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화 (10/39)

친구 엄마는 대학교수

 10

 선혜는 쉽게 입을 열지 못하고

 규복의 얼굴을 향해 잠시만, 하는 제스쳐로 손바닥을 뻗었다.

 소년은 여인이 호흡을 다스릴 때까지 잠자코 기다린다.

 5분 정도 지나, 선혜는 차 조수석에 있던 조제약과 물을 가져와 먹었다.

 꿀꺽, 삼키고 나서 “하아~” 한숨을 쉰다.

 “좋아, 말할 수 있을 것 같아.

 흠, 흐흠, 음~”

 “좀 나은데요? 아까보다 목소리가요”

 “그래봤자 쪼금이지.. 후후, 고마워.

 있지, 내가.. 너한테 9월 첫주에.. 부산을 다녀왔다고 했잖니”

 선혜는 약간 비장한 눈빛이다.

 “예..”

 “그래, 부산이 행선지인데..

 가족이 아닌, 다른 행사에.. 참석을 하러 간 거였어”

 “....”

 “... 그리고.. 그 행사를 주관한 분은 얼마 전에 돌아가셔서,

 더 이상 뵐 수가 없게 되었단다”

 “그렇군요”

 무슨 말하려나 듣는데, 갑자기 선혜의 눈이 충혈되면서 눈물을 흘린다.

 규복은 선혜가 호흡이 거칠어지자 조금 겁이 났다.

 듣기에는 그렇게 심각한 내용이 아닌 듯한데..

 선혜는 이야기하다 말고 쉬고, 또 겨우 말을 잇는다.

 이상하게 생각하며 규복은 되묻는다.

 “그럼.. 그 돌아가신 분의 장례식장에 다녀오신 건가요?”

 “아니, 정작 거기에 나 같은 건 찾아갈 자격도 없지”

 “예?..”

 규복은 선혜가.. 거침없이 스스로를 깎아내리는 표현을 하자 놀란다.

 그런데 선혜는 그 말을 하더니,

 갑자기 오한을 느끼며

 그녀의 어깨와 팔을 감싸며 덜덜덜.. 떨기 시작한다.

 “아주머니?”

 “아, 안되겠다, 나 더 무리하면 안될 것 같아..

 미안해, 미안해, 규복아”

 “....”

 “오늘은 여기까지만 말할게, 미안하다, 아줌마를 용서해줘”

 “무, 뭘 용서해달라고 하는 거예요?..

 저 잘 모르겠어요..”

 “나 말야,

 나.. 나, 더럽고 역겨운 짓을 했어.. 그래서 미안해..”

 갑작스럽게 선혜가 마구 흐느끼는 것 아닌가.

 규복은 너무 당황해, 벙찐 얼굴로 그녀의 격하게 흔들리는 몸을 붙든다.

 가만 놔두면 쓰러질 것 같아 부축해주자

 선혜는 곧바로, 몸을 가누지 못하고, 규복의 품에 풀썩~ 안겨버렸다.

 “아...”

 “괜찮아요? 아줌마? 괜찮은 거예요, 예?”

 “훌쩍, 훌쩍.. 흑.. 미안해..”

 “... 아녜요, 다 이해해요, 괜찮아요..”

 앵무새처럼 미안하다는 말만 반복하는 선혜와

 괜찮다는 말만 거듭하며,

 품에 안긴 선혜의 등을 토닥 토닥 다독여주는 규복.

 정말 신기하다.

 선혜를 통해 수많은 시간 동안, 음란한 정욕을 품어왔지만

 오랫동안 품에 안고 싶던 그녀를 막상 품 안에 담자, 희한할 정도로

 규복은 그 순간 안타깝다는 심정만 들뿐,

 오히려 동물적인 욕구는 차오르지 않았다.

 선혜는 어린 아기처럼 규복의 품에 쏘옥 파묻힌 채 흐느낀다.

 규복은 계속 그녀를 진정시키려 등과 어깨를 자상하게 두드려주었다.

 그런데 겨우 진정되는 줄 알았더니,

 선혜의 몸은 점점 뜨겁게 열기로 달아오르고..

 일어서 있지도 못하면서 다리가 후들거린다.

 엄청난 체온에 규복은 덜컥 겁이 난다.

 ‘뭐야, 이거.. 펄펄 끓는데?

 열이 40도에 가까운 거 아냐??’

 아까 약까지 먹던데, 효과가 없었나?

 큰 이상이 생겼나 싶어 두렵다.

 꿀꺽,

 규복은 선혜를 껴안은 팔로 그녀를 꽉, 안아주며

 낮은 톤의 음성으로 그녀의 귀에 속삭인다.

 “아, 어떻게 하면 좋아요, 아주머니,

 약, 약 또 없어요?

 아까 드신 건 뭐예요, 네?”

 “끅.. 하아.. 하아..

 아냐, 그렇게 심하지 않아..

 콜록, 규복아, 나 괜찮아, 지금 잠깐 그러는 것 뿐이야..”

 “무슨 소리예요, 이렇게 열이 심한데?

 아~ 미치겠다! 아줌마, 여기 앉아요!”

 규복은 선혜가 입으로만 멀쩡하다면서 안색이 점점 안 좋아지자

 결심한 듯,

 선혜를 두팔로 번쩍, 안아 “홱~” 들어올렸다.

 그리고 차 뒷문을 열고 몸이 불덩이처럼 뜨거운 선혜를 눕힌다.

 “하아, 하아.. 규복아, 너 뭐하려고..”

 “가만히 계셔요. 키 어딨어요?”

 “흐응... 하아..”

 “빨리요!”

 규복이 소리를 지르자, 선혜는 끙끙대면서 힘겹게 손가락을 뻗었다.

 ‘그냥 옆에 눌러’라는 의미의 손짓.

 규복은 선혜의 행동을 이해 못하다가 ‘아, 그 뜻이구나’를 알고 곧바로 핸들 옆 버튼을 눌러 시동을 건다.

 ‘이런 제기랄, 저렇게 아프면서 왜 아무 말도 안한 거야!’

 규복은 브레이크를 밟아보고, 사이드와 기어를 만지며 차를 점검한다.

 무면허지만 예전에 아부지 차를 옆에서 수 없이 타면서 봤던 걸 기억했다.

 ‘까짓거 조심만 하면 되지, 난 스틱도 할 줄 아는데.. 문제 없어!’

 고개를 끄떡거리며 자신감을 갖고 차를 움직인다.

 선혜 차의 네비게이션이 켜지자 타닥, 타닥, 빠르게 인근 병원을 검색.

 목적지를 찾는 즉시 액셀을 밟는다.

 끼이익,

 가까운 곳에 다행이 좋은 병원이 있었다.

 규복은 차에서 내리자마자 선혜를 등 뒤로 업고 쏜살같이 들어간다.

20여분 뒤.

 데스크의 간호사가 다가와 '보호자 분~'이라고 부른다.

 그 보호자라는 호칭에 규복의 심장은 두근거렸다.

 흡사 제가 선혜의 진짜 뭐라도 되는 것인양,

 가슴 설레고 뿌듯하게 들렸다.

 간호사 왈, 진료 후 조금 강한 주사를 맞은 후

 푹 자고 있으니 걱정 말라고 규복을 안심시킨다.

 일시적으로 급격한 스트레스를 받아...

 고열과 이상 징후가 온 것이란다.

 휴...

 안도의 한숨을 쉬며 선혜의 병실로 가보았다.

 선혜는 쌔근 쌔근~

 어린 아기처럼.. 천사같은 얼굴로 자고 있다.

 규복은 선혜의 평온한 자태에 비로소 마음이 놓이고

 애정이 듬뿍 담긴 얼굴로, 미소지으며 선혜를 바라본다.

그 다음주 화요일.

 점심시간에 규복은 구내식당에서 진우와 메뉴를 고르고 있다.

 선혜의 전화가 오자 진우의 눈치를 보며 당황한다.

 “여, 여보세요”

 “규복아, 나야, 식사하고 있니?”

 “예..”

 규복이 어색해하자 선혜도 걸어놓고 말을 쉽게 못 꺼낸다.

 “오늘 혹시 연구실에 안오나 해서 걸었어..”

 “제가, 제가 이따가 밥 먹고 전화드릴게요”

 “응..”

 일상적이지 않은 규복의 통화하는 모습.

 선혜도 별 말없이 전화를 끊었다.

 그러니 되려 진우가 누구냐며 궁금해한다.

 어색하게 우물쭈물 웃어대며 둘러대는 규복이다.

 그뿐이 아니다.

 그 날 이후 선혜가 연락을 해와도 규복은 편하게 받지 못했다.

 연구실 출입도 조금 소원해지고

 서진이 ‘너 뭐하는 거야, 요즘 바쁜데 연구실 왜 안와?’라고 다그치자

 마지 못해 연구실을 찾을 정도였다.

 그렇게 선혜와 규복은 서로 잠시 소강상태를 가진다.

 사실 선혜는 간간이 카톡으로 규복에게 메시지도 남기고

 전화통화도 몇차례 시도했지만

 규복 측에서 오히려 불편해하거나 꺼리는 상황.

 11월이 되어서야 둘 사이는 차츰 왕래가 이어지며 연락하게 되었고..

 둘의 사이가 겨우 정상화되나 싶더니,

 중간고사가 막 끝난 규복은 강의를 따라가느라 더 힘들어하는 모습.

 때문에 선혜와 서진도 규복을 배려해주고

 어느 순간부터 의도치 않게, 규복의 연구실 행은 다시 뜸해졌다.

12월 둘째주, 2학기 종강을 앞두고

 국문학과에서는 교수들과 함께 하는 종강파티 시간을 계획한다.

 선혜는 이 학교에 부임하고 2년차 때 겪은, 좋지 않았던 모 기억 때문에

 이번에도 종강파티에 함께 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그러자 훌륭한 인품으로 평판이 좋은 학과장 교수가 선혜를 호출한다.

둘은 학과장의 연구실에서

 고풍스러운 검정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가죽 소파에 마주 앉아 있다.

 “그래요, 요즘 여러모로 바쁘고 힘든 일이 많죠.

 모든 교수님들이 학사일정 때문에 심리적으로 쫓기고 계실 줄 압니다.

 더군다나 우리 고 교수님은 맡고 있는 일이 많으시니...

 시간 내시기가 부담스러우리라 짐작도 하고요”

 “교수님..”

50대 중반의 윤교수는 희끗희끗한 흰머리가 여러군데 섞여 있다.

 각진 형태의 깔끔한 무테 안경을 끼고 있다.

 고압적이지 않으며 반듯하고 존경받는 학자의 이미지를 가진 사람.

 늘 겸손하고 타의 귀감이 되려 힘쓰는 이로, 대외적인 평도 좋다.

 윤현철 교수는 자스민 차를 마시고 유리 찻잔을 내려놓으며

 말없는 선혜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고 교수, 요즘 어려운 일이라도 있어요?”

 “아니에요.. 교수님, 별 일 없습니다”

 “그래요...

 이번에 학기 초에 있던 작은 소동 때문에

 저는 우리 교수님이 여전히 많이 힘들어하시지는 않은지 걱정이 됩니다”

 “....”

 “제가 내색은 안 해도, 늘 누구보다도 교수님을 응원하고 있어요.

 항상 밝고 긍정적인 모습을 보여주시는 고선혜 교수님,

 저뿐 아니라 우리 학과 모든 사람들이 교수님을 사랑하고 좋아합니다.

 그걸 언제나 잊지 않아주었으면 좋겠군요”

 “감사합니다..”

 “힘든 일 있으면 언제라도 좋으니 꼭 찾아오시구요.

 아픈 일이 있으면 함께 나누고 해결합시다. 식사도 종종 저랑 같이 하시고”

 “예.. 알겠습니다, 교수님, 언제나 신경써주셔서 정말 감사드려요...”

 몇 마디 덕담을 나눈 뒤,

 선혜는 공손하게 윤교수의 집무실을 나온 후 복도를 걸었다.

 자로 잰 듯 깔끔하게 세공된 대리석 바닥.

 선혜는 위로 올라가는 계단에 이르러서 겨우 숨을 내뱉는다.

 “하..

 왜들 그렇게 걱정들이 많으신지.. 난 아무렇지도 않은데..”

 나지막히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선혜는 자신의 가슴팍을 주먹으로 살짝 ‘툭, 툭’ 몇번 두드린다.

 ‘올해 건강검진을 아직 못 받았지..

 해가 바뀌기 전에 꼭 가봐야겠다..’

 갑갑한 호흡을 진정되도록 다스린 뒤, 핸드폰 액정을 슥- 손가락으로 문질렀다.

 배경화면에 규복과 서진과 셋이 찍었던 사진이 떠 있다.

 서진을 향하던 선혜의 시선이 규복의 얼굴에서 한참 머무른다.

 “.....

 규복아..”

 12월 18일, 종강일.

 종강 회의가 다 끝나고 모든 학생과 교수들은

 교내의 리셉션 홀을 빌려 그들만의 조촐한 파티를 열고 있다.

 밝고 화려한 조명 아래, 작은 소강당 같은 시설.

 많은 학생과 교수들 앞에서 소소한 공연이 펼쳐진다.

 100 여명 남짓한 대 인원이 참석한 자리라서 긴 테이블이 여러개 동원되었고,

 사람들은 다과와 음료를 즐기고 있었다.

 “많은 인원께서 회의가 끝나고도 이 자리를 찾아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윤현철 교수가 단상 위의 마이크를 잡고 있는 사이,

 선혜는 한 테이블에서 수많은 학생들 사이에 둘러싸여 이야기 꽃을 피운다.

 특히 고선혜 교수가 앉은 테이블은 온통 여학생들 차지다.

 선혜를 좋아하는 학생들은 그녀를 둘러싸고 선혜에 대한 열렬한 사랑과 뜨거운 관심을 표현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한 테이블 옆의 진우가 조심스럽게 멀리서 보고 있다.

 규복은 영문과가 아니지만, 선혜의 개인 연구실 부 조교라는 이유로 참석해 있다.

 한 구석에서 마실 물과 음식들을 나르는 잡일을 하느라 바쁘다.

 저녁 8시쯤 파티가 어느정도 무르익고 나자 분위기가 한산해진다.

 선혜의 곁을 찰싹 붙어 지키던 여학생들이 조금씩 흩어지고..

 많은 이들이 집에 가거나 사라진 가운데,

 생소한 남학생이 선혜의 옆에 앉아 그녀에게 농을 건네고 있다.

 진우 건너편 테이블에서 그걸 초조하게 지켜본다.

 ‘... 저놈 저거, 역시 그럴줄 알았더니..

 교수님한테 흑심 품고 미친 짓하려는거 아닌지.. 볼수록 불안하네..’

 진우는 알고 있다.

 선혜가 인기가 많은 만큼, 부임 초에 과에 익숙하지 못해 곤욕을 치렀고

 남학생들 사이에서 그녀의 미모를 두고 지저분한 음담패설이 많이 오갔던 것을.

 대체로 학생들이 교양있고 착한 편이라, 노골적으로 돌발행동하는 애들이 드물다.

 그런데 지금 선혜의 곁에 앉은 녀석은 갓 제대하고 복학한 23세 막내로

 예비역들 모임에서도 약간 ‘똘아이’ 취급을 받는 학생이다.

 녀석이 상태가 안 좋다는 소문은..

 고선혜 교수를 ‘따먹고 싶어 죽겠다’고 동기 예비역들과 술자리에서 떠들어대는 바람에, 남학생들 사이에서 요주의 대상으로 보고 있기 때문이었다.

 언제 한번 사고칠지 모르니 지켜봐야한다고,

 타과 출신 진우가 들어서 알 정도로.

 마침 사고 치기 딱 좋은 종강파티 날,

 사람들이 테이블을 돌아다니며 과일주와 맥주를 마시는 사이,

 우려했던 그놈이 선혜와 붙어 있자 진우는 불안하기만 하다.

 계속 시선을 떼지 않고 있었지만..

 전화통화를 몇분간 하면서, “잠깐” 선혜를 안 보고 있을 때였다.

 “어..? 어디 갔어..”

 웃는 얼굴로 통화를 마치고 자기 자리에 앉고 보니,

 선혜와 그 신참 예비역이 사라지고 없는 것이다.

 진우는 갑자기 등골이 오싹해진다.

 ‘뭐야!? 혼자도 아니고 왜 둘이 같이 없어져??’

 잠깐 자리를 비웠을 뿐인데..

 설마 그 교활한 놈이 진우의 기척을 살피다가, 잽싸게 선혜를 데리고 나갔나?

 진우의 앞이 노래진다.

 교수님과 둘만 사라질 리가 없어...

 막중한 책임감에 서둘러 선혜를 찾느라 난리를 피웠다.

 아무 것도 모른채,

 심부름으로 맥주만 나르는 규복을 다급하게 부른다.

 “야! 규복이! 빨리와!”

 “예, 형, 왜 그래요??”

 “빨리, 빨리! 얼른~

(규복에게만 조용하게)

 야, 클났어! 고 교수님 사라졌다고!...”

 “녜..?”

 “새끼야! 정신차려, 설명 나중에 할테니까 빨리 나와!”

 힘좋은 진우가 어벙한 규복을 반 멱살잡다시피 끌고 나간다.

 나가면서 사정을 빠르게 설명해준 뒤,

 두 사람은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선혜를 찾아 양 옆으로 흩어졌다.

 아마 공중화장실 아니면 사람 없는 복도 구석으로 끌고 갔을 것이다.

 규복은 특히 제정신이 아니었다.

 선혜를 누가 끌고 갔다는 소리에, 얼굴이 백짓장처럼 하얗게 떠있다.

 그런데 천만 다행히도,

 리셉션 홀에서 오른쪽으로 뻗어진 복도의 끝에서,

 누군가 어둠 속에서 키 큰 여인을 세워두고 수상한 짓하는 장면이 보인다.

 진우는 발견하자마자 냅다 달려가

 그 녀석과 선혜가 맞다는 걸 확인하고, 도움닫기로 붕~ 날아~

 녀석의 등을 “퍽!” 소리 나게 차버린다.

 순식간에 복도 한 가운데 내동댕이쳐진 남자.

 “하아.. 이 발정난 개새끼 같은게.. 어디서 개수작질이야,

 넘마, 뒤지고 싶냐???”

 “쓰읍, 하아, 하아, 이 씨발놈은 뭐야?..”

 얼마나 세게 찼는지, 앞으로 고꾸라진 그놈은 넘어지면서 얼굴이 터져

 입술에 피가 흥건하게 흐르고 있다.

 진우는 분노를 접어두고, 서둘러 선혜부터 살핀다.

 역시...

 예상대로 선혜는 술에 잔뜩 취한채로 눈을 감고 잠든 모습.

 낮은 도수의 과일주를 마셨지만 원체 주량이 약하다 보니,

 그녀의 밝은 핑크빛 셔츠는 풀어헤쳐지고

 하얗고 탐스러운 젖가슴이 절반 이상 드러나 있었다.

 이미 녀석이..

 얼마나 선혜의 유두와 유방을 주무르고 입으로 빨았는지..

 그녀의 두 가슴은 모두 빨갛게 자국이 난 채, 침으로 젖어 번들거린다.

 게다가, 아래를 보니..

 선혜가 입은 캐러멜 색 체크무니 스커트는 위로 걷어올려져 있고

 흰색 팬티 옆으로, 선홍빛 음부가 고스란이 노출되어 있었다.

 입으로 애무했는지 손가락만으로 마구 쑤셨는지는 모르나,

 선혜의 소중한 아랫도리가..

 그녀의 애액으로 흠뻑 젖어 반짝- 빛나는 것이 보인다.

 .......

그걸 본 진우도 머리에 피가 몰리면서 눈이 충혈되지만,

 눈을 질끈, 감으며 시선을 피한다.

 얼른 입고 있는 점퍼를 벗어 선혜의 부끄러운 흔적을 덮어주었다.

 이 동작에 걸리는 시간이 짧은 덕분에..

 뒤를 돌아보니, 아직 그놈이 고꾸라진 채 바닥을 기는게 보인다.

 “너 잘 걸렸다, 그럼 그렇지~ 내가 너 이럴줄 알고 보고 있었다”

 “놔, 이 새꺄, 넌 뭐냐고? 안놔?”

 “형! 하아, 하아,

 그, 그 사람 뭐예요?”

 반대쪽 통로로 갔다가, 뒤늦게 제대로 뛰어온 규복이 숨을 헉헉 고른다.

 멀리서 급히 달려오자마자..

 차가운 바닥에 엉거주춤하게 앉아 있는 선혜를 보고 동공이 커진다.

 “아, 아주머니..”

 떨리는 목소리와 함께, 몸의 온갖 세포가 소름끼치도록 곤두서는 순간.

 막연한 공포를 느끼는 규복은 급히 다가가 선혜의 옷을 조심스레 들추어본다.

 .....

얼굴이 딱딱히 굳는 소년.

 위기일발이었음을 확인하고, 홱~ 진우 쪽으로 시선을 돌린다.

 “혀..”

 진우를 불러보는데, 이미 진우가 그놈을 굴비 엮듯 팔을 엑스 자로 꺾어서 질질 끌면서 저 멀리로 데려가는게 보였다.

 그러더니 진우는 규복을 힐끗, 돌아보며 시선이 마주친다.

 “형님!”

 “됐어, 이 녀석은 내가 알아서 할테니까,

 넌 얼른 교수님 모시고 차로 데려가, 부탁한다!”

 “아.. 네, 형님, 고마워요..”

 규복은 금방 진우가 어린 예비역을 데리고 사라지자 도무지 믿기지가 않아, 풀썩 주저 앉으며 망연자실하다.

 이 즐거운 파티날 무슨 이런 불행이..

 넋이 풀린 얼굴로, 선혜의 잠든 모습만 내려다본다.

 꿀꺽..

 규복은 곧 ‘도리도리~’ 얼굴을 빠르게 젓고 정신을 차린 다음

 조심스럽게, 자고 있는 선혜를 일으켜, 자신의 뒤로 업었다.

 술에 취해서 그런지 꽤 무겁다.

 “하아, 하아..

 하아, 아주머니.. 흑흑..”

 시원한 바깥으로 선혜를 업고 나오면서

 자기도 모르게 설움이 복받쳐 눈물을 흘리는 규복.

 여전히 아무것도 모르고 잠든 선혜를 업고, 서럽게 울며 선혜의 차까지 도착했다.

 잠깐 망설이던 규복은

 선혜의 하얀색 가디건 주머니에서 키홀더를 꺼낸다.

 삑-

 조심스럽게, 천천히 선혜가 깨지 않도록..

 뒷자리에 그녀를 눕혔다.

 “아주머니.. 미안해요.. 지켜드리지 못해서..”

 세상 모르고 쌕- 쌕- 자고 있는 선혜의 숨소리.

 규복은 애꿎은 주먹만 불끈, 쥐며 어깨를 부들, 부들 떤다.

 -

 그리고 시간은 빠르게 지나갔다.

 2학기가 어느새 끝나고, 크리스마스를 지나

 새해가 밝은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

 지난 학기 종강일의 끔찍했던 기억이 채 가시기도 전에

 규복에게 날아든, 상상치도 못했던 큰 충격적 비보...

 수많은 사람들로 북적거리는 장소.

 혼란스럽게 이리 저리 뛰어다니는 사람들, 지인을 부르는 사람들,

 모 대학 병원의 장례식장이다.

 규복의 모친이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웅성- 웅성-

 정신이 없는 인파의 부대끼는 모습이

 마치 얼이 빠져 있는 규복의 얼굴을 그대로 투영하는 듯하다.

 말 그대로 규복은, 넋이 나간 몰골로

 검은 정장을 입고서 상주 자리에 서서, 사람들의 인사를 받고 있었다.

 고인이 사고를 당한 시점은 1월 9일 저녁.

 늦게 퇴근하고 집으로 돌아오다가

 언제나 건너는 익숙한 횡단보도에서 뺑소니 차량에 치어..

 안타깝게도 규복의 어머니는 병원으로 실려가는 구급차 내에서, 숨을 거뒀다.

 규복이 비보를 접하고 병원으로 달려 왔을 때는 이미..

 싸늘하게 식어있는 모친의 얼굴을 마주한다.

 .....

 소식을 들은 규복의 얼마 안 되는 외가 친척들도 황급히 달려왔다.

 바로 다음날 장례식장에 유해가 안치되었고

 오전부터 지인들이 부지런히 다녀가면서, 규복은 황망한 가운데에서도,

 친척들과 동문들의 심심한 위로를 받았다.

 장례식은 간소하다.

 분향하지 않고, 가만히 고인을 향해 기도한 후에 국화를 헌화하는 형식.

 기독교식으로 장례가 치러지면서 경건하고 고요한 분위기 가운데, 사람들은 진심으로 고인의 죽음을 애통해하고 있었다.

 화환은 간소하게 식장 입구에 하나만 서 있다.

 오후에 한차례 규복의 친척이 다니는 교회의 목사와 성도들이 와서 예배를 드리고 눈물로 규복을 위로해주었다.

 워낙 정신없는 가운데 급한 일을 겪어 멘탈이 나갈 법 한데..

 규복은 무표정한 얼굴로 많은 이들이 그를 위로할 때마다,

 정중하게 예를 표하며 한명 한명, 와주어 고맙다고 깍듯이 고개를 숙인다.

 제법 의젓한 모습과.. 큰 일을 겪은 뒤 잘 추스르는 담담함이

 규복을 둘러싸고 있는 이들의 가슴을 더 애통하게 했다.

 학과장 교수를 비롯해서 많은 교수들과 일부 교직원들도 방문했고

 그와 친분이 적은 사람들도 찾아와 규복의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린다.

 그 중에는 친한 선배 진우와,

 많이 친숙해진 누나 서진의 숙연한 모습도 보였다.

 그리고..

 누구보다 규복의 비극적인 소식을 접하고 마음 아파할 선혜는

 소식을 듣자마자 모든 일정을 취소하고 곧바로 달려왔다.

 오후 한시부터 늦은 저녁까지..

 선혜는 기꺼이 상주 보조를 자처하면서

 규복의 곁을 떠나지 않고 나란히 서서 지켜주었다.

 때때로 진우와 서진이 보다 못해 선혜에게 쉬라며 교대해주곤 하지만

 선혜는 아랑곳 않고, 묵묵히 규복의 옆자리를 고집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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