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오빠, 지금 여기서 뭐하는 거야?”
갑자기 등 뒤에서 들려오는 앙칼진 여자 목소리에 준혁은 순간 놀라 움찔했다.
하지만, 곧 얼굴에 웃음을 짓고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그 익숙한 목소리의 주인공에게 고개를 돌렸다.
거기에는 늘씬하게 잘 빠진 몸매에 최신 유행 패션을 멋지게 차려입은 젊은 여자가
아리따운 얼굴에 어울리지 않게 잔뜩 성이 난 표정으로 서있었다.
“어, 수진이 왔어? 내가 여기 있는지 어떻게 알았대?”
“오빠가 어디 있는지 내가 모를 줄 알아? 오빤 내 손바닥 안이야.
그건 그렇고 여기서 도대체 뭔 짓을 하고 있던 건지 설명 좀 해보시지.”
“어, 그, 그게.......”
준혁은 난처한 표정으로 줄줄이 말을 늘어놓으며 애써 수진의 관심을 딴 데로 돌리려고 노력했지만,
자기 아내가 한번 물면 끝장을 보는 성격이라는 걸 잘 알기에
그가 몰래 벌이던 이번 일을 대충 둘려대는 선에서 마무리 짓는다는 것이 쉽지 않음을 직감하고 있었다.
게다가 상황조차 좋지 못했다. 준혁이 연습하느라 테이블 위에 널려놓은 물건들은
척 봐도 여기서 뭘 하는 건지 금방 알 수 있는 물건들 이어서 눈치 빠른 수진에게 그걸 숨긴다는 건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었다.
결국 준혁은 마지못해 사실을 털어놓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결혼기념일에 깜짝 이벤트나 해주겠다고,
이런 코딱지만 한 학원에 돈 막 퍼주면서 같지도 않은 마술 나부랭이나 배우고 있었단 말이야?
차라리 그럴 시간 있으면 돈 낭비하지 말고 집에나 일찍 들어와, 인간아.
그건 그렇고, 이 남자가 오빠 이런 거 하자고 꼬신 거야? 나 원, 기가 차서.
이렇게 젊은 사람이 무슨 실력이 있다고? 아직도 그렇게 사람 볼 줄 몰라?
차라리 내가 알아봐도 더 나은 선생 찾겠다.”
“수, 수진아. 그만 둬. 그게 무슨 말이야. 선생님 죄송합니다. 아내가 뭔가 오해한 듯 하네요. 수진아, 얼른 사과드려.”
“오해는 무슨 오해. 내가 무슨 틀린 말 했어? 오빠 대체 뭐에 홀린 거야? 이런다고 내가 좋아할 것 같아?
이런 데 쓸 돈 있음 차라리 그 돈 나한테나 갖다 주라고.”
“알았어. 알았다고. 자, 자, 나가서 얘기하자.”
“나가긴 어딜 나가? 이 팔 안 놔?”
“수진아. 내말 좀 들어. 자, 얼른.”
두 사람은 얼떨결에 사기꾼으로 몰린 남자를 달랑 혼자 남기고는 소란스럽게 그곳을 빠져나갔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 둘이 티격태격 대는 소리는 그들이 건물 밖으로 나갈 때까지 오랫동안 길게 이어져왔다.
준혁이 다시 그곳으로 돌아온 것은 남자가 소란 통에 어질러진 실내를 정리하고 난 한참 후였다.
준혁은 미안한 표정으로 테이블 근처 의자에 앉아있던 남자에게로 다가갔다.
“부인은 잘 들어가셨습니까?”
“네, 간신히 달래서 택시에 태워 보냈습니다. 이게 뭔 소란인지....... 죄송합니다, 선생님.
이러려고 했던 게 아니었는데, 정말 죄송합니다.”
“괜찮습니다. 전 오히려 준혁씨가 더 걱정되는 군요. 괜찮습니까?”
“저야 뭐 늘 겪는 일인데요, 뭐. 이젠 그냥 그러려니 하죠.”
“그럼 다행이군요.”
“한데 수진이가 이 일을 알아버렸으니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하네요.
이미 들킨 상황에서 깜짝 이벤트는 물 건너 간 것 같고....... 죄송해서 어쩌죠?”
“이미 벌어진 일을 후회하면 뭘 합니까?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수강료는 오늘 꺼 까지만 제하고 돌려드리겠습니다.”
“아뇨. 그러지 마세요. 제가 큰 실례를 저질렀는데요. 그건 그냥.......”
“괜찮습니다. 그보다 오늘 저녁 시간 어떠십니까?”
“예?”
“여기 있어봤자 더 올 사람도 없을 것 같고, 차라리 일찍 닫고 기분도 풀 겸 같이 한 잔 하러 가는 게 어떨까 하는데요.”
“그건 좀 곤란할 것 같습니다. 집에서 아내가 이를 갈면서 기다릴 거 같아서요.”
“가벼운 저녁식사와 반주 정도면 부인께서도 크게 뭐라고 하지 않으실 것 같은데요.”
“아, 그렇게 말씀하신다면야. 알겠습니다. 수진이한텐 가볍게 핑계 하나 데죠, 뭐.”
학원 문을 닫고 두 사람이 향한 곳은 근처에 위치한 아담한 식당이었다.
비록 크기는 작아도 맛있다는 입소문과 길목 좋은 곳에 위치한 덕에 늘 사람이 북적대는 곳이었지만,
지금은 아직 이른 시간이었는지 식당 안은 한산해 보였다.
그 덕에 쉽게 자리를 잡은 두 사람은 간단한 요깃거리와 술을 주문했다.
이곳의 음식 맛은 소문대로 훌륭했다.
두 사람은 그렇게 서로 잔을 나누며 탁자에 차려진 반찬을 안주삼아 가벼운 이야기를 주고받기 시작했다.
얼마 뒤, 분위기가 무르익자 몸에 적당히 술이 돌아 긴장이 풀린 준혁은
그동안의 울분을 토해내 듯이 남자에게 수진에 대한 불만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 선생님이 보셨다 시피 제 아내, 수진이. 꽤 예쁘죠?
그런데 막상 살아보니 마음이 외모 따라 가는 건 아니더라고요.
저도 처음엔 걔 예쁜 모습에 홀딱 반했었는데, 지금은 선생님처럼 혼자 사는 게 훨씬 더 편하다는 생각이 계속 들어요.
제 말 이해하시겠죠?”
“글쎄요. 저는 그저 부러울 뿐인데요. 저도 그렇게 어리고 아름다운 신부와 살아봤으면 좋겠습니다.
게다가 두 분 결혼도 일찍 하시지 않았습니까?”
“참으세요. 제가 적극 말리겠습니다. 만약 결혼을 하시더라도 최대한 미룰 만큼 미룬 뒤에 하세요.”
“왜 그렇게 생각하시죠?”
“젊은 나이더라도 권태기라는 건 피할 수 없더라고요.
우리야 비록 밖에서 공부하다가 양가 부모님들이 짝이 맞는다고 성화여서 서둘러 결혼하긴 했지만,
아, 물론 처음엔 꽤 좋았죠. 어린 나이에 저보다 더 어리고 예쁜 여자를 데리고 산다는 게 꿈만 같더라고요.
거 남자의 로망이잖아요.
근데 시간이 일 년, 일 년 지나가니까 서로 익숙해지고 각자 성격이 부딪히면서 어느 순간 꼴도 보기 싫어지더군요.
아까 수진이 말하는 거 들으셨죠? 정말 속을 긁는다니까요.
얼마 전에야 ‘이게 말로만 듣던 권태기구나’하고 알았지만, 남들에게 말해봤자 배부른 소리 한다는 말만 들을 게 뻔해서
어디 가서 하소연도 못해요.”
“이런, 안타깝군요. 그럼 아내분과 이런 상황을 풀어보려고 노력은 해 보셨나요?”
“그럼요. 이런 상황이 오래 가는 건 서로에게 좋지 못하니까 이것저것 시도해보곤 했죠.
근데 그게 말처럼 쉽지 않더라구요. 제가 선생님께 마술을 배운 것도 다 그 때문인데 이젠 이것도 글렀네요. 아까 반응 보셨죠?”
“참, 이거 남일 같지 않군요. 기운내세요. 뭔가 방법이 있겠죠.”
“글쎄요. 저는 이번이 마지막이라는 심정으로 준비하던 거였는데 이렇게 되니 참 허탈하네요.
앞으로 뭘 더 해봐야 할지 모르겠어요.”
준혁은 자신의 우울한 기분을 털어버리기라도 하는 듯이 술잔을 한 입에 탁 털어 넣었다.
그런 준혁의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마술사는 뭔가 곰곰이 생각하더니 입을 열었다.
“이런 방법은 어떨까요? 이게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그 말과 함께 마술사는 준혁의 귀에 대고 뭔가를 속삭이기 시작했다.
가만히 그 말을 듣고 있던 준혁은 갑자기 술이 번쩍 깨듯이 눈이 휘둥그레지더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마술선생을 쳐다보았다.
“그, 그게 가능한 얘기입니까? 믿을 수가 없는 데요.”
“처음엔 누구나 다 그렇게 생각하시더군요. 하지만 여태까지 실패한 적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정말 확실 합니까?”
“저는 함부로 이런 얘기를 꺼내진 않습니다. 정말 믿을 수 있는 사람에게만 귀띔을 해주죠.
준혁씨는 지금 자신의 마음을 제게 솔직하게 보여주셨고, 제가 그런 준혁씨를 믿기에 이 말을 꺼내는 겁니다.
물론 당장 믿기 어렵다는 건 압니다. 때문에 필요하다면 증명해 보일 수도 있습니다.
허나 분명한 것은 결정은 온전히 준혁씨 몫이라는 겁니다. 신중하게 생각하고 선택하세요.”
그 말에 준혁은 생각에 잠겼다. 그렇게 잠시 고민하던 준혁은 곧 마음을 정했는지 입을 열었다.
“만약 선생님 말이 100% 확실하다고 한다면, 전 한 번 해보고 싶습니다.
하지만, 그 전에 선생님의 방법이 정말 안전하고 확실한 것인지 제가 확인해 볼 수 있겠습니까?”
“........”
마술사는 대답 대신에 코트 안주머니에서 명함첩을 꺼냈다. 그리곤 명함 하나를 꺼내서 준혁에게 건넸다.
금빛 명함 앞면엔 간단한 상호만이 적혀있었다.
‘클럽 모나코’
계속해서 준혁이 명함을 뒤집자, 이번엔 흰 바탕에 검은색으로 전화번호 하나가 적혀있었다.
그런 준혁을 바라보면서 마술사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이번 금요일 밤에 거기서 제 공연이 있습니다. 정말로 결심이 서셨다면, 목요일까지 그 번호로 연락을 주세요. 그럼 진짜 마술을 보실 수 있을 겁니다.”
금요일 밤, 준혁은 거리를 걷고 있었다. 마음속으로는 계속해서 자신이 미쳤다고 자책하고 있었지만,
한편으론 밑져야 본전이라는 생각에, 또 다른 한편으론 약간의 기대감과 흥분에 휩싸인 채로 준혁은 부지런히 발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그가 도착 곳은 큰 길에서 한 칸 안쪽으로 자리 잡은 상가 골목이었다.
골목 양 옆을 꽉 매운 각종 음식점과 술집들 사이를 지나 준혁은 마침내 그 끝 한적한 곳에 자리한 빌딩 앞에 발걸음을 멈추었다.
그 그물 지하로 통하는 입구 옆으로는 그렇게 확 눈에 띠지는 않았지만,
깔끔한 글씨체로 ‘클럽 모나코’라고 멋스럽게 적힌 간판이 붙어있었다.
준혁은 다시금 망설이는 듯이 잠시 그 앞에서 서성거렸지만,
이내 마음을 굳히고 계단을 내려가서는 거기에 자리 잡은 반투명 유리문을 열었다.
그러자, 안쪽으로 어둑어둑하면서도 멋있는 인테리어가 인상적인 공간이 눈에 들어왔다.
그곳은 마치 고급 와인바 같은 분위기였다. 한쪽에 위치한 각종 술이 전시되어있는 바가 자리 잡고 있고,
그 앞으로 펼쳐진 광택 나는 나무 바닥 위로 각종 테이블과 함께 여기저기 몸이 푹 들어갈 정도로 푹신한 소파들과
거기에 둘러싸인 낮은 탁자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검게 칠해진 천정에서는 여러 개의 텅스텐 조명이 밑으로 늘어져서는 그 아래 자리 잡고 있는 테이블과 사람들을
비춰주고 있었다. 그리고 바 맞은편으로는 공연을 위한 작은 무대가 자리해 있었다. 손님은 많지도 적지도 않았지만,
미리 자리를 잡은 사람들은 무대에서 공연 중인 가수의 노래에 흠뻑 젖어있거나, 또는 일행과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준혁은 카운터에 다가가 직원을 찾았다.
“오늘 여기 예약하고 왔는데요. 확인 가능할 까요?”
잠깐 예약상황을 확인한 직원의 안내에 따라 준혁은 무대 앞쪽에 있는 예약석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 곳에서 가벼운 칵테일을 주문한 준혁은 잠시 주위를 둘러보다가 곧 의자에 편안한 자세로 몸을 기대고는
음악을 감상하기 시작했다.
그런 준혁에게로 얼마 안 있어 아까의 카운터 직원이 다가오더니 죄송하단 표정으로 말을 건넸다.
“죄송합니다, 손님. 저희 착오로 예약이 중복되어서 그런데, 실례가 안 되신다면
여기 두 분과 합석을 부탁드려도 괜찮으시겠습니까?”
갑자기 벌어진 일에 약간 의아한 준혁이었지만, 다른 손님들을 세워두고 넓은 예약석 좌석을 혼자 독차지하고 있는 건
경우가 아니라고 생각하고는 흔쾌히 승낙을 했다.
직원의 안내로 준혁과 동석하게 된 사람들은 준혁 또래의 젊은 커플이었다.
두 사람은 고맙다는 말과 함께 외투를 벗고는 준혁의 옆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메뉴판을 들고 주문할 것을 상의하기 시작했다.
준혁은 자신의 잔을 홀짝이면서 호기심에 그런 두 사람을 곁눈질로 관찰하기 시작했다.
두 사람 중 남자는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훈남 스타일이었지만, 생기 있는 눈빛과 장난기가 살짝 엿보이는 표정은
마치 잘 자란 개구쟁이 소년 같은 느낌이었다.
그리고 그 옆 남자와 준혁 사이에 자리 잡은 여자는 좀 전부터 다른 이유로 준혁의 관심을 끌고 있었다.
여자의 외모는 얼핏 나이를 짐작하기 힘들었다. 꽤나 예쁘장한 생김새와 밝고 깨끗한 피부는 탱탱한 20대를 떠오르게 했지만,
그녀의 태도나 자신의 스타일에 맞게 세련되면서도 화사하게 꾸민 옷차림과 과하지 않고 자연스러운 화장은 그녀의 노련함을
보여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준혁은 결국 그 여자가 약간 나이가 좀 있지만, 자기관리를 꽤나 잘한 것으로 결론을 내렸다.
하지만 정작 준혁의 눈길을 붙잡은 것은 따로 있었다.
그녀가 재킷을 벗자 드러난, 몸에 바른 듯이 꼭 맞는 실크 블라우스와 치마, 그리고 그 아래 광택나는 스타킹에 싸여
길게 뻗어있는 늘씬한 다리는 이 여자가 꽤나 매력적인 글래머 몸매의 소유자임을 확인시켜주고 있었다.
게다가 여자의 머리카락과 몸에서 은은하게 피어오르는 향기는 그런 그녀의 섹시한 매력을 한층 더 빛나게 하고 있었다.
준혁은 여자가 움직일 때마다 파란 블라우스 너머 어렴풋이 비쳐 보이는 화려한 레이스의 검정 브래지어와 그 사이로
살짝 드러난 통통한 젖가슴이 쉴 새 없이 흔들리는 것을 슬금슬금 감상하면서 지금 마시고 있는 칵테일이 더욱 달콤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그 순간,
“여긴 처음이신가 보죠?”
“예?”
“제 입으로 말하긴 쑥스럽지만, 저희가 여기 단골인데 오늘 처음 뵙는 것 같아서요.”
갑자기 말을 걸어온 남자 덕에 순간 마시던 칵테일이 목에 걸릴 뻔한 준혁은 간신히 위기를 모면하고 옆의 두 사람을 보면서
말했다.
“아, 예. 실은 오늘 여기서 약속이 있어서요.”
“와, 신기한 일이네요. 저희도 오늘 약속 때문에 여기 왔거든요.”
“야, 너 너무 나댄다. 강대리.”
“회사는 이미 끝났는데, 지금도 직급 찾으시깁니까, 윤.소.정. 차장님?”
“처음 뵙는 분에게 무슨 말을 그렇게 해? 우리 땜에 자리까지 양보해주셨는데. 죄송합니다. 제 동료가 즐기시는 데 방해를 한 것
같네요.”
“아니요, 괜찮습니다. 실은 여기 아는 사람도 없이 혼자 뻘쭘하게 앉아있기가 좀 그러던 참이었거든요."
“그런데 만나기로 하신 분은 아직 인가 보네요.”
“예, 일이 있는 건지 좀 늦으시는 것 같군요. 두 분은요?”
“저희도 비슷해요. 여기서 누굴 기다려야 하거든요.”
“그럼 그 때까지 같이 시간을 보내면 되겠군요. 그러고 보니 아직 인사도 안 드렸네요. 저는 박준혁라고 합니다.”
“저는 윤소정입니다.”
“저는 그 밑에서 노력봉사 중인 강윤호라고 합니다. 근데, 혹시 우리 전에 만난 적이 있나요?”
“예? 왜 그러시죠?”
“그게 얼굴이 좀 낯익은 듯해서요.”
“아, 평소에 그런 얘기 많이 듣습니다. 아무래도 얼굴이 평범하게 생겨서 그런 모양이에요.”
“야! 너 말 좀 점잖게 못할래? 과장대리 타이틀이 아깝다. 인간아!”
“아니, 여기까지 와서 직급 타령이라니. 좀 심하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하지만, 윤차장은 그런 강대리의 귀를 잡아당기더니 작은 목소리로 귓속말을 속삭이기 시작했다.
“이 멍청아! 척보면 몰라? 우리 중요 거래처인 클로버 그룹의 하나뿐인 데릴사위잖아!”
그 말을 들은 강대리는 깜짝 놀랐는지 눈이 동그래져서는 준혁을 쳐다보았다.
하지만 그완 대조적으로 옆에 있던 윤차장은 그래도 사회생활 경력은 무시하지 못 하는 듯, 바로 자세를 고치고 앉아서
공손히 사과를 했다.
“이렇게 자리까지 양보해 주셨는데, 실례를 범하게 되서 죄송합니다. 제가 부하직원을 잘못 둔 바람에......”
“아아, 신경쓰지 마세요. 강대리님 말처럼 우리가 지금 일하러 만난 게 아니잖습니까? 전 지금 이렇게 서로 편안하게 대화를
나누는 게 더 좋으니까 맘에 두지 말아주세요. 제가 오히려 부탁드립니다.”
“거봐요. 제가 뭐랬어요. 우리 즐길 땐 맘껏 즐기자고요.”
“그래도 상황을 보면서 즐겨야 할 거 아니야! 이 단세포, 말미잘아!”
준혁은 한동안 그렇게 자기 눈앞에서 윤차장과 강대리가 정겹게 티격태격하는 장면을 조용히 지켜보다가 입을 열었다.
“근데 두 분 사귄지 얼마나 되셨나요?”
“예?”
“아, 그게 지금 두 분의 모습이 그냥 일반적인 직장 선후배관계는 아닌 것 같아서요.”
준혁의 말에 두 사람은 한동안 말이 없이 서로 눈치만 보고 있었다.
특히 윤차장의 눈에선 강대리에게 말조심하라는 강한 경고성의 레이저가 발사되고 있었다. 하지만 정작 강대리는 뭔가
마음 속으로 결정을 내렸는지, 준혁의 질문에 호탕하게 웃으면서 대답했다.
“하하하, 역시 보통 눈썰미가 아니시군요.”
“야, 강대리.”
“이미 눈치 다 채신 것 같은데 시원하게 공개하자고요. 예, 맞습니다. 저희 실은 사귀고 있습니다. 날짜도 잡았고요.”
“예? 정말로요? 와,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감사합니다. 근데 부탁인데, 당분간 비밀로 해주시면 안 될까요? 회사에서 시끄러울까봐서요.”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윤차장님. 두 분 결혼하실 때까지 이 입을 꼭 봉해놓고 있지요.”
준혁은 손으로 입에 지퍼를 채우는 시늉을 하면서 말했다. 그 행동에 세 사람은 크게 웃기 시작했다. 그런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들려오던 노래가 끝나고 가수가 무대에서 퇴장했다. 그리고 작은 북소리와 함께 조명이 어두워지더니,
곧 말끔하게 검정색 정장을 차려입은 남자가 무대 위로 등장했다. 준혁은 그 사람이 바로 자신을 이곳에 초대한 마술사 임을
한 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신사 숙녀 여러분. 바쁘신 와중에도 이렇게 저희 가게를 찾아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근데 이 인간이 누구기에
갑자기 무대를 독차지하고서 이렇게 떠드는지 궁금하시죠? 먼저 제 소개부터 하도록 하죠.”
그러면서 마술사는 주머니에서 평범한 휴지뭉치를 꺼내어 가늘게 돌돌 말기 시작하더니 순식간에 종이장미 한송이을 만들었다.
마술사는 그것을 들고 손님들에게로 걸어가더니 그 중 가까이에 있는 한 여성에게 우아하게 그걸 내밀고 다른 손으로 장미
전체를 쓰다듬었다. 그러자, 마술사의 손에는 진짜 장미가 들려져 있었다.
그 깜짝 마술에 손님들은 모두 너나할 것 없이 놀라면서도 즐겁게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순간에 손님들의 관심을
집중시키면서 분위기를 띄운 마술사는 그 장미의 향기를 살짝 맡고는 손님에게 건네주고 다시 무대로 돌아왔다.
“여러분의 환영에 감사드립니다. 자, 그럼 이런 분위기에서 지원자 한 분 모시도록 하죠. 누구 없으십니까?”
당연히 사방에선 자원하는 손들이 무대 주변을 가득 채웠다. 마술사는 그 중 가까이에 있던 아리따운 젊은 여성 하나를 무대
위로 올라오게 하더니, 두 손을 모아 앞으로 내밀게 하고는 그 위에 작은 봉제인형을 올려놓았다. 그리고 그 주변을 쓰다듬듯이
두 손을 움직였다. 그러자 곧 손 위의 인형이 음악에 맞춰 일어나더니 춤을 추기 시작했다. 그 광경에 객석에선 또다시 열광적인
박수소리가 터져나왔다.
계속해서 마술사는 커플 한쌍을 초대해서 서로의 두 손을 마주잡게 하고는 그 사이로 붉은 끈을 통과시켜 그 손들을 묶고 매듭을
지은 뒤, 잠시 천으로 그 손들을 덮은 사이 매듭을 푼다던가, 두 사람의 팔을 이리저리 기묘하게 움직이더니 두 사람이 자신의
두 손이 묶인 상태 그대로 서로의 허리를 껴안게 만들거나, 세 여성을 세로로 세워진 긴 상자에 각자 넣고는 상자를 4등분 해서
각자의 상하체를 뒤바꾼 뒤 꺼내보니 각자 입었던 옷이 그대로 바뀌어 있는 등 일반 까페나 클럽에서 가볍게 선보이는 수준을
훌쩍 넘어서는 고급마술들을 차례로 선보였다.
물론 보는 이들 입장에선 마술사와 지원자가 짜고 치는 것 아니냐고 의문을 품을 수도 있겠지만, 마술사가 매 마술마다 지원자를
바꾸고 있었기에 그런 트릭은 애초에 불가능해 보였다. 때문에 손님들은 도대체 마술의 트릭이 무엇인지 궁금해 하면서도 눈
앞에서 연달아 펼쳐지는 마술사의 환상적인 공연에 모두 흠뻑 빠져서는 공연 내내 환호와 박수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자, 이제 그럼 마지막 마술입니다. 아, 아, 압니다. 이렇게 끝내긴 아쉽겠지요. 하지만 이 밤이 더 깊어지기 전에 여러분을 집으로
돌려보내드려야죠.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그리고 마술사는 방금 전 마술의 지원자로 무대에 나와있던 여성에게 부탁해 언제 준비된 건지 무대 옆에 놓여있던 전신거울을
무대 중앙으로 끌고오게 했다.
“여러분. 보시다시피 이번 마술은 거울통과쇼 입니다 . 제가 이 거울 속으로 사라지는 거죠.”
마술사의 말에 관객들은 반신반의하는 표정들이었다. 그도 그런 것이 아까 무대 위로 가져올 때 그 얇디 얇은 거울 어디에도
속임수의 흔적은 찾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마술사는 거기에 한술 더 떠서 지원자에게 그 거울을 돌게 하면서 거기에
아무런 장치도 없는지 꼼꼼히 확인하도록 했다.
“감사합니다. 아, 한데 자리로 가시기 전에 여기 거울 좀 닦아주시겠습니까? 특히 이부분은 제가 들어가야 하니 깨끗이
닦아주셨으면 좋겠군요.”
그렇게 장난스러운 지시로 지원자에게 거울을 닦게 하면서 다시 한 번 거기에 아무런 트릭이 없다는 것을 손님들에게 확인시킨
마술사는 지원자를 무대에서 내려보낸 뒤 한 팔을 들어올려 신호를 보냈다. 그러자 조명이 어두워지면서 거울 쪽에만
스포트라이트가 밝혀지고, 작은 북소리가 울리면서 긴장감을 조성하기 시작했다.
모두의 시선이 집중된 가운데 드디어 마술사가 거울 앞으로 걸어갔다. 그리고는 한 발을 들어 거울 쪽으로 내밀었다. 그러자
놀랍게도 그 발이 거울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닌가. 마술사는 그 상태에서 관객들을 쳐다보며 잠시 뜸을 들이더니 쓰윽
무게 중심을 옮기면서 거울 안으로 몸을 집어넣었다. 그리고 거울 속에 비친 객석들 사이로 걸어가더니 뒤를 돌아보고는
손님들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동시에 카페 조명 전체가 들어왔다.
“신사숙녀 여려분, 감사합니다! 오늘은 여기까지입니다! 다음에 또 뵙도록 하죠.”
손님들은 갑자기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깜짝 놀라 모두 뒤를 돌아다 보았다. 그러자 거기에는 거울 속에 보이는 것과 똑같은
위치에 마술사가 서있었다. 그 놀라운 광경에 손님들은 잠시 믿을 수 없다는 듯 얼어있다가 곧 카페 안이 떠나갈 듯이 박수와
환호성을 보내기 시작했다. 그 환호에 마술사는 몇 번이나 허리를 숙여 인사를 하더니 곧 그 자리를 떴다.
그렇게 쇼가 끝나고 마술사가 퇴장한 뒤에도 사람들의 흥분이 가라않기에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사람들은 마술사가 자신들의
눈 앞에서 펼쳐보인 환상적인 마술들을 주제로 끊임없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건 예약석의 세 사람도 마찬가지였다.
“이야, 정말 대단한데요. 이렇게 환상적인 무대는 처음입니다.”
“정말 그렇죠? 이래서 우리가 여길 자주 온다니까요.”
“그럼요. 어디서 이런 공연을 음료수 한잔 값에 공짜로 보겠어요?”
“한데 진짜 놀랐습니다. 제가 마술을 배우고 있었지만, 저 분 실력이 이정도 인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거든요.”
“예? 저분한테 마술도 배우세요?”
“아, 그게 잠시동안이지만, 간단한 마술 몇가지 정도 날까.......”
“그래도 저런 분한테 배우셨다면 정말 잘하실 것 같은데.......”
“아니에요. 이 공연을 보니 제가 그동안 연습한 건 저 분 발 끝에도 못 미친다는 걸 알았습니다. 바로 코 앞에서 보는 데도
어떻게 저렇게 하는 건지 전혀 모르겠거든요.”
“그렇죠? 저희도 매번 보지만, 어떻게 트릭을 쓰는 건지 전혀 알 수 가 없더라고요.”
“그게 바로 제 사업 밑천인데, 그렇게 쉽게 내보여드리면 안되죠.”
갑자기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세 사람은 깜짝 놀라 뒤를 돌아 보았다. 거기에는 언제 왔는지 마술사가 서있었다. 마술사는
무대에서와 같이 환한 미소와 함께 세 사람이 모여있는 테이블로 걸어오더니 남아있는 빈 자리에 자리를 잡았다.
“어떻게 공연이 즐거우셨는지 모르겠군요.”
“매 번 놀라지만 오늘 마술도 정말 대단했어요.”
"감사합니다, 소정씨. 늘 이렇게 제 마술을 즐겨주시니 그저 고마울 뿐이군요."
“근데 이런 실력이 있으신데도 왜 좀 더 큰 무대로 안 나가시는지 모르겠군요.”
“아, 그렇게 일을 크게 벌이는 건 제 취향이 아니라서요. 저는 이정도 무대로도 충분히 만족하고 있습니다. 이만하면 먹고 살
정도로 밥벌이는 충분하니까니요.”
“그렇다면 할 수 없겠지만, 왠지 아쉽군요. 선생님의 멋진 마술을 많은 사람들에게 선보일 기회가 없으니 말이죠.”
“준혁씨 말씀은 감사하지만은 제 마술이 그정도로 훌륭한 수준이 아니라서요. 다른 마술사 분들께 폐나 안 끼치면 다행이죠.
근데 여기 분위기를 보아하니 벌써 서로들 인사를 나누신 모양이군요.”
"예. 가볍게 인사정도만......."
"그럼 제가 정식으로 다시 소개시켜 드려도 되겠습니까? 여기 이 분은 오늘 제 초대손님인 박준혁씨. 그리고 이쪽은 제 특별한
부탁에 기꺼이 응해주신 윤소정씨와 강윤호씨."
"뭘, 이정도로 그런 말씀을. 누구 부탁인데 당연히 들어들여야죠."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강대리의 얼굴은 말과는 달린 이제야 뭔가 이해가 간다는 표정이었다. 준혁은 그런 강대리의 반응이
조금 의아하게 느껴졌다.
“그나저나 축하드립니다. 최근에 좋은 소식 들리더군요."
"벌써 아셨어요? 저흰 나중에 따로 모시고 말씀드릴려고 했는데......."
"뭐, 그럴 필요까지야...... 전 그저 두 분 앞날에 행복이 가득하길 빌겠습니다."
"무슨 그런 말씀을....... 사실 마술사님 없으셨으면 이렇게 소정씨와 함께 할 수도 없었을 텐데요."
"아니죠. 저는 그저 무대만 제공했을 뿐, 실제 결실을 맺게 한 건 강대리님 노력 덕분이죠."
"그런 말은 그만 자제해 주세요. 강대리 버릇만 더 나빠지니까요. 그동안 불쌍한 인생 하나 구제해 준다고 오냐오냐
다 받아줬더니, 이젠 아무 때나 기어오르려고 해서 제가 얼마나 피곤한지......."
"아니 내가 무슨 애완동물도 아니고. 그러는 자기는 남들 앞에서 남자친구 깎아 내리는 습관 좀 고쳐보시던지."
"뭐야? 내가 언제?"
"방금 전에도 그랬잖아요? 안그렇습니까, 여러분?"
"자, 자. 모두 진정들 하시고요. 누가 보면 제가 두 분 사이에서 싸움 붙인 줄 알겠습니다. 그러지 마시고 여긴 주변 눈치도
있으니 좀 더 이야기 나누기 편안한 곳으로 자리를 옮기는 게 어떨까요?"
"예?"
"알겠습니다. 그럼 다들 이동하기도 하죠."
갑작스러운 마술사의 제안에 영문을 모르는 준혁과는 달리, 한참 윤차장과의 과격한 애정표현 속에서도 자신을 슬쩍 바라보는
마술사의 신호를 감지한 강대리는 알겠다는 듯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약이 올라 씩씩거리는 윤차장을 바라보곤 싱긋
웃으면서 조용히 말했다.
"도둑 고양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