오,, 별일 없었지?"
"네~"
"다연이는 남자친구랑 재밌게 놀았고?"
"몰라요,, 그런거"
"아하하!! 이제 다연이도 다 컷구나!! 부끄럼도 탈 줄 알고"
"치이~ 아빠 미워요!"
"아하하하!! 녀석, 그나저나 조만간에 집에 한 번 데려와야지? 우리 예쁜 딸을 홀린 녀석이 누군지 궁금해서 말이야"
어느새 수상한 두 사람은 방 안으로 들어와 있었음에도 중년 남자의 단란한 가족들은 아무도 그 두 사람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편안한 표정으로 그들의 모습을 살펴보고 있었다.
"에에? 아직 사귄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요..? 너무 빠르잖아요"
"아하하!! 그런 게 무슨 문제가 된다고 그러니, 마음에 들면 뭐 하루만에 스트레이트로 달릴,, 큭,, 여,, 여보!!"
"어휴,, 순진한 애들한테 못하는 소리가 없어요!! 빨리 들어가서 씻기나 하세요"
"으휴,, 장난도 못치나"
중년 남자는 너털웃음을 터뜨리고는 겉옷을 벗어제끼고 욕실로 들어갔다.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의 김다연은 고개를 푹 숙이고는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버렸다. 그런 언니를 재미있다는 시선으로 바라보던 김태연은 자신을 부르는 어머니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그 남자 어떤거 같았니? 너도 같이 갔었다며?"
"아아~ 지헌 오빠요? 흠,,, 솔직히 좀 아까워요"
"아,, 아깝다니? 혹시 별 볼일 없는거야?"
김태연의 어머니, 31세의 박소현은 흠칫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김태연은 새침한 표정으로 말을 아끼더니 박소현의 표정이 점점 일그러지는 것을 보며 장난스러운 미소와 함께 말했다.
"아아뇨~!! 그 반대죠, 우리 언니 짝으로는 너무 아까운 사람이에요"
"에에에?? 그, 그게 정말이야? 말도 안돼, 우리 다연이가 얼마나 예쁘고 착한 딸인데,, 설마 니가 콩깍지가 씌여서 그렇게 말하는거 아니야?"
"히잇,, 무,,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세요... 그런 바람둥이 따위.. 쳇, 관심도 없다구요!! 뭐.. 일단은 나도 여자친구로서의 의무는 다 하려고 하고 있지만.."
"응?? 여자친구라니? 이지헌군은 다연이의.."
"아!! 그런 건 중요한게 아니라구요!"
김태연은 빨개진 얼굴을 도리도리 흔들며 소리를 빽 지르고는 방으로 튀어들어갔다. 박소현은 어이없다는 표정을 하고는 잠시 멍하니 서 있다가 입가를 손으로 가리며 기분좋은 웃음을 터뜨렸다.
"어머.. 녀석도 참.. 그나저나 그 소년 꽤나 잘난 모양이네~ 우리 예쁜 딸 두명의 마음을 한 번에 가져가다니"
박소현의 눈빛에 일말의 호기심이 일렁거렸다.
삐이이걱...
책상에 앉아 책을 보던 김태연은 방문이 열리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아무도 들어오는 사람이 없자 김태연은 인상을 쓰며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닫았다.
"문이 왜 이래? 저 혼자 막 열리고.. 응?"
투덜거리며 문을 닫던 김태연은 갑자기 허공중에 잿빛의 가루가 휘날리자 의아한 눈빛으로 그 가루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김태연은 어쩐지 머릿속이 멍해지는 것을 느끼며 손을 내뻗어 벽을 짚었다. 땅이 핑핑 돌면서 온 몸의 힘이 천천히 빠져나가고 있었다. 김태연은 뭔가 좋지 않은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을 예감하며 필사적으로 방에서 빠져나가려 했다.
"아아.. 무,, 무슨.. 아?"
김태연은 부들부들 떨리는 손을 힘겹게 내밀어 방문의 손잡이를 잡았다. 그리고 힘을 다해 손잡이를 돌리던 김태연은 누군가의 손에 자신의 팔이 잡혀 문을 여는데 실패하고 말았다. 김태연은 흐릿하게 감기는 눈으로 고개를 돌려 자신을 잡은 사람을 쳐다보려 했다. 김태연은 붉은 눈동자로 자신을 응시하는 아름다운 여자의 얼굴을 마지막으로 정신을 잃고 말았다.
"꽤 버티잖아?"
"그러네,, 생각보다 정신방어가 대단해"
"그런데도 이지헌 그 녀석은 이 정도나 파헤쳐 놓았군"
"덕분에 우리는 일이 쉽게 되었어"
푸덕한 몸집의 흉한 남자와 아름다운 적안의 여자는 쓰러진 김태연을 침대에 눕히고 조용히 말을 주고받았다. 남자는 김태연의 무방비한 몸을 보며 군침을 흘리고 있었다.
"흐흐흐... 어린 것들이 원래 더 맛있는 법이지"
"그만둬, 빨리 할 일이나 처리하고 떠나자, 착란 가루의 효과도 앞으로 얼마 안 남았어"
"쳇,, 아쉽군"
김태연의 투명한 살결을 두꺼운 손으로 쓰다듬으며 군침을 흘리던 남자는 아쉬운 듯한 표정을 애써 가리며 품 속에서 작은 약병을 꺼내들었다. 짙은 주황빛의 색깔을 띄는 그 약병을 남자는 자부심이 가득한 표정으로 바라보더니 단번에 그 봉한 입구를 열고는 김태연의 입에 털어넣었다.
"이걸로 이지헌 녀석도 끝이야.."
"장담할 수 있겠어? 이미 한 번 실패한 전력도 있잖아"
"그,,, 그건... 아니, 이번은 달라, 믿어줘"
남자는 분한 표정을 삼키며 말했다. 여자는 살짝 비웃음을 담은 미소를 지으며 방문을 열고 나섰다.
"됐으니까 가자."
남자는 불만이 가득한 표정이었지만 여자가 아무런 말도 없이 앞서 나가자 어쩔 수 없이 그 뒤를 따라나갔다. 박소현이 주방에서 남편의 야참을 준비하고 박소현의 남편이 TV에 빠져있는 틈을 타서 두 사람은 현관의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고 이내 그 골목에서 사라져 버렸다. 두 사람의 최면 착란 가루의 효과 때문에 두 사람이 김다연의 집에 다녀갔다는 것은 아무도 알지 못했다. 그리고 그것은 앞으로 닥쳐올 커다란 위험에 대한 신호를 전해주고 있었다
"하악,, 하아아,, 하아,, 제,, 젠장!!"
세바스찬은 심장이 터질듯이 뛰고 호흡이 턱 밑에까지 올라와 숨이 가빠오는 것을 느꼈지만 달리는 걸음을 멈출 수 없었다. 가까스로 그 방에서 탈출하는데는 성공했지만 여전히 지서연은 살기를 폭출하며 자신의 뒤를 쫓아오고 있는 것이었다. 세바스찬은 이를 악물고 죽을 힘을 다해 지서연에게서 달아나고 있었다.
슈슛!!
"으엇!!"
세바스찬은 뒤에서 느껴지는 서늘한 감각에 급히 몸을 틀며 내뒹굴었다. 덕분에 지서연의 단검을 피해낼 수 있었지만 지서연과의 거리차는 꽤나 좁혀지고 말았다. 세바스찬은 급히 몸을 일으켜 달아나면서 복도에 놓인 도구함을 잡아당겨 쓰러뜨렸다.
와르르르!!
세바스찬은 도구함에 담겨 있던 잡기들이 쏟아져 길을 막는 것을 보고는 더욱 힘을 다해 달리기 시작했다. 세바스찬은 드디어 1층의 복도를 벗어나 밖으로 나와 달리기 시작했다. 지서연은 대략 세바스찬의 100미터 뒤 쯤에서 여전히 쫓아오는 중이었다. 꽤나 거리를 벌리긴 했지만 여전히 안심할 수는 없었다. 세바스찬은 제발 지서연이 지쳐서 멈추어 주기를 빌고 있었지만 아무래도 최면으로 조종되고 있는 모양인 지서연이 지칠 리가 없었다. 세바스찬은 절망감을 느끼면서도 죽을 힘을 다해 달렸다. 이대로 달리다 보면 누군가라도 나와서 도와주리라고 믿으며...
"으음..."
한편, 같은 시간 이지헌은 달빛이 내려앉은 창가에 서서 바깥의 전경을 내다보고 있었다.
화려한 달빛에 빛나는 거대한 저택... 이지헌의 시선은 그 저택의 정원위를 내달리는 세바스찬과 지서연에게 머물고 있었다.
"나름 제대로 해내고 있군..."
이지헌은 소름끼치는 살기를 내뿜으며 세바스찬의 뒤를 쫓는 지서연의 모습을 바라보며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어딘가 마음 한 구석이 쓰려오고 있기는 했지만 이지헌은 애써 그 마음을 무시하며 중얼거렸다.
"최면술사에게 가족 따위는 아무런 의미도 없어..."
이지헌은 멀리서 번쩍거리는 빛줄기가 세바스찬을 스치며 결국 세바스찬이 바닥에 쓰러지는 것을 보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멀리 세바스찬을 바라보는 이지헌은 세바스찬이 자신을 쳐다보는 듯한 느낌을 느끼자 살짝 인상을 쓰며 창문에서 등을 돌려버렸다.
"이걸로,, 된거야"
이지헌은 어딘가 씁쓸한 표정으로 침대를 향해 걸어가서는 몸을 그 위에 던져버렸다.
스걱!!
"크으윽,,"
결국 달리다 힘이 빠져버린 세바스찬은 지서연에게 거리를 주고 말았고 그 결과로 다리와 몸통 곳곳에 스친 상처를 만들고 말았다. 세바스찬은 온 몸에서 흘러내린 피와 땀으로 점점 더 빠르게 지쳐가는 자신의 상태를 느끼고 있었다. 세바스찬은 입술을 깨물며 억지로라도 정신을 차리려 애썼다. 하지만 지치지 않는 지서연의 추격은 너무나 무서웠다. 세바스찬은 다시 목 언저리에 느껴지는 섬뜩한 감각에 비명을 지르며 몸을 굴렀다.
츠파팟!!
급히 고개를 숙이는 세바스찬의 위로 하얀 머리카락 몇 개가 흩날리고 세바스찬은 피할 때의 충격으로 세 바퀴나 굴러버렸다. 그리고 다음 순간, 바닥을 구르며 균형을 잃은 세바스찬을 향해 단검이 소나기처럼 쏟아져 내렸다.
츠파파파파파팟!! 파팟!! 팟!!
"으허헉!! ,,, 읏,, 아악!!"
세바스찬은 기겁을 하며 몸을 굴려 단검을 피하려 했다. 하지만 빠른 속도로 쏟아지듯 내려오는 단검을 모두 피해 낼 수 있을리가 없었다. 결국 세바스찬은 허벅지와 어깨에 단검을 꽂은 상태로 바닥에 널브러져 버렸다. 이를 악물고 일어나 보려 애써도 이미 단검에 허벅지의 힘줄이 끊겨 버린 듯 다리에 힘을 줄 수 없었다.
"마스터의 명령에 따라서 목표물을 멸살하겠습니다."
천천히 다가오는 지서연은 나직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다시 양 손에 단검을 가득 쥐고는 세바스찬을 노려보기 시작했다. 세바스찬은 온 몸에 잠식해오는 고통을 일그러지는 얼굴로 참아내며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어,, 어째서!! ... 서.. 설마 정말로 그 아이가..."
세바스찬의 얼굴에 괴로운 표정이 떠올랐다. 세바스찬의 시선이 이지헌이 머물고 있을 3층의 방으로 향했다. 그 순간 세바스찬은 창가에 어른거리던 이지헌의 형상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세바스찬이 그 형상을 동공에 담은 순간 그 형상은 창문에서 등을 돌려 멀어져갔다. 세바스찬은 비참한 표정으로 허탈한 웃음을 터뜨렸다.
"하,, 하하하!!! 그래,, 죗 값은 치뤄야겠지... 아직도 내가 그 아이의 아버지이기를 바라다니... 이렇게 염치가 없어서야!! 으하하하!!"
세바스찬은 미친듯이 웃음을 터뜨렸다.
"크하하하!! 크하,,, 쿨럭,, 컥,, 커억,,,"
한참 광소하던 세바스찬은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핏물을 게워냈다. 세바스찬의 몸이 들썩일 때 마다 입가에서는 굵은 핏덩이가 울컥울컥 솟아나 바닥을 더럽히고 있었다. 지서연은 그런 세바스찬의 비참한 모습을 무심한 표정으로,, 아니 묘한 미소를 머금고 바라보면서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그리고 대략 세바스찬의 5미터 정도 앞에 멈춰선 지서연은 입을 열었다.
"다음 생에서 다시 당신을 아버지로 만난다면..."
"아아..."
세바스찬은 떨리는 눈동자로 지서연을 바라보았다. 지서연은 입가에 떠오른 미소를 더욱 진하게 띄워올리며 말했다.
"그때는 꼭 행복한 가족일 수 있기를"
지서연의 입가에서 미소가 천천히 사라져가고, 세바스찬은 한 줄기의 눈물과 함께 고개를 떨구었다. 그리고, 지서연의 손 끝에서 한 무리의 단검이 떠나갔다.
파파파파팟!!!
소름끼치는 파란 섬광과 함께 허공을 가르며 날아가 세바스찬의 몸을 가르고 박히는 단검... 세바스찬은 그 섬찟한 느낌에 몸을
떨며 천천히 쓰러져갔다. 쓰러지는 세바스찬의 입가에 한 줄기의 미소가 어른거렸다.
털썩.
달빛이 쏟아지는 어두운 밤... 무심한 표정의 지서연은 입가에서 핏덩이를 토해내며 쓰러진 세바스찬을 조용히 내려다 보고 있었다.
지서연은 천천히 다가가 세바스찬의 채 감기지 못한 눈을 감겨주었다. 지서연의 시선이 세바스찬의 몸을 천천히 훑었다.
격한 도주의 영향으로 거칠게 구겨진 집사복, 지친 표정이 역력한 사자의 얼굴... 하지만 몸 어느 곳에도 작은 상처 하나 남아있지 않았다. 그것을 확인한 지서연은 슬며시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저택으로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