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05화 〉504화-성전
"베, 베인? 혹시 그…… 베인신 말하는 건가요?"
【그래, 내가 바로 그 베인신이다. 이 세계의 섭리에서 벗어난 자여.】
이 세계의 섭리에서 벗어난 자.
그 말은 처음 솔리 씨를 만났을 때 들었던 말이다.
【흐음, 아니면 이 세계에 태어나 받은 이름으로 불리는 게 좋은가? 랜트.】
"그쪽이 더 짧고 좋네요."
【후후훗, 그럼 랜트라고 부르지. 하지만…… 그다지 놀라지 않는군.】
"이미 비슷한 일이 있어서요."
【흐음, 싱겁군.】
그러고 보니 어제 깨어날 때 들렸던 희미한 웃음소리.
혹시 그건 베인신의 웃음 소리가 아니었을까?
아니, 그전에…… 눈앞에 있는 존재는 정말로 베인신 본인이 맞는 걸까?
"정말로 당신은 베인신입니까?"
【무슨 말이지?】
"솔리 씨 같은…… 분령 같은 게 아닌가요?"
【솔리 씨…… 아아, 네가 그 솔리의 분령을 부르는 호칭이지. 그래그래, 뭐. 비슷하다고 할수 있지. 확실히 여기에 있는 나는 내 본체가 아니다. 분령의 형태로 여기에 현현해 있을 뿐이다. 하지만…….】
베인신은키득키득 웃으며 말했다.
【그저간단한 지식만을 주워지고 내팽개쳐진 그 솔리 씨라는 년과 다르게 나는 또 하나의 베인신이나 마찬가지인 존재다. 즉!내가 더 뛰어나지!】
훗! 하며 자신만만해 하는 베인신…… 아니, 분령이니 베인 씨라고 하자.
그런데 베인신과 솔리신 사이에서 라이벌 의식이라도 있는 걸까?
하지만 솔리 씨를 나쁘게 말하는 건 기분이 안 좋습니다.
"그래서…… 어째서 전 여기에 있는 건가요?"
【물론 내가 너와 대화를 하기 위해서지. 그리고 고맙다는 말을 전하기 위해서다.】
"고맙…… 다고요?"
어째서 베인 씨가 나에게 고맙다고 하는 건지 이해가 가질 않았다.
【그래, 고마움을 전하기 위해서다. 너는 여성을 좋아하지? 그것도 가슴 큰 여성을. 그래서 너와 만날 때 모습도 일일이 이렇게 한 번 바꿔봤다. 어때? 이 몸은? 마음에 드나?】
"네."
그것에 대해 거짓말을 할 생각은 없었다.
【하하하! 솔직하군. 하지만 그 분령처럼 몸을 내줄 생각은 없다는 건 알아둬라. 고맙기는 하지만 너와 생명을 만드는 행위는 하기 싫으니.】
애초에 갑자기 하자고 해도 곤란할 뿐이다.
그래도 할 수 없다는 건 살짝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보는 건 자유지. 뭐, 원하는 포즈라도 있나? 그 정도는 해주지.】
"그 자세가 좋아요."
섹스를 할 수 있다면야 여러 꼴릿한 자세를 요청하겠지만 지금처럼 단순히 대화한다면 그럴 필요는 없다고 느껴졌다.
애초에 자연스럽게 앉아 있는 지금자세가 오히려 더한 꼴림을 유발하고 있다.
그건 그렇고…… 어째서 베인 씨는 나에게 이렇게 고마워하는 걸까?
"질문해도 될까요?"
【얼마든지.】
"어째서…… 저에게 그렇게 감사하시는 거죠?"
【그야 네가 날 즐겁게 해줬기 때문이지.】
"제가…… 베인 씨를요?"
【베인 씨?】
"베인 씨는 베인신의 분령이시니까요."
【……그 분령과 비슷한 호칭이라는 건 마음에 안 들지만 뭐, 좋다. 부르는 건 네 맘이다. 내가 왜 감사하는지 알고 싶다고 했지?】
"네."
베인 씨는 양반다리에서 한쪽 다리를 세우고 그 위에 팔뚝을 올리며 말했다.
【나는 따분했다. 죽음과 파괴는 계속 일어나고 있지만, 그것도 딱히 큰 자극이나 변화가 없으니 너무나도 심심했지. 그래서 마왕이라도 하나 만들까 생각하는 중이었다. 그런데…… 내 장난감 상자에 아주 신기한 일이 벌어지더군.】
장난감 상자…… 베인신의 장난감 상자라고 한다면 던전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던전 말씀인가요?"
【그래, 던전. 너희는 내 장난감 상자를 그렇게 부르고 있더군. 심심하던 차에 내 던전의 일부가 파괴되는 걸 느꼈지. 평범한 생명이라면 절대로 부술 수 없는 내 장난감 상자의 일부를 부순 자가 나타났어. 한 번이 아니라 여러 번씩이나! 그래…… 바로 너다, 랜트.】
그때는 분명 엘시가 납치되어 노아와 함께 구출하러 갈 때다.
【즐거웠다고! 신선했어! 설마 내 장난감 상자 안의 생명이 아니라 장난감 상자 자체가 파괴될 줄이야! 그리고 난 널 지켜봤다, 랜트. 넌 그 후에도 너는 직접 파괴는 하지 않아도 내 장난감 상자 안에서 다양한 파괴와 죽음을 보여줬지! 다른 생명들하고는 다른 방식으로!】
베인 씨는 매우 신나 보였다.
【쭈욱…… 쭈욱 지켜봤어. 과연 다음에는 어떤 파괴와 죽음을 나에게 보여줄지 기대하면서 말이야! 그런데…… 갑자기 솔리 그것이 너에게 분령을 보내며 참견을 시작하더군. 그때는 정말 기분이 안 좋았어. 뭐…… 네 덕분에 다시 기분이 좋아졌지. 어째서일까?】
"어어…… 버, 범람에서 많은 마물을 제가 죽여서요?"
【아니, 물론 그것도 최고였지만 내가 다시 기분이 좋아진 건 네가 분령과 만난 직후다.】
"직후?"
【크크크큭, 설마 솔리의 분령에게 그런 우스꽝스러운 춤을 추게 하다니! 하하하하! 그렇게 유쾌했던 적은 처음이야! 언제나 건방지게 있던 녀석의 모습으로! 분령이라곤 해도 그런 유혹하며 아양을 떠는 춤을 추다니!】
아아, 처음 솔리 씨와만났을 때 시켰던 봉춤을 말하나 보다.
【원래라면 나도 개입해서 다신개입을 못 하도록 훼방을 놓으려고 했지만…… 다음에 네가 그 분령에게 무슨 짓을 벌일지 궁금해서 놔뒀지. 하지만 네가 보여주는 파괴와 죽음도 조금 지루하더군. 그래서…… 장난을 좀 쳤지.】
그 장난이무엇인지는 바로 예상이 갔다.
"그게 범람이군요."
【그래! 범람! 나는 네가 마구 날뛰며 파괴와 죽음을 일으키는 걸 보고 싶었어! 그러기 위해서 특별히 네가 부숴왔던 층의 마물만을 대량으로 만들어냈지! 결과는 대만족이다! 짜릿했어! 최고였다고! 내가 만들어낸 마물들이 마치 천 년 전처럼 무수히 생명이 죽어 나가는 모습은 정말 오랜만이야!】
으음~ 상당히 편향된 취향을 가지고 있다는 건 아주 잘 알 수 있었다.
【지금도 그때의 모습을 떠올리면서 즐기고 있을 정도로 너의 파괴는 나에겐 최고의 오락이었어. 그러니…… 이번에 만난 건 그것에 대한 고마움도 있다는 거다.】
"아하."
【하지만 그것뿐만이 아니야. 접신몽…… 네가 솔리의분령과 만나는 동안의 모습도 나는 봐왔다. 그런데…… 크, 크큭, 크하하하하하!!!! 설마 육체구조 빼고는 일치하는 것이 거의 없다고는 해도 그 솔리의 분령을 그렇게나 만들다니!
하하하하!!! 완전히 쾌락에 취한 한 마리의 암컷에 불과한 모습으로 만들다니! 정말 유쾌했어! 설마 빙의를 이용한 감각의 공유라니! 나도 예상 못 한 방법이었다!
아, 어제 한 레슬링 컨셉? 이란 것도 재밌었다. 꼼짝도 못 하는 분령의 모습이 아주 꼴 좋더군!】
베인신은 상당히 내 모습을 쭈욱 바라본 것 같다.
베인 씨는 너무 웃어서 흘러나오는 눈물을 닦아내며 말했다.
【정말…… 너는 날 질리지 않게 하는 자다, 랜트. 다시 한번 고맙다고 해두지.】
"네. 아, 하나 더 물어봐도 될까요?"
【이미 말했다. 얼마든지 물어도 된다고.】
"베인신은 죽음과 파괴를 관장하는 신이잖아요? 그런데 마물을 만드는 것도 창조나 다름없는데…… 그런 건 어떻게 구분되는 건가요?"
【아아, 그런 물음이군. 나와 솔리는 거의 같은 힘을 갖고 있다. 차이가 있다면 좋아하는 성향이 다르다는 것뿐이지. 창조의 힘도 파괴의 힘도 나와솔리, 모두 가지고 있다. 솔리는 생명이 새로운 생명이나 물건을 만드는 모습을 좋아하며…… 나는 생명이 죽어가거나 만들어진 물건이 파괴는 모습을 좋아할 뿐이다.】
그 설명을 한 후 베인 씨는 재미없다는 듯이흥하고 콧소리를 냈다.
【하지만 최근에는 솔리의 영향이 커져서 그다지 마음대로 놀지도 못하고 있는 실정이지. 그럴 때 네가 나타나서 나는 정말 기쁘다, 랜트.】
대략 정리하자면 솔리신의 세력이 커져 심심한 생활을 보내고 있던 베인신은 나로 인해 즐거움을 얻어 그에 대한 고마움을 전하기 위해 이렇게 나타났다는 거다.
"어…… 다, 다행이네요. 그럼 대화는 이걸로 끝인가요?"
【아니, 하나 더남아있다. 사실 너에게 한 가지 부탁할 게 있지.】
"부탁?"
베인 씨는 밑동에서 일어나 내 앞으로다가온 다음 고혹적인 눈매로 마치 야수와도 같은 미소를 지으며 나를 올려다봤다.
【여러 생명이 많이 죽는 것도 좋지만…… 커다란 생명이 화려하게 죽는 것도 보고 싶어서 말이야.】
베인 씨는 내 가슴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너도 화려한 걸 좋아한다고 했지?】
"……뭘 하시려는 거예요?"
【뭐긴…… 여태껏 그래왔던 것처럼 나에게 파괴와 죽음을 보여줄마물들을 만들 뿐이야. 그리고 그 마물들을 지금 네가 있는 캬멜을 향해 보낼 뿐이지. 다만 이번에는…… 아주 2마리를 만들 거다.】
베인 씨는 내 가슴에서 손을 떼고 잠시 뒤로 물러났다.
【그러니 이번에도 나에게 즐거운 파괴와 죽음을 보여달라고, 랜트. 그렇지 않으면…… 다른 생명들이 죽어버린다고?】
말을 끝낸 순간 베인 씨와 함께 검은 숲으로 둘러싸인 공간이 단숨에 사라지고.
"랜트……!"
평소의 접신몽 공간과 함께 솔리 씨가 나타났다.
"솔리 씨."
"괜찮으신 겁니까!"
솔리 씨는 매우 불안해하는 표정을 지으며 내 몸을 만졌다.
이런 솔리 씨의 모습은 처음이다.
나는 솔리 씨를 꼬옥 안으며 진정시켰다.
"괜찮아요, 솔리 씨. 그런 표정 짓지 않으셔도 돼요."
"랜트……."
솔리 씨는 잠시 내 품에 안긴 후 거리를 벌린 다음 나에게 물었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거죠? 갑자기 랜트와의 연결이 끊어졌었습니다."
"베인신…… 베인 씨와 만났어요."
"베인!?"
"네."
나는 솔리 씨에게 베인 씨와 만났을 때의 일을 설명했다.
내 설명을 다 듣자 솔리 씨는 매우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설마 베인신이 여태껏 랜트를 지켜봐 왔다니……."
"아무래도 범람때처럼 큰일이 벌어질 것 같아요. 솔리 씨, 솔리신께서 무슨 연락 같은 거 없었나요?"
"……지금 왔습니다. 베인신이 캬멜 근처에 대량의 마물…… 그리고 히드라와 자이언트 사이클롭스를 만들었다고 합니다."
"히드라와 자이언트 사이클롭스요?"
"둘 다 50m가 넘는 거대한 마물입니다."
"거대한 죽음이 커다란 마물의 죽음이라는 소리네요."
질 것 같다는생각이 들지는 않았다.
게다가 베인 씨의 말에 따르면 베인신은 생명이 죽는거나 파괴되는 것 자체를 좋아한다.
즉 자기가 만들어낸 마물들이 죽는 것도 좋아하기에 내가 히드라와 자이언트 사이클롭스를 토벌하는 걸전제로 이번 부탁을 한 거다.
……솔직히 거대 괴수와 싸운다는 느낌이 들어서 조금 기대됩니다.
내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용서…… 못 합니다."
솔리 씨는 두 주먹을 쥐고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소, 솔리 씨?"
"절대로…… 용서 못 합니다."
솔리 씨는 엄청나게 화를 내고 있었다.
"제 삶의 원동력…… 제 존재의의나 마찬가지인 접신몽 시간을 조금이라도 빼앗다니. 게다가……."
이렇게 화난 솔리 씨는 처음 본다.
"저와 랜트만의 시간을 엿보다니……!!! 절대로 용서 못 합니다! 랜트가 원하는 플레이로서 엿보는 것도 아닌 함부로 엿보다니! 그런 건 결코 용서 못 합니다!"
솔리 씨는 베인 씨에 의해 나와의 시간이 조금이라도 줄어든 것과 여태까지의 둘만의 플레이를 엿봐진 것에 대해 무척이나 화를 내고 있었다.
솔리 씨에게는 미안하지만…… 그 모습이 나를 매우 중요하게 여긴다는 증명으로 느껴져서…… 솔리 씨의 사랑스러움이 더더욱 증가됐다.
"솔리 씨……!!!"
감격의 마음이 북받쳐 올라 나는 솔리 씨를 꼬옥 껴안았다.
"꺄악! 래, 랜트?"
"사랑해요, 솔리 씨!"
"저, 저도 사랑합니다♡ 하, 하지만 동시에 화도 납니다! 베인신을 향해 불평이라도 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베인신이 저희 둘의 모습을 못 보도록 조치를 취해야 합니다!"
"저는 베인신이 보고 있다고 생각하면 그건 그것대로 흥분돼요."
"그럼 그건 그대로 두죠! 랜트가 좋아한다면 오히려 저는 더 봐줬으면 합니다!"
언제나 내가 우선인 솔리 씨였다.
하지만 솔리 씨가 받은 화나 스트레스의 해소도 중요하다고 난 생각했다.
무슨 좋은 방법이 없을까?
솔리 씨의 스트레스를 해소하면서 베인신의 부탁…… 이라기보다는 거의 즐거운 걸 보여달라는 의뢰나다름없는이 사태를 해결할 방법.
"으음…… 아!"
그때 내 머리에 기발한 생각이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