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 엄마는 대학교수
6
“후... 덥다”
수요일 등굣길의 아침,
규복은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으며 경사진 길을 오른다.
아직 5월 셋째 주지만 계절의 여왕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더운 날씨.
짧았지만 즐거웠던 선혜와의 첫 데이트.
사흘 전의 일이었다.
규복은 그날 집에 오는 길에 선혜에게 연락을 차마 하지 못했다.
그날 전철 내에서 선혜가 지었던 불쾌한 표정은
다시 만난 후 규복이 이제까지 접해보지 못한, 살포시 노골적인 얼굴이었다.
대수롭지 않은 일이 아닐거라 생각은 들면서도 또 한편 연락하기 어려웠던 이유가 아닐까 싶다.
그런가 하면, 내심 선혜 쪽에서 먼저 연락해주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있었지만
그건 희망사항일 뿐..
규복은 그렇게 선혜의 얼굴만 그리워하며 주말을 보냈다.
‘좋아하는 사람은 난데 아줌마가 먼저 연락할 리가 있냐.
연구실만 어딘줄 알면 찾아갈 수도 있는데, 그러지도 못하고..’
수요일 오전도 강의에 집중을 못한다.
규복은 월화수 내내 머릿속을 가득 채우는 선혜 생각으로 괴로웠다.
그나마 어제는 평정심을 유지하며 잘 들었는데
오늘 아침은 그녀에 대한 상상으로 머릿속이 터질듯한 상태다.
‘미치겠다... 상사병이 이렇게 무서운 건가봐..
벌써부터 하...’
2교시 수업이 끝나자 갑갑해서 죽을 것 같았다.
가슴이 답답하고 불이 붙는 느낌에 속이 메스꺼울 지경.
서둘러 넓은 휴게실로 향하고, 들어서자마자 자판기 커피부터 찾는다.
작년 고3 때까지 입에 달고 살았다가 끊었던 커피를 또 마신다.
‘스읍~’
둥그런 탁자와 등받이 의자가 여러개 마련되어 있는 휴식 공간.
규복은 의자에 걸터 앉아 두 다리를 쭉 뻗는다.
카페인이 들어가니 비로소 진정이 되는 기분.
문득 고등학교 때 독서실을 같이 다니던 친구가 떠오른다.
- (친) 너 자꾸 그렇게 커피 좋아하다가 그나마 열릴랑 말랑~ 하는 성장판도 닫힌다.
- (복) 지x~ 몰라, 이미 포기했어.
고 2면 늦었지, 성장판이 지금까지 열려 있는 사람이 어딨냐?
- 어어~? 아니라니까~ 늦게 크는 사람도 있어~
내가 말 안했냐.. 우리 삼촌도 군대 가서 15센치 컸다고
- ... 그런 말 못들었는데.
근데 진짜 그런 사람이 있어? 너 삼촌 키가 몇인데
- 백팔십 넘지. 암튼 있엄마~! 거짓말 아녀.
너두 혹시 아냐?
그러니까 우리 나이 때는 카페인에 너무 길들여지면 못쓰는 거야~
- 그치만 이걸 안마시면.. 나는 졸려서 집중을 못한다구..
‘... 푸훗, 색히.. 구라는 100단이야.. 어떻게 군대에서 키가 크냐’
규복은 절친했던 친구 정민과의 대화를 되새기며 피식 웃는다.
재수한다고 들었는데 이 더운 날 공부 잘 하고 있으려나..
곧 전화 한번 해봐야겠다.
그런 생각을 하며 대리석 계단을 타박, 타박 내려간다.
그날 저녁.
규복은 허공을 응시하며 고민중.
4일째 저녁마다 이어지는 똑같은 근심.
카톡이나 문자를 보내려고 몇 번이나 폰을 만지작 거리고, 좋은 아이디어가 떠올라 용케 몇 글자 입력까지 해도.. 끝내 전송을 못하고 있다.
‘그래, 눈 딱 감고 보내자.
내가 연락 안하면 아줌마도 이상하게 생각할 거야’
겨우 연락을 꼭 해야 한다는 당위성을 발견하고서야 카톡을 보낸다.
한참 소식이 없다가~
저녁 10시 반에 한숨을 쉬며 잠이나 자자 할 때, ‘깟똑!’ 답장이 온다.
크게 울려퍼지는 소리가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다.
「반가워^^ 그러게~ 나도 연락했어야 하는데 못했네~ 미안하게 생각해
내가 보통 주중에는 바빠서 학교에서 못 볼 수도 있어 규복아~」
「아... 네네, 아주머니, 그럼 시간이 언제 되세요?」
「움~ 이번주 쫌 바빠서
아 잠깐, 혹시 금요일 날 학교 오니?」
「네네~ 그럼요~! 저 화수목금 학교에 가요」
「^^ 잘 됐다~ 그 날 사람이 좀 뜸하거든
내가 우리 조교한테 말해둘 테니까 점심이나 와서 함께 먹자」
「조교라구요..?」
「응~ 걱정하지마~ 생긴건 무서워도 착한 누나거든~ㅋㅋ
와서 걔 얼굴도 보면 되겠네 ㅎㅎ」
「네.. 알겠습니다 아주머니, 그럼 금요일에 뵐게요..」
만면에 환한 웃음꽃을 피우며 싱글벙글~ 침대에 드러눕는 규복.
그런데 웃음도 잠시, 잠들기 전에 또 고민이다.
‘단 둘이 아니고 누가 같이 있는 자리??
그냥 아줌마랑 둘만 만나는 것도 아직 어색한데..
같이 밥 먹다가 제대로 넘어가긴 할까..’
소심함이 도진다.
불 꺼진 실내를 희미하게 비추는 한줄기 빛.
걱정할 이유도 없고, 예상보다 술술 일도 잘 풀리니 얼마나 좋은 상황인가.
저번 토요일의 만남은..
맨 처음 계단에서 어렵게 선혜를 만난 날부터, 2주나 지나서 성사된 일이었다.
이번 주에 ‘6일’ 만에 보는 것은 꽤 빠른 일정인 셈.
그렇게 생각하면 아주 고무적인데~
‘여자만 두 명 있는 연구실이라..
조교가 무서운 복학생이 아니고 누나라서 다행이긴 한데..
무섭게 생겼으면 덩치도 큰 거 아냐?’
한편 이런 생각도 든다.
만약 저렇게 예쁜 선혜와 같은 공간에서 일하는 사람이 남자면
그건 그것 나름대로 엄청나게 질투날 거라고..
-
기다렸던 금요일 점심 시간.
12시에 보자고 했는데 규복은 수업이 끝나자마자 달렸고
11시 45분에 진즉 선혜의 연구실 앞 복도에 도착해 ‘하아, 하아’ 숨을 고른다.
영문과를 비롯한 어학 계열과 일부 교양 강의를 듣는 본관 건물.
규복은 본관에서 불과 20미터 거리의 교수 연구동에 와 있다.
듣기로는 작년 여름에 신축해서 시설이 상당히 좋다는 평.
차마 들어갈 엄두는 못내고 오줌 마려운 강아지처럼 주위를 서성인다.
혹시 누가 지나가다 자신을 보면,
본인은 둘째치고 오늘 초대해준 선혜 교수에게 민폐라는 생각이 들어 더 초조하다.
그렇게 핸드폰 액정만 바라보다 겨우 50분이 되자
땀에 젖은 손으로 문고리를 잡고 돌리는데..
“어떤 용무가 있어서 오셨어요?”
청아한 여성의 목소리가 규복을 깜짝 놀라게 한다.
바로 뒤를 돌아보니...
‘우왓!...’
반듯한 옷차림의, 늘씬한 여성이 서 있었다.
머리 끝부터 발 끝까지 온통 블랙 정장과 스타킹으로 통일된 코디.
규복은 사무직 여성을 방불케 하는 그녀의 패션에 시선을 고정한다.
“아, 아, 예.. 예, 안녕하세요!”
“..? 네, 안녕하세요,
아, 혹시 고선혜 교수님이, 오늘 오시기로 했다는 분?”
“네, 네 맞습니다.. 헤헤.. 제가 좀 빨리 왔죠”
“아니에요. 들어오세요”
무표정한 얼굴로 문을 열어주며 규복을 안내하는 그녀.
규복은 어찌나 긴장을 했는지 이마에 흥건하게 땀이 맺혔다.
잽싸게 바지 주머니에 넣어뒀던 손수건으로 머리를 닦는다.
‘선혜 아주머니 말로는 무섭게 생겼다고 했는데
엄청 이쁘잖아..?’
선혜가 뜻한 무서운 얼굴이라는 말은
아마 단순한 생김새만 두고 하는 의미는 아닐 것이다.
그렇게 추측하며 규복은 연구실로 들어가, 공손하게 두 손을 모아 문을 닫는다.
“실례합니다..”
“예, 거기 아무데나 편하게 앉으시면 되어요”
“네, 감사합니다..”
“교수님께 미리 이야기는 들었어요.
학생 이름이 아마..”
“예, 이, 이규복입니다”
“아~ 그래요, 기억이 나네요..”
“네..”
“....”
“저.. 교수님은 이제 오고 계시겠죠?”
“네, 지금 거의 다 오셨을 거예요~”
규복은 연상으로 보이는 조교를 떠듬 떠듬 바라보며
그녀에게 시선을 좀처럼 맞추지 못하고 말을 더듬었다.
조교가 내뿜는 위압감도 있거니와 잘 웃지도 않고..
사무적인 말투로 응대만 하니 그럴만 하다.
‘전혀 웃질 않네, 차갑게 시리..
얼굴은 미인인데 원래 쌀쌀맞나?’
어쩐지 버거운 상대.
여성은 규복에게 간단한 사실만 묻고 곧 책을 펼쳐 자기 용무를 보는데..
규복은 필요 이상으로 그녀를 의식하고, 바닥만 묵묵히 쳐다본다.
‘역쉬 여자는 불편해... 가뜩이나 첨 보는 사람인데 둘이서 이 쫍은 방에..
무섭기도 하고, 아으으~
차라리 밖에 뛰쳐나가서 운동장 열바퀴 돌라고 시키면 그게 낫겠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는 규복이다.
누군가 강제로 이처럼 냉랭한 포스의 여성과 둘만 있는 것보다 생고생을 하라고 강요하면, 기꺼이 그쪽을 택하겠다는 절실함.
‘흐... 아줌마 오실 때까지 조금만 참으면 되니까..
음, 방이 꽤 이쁘네’
규복은 물이라도 마시고 싶었지만, 정수기가 멀리 있어 일어날 엄두를 못 낸다.
그저 실내를 가만히 둘러볼 뿐.
얌전히 한쪽 구석의 검정색 소파에 앉아 실내를 하나 하나 훑는다.
숨 죽이고 구경하는 눈빛이 초롱 초롱 빛난다.
꿈에도 잊지 못하고 오랫동안 좋아하던 여성, 고선혜의 연구실에..
이렇게 앉아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큰 기적으로 다가오는지..
감개무량해서 슬쩍 눈가를 훔쳤다.
‘아씨.. 또 눈물 날라 그러네.. 좀 닦고..’
갈색 버티컬 창틀 사이로 밝은 햇볕이 들어오는 실내.
아주 넓지도 작지도 않은 적당한 사이즈의 연구실.
세로로 조금 긴 구조의 방으로
한가운데는 여럿이 오순도순 모여 다과를 나누기에 알맞은 탁자가 놓여 있다.
고급스러운 무광의 원목 탁자와 그 주위에 질서정연하게 놓인 검정색 등받이 의자.
또 한쪽 벽을 덮는 서재와 테이블, 그리고 의자의 다리는 모두 위트 톤으로 통일되어 있다.
그 외에는 대체로 짙은 아이보리 컬러의 따스한 색감.
규복은 질서정연한 가구의 배치와, 그 색상들이 주는 아늑한 분위기에..
편안함을 느끼며 지그시 눈을 감았다.
이대로 잠들 수도 있을 것 같다.
‘와, 진짜 깜짝 놀랐어.
아줌마가 톡을 그렇게 보내서, 난 또 얼마나 살떨리게 생겼다고..’
저 멀리 앉아 독서만 하고 있는 그녀를 몰래 의식한다.
허파에 바람 들어간 것처럼 웃음이 새어 나왔다.
혹시나 싶어, 미소를 띄다가 슬쩍 그녀쪽을 보지만
여전히 그녀는 책에만 시선을 고정한다.
단순한 학생으로는 보이지 않는 사람이다.
아마 피팅 모델이나 아이돌 지망생이 아닐까.
훤칠한 스타일이라든가 단정하게 빼 입은 정장 차림의 포스도..
그녀 주위의 사물에 시선을 향한다.
조교의 책상은 선혜의 테이블로 추정되는 그것 옆에 나란히 붙어 있다.
말 없이 책을 ‘사각~’ 소리 내며 넘기는 여성의 하얀 손가락이
소년 규복의 눈에 자연스럽게 들어온다.
“뭐 찾으시는 거라도 있으세요?”
“읏, 아닙니다, 그냥..”
“..?”
“둘러보고 있어요, 헤헤, 아참, 저 목이 좀 말라서..”
“아, 나좀 봐, 죄송해요, 마실 것도 드리지 않고..
곧 식사할 테니까 기다릴 생각만 했나봐요, 잠시만요~”
“예, 예”
규복은 조교가 등을 돌리고 냉장고를 열자
그 등 뒤에서 보이지도 않는데 혼자 굽신 굽신 거리며 예를 표했다.
그녀가 건네준 것은 작은 손잡이가 달린 하늘색 머그컵이다.
달랑 물에 얼음 세 개 띄워진 것이 전부.
하...
그저 규복은 얼음이 차갑겠다는 생각으로 잠시 볼 뿐이었는데
바로 마시지 않으니 그게 조교는 이상했나보다.
“웅?”하는 작은 소리를 내며 입을 연다.
“죄송해요, 주스를 드릴까 했는데 밥 드셔야 해서.
지금 레모네이드 밖에 없는데 그거라도 드릴까요?”
“아뇨, 아뇨, 그것 때문이 아니고 얼음 때문에 잠깐 보고 있었어요.
감사합니다.. 잘 마실게요”
나이도 아직 어린데 얼음 씹는걸 두려워하는 규복.
시원한 물을 벌컥~ 들이킨다.
캬~~ 차가운 냉기가 뼛속까지 스며드는 아찔한 감각.
규복은 물을 마시고 다시 소파에 앉는다.
‘햐... 살 것 같다.
의외로 친절하네. 또 물어봐주기까지 하고... 하하’
핸드폰 액정을 들여다보니 12시 21분.
슬슬 좀이 쑤실만한 타이밍이라 팔을 뻗고 하품을 하는데..
문이 달칵- 열리며 선혜가 들어왔다.
“에고~ 늦어서 미안해~~ 많이 기다렸지!”
“아줌.. 교수님 오셨어요?”
“호호, 규복이~ 역시 와 있었네~ 쪼금 늦었어~
찾아 오는 길은 어렵지 않았니?”
“예, 그냥.. 쭉 길만 따라오면 되니까요^^”
“그래?”
규복은 반가운 선혜의 미소를 보자 대단히 기쁘다.
선혜가 지난주에 보여주었던 것과 같은, 밝은 그 미소.
이미 그 미소를 본 것만으로..
먹은 것도 없는데 배부른 것처럼.. 마음이 평온해지며 치유되는 듯하다.
그런데 선혜가 들어오자마자, 구석에 앉아 있는 규복에게 환하게 인사하니
조용하던 조교는 꽤 놀라는 눈치다.
“.....
50분에 정확히 오셨더라구요. 좀 많이 기다리셨어요”
“아~ 그랬구나.. 미안해서 어쩌지.
서진이 너두 많이 배고팠지?
헤헤, 오는 길에 뭐 좀 사왔어~”
“아니에요.. 호호”
규복은 선혜의 아름다운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하다가
조교의 이름을 부르자 그녀 쪽으로 시선이 옮겨간다.
선혜의 말에 그녀가 살짝 입가에 미소를 짓자 그 작은 표정 변화조차 아주 신선하게 느껴졌다.
오늘 이 연구실에 오고 나서 처음 보는 그녀의 웃음.
’웃을 줄은 아네.. 이름이 서진이구나’
조교가 큰 테이블에 간단히 식탁보로 쓸 하얀 깔개를 깔고 선혜가 사온 음식들을 올리자 규복도 눈치를 보며 주섬 주섬, 그녀를 돕는다.
“착하다, 호호, 그렇게 도와주면 서진이도 편하지~
참, 두 사람 서로 인사는 했고?”
(서) “네~ 그럼요~ 인사했죠~”
(규) “네..”
“후후, 아직은 어색할 꺼야.
어때 서진아, 내가 말한대로 규복이 인상이 참 순하고 좋지?”
“녜?....
예, 호호, 인상이 되게 밝고 순수하게 생기신 분이네요”
“그치? 마음도 착한 아이야~”
서진이라는 이름의 조교는 선혜가 하는 이야기에
새삼 옅은 미소를 지으며 규복을 바라보았다.
규복은 선혜의 말과 서진의 시선이 쑥스러워 자기 뒷통수만 만진다.
“자~ 두 사람 앉고~
내가 오늘 일찍 올 수 있으면 뭐라도 시키려 했는데,
이렇게 늦을 줄은 몰라서, 미안한 맘에 오는 길에 사왔어~ 히히”
(규) “와~ 맛있겠는데요”
(서) “교수님 여기 수저요, 감사히 먹겠습니다”
선혜가 사온 것은 튀김과 맛탕을 비롯한 분식, 그리고 닭강정과 파스타였다.
조교는 음식들을 보자 스스럼 없이 피식, 웃는다.
가식 없이 소탈해보이는 얼굴.
“잘 먹었습니다, 교수님~ 다 맛있었어요~ 헤헷”
“응~ 규복이 너 잘 먹는다~
저번에도 가리지 않고 골고루 먹는 모습이 보기 좋았는데.. 후훗”
“예, 음식은 되도록 편식 안하려고 해요..”
선혜와 규복의 다정한 분위기를 지켜보는 조교는 살짝 의아한 눈치다.
아마도 '저번'이라는 선혜의 말 때문인 듯.
식사를 끝내고 치운 뒤,
선혜는 조교를 시켜 냉장고에 있는 디저트 아이스크림과 수박 반 덩어리를 꺼내도록 했다.
뭐가 자꾸 나와, 고맙게...
규복은 이미 잔뜩 먹은 뒤였지만, 후식이 나오니 눈이 맑아진다.
선혜는 규복이 오늘 찾아오면 든든하게 먹이려 했던 모양이다.
쉬지 않고 조교로 하여금 규복에게 마실 음료와 다과를 챙기도록 한다.
“자, 이제 배도 채웠으니까~
우리 앉아서 커피라도 마시자. 규복이 커피 마시니?
이거 얘.. 우리 조교가 지난번에 가져온 건데 향이 괜찮아~”
“아.. 네네, 마실게요, 감사합니다!”
규복은 ‘음~’하고 선혜가 건네준 커피의 향을 코로 음미해보았다.
워낙 커피믹스로만 버릇이 들여 있어 프림이 들어가지 않은 원두를 마시려니..
저도 모르게 살짝 눈이 찡그려진다.
'쓰기만 한데 이걸 무슨 맛으로 먹는다고..
그냥 먹물이잖아.. 크크~
눈치 없게 이런 말 하면 욕 먹겠지?'
그래도 준 성의를 생각해서 익숙치 않지만 홀짝인다.
맛과 향도 느낄 줄 모르는..
이런 촌티는 이제 벗고 싶다는 생각과 함께..
그와 동시에 규복은 선혜가 입고 있는 옷을 유심히 곁눈질하였다.
알록달록 꽃무늬가 새겨져 있는 네이비 색 프릴 스커트,
상의는 차분한 색감의 검정 린넨 블라우스.
더운 여름이라 통풍이 잘 되는 반팔을 입고 있다.
오늘도 저번처럼 머리를 살짝 묶어 내렸다.
스커트 아래는 약간 굽이 있는 베이지 샌들,
토요일도 그랬던 걸로 보아 선혜는 이런 스타일이 취향인가보다.
예쁘고 가지런하게 뻗어 있는 그녀의 발가락.
하늘색에 가까운 매니큐어를 발랐다.
규복은 선혜의 아름다운 발을 보는 것이 즐겁다.
오랜만에 만나서 이제 겨우 두 세차례 만났을 뿐이지만
‘발까지 저렇게 이쁘다니... 완전 반칙이야’ 라는 감상.
그러다가 문득,
‘앗, 정신 차려야지’하며 자세를 바로 하고 앉는다.
하나도 아니고 아름다운 여성이 둘이나 눈 앞에 있는데..
선혜와 단 둘이 있던 저번처럼 변태같은 시선으로 볼 수는 없잖은가.
바짝 긴장이 되고 몸에 힘이 들어간다.
“후릅~ 움~ 좋다.
서진아, 근데 너 오늘은 아까부터 너무 말이 없다~”
“네?”
“평소에 나하고만 있을 때는 재밌게 웃으면서 말 잘 하잖아..^^”
(규) “....”
(서) “엇, 제가.. 언제요?
교수님, 저 말 많지 않은 거 아시잖아요..”
조교는 진심으로 당혹스러워하는 얼굴이다.
“쿡쿡, 그래?
그럼 규복아. 네가 볼때는 우리 조교 첫 인상이 어때 보이니~?”
“... 네? 어떻다뇨?”
규복은 선혜의 말에 놀라서 서진의 눈치를 살핀다.
...
선혜가 무슨 저의로 저런 말을?
그 질문을 해놓고 선혜는 ‘풋’ 웃음을 터뜨린다.
영문을 알 수 없어 눈만 뻐끔 거리는 규복.
“킥, 그냥 물어본 거야..
우리 서진이 얼굴이나 전체적으로 풍겨지는 이미지가 어떤가 해서~?”
“아.. 그, 글쎄요?”
이런 고난이도의 질문을...
규복은 필요 이상으로 얼굴이 새빨개진다.
선혜는 아무렇지 않게 던진 말에 나오는 그 반응을 보고, 웃음을 필사적으로 참고 있다.
서진도 규복의 얼굴을 기웃거리며 얼굴에 자그만 미소가 번진다.
(규) “끙...”
(선) “하하, 얘 얼굴 완전 경직됐어~”
(진) “교수님.. 호호.. 신나셨어요”
(선) “재밌잖아 ㅎㅎ”
아구 죽겠네..
규복은 안 돌아가는 머리를 재빨리 굴린다.
보나마나 선혜의 인격을 볼 때, 나쁜 의도는 아닐테니 편하게 말하면 되겠지~
규복은 얼굴을 붉히고 가볍게 웃으며 말한다.
(규) “에, 뭐라고 말해야할지..
아휴, 어렵잖아요. 저 이런거 시키지 마세요, 교수님..”
“키득.. 아냐, 그냥 너 느낀대로 말하면 되는데~”
“움, 움, 녜, 제가 볼때는..
처음에는 좀 딱딱하고, 다가서기 어려운 분이라고만 생각했는데요..”
“우왕~ 그래, 잘하네, 생각했는데?”
선혜가 장난스럽게 눈을 반짝 빛낸다.
(진) “아휴, 교수님~”
(선) “왜애~ 재밌잖아, 서진이 첫 인상 평가 오랜만에 들어보자!”
(규) “예.. 어렵게만 느꼈었는데..
식사하면서 천천히 보니까, 성격이 온화하신 분 같아요.
표현하기 어려워하시는 것 뿐이죠..
처음 만나는 사이니까, 친해지는데 시간이 필요하고 조심스러운 건 누구나 마찬가지 아니겠어요..”
말하는 내내 규복은 한마디, 한마디, 천천히 뜸을 들이면서
불필요한 오해가 생지 않도록 신경을 쏟는다.
이런 예민함은 스스로 보기에도 고쳐야 할 것 같다는 생각과 함께..
어쨌든 규복의 신경 쓴 대답이 효과가 있었는지~
듣고 있던 선혜와 서진 모두 얼굴에 미소를 띄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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