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55화 〉54화나의 용사님 (55/818)



〈 55화 〉54화나의 용사님

“자, 잠깐만요!”

조금만…… 조금만 더 시간을…….

“뭔가요, 엘시 씨?”

“어이, 뜸 들이지 말고 빨리해라.”

“후후훗, 빨리하고 싶은 마음도 이해됩니다, 치타 씨. 하지만 엘시 씨는 오늘이 마지막 날입니다. 아주 잠시만의 시간은 드리는 것도 좋다고 생각  하십니까? 특히…….”

가비다가 내 턱을 집고 살짝 올리며 내 얼굴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이 조금이라도 살려고…… 어떻게든 시간을 끌려고 아둥바둥하는 모습이 정말로 흥분되지 않습니까? 쓸데없는 노력이란 걸 알면서도 삶을 갈망하는 이 모습…… 아아, 정말 최고군요.

이런 얼굴이 고통과 절망으로 일그러지는 건 치타 씨도 좋아하지 않습니까?”

“흥…….”

“후후훗, 자아, 엘시 씨, 뭔가요?”

가비다는 내가 말을 이으려는 목적을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알고 있으면서 발버둥 치는 내 모습을 보고 오히려 즐기고 있었다.

분명…… 내가 아무리 시간을 끌어도 도움이 제때 오지 않는다는 걸 확신하고 있는 거다.

몸이 떨린다.

내가 아무리 시간을 끌어도 결국 나는…… 눈앞에 있는 추악한 인간들에게 범해지고 존엄을 짓밟힐 거라는 공포가 온몸에 맴돌았다.

공포에 눈가에 눈망울이 맺혔다.

마음 어딘가에서 내 죽음은 확정되었다고 생각하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랜트…… 노아……

살고 싶었다.

랜트와 노아하고 다시 만나고 싶었다.

이대로 죽기 싫다.

설령 사랑이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해도……

랜트가 나의 용사님이 아니라고 해도……

적어도 이 마음만은 랜트에게…… 전하고 싶다.

같이 있는 게 마음이 아프더라 하더라도…… 랜트하고 노아랑 같이 있고 싶다.

처음에는 파티에서 빠져나가자는 상황을 생각했었지만 역시…… 그러기는 싫었다.

설령 마음이 아프더라도…… 그것만이 전부가 아니니까.

셋이서 같이 있으면 즐거움도 기쁨도 두근거림도 있으니까.

모험을 하고 싶다.

좀 더 다양한 풍경을…… 그때 약속했던 것처럼 셋이서 같이 더 많은 모험을 하고 싶다.

함께 모험을 하면 분명…… 아픔보다도 더욱 큰 기쁨이 찾아올 테니까.

그러니까 조금이라도……

아주 조금이라도……

나는 조금이라도 살 가능성을 믿으며 가비다에게 질문했다.

“어떻게…… 가능한 거죠? 대체 어떻게……저를 이곳에…….”

“아아, 그러고 보니 거기에 대해서는 아직 설명을 안 했군요. 후후훗, 깜빡하고 말았습니다. 그걸 설명하는 것도 즐거움  하나인데 말이죠. 볼프, 제가 설명해도 되겠습니까?”

“그래, 맘대로 해라. 이 년을 발견한 건 너니까 말이야.”

“후후훗, 고맙습니다. 그럼 엘시 씨. 어째서저희가 당신을 이곳까지 옮길  있었는지 설명하도록 하죠.”

가비다가 내 턱에서 손을 떼고 짝! 하고 손뼉을 한 번 치며 말했다.

“엘시 씨는 워프장치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아시나요?”

최대한 내가 워프장치에 대해 아는 것을 말하자.

조금이라도 더 시간을…….

“……던전이 생기고 나서 많은 모험가들이 던전을 향해 모험을 떠났어요. 하지만 각층을 내려가기까지의 거리가 너무…… 길어서   편하게 이동하는 방법을 찾기 위해서…… 선인들이 지혜를 총합해서 만들어졌다고…… 들었어요.”

“네, 맞습니다. 사실 워프장치라는 것은 공간 마법의 궁극이라고 부를 정도로 고도의 기술이 종합되어 만들어진 마도구입니다.

먼 옛날 워프장치를 만들기 위해많은 자원과 인력이 투입됐다고 하죠.
원래라면 협력할 리 없었던 다양한 길드들이 모두 한마음이 돼서 만들 정도로 말이죠.

그만큼 던전이라는 베인신의 놀이터에서 무한히 나오는 마물들과 그 마물들이 떨구는 마석과 소재들은 너무나도 매력적이었죠.

그리고 어떻게든 워프장치를 던전과 연결하고 그 주변에 고위급 신관들의 신성 마법으로 강력한 결계를 쳐서 안전하게 이동을 할 수 있게 됐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문제가생겼죠.”

“문제……?”

“네, 그건 바로 새로운 계층을 개척할 때 새로운 워프장치를 설치하기 위한 문제입니다. 층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마물들의 강함도 그에 비례해서 더욱 강해지고…… 새로운 계층을 개척하기 위해서는 많은 희생이 따랐습니다.

결계를 치기 위해 함께  신관들이 전멸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하더군요. 그래서는 수많은 인적 손해가 생기지 않겠습니까?

그렇기에 예전에는 아직 도달한 자밖에 워프할 수 있는 제약은 없었다고 합니다.

오히려 개척한 다음 조금이라도 사람이 남아 있으면 그 사람이 돌아와 아직 계층에 도달하지 못한 신관들과 함께 워프해 결계를 펼쳤죠.”

“그런 일이…….”

“하지만 어느 정도 계층이 개척된 후에는 여러 문제가발생했습니다. 예를 들면 아직 수준에 걸맞지 않은 모험가를 낮은 계층으로 납치해서 협박해금전이나 장비를 빼앗는다든지 말이죠. 물론…… 그 후엔 죽이겠지만요.”

“당신들 같이…… 말인가요.”

“후후훗, 네. 맞습니다. 저희 같은 사람들이 등장하기 시작했죠. 그때부터 워프장치에는 도달하지 않는 자는 해당 계층으로 워프할  없다는 제약이 생겼죠.

하지만 모든 사람이 그럴 수는 없습니다. 새로운 계층을 개척했을 때. 또는 정기적으로 결계의 보강이 필요할 때 고위신관들을 대거 부를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선인들은 워프장치의 제약을 일시적으로 풀 수 있는 열쇠 같은 마도구를 만들었죠.”

가비다는 볼프를 양손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그리고 여기에 있는 볼프 씨가 그 장치를 가지고 있습니다. 원래는 아주 엄중히 보관되어야 할 물건입니다만…… 볼프 씨의 조상은 던전을 개척하던 개척대 중 한 분이라고 하시더군요. 아직 초기라 보관이 그렇게 엄중하지 않던 시절에 몰래 빼돌렸다고 합니다. 그래서 저희는 이렇게 마음껏 취향에 맞는 취미를 즐길 수 있게 됐지요.”

“그럴 수가…….”

위대한 선인들이 질서와 안전을 지키기 위해 만든 마도구.

그것을  세 명은 자신들의 추악한 욕망을 위해 이용하고 있었다.

“후후훗, 그럼 설명도 끝났으니 이제 슬슬 즐겨보도록 할까요.”

가비다가 손을 뻗어 내 허벅지를 어루만졌다.

“히익!”

무섭다.

기분 나쁘다.

싫어!

만지지 마!

“후후훗, 허벅지가 참 맨들맨들하군요, 엘시 씨……. 아참,이걸 말하는  깜빡했군요.”

가비다가 초승달처럼 입꼬리를 올리며 사악한 미소를 지었다.

“저희는 지름길을 써서 여기까지 오는데 많은 시간을 단축했습니다만…… 다른 모험가들이 여기를 찾으려면 적어도 6시간 이상은 걸릴 겁니다. 후후후훗, 아아, 당신의 손목에 건 그 마도구. 분명 동료의 방향과 있는 계층을 알  있다고 했죠?”

가비다가 밧줄에 묶인 내 손을 가리켰다.

“하지만 그 마도구는 아직 만들어진 지 초반입니다. 큰 결점이 있죠. 아무리 계층과 방향을 알아도 알고 있는 장본인이 이 계층에 못 오면 탐색에 시간이 걸리는 건 뻔합니다.

후후훗, 아무리 비상사태라도 엄중하게 보관되어있는 열쇠를 초보 모험가  명을 구하겠다고 길드에서 내줄 리도 없고 말이죠.

애초에…… 이런 예외적인 상황에 그 열쇠를 쓰려면 모험가 길드 말고도 신전과 마법사 길드, 그리고 연금술사 길드 등 다양한 길드의 승인이 필요하니 시간은 더욱 들 겁니다.

거기다 당신을 발견한 때는 늦은 밤입니다. 당신이 사라졌다고 해도 대부분의 모험가는 잠을 자거나 사랑을 나누거나 밤거리에서 즐길 시간대지요.

그러니 당신의 동료가 이변을 눈치채는 건 지금 이때쯤이겠군요.

후후훗, 아시겠습니까, 엘시 씨? 이렇게 저희가 느긋하게 여유를 부리며당신에게 자기소개를 하거나 이렇게 친절히 설명을 하는 건 그만큼 시간이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가비다의 설명을 들을수록 마음속에서 절망이 커져갔다.

조금이라도 시간을 끌려고 작게나마 남아 있는 희망을 기대하는 마음이 꺼지기 시작했다.

무섭다.

홉고블린에게 살해당하기 직전에도 이렇게 무섭지는 않았다.

단순히 죽는  아니다.

나는 이 세 명에게 범해지고 장난감처럼 난폭하게 마음대로 갖고 놀아지며 존엄을 짓밟힌 채 잔혹하게 죽는 거다.

“싫어……!”

눈에서 흐르는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다리를내밀어 뒤로 움직여 가비다에게서 떨어지려고 했다.

하지만 움직이는 거리는 고작 해봐야 1m 정도밖에 안 됐다.

내 뒤에 있었던 나무에 부딪혀 내 도주는 거기서 멈추고 말았다.

“아아아! 정말 좋습니다! 그 표정! 그 목소리! 슬퍼하고 긴장할 때! 그리고 비명을 지를 때! 당신의 음부가 제 물건을 강하게 조이는 게 벌써부터 기대되는군요!”

“풉, 매번 저 녀석이 가장신나 한다니까.”

“쌀려면 안에다만 싸라. 밖에다 싸서 나중에 내 화살에  말고 네 정액이 묻으면 기분 나쁘니까.”

“후후훗,알겠습니다. 최대한 노력해보죠.”

가비다가 나를 향해 서서히 다가왔다.

아아, 싫어!

오지 마…….

누가…… 누가 구해줘.

누가……

“랜트…….”

입에서 무의식적으로 랜트의 이름이 나왔다.

처음 만났을 때 나를 구해준 용사님……

나의 용사님이 아닌 노아의 용사님…….

아아, 그래도…… 한 번 더…… 설령 나의 용사님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랜트를 만나고 싶다.

만나서 한 번이라도 이 마음을…… 전하고 싶다.

하지만 아무리 랜트라도 지금 날 구하러 오는  불가능하다.

가비다의 설명을 듣고 싫어도 이해할 수 있었다.

아무리 랜트라도…… 짧은 시간에 많은 길드의 허락을 받는 건 할 수 없다.

아무리 랜트라도…… 3층에서 여기까지 나를 찾아 달려올 수는 없다.

 하고 땅을 박차고 달려와 홉고블린을 날려버릴 때처럼……

랜트가 이곳에 오는 것은 불가능하다.

아아, 하지만…… 만약 기적이 있다고 하다면……

한 번만이라도…… 랜트를 만나  마음을 전하고 싶었다.

랜트에게 거절당해도 좋으니까…… 이 마음을 전하고 싶었다.

그때였다.

“음? 잠깐만,가비다.”

치타라고 불린 남성이 가비다를 불러세웠다.

가비다는 나에게 다가오는 발걸음을 멈추고 치타 쪽을 돌아봤다.

“왜 그러시죠, 치타 씨? 저도 지금 한창 열이 들어가려던 참이었습니다만…….”

“가비다, 볼프. 무슨 소리 안 들려?”

“소리라고요?”

“무슨 소리를 말하는 거냐? 이 주변에는 울프팡은 없다고?”

“아니, 울프팡의 울음소리가 아니야, 이건…… 파괴되는 진동?”

콰아아앙

 귀에도 무언가가 파괴되는 소리가 들렸다.

“정말이군요. 뭐죠,  소리는? 대체 어디서…….”

기시감이 들었다.

콰아아아아아아앙

점점 커지는 파괴적인 소리.

“점점 커지고 있잖아? 어디서 나는 거야? 왠지 모든 방향에서 울려 퍼지는  같은데. 어이, 치타! 이 소리 어디서 나는 거냐! 설마 모험가들이 나무들을 부수며 오는 거냐?”

소리의 크기도 종류도 달랐다.

콰아아아아아아아이아아앙

하지만 그때 들렸던 소리가 떠올랐다.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마치 홉고블린에게 부상당한 노아와 나에게 다가올  들려왔던 소리.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강하게 땅을 박차며 단숨에 거리를 좁혀 다가오는 소리.

“아니, 그런 소리는 아니다. 애초에 나무를 부순다고 이런 소리는 안 나. 이건 좀 더 거대하고 파괴적인 소리야. 게다가 이 소리가 들리는  위쪽…….”

랜트가…… 내가 사랑에 빠진 용사님이 위기에 처한 우리를 구하러 왔을 때 났던 소리가 떠올랐다.

위를 쳐다봤다.

그리고 그때.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계층 전체로 울려 퍼지는 굉음과 함께하늘이 깨졌다.

“뭐야!”

“뭐죠!”

“위다!”

하늘이 깨지며 생긴 구멍에서 누군가가 떨어졌다.

“아…….”

한눈에 봐도  수 있는 커다란 덩치와 두꺼운 근육.

평범한 마을 사람들이 입는 일상복,

그리고 짧은 녹색 머리.

기적이 일어났다.

내가 지금가장 보고 싶었던 사람이 깨진 하늘에서 내려오고 있었다.

마치 신화 속에 나오는  장면처럼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진 상황에서

믿기지 않는 기적 같은 일을 일으키며

“랜트……!”

“엘시이이이이이이이이이이이이이이이이!”

랜트가…… 나의 용사님이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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