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 엄마는 대학교수
8
“여보세요? 아주머니?”
“응~ 나야~
통화, 괜찮니?”
“네네! 그럼요, 저 집에 있었어요”
“그래~ 규복아, 요즘 잘 지내?
그냥 한동안 얼굴도 못 봤고
계속~ 바빠서 잘 챙겨주지도 못하고.. 미안한 마음이 들어서 전화해봤어”
이렇게 반가울 수가..
규복은 팬티를 서둘러 당겨 입은 채 소파 위에서 방방~ 널뛴다.
“예, 그러셨군요..
편하게 그냥 전화 자주 주셔도 괜찮아요, 아주머니”
“후후, 정말 그래도 될까?
그래도 미안하지.. 아무 때나 불쑥 전화하면..”
“헤헤~”
“밥은 먹었구?”
“저녁요? 아직..”
“음~~ 그럼.. 혹시 괜찮으면 오늘 내가 밥 사줄까~ 나올래?”
“저녁 식사를?.. 오늘요?”
“응!”
이게 웬 굴러온 복이냐..
규복은 숨쉬기도 곤란할 지경이었다.
망설일 틈도 없이 바로 장소와 시간을 잡는다.
그리고 샤워하러 들어가 구석 구석 뽀드득~ 소리날 정도로 씻은 다음
잘 하지 않던 드라이까지 하며 신경을 썼다.
“규복아~”
“네~ 안녕하세요~”
“금방 왔네, 전화하고 시간 얼마 안됐는데..”
“좀 서둘렀죠! 아주머니가 부르시는 건데요”
“하하, 말이라도 고맙다, 얘..”
두 사람은 전화로 시내 쇼핑몰의 입구에서 만날 약속을 정했다.
시간은 저녁 7시.
규복은 길지도 않은 반 스포츠 머리에 젤까지 발라 세웠다.
하얀 반팔티에, 색감이 다소 바랜 청바지와 저렴한 단화 차림.
그래도 규복의 모습은 깔끔하니 보기 좋다.
선혜는 잠시 말없이 규복의 모습을 위 아래로 살핀다.
선혜는 하얗게 나풀거리는 반팔 블라우스 상의에
길게 발목까지 내려오는 샌디 브라운 색의 플레어 주름 스커트를 입었다.
가는 갈색 끈으로만 이루어진 샌들은 굽이 높지 않았다.
훤칠한 키에 멋진 글래머 체형의 선혜.
규복은 멀리서부터, 선혜가 광장에 서 있는 모습을 보고
그 환상적인 자태를 감상하려고.. 일부러 다가가지 않고 서 있었다.
가까이 가서는 은근한 눈빛으로 선혜의 쇄골 주위를 훑는다.
얇고 세련된 비주얼의 펜던트 목걸이가 예쁘다.
하얀 컬러의 작은 꽃무늬 귀걸이와
왼쪽 손목을 두르는 빨간 가죽끈의 심플한 시계.
규복은 선혜의 악세서리 하나 하나를 구경하느라 팔려서
또 그녀가 ‘뭐 먹을래?’하며 메뉴를 추천하는 것도 놓친다.
무엇을 몸에 입고 걸쳐도
선혜의 러블리한 이미지는 캐주얼한 컨셉과 조화롭게 잘 어울린다.
규복은 그녀의 스타일리쉬한 매력에 푹 빠져 있었다.
‘하기야 저 키와 몸매에 뭘 입어도, 안 이쁘면 그것도 이상하지..
아주 되빠꾸 먹을 만한 이상한 코디만 아니면.. 히히’
규복이 실실 쪼개면서 얼굴을 붉히고만 서 있자,
선혜는 약간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본다.
그리고는 장난스럽게 규복의 양쪽 어깨를
‘꾸욱’ 두 손가락으로 살살 꼬집는다.
어쨌든 선혜가 규복의 몸을 터치하는 것이 아닌가.
규복은 가볍게 몸에 흐르는 전류를 느끼며
그제서야 “예, 예, 아줌마..”
어리버리대면서 선혜를 보았다.
“쿡쿡, 너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먹고 싶은 것 있느냐고 여러번 불렀어~”
“죄송해요.. 그냥..”
“훗~ 나도 배 고프다궁~
아, 저거 먹으면 좋겠다, 규복아, 우리 저거.. 랍스터 먹으러 가자!”
“예? 그래요..”
메뉴야 아무려면 뭐 어떤가.
어차피 규복에게 뭘 먹는지는 중요하지 않은데..
선혜와 함께 2층으로 올라가며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느라 넋을 잃을 뿐.
‘이쁜데.. 이런 치마..
디게 얇다.. 투명하게 비치지는 않아도.. 세련되고 잘 어울려..’
선혜의 미끈한 각선미를 보고 싶지만
잘 보이지 않아, 아쉬운 마음으로 그 플레어 스커트 아래 윤곽만 훑는다.
두 사람은 근사한 조명의 실내에 앉아 있다.
웨이터가 와서 물과 메뉴를 건네고 선혜가 알아서 메뉴를 시킨다.
그리고 팔꿈치를 테이블에 기대며 입을 열었다.
“배가 많이 고프지?
아직까지 밥 안 먹고 뭐했어..”
“헤헤, 이것저것 집에 군것질할 꺼리가 있었어요, 그거 먹었죠”
“그랬구나, 오늘 혼자 있었어?”
“예~ 어머니는 보통 토요일에도 늦게까지 일하시니까..
저녁은 주로 혼자서 해결하는 편이에요”
“음.. 그래.. 그러고 보니까,
규복이 너희 어머님에 대해서 기억나는 내용이 많지 않구나..
오늘 차차 먹으면서, 어머니 근황과 이런 저런 이야길 나눠보자”
“예, 저도 그러고 싶어요.. 참, 아주머니~”
“응~”
“진짜~ 오늘 갑자기 저한테 식사하자고 전화하신 건 웬일이에요.
저 많이 놀랐거든요..”
“하하~ 놀랐어? 그냥 부른거지..
규복이 너는 우리 아들이나 마찬가진데~ 키득,
불러서 식사할 때마다~ 꼭 이유가 있어야 되는 거야?”
선혜가 장난스럽게 웃으며 규복의 코를 한 손가락으로 누른다.
그 사소한 피부의 접촉도 기분 좋았다.
규복은 설레는 마음으로 웃으며 말한다.
“아뇨.. 헤헤, 오면서 생각했거든요.
전화 주신 자체가 감사한 일이지만..
분명히 따로 이야기할 용건이 있으실 거라고 생각했어요”
“오~ 우리 규복이 눈치가 좀 빠르다.
후후, 아무려면 어떠니?
얘기를 떠나서~ 일단 배부터 채우자고~”
선혜는 쾌활하게 웃었다.
곧 식사가 나오고, 규복은 처음 먹어보는 음식이 신기한지 말 없이 먹기만 한다.
그런 규복을 선혜는 복잡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다.
식사가 끝난 후 선혜는 규복을 데리고 같은 빌딩 내의 조용한 카페로 향한다.
“후...”
은은한 조명이 비추는 고요한 화장실.
선혜는 서서 거울을 바라보며 화장을 고친다.
“규복이 덕분에 나도 많이 먹어버렸네, 후후..
정말.. 그애랑 같이 있으면 나도 모르게.. 맘이 푸근해진다니까..”
가만히 거울을 향해 혼잣말을 하며, 입을 살짝 오무렸다가 펼친다.
얕은 한숨을 쉬는걸 보니.. 담아두었던 근심을 되새기는 듯하다.
고개를 절레~ 절레~
약간 큰 모션으로 흔들고 휴대폰 액정을 말없이 들여다보았다.
“미안, 나 왔어~ 약간 속이 안 좋아서..”
“괜찮아요~ 저도 핸드폰 보고 있었어요, 이제 괜찮으신 거예요?”
“응~ 이제 괜찮아.
이긍 왜 안 먹고 가만 있어~ 커피랑 다 나왔네~”
“헷, 먹을려고요 지금..”
규복은 선혜가 올 때까지 기다렸는지, 그제야 달달한 마끼아또를 마신다.
선혜는 에스프레소를 마시며
까망베르 치즈 케이크를 맛있게 몇 입 먹고 스푼을 내려놓았다.
“흠...
있잖아, 규복아..”
“(꿀꺽) 녜..”
“키득, 먹으면서 편히 들어요.
이제 다음주부터 종강하면.. 방학을 해도, 교수들은 종종 학교에 있거든?”
“네, 네”
“그런데 내가.. 이번에 급작스러운 사정이 생겨서..
학교에 가끔씩 머물긴 해도, 평상시, 보통 방학 때 만큼 학교에 있지는 못할 것 같아..
아니, 너는 올해 입학했지, 하하.. 내 예전 사이클을 모르지, 참..”
“..?”
선혜는 말하는 도중에 혀가 엉키는지, 약간 당황스러워 했다.
규복은 입에 하얀 거품을 묻힌 채
아무 말 않고 선혜가 하는 말을 듣는다.
에어컨도 빵빵한 실내인데..
선혜는 괜히 더운 듯, 손으로 얼굴에 부채질을 한다.
“일반적으로 방학하면 연구활동과 논문 작업을, 그리고 프로젝트 준비도..
하아.. 이런 저런 활동으로 학교에 붙어 있을 수 밖에 없거든.
교수에 따라, 성향 따라 다르기는 하지만..
대체로 자리를 지켜야 하는데, 이번엔 피치 못할 집안 사정이 생겼어”
“예...”
“그래서.. 내가 많아봤자, 이번 여름 방학에는 일주일에 이틀 정도만?
그 정도쯤만 학교에 나올 것 같아서, 너한테 미리 얘기해두는 거야..”
“하아... 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서울에도 이틀에서 사흘만 있고..
나머지는 지방에 쭉 내려가 있어야할 것 같아”
규복은 약간 어두운 표정을 짓는다.
선혜가 그렇다니 틀림없는 사실일 것이다.
얼마나 학기 중에도 이리 저리 뛰어다니며 바빠하고 고생하는지를..
이번 한 학기나마 직,간접적으로 보고 들었기 때문에 알고 있다.
규복은 학기 중에 쉴틈없이 일하는 그녀가 안쓰러웠고
방학이 되면 조금 한가해지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하고 있었다.
자주 얼굴 좀 봤으면 하는 솔직한 바람이 있었는데..
“그렇군요.. 저는 개인적으로 아쉽네요.
아주머니 몸도 피곤하고 아프실까봐 걱정도 되고..
또.. 사실 방학때 되면 별로 할 일도 없으니까
같이 만나서 이런 저런 얘기도 많이 하고 싶었거든요.
아주머니만 시간이 되신다면 말이죠..”
자기 의지를 밝히면서도 천천히 말하는 내내.. 선혜의 눈치를 살핀다.
“후후, 그랬어?
규복이가 아줌마 생각을 많이 해주는구나..
고마워, 그렇게 말해줘서, 훗..”
“....”
“진심이야, 진심으로 고맙게 생각해..”
“예, 알아요, 저도”
규복은 ‘척하면 이심전심이죠’라고 말하듯이 눈빛을 반짝이며 그녀를 본다.
그 의미심장한 눈을 보며 선혜도 웃는다.
웃는 그녀의 눈꺼풀이 츠르르, 살짝 떨리고 있다.
“어쨌거나, 자주 올라오지 못할 뿐이지, 오기는 오니까..
우리 방학때 시간 되면 자주 얼굴 보고 같이 놀도록 하자, 규복아~”
“헤헤, 좋아요, 얼마든지요”
“정말 좋은 거지? 후후~ 내가 보자고 하면 시간 내줄 거야?”
“다, 당연하죠~ 엄마가 보자고 하시는 건데..”
“하하, 그래? 엄마라니~ 킥킥~”
아까 선혜가 자상한 말투와 손짓으로 ‘너는 내 아들과도 같다’라고 말했기에
그걸 상기하면서 재치있게 한 말이다.
하지만 규복은 그 말을 하면서도 건방지게 보이지 않을까 조심스러워한다.
어쨌든 선혜는 규복의 ‘엄마’라는 호칭이 맘에 든다.
‘엄마라...
그래, 강인이나 너나.. 나한테는 둘 다 소중한 자식들이나 마찬가지야..’
차마 규복에겐 아직 말할 수 없는 비밀을 갖고 있는 선혜.
규복에게 보이지 않도록 얕은 호흡을 내쉬며, 테이블의 티스푼을 집었다.
“방학하면 확실한 스케줄이 잡히니까, 그때 다시 말해줄게.
음.. 아, 그래, 규복아,
생각이 났을 때 우리 조교~ 서진 씨 얘기도 해둬야겠다”
“서진이 누나요?”
“응~ 걔에 대해서 너도 좀 더 알고 싶은 맘이 들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고..
또 나도 우리 서진이에 대해~ 귀띔 해주고픈 이야기도 있었어”
“그래요.. 저는 얼마든지 환영이에요, 헷.
해주세요, 조교 누나 이야기~”
선혜에 관한 이야기만 해도 시간이 넉넉지 않겠지만 규복은 내색 않으며 웃었다.
내심 귀가 솔깃하기도 하다.
그런데 다시 입을 열기 전에 선혜의 폰이 울린다.
“...... 아, 아니구나, 여보세요? 응~ 여보~”
선혜는 눈살을 가볍게 찌푸렸으나, 발신자가 남편인 걸 알자 이마가 펴진다.
규복은 ‘아니구나’라는 선혜의 중얼거림에 기분이 묘하다.
“응~ 응~ 맞아, 그래~ 규복이.
그렇지. 얘랑 요즘 학교서 거의 못 보니까~
밥도 먹을 때 됐고~ 해서 간만에 데꼬 나왔어~ 후후,
응?...
뭐야~ 깔깔~ 자기 규복이한테 질투하는 거야~? 쿡”
선혜는 남편과 통화하며 활짝 웃는다.
그 천진난만한 미소를 보는 규복도 덩달아 흐뭇한 표정이 된다.
저렇게 해맑게, 보는 사람까지 엔돌핀이 전이될 정도로 기쁘게 웃는구나..
순수하며 스스로를 드러내는데 있어 주저함이 없는, 솔직 담백한 성격.
아직까지 규복의 눈에 비친 선혜의 모습은 그랬다.
‘근데 생각해보니 강인이랑 통화하는 건 본 적이 없어, 진짜..
아저씨랑 통화하는건 전에도 몇 번 봤지만..
한번 살짝 물어나볼까?’
“풋.. 아니래두.. 규복이도 자기 보고 싶어해.
전에 그러더라, 아저씨도 기회되면 다시 꼭 만나보고 싶다구~”
“....”
“그래.. 한번 만나서 식사나 같이해~ 애가 멋지게 잘 컸더라”
전화를 끊는다.
그리고나서 선혜는 실컷 떠든게 머쓱한지, 규복을 보고 샐쭉 웃었다.
“통화가 너무 길었지.. 호호, 우리 남편이 자꾸 물어봐서, 너에 대해서 궁금한게 많은가봐”
“하하, 저두 궁금해요, 아저씨 못본지가 한참 돼서..”
“그래~ 후후, 곧 있으면 지겹도록 만나게 해줄게~
자, 서진이 얘기로 돌아가자”
선혜는 뒤로 엉덩이를 살짝 빼며, 편하게 쿠션에 등을 기댄다.
그리고는 담담한 어조로 서진에 관한 이야기들을 늘어놓는다.
사연들을 듣는 규복의 눈은 때로는 작아졌다가
호기심에 반짝거리기도, 또 심각한 낯빛을 띄기도 하며 경청한다.
‘스토킹.. 햐..
그렇구나~ 아줌마 말을 들으니까 하나씩 퍼즐이 맞춰지는 것 같네’
서진은 가장 최근에 사귀고 있는 남자와 올해 초 관계를 정리했다고 한다.
남자가 얼굴은 말끔하니 잘 생겼는데..
1년 반 남짓 사귀면서, 처음에는 매너가 좋고 온순하다가
점점 시간이 지날수록 폭력적이며 옭아매는 성향으로 변하더란 이야기.
그 결과 헤어지기 전까지 남친 때문에 우울증에 시달린 그녀.
어렵사리 이별을 통보한 뒤로,
전 남친은 지금까지도 간간히 연락하며 그녀에게 집착하고 있었다.
규복은 이야기를 들으면서 서진이 측은하다는 동정심이 들었다.
하지만 남자에 대해서도 딱히 나쁜놈이라는 편견은 생기지 않는 것이..
남자와 여자 어느 한쪽만을 두둔할 수는 없다고 판단했다.
이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선혜가 가치 중립적으로 사실만 전할 뿐,
서진에게만 유리하게끔 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누가 그랬지, 남녀관계는 오직 그 당사자만 안다고..’
선혜는 말을 하다 말고 치즈 케이크를 한 입 먹는다.
그리고 카운터에 가더니 차가운 물을 달래서 가지고 온다.
“킥킥, 왜애~ 너두 마실래? 줄까~”
“아니에요~ㅎ 그냥 웃겨서.. 말을 많이 하시니까 목이 마르죠.. 드세요~”
“웅~ 꿀꺽...”
“그러면 아주머니, 조교 누나는~
얼마 전에 헤어졌다던 남자친구 때문에 지금까지도 힘들어하고 있는 거군요?”
“응, 본인이 그렇다고 했으니까”
“그렇구나.. 어쩐지..”
“왜?”
“아뇨, 제가 보기에도.. 왜 그런진 몰라도, 늘 얼굴에 그늘이 져 있다고 할까.
아직은 잘 모르지만.. 같이 있을 때마다..
정서적으로 왠지 불안해하는 느낌을 받았어요”
“그래, 말을 하지 않아도 그런게 좀 느껴지니?”
“아무래도.. 말 안하고 가만 있으면..
어떨 땐 싸늘하고 좀 무서울 때도 있어요.
저는 전혀 사정을 모르니까~ 아니 왜 맨날 화만 내, 저 누나는~ 생각했죠”
“후훗..”
“에, 화를 낸건 아니고요.. 말을 좀 잘못했네요..ㅎ
저한테 어쩌다가 따듯하게 대해줬다는 생각도 드는 걸요”
“어.. 그래? 어떤 면에서~”
“.....
좀 어려운 타이핑이라든가, 오탈자 검수 같은거..
까다로운 일을 무사히 끝내고 나면, 항상~ 살짝이라도 웃으면서 고맙다고 해줘요”
“와.. 그건..
규복이 너 말대로 서진이가 상당히 호의를 보여주는 건데?”
규복은 선혜가 ‘어떤 면이 그러냐’고 묻자, 또 고민하며 머리를 굴려야 했다.
너무 입에 침을 발랐나.
속으로 ‘근데 처음 시킬 때는 성격이 좀 더럽죠..’라고 되뇌일 뿐,
차마 입 밖으로 말은 못 한다.
“그래요?”
“응, 보통은 걔가.. 상처 받은 이후로는 남자에 한해서, 대인기피증이 좀 있거든.
연구실 조교니까, 우리과 학생들이 상담하러 오면 잘 맞아줘야 하는데..”
“... 남학생이랑 여학생한테 대하는 태도가 약간 다른가 보네요”
“어.. 글취, 너 어뜨케 잘 아니? 호호”
“헤헤, 죄송해요, 추측해봤어요..”
“아냐, 미안해 하지마~
국문과를 포함한 어학 쪽은 대부분 여자 비율이 큰 차이날 정도로 많지”
“맞아요”
“그나마 우리 과가 작년에 조금 나아져서 7대 3 정도였어,
또 남학생들은 원래 거의 찾아오지도 않거든”
“하하”
“훗, 어린 1학년들은 잘 안 오고, 군 제대한 복학생들이 들르지.
어쨌든 누구에게나 친절하든지, 차라리 사무적이든지, 일관성 있는 자세면 좋은데,
서진이도 그걸 극복하기가 힘들다고 종종 이야기하곤 해”
“그래요, 그런 힘든 마음이 있었네요, 누나가..
근데 아주머니, 지금 이런 얘기하는 거,
조교 누나 입장에서 보면 쫌.. 뒷담화하는 거 아니에요?ㅎ”
그러자 선혜는 키득거리며 웃는다.
“얘~ 이게 왜 뒷다마야~ㅋ 서진이 걔가 나한테 처음에 조교 맡을 때
매일 같이 적응 안되서 괴롭다 그랬고,
이미 학생들도 공공연하게 그걸 알고 있는데~”
“아.. 그래요, 헤헤, 죄송해요. 제가 또 버릇없게..”
규복은 쑥스러울 때면 자기 뒷통수를 긁는 습관이 있다.
‘근데.. 명색이 교수님이신데..
뒷다마라고 한다든가, 오히려 나보다 비속어를 은근 쓰시는 것 같아~ 하하’
선혜가 너무나 귀여웠다.
버릇인지 아니면 자기 앞에서만 말투가 그런지 모르지만
가끔씩 그녀는 규복에게 말할 때 혀 짧은 소리를 섞는다.
“쿡쿡, 자, 그래서 오늘의 결론~”
“예예”
“조교 누나가 까칠하고 가끔 차갑게 대한다고 해도,
다 그 아이 나름의 가슴 아픈 트라우마가 있기 때문인 걸 이해하기~”
“네~ㅎㅎ”
“오히려 착하고 이해심 많은 규복이가~ 다가가서 따듯하게 대해주면
서진이도 본질은 여린 아이니까~ 점점 마음을 열고 잘 해줄거야, 나는 믿어”
“그래요, 무슨 말씀하시는지 알 것 같아요, 아주머니..
말씀하신 대로 꼭 노력해 볼게요”
“진짜 기특하다, 규복이..
후훗, 우리 아들보다 훨씬 더 철이 든 것 같아~”
“하하~ 에이..”
“정말야? 호호, 강인이도 이제 좀 어른스러워질 때도 되었는데..”
“아.. 맞다.
강인이는 한국에 언제쯤.. 들어오나요?”
“강인이?
글쎄~ 본인이 원하면 그렇게 하겠지.
우리가 알기로는, 아직은 미국 생활이 더 좋다고 해..”
“아..”
“자세한 이야기는 나도 최근에 이야기를 못 나눠봐서 못 해주겠네.
아마 이번 방학 때도, 한국에 안 오고 거기 있을 거 같아”
“그러면.. 미국 어디쯤에 있는 거예요?”
“후후, 보고 싶지? 시카고에 있어”
“시카고..”
“웅~ 조만간 내가 연락해서 너 이야기도 꺼내고, 근황 한번 물어보도록 할게”
그렇게 이야기가 끝났다.
선혜는 손목시계를 들여다보며, 규복을 데리고 일어선다.
규복은 선혜가 주차장에 세워둔 suv를 끌고 나타나자 놀랐다.
날렵한 디자인과 함께 묵직한 외관에 살짝 압도당한다.
선혜의 이미지만 보고 얌전한 세단을 상상했는데
그녀가 끌고 온 것은 재규어의 F-페이스였다.
“와... 멋져요, 아줌마”
“호호 고마워요~ 차 이뻐?”
“네! 완전 이쁜데~ 밖에도 그렇고 안에도 이쁘구요..”
“웅, 나도 그렇게 생각했어, 처음 사고..”
곧 선혜가 액셀을 밟자 스무스하게 미끄러진다.
승차감도 만족스러운지 규복은 설레임을 감추지 못한다.
그런데 차가 좋다는 둥, 아주머니 카리스마가 있다는 둥~
탈 때까지는 대화를 이어가더니 집에 가는 동안에는 거의 말을 하지 않는다.
규복이 이상할 정도로 침묵하자
선혜가 백미러로 힐끗, 그를 살핀다.
“후후, 규복아, 왜 아무 말이 없어?”
“아니에요.. 그냥..”
“응?”
“헤헤, 모르겠어요, 약간 저도 모르게.. 주눅이 든 것 같아요..”
그러자 선혜는 규복의 속마음을 읽었는지
아무 말 하지 않고 다정하게 웃어주며, 그의 왼손을 잡는다.
규복은 갑작스런 선혜의 스킨쉽에 깜짝 놀란다.
“자주 타고~ 같이 밥도 먹으러 가고~ 다니고 그래, 아줌마하고.
앞으로는~ 알았지?”
“녜.. 그래도 되는 건가요..”
“하하, 안될건 뭐 있니?
아, 다 온 것 같다, 여기가 너희 집 근처지?”
“예, 맞아요, 감사합니다..”
규복은 차에서 내려, 선혜를 향해 깍듯하게 인사한다.
선혜도 차창을 열고 규복에게 따듯하게 손을 흔들어주었다.
-
학기가 끝났다.
2주도 아닌, 불과 한주 사이에 많은 과목을 스트레이트로 시험치고 나니
그 후유증으로 규복은 종강과 동시에, 끙끙 앓으며 뻗어버린다.
익숙치 않은 공부.
난생 처음 대학와서 새로 배운 공부를 하면서 한 학기 동안 꽤 고생했다.
선혜와는 그 날을 마지막으로 얼굴을 보지 못했다.
다만 한가지 변한 점은,
이제까지와 다르게 선혜도 규복을 더 드러내 놓고 챙기기 시작한 것.
매일은 아니라도.. 이틀에 한번 이상은 통화를 하고 있다.
이건 규복 입장에서는 정말 획기적인 변화.
카톡 하나도, 병든 닭처럼 벌벌 떨면서 온갖 고민하며 보내던 때를 생각하면..
그야말로 상전벽해다.
선혜는 종강과 함께 일주일간 학교를 비웠다.
그리고 본인이 말한대로 그 후는 일주에 정확히 이틀은 나오는 모양.
그런데 오는 날은 규복을 찾지 않고
오후, 저녁이나, 그 다음날에서야 통화로 “갔었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 때만 해도 규복은 ‘아줌마 왜 그러시지, 학교 올때마다 손님을 데리고 오나?’
정도로만 추측할 뿐,
뭔가 미심쩍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선혜 말로는 서진도 방학때 친가에 내려가야 해서 시간이 빠듯하다.
규복은 그 말을 들으니
서진에게도 미운 정 고운 정이 들어서, 그리운 마음이 든다.
그렇게.. 대학 입학 후 처음으로 찾아온 여름 방학은..
어떻게 지났을 지 모를 정도로 빠르게 흘러갔다.
개강을 정확히 열흘 앞두고 갑자기 서진에게서 전화가 온다.
규복은 웬일인가 싶어 긴장하며 전화를 받았다.
그 날이 일요일이었는데
다음날인 월요일부터, 빡세게 개강하는 날까지 나머지 정리를 하잔다.
“어, 누나는 그럼.. 그동안 학교에 계속 나오셨던 거예요?”
“응~ 그랬어, 사실 나도 너 부를까 생각은 했는데
교수님이 규복이 귀찮게 하지 말라고 하셔서..”
“그랬구나.. 알았어요, 그럼 내일 일찍, 아침에 갈게요”
“그래, 고마워, 아홉시까지 맞춰서 와주면 더 고맙겠어!”
이미 서진은 규복에게 허물없이 ‘너’라고 부르고 있었다.
규복도 서진이 그렇게 불러주니 기쁘다.
까탈스럽고 대하기 어렵던, 저 얼음마녀가..
조금씩 마음의 문을 열고 있다는 증거가 아니겠는가?
그런데, 뜻밖의 사건이 다시 연구실의 업무를 개시한 월요일 오후에 일어났다.
규복은 궁시렁대면서 내려왔던 언덕길을 다시 오르고 있다.
높은 캠퍼스 꼭대기에서 기껏 평지까지 내려왔더니
다시 놓고 온 핸드폰 때문에.. 가야한다는 사실이 불쾌하다.
‘정신 좀 차리고 살자.. 맨날 이러냐..’
자신을 탓하며 연구동 건물에 도착한다.
선혜의 연구실은 그동안 2층이었는데,
방학이 끝나고 와보니 전체 리모델링과 함께, 무려 5층으로 이동해 있었다.
보아하니 엘리베이터를 설치하는 중인데~ 완공되려면 한참인 듯.
올라갈 엄두를 못내고, 헥헥, 거리면서
연구동 입구의 그늘진 나무 벤치에 앉아 잠시 쉰다.
‘..?
익숙한 목소리가~
이거 서진이 누나 목소리 같은데..’
약간 앙칼지게 따지고 드는 톤이다.
규복은 긴장해서 천천히, 들키지 않도록 소리나는 쪽을 향한다.
서진이 맞다.
그녀는 등나무 숲을 지나, 한 다리 건너 있는 건물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있다.
무릎을 구부리고 있는 서진.
규복은 조교의 쪼그린 자세를 보고 침을 꿀꺽 삼킨다.
빨간 기모 스커트 아래로 그녀의 새하얗고 탐스러운 허벅지가 보였기 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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