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56화 〉555화-어비스
"다들 어서 와라, 어제는 피로도 모르고 상당히 소란스럽게 즐겼나 보군."
우리가 들어오자마자 제1왕자 바르바는 싱긋 웃으며 말했다.
으음~ 뭐라 한 소리라도 듣는 걸까?
"잘해주었네. 가능하다면 오늘도 모험가 길드에서 한바탕 날뛰어줬으면 하는군."
"네?"
예상했던 질타 같은 게 아닌 오히려 우리를 더욱 부추기는 말이 나왔다.
물론 이 말에 어리둥절한 건 나만이 아닌 크라이그 씨와 아만다 씨도 마찬가지였다.
"더 해달라고?"
"한 소리라도 듣는 줄 알았는데?"
제이슨 씨는 가만히 있을 뿐이고 니노 씨는 짝하고 손뼉을 쳤다.
"거봐요, 괜찮다고 했죠?"
"하하하, 나도 처음에는 당황했지. 하지만 생각해보면 지금 이 시기에는 아주 좋은 행동들이야."
"그런가요?"
"계속 서 있지 말고 우선 소파에 앉거라. 나를 도와주러 온 너희에게 자세한 사정 설명도 해야 하니."
방 안에는 길드장실과 똑같게 접대용 소파와 테이블 세트도 함께 있었기에.
우리는 나란히 소파에 앉았고 제1왕자도 우리의 맞은편에 앉았다.
다만 제이슨 씨는 바르바 씨의 뒤에 서 있었다.
제1왕자는 깍지를 끼며 얘기를 시작했다.
"우선 대략적인 사정은 제이슨에게 들었을 거고…… 조금 더 상세하게 지금 벤디나의 사정을 말하도록 하지."
제1왕자…… 바르바가 깍지를 풀고 오른손으로 손가락을 튕겼다.
딱!
"사일런스."
침묵의 마법사일런스.
엘시도 쓸 수 있는 마법을 사용하며 바르바는 대화가 밖으로 세어 나가지 못하게 만들었다.
"브리단의 수도 캬멜. 하늘에 수많은태양이 나타남과 동시에 검은 번개가 내리치며자이언트 사이클롭스와 히드라와 수많은 마물들이 나타났지. 그리고 그 뒤 거대한 솔리신의 분령의 강림하여 기사단과 함께 이를 물리친 사건이 일어나고……."
스윽 하고 바르바는 소매를 걷어 제이슨 씨보다 진하게 새겨진 검은 번개 문양을 드러냈다.
"마왕의 피를 잇는 자들에게 일제히 이 문양이 나타났지. 이 문양이 나타날 때는 캬멜의 소식이 아직 전해지기 전이라 우린 혼란에 빠졌었다. 문양이 나타나자 몸 안에서 정체 모를 파괴충동을 유혹하는 목소리가 들려왔지. 게다가 이 충동과 목소리는 진한 피를 지닌 자일수록 더욱 심하단 걸 알 수 있었다."
"제이슨 씨도 그런 목소리가 들렸나요?"
내 물음에 제이슨 씨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나는 피가 옅어서인지 문양만 나타날 뿐 파괴충동도 그 파괴충동을 유혹하는 목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럼 바르바 씨…… 아니, 전하께서는 괜찮으신가요?"
바르바 전하는 싱긋하고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강한 파괴충동과 그 파괴를 속삭이는 목소리는 지금도 들려온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못 버틸 수준은 아니더군. 게다가…… 겨우 이런 충동 때문에 여태껏 우리 왕족이, 그리고 어비스가 쌓아온 평화를 깨트릴 순 없어. 결코."
얼굴은 자상한 채로지만 목소리는진지하게 나라의 미래를 생각하는 왕족의 느낌이었다.
"하지만 마왕의 피를 잇고 있는 모든 마족이 나 같은 건 아니지. 그중에는…… 바보같이 파괴충동을 좋다고 받아들이는 멍청…… 크흠, 살짝 모자란 마족들도 있지"
바르바 전하가 말하는 모자란 마족이 제2왕자 및 제2왕자가 이끄는 강경파 마족이라는 건 뻔했다.
"강경파를 말씀하시는 거죠?"
"그래, 맞다. 이해하는 게 빨라서 다행이군. 하아…… 내 동생. 제2왕자인 우르고스는 평소부터 칠칠맞은 애송이 같이 생각이 없고 미친개처럼 여기저기 싸움을 걸기 좋아하는 녀석이다."
오우, 동생에 대한 평가가 가차 없네요.
"정치에 대해 그닥 생각하지도 않는데 왕족이라는 권력만은 있어서 단물을 빨아먹으려고 자기에게 다가오는 강경파들을 쳐내지 못하고 동네 대장처럼 떵떵거리고 있지. 왕족의 피를 잇고 있고 전투에 관한 재능도 있어서 웬만한 마족은 상대도 안 되니 아주 골치 아픈 녀석이다."
"야,아만다. 흉보는 거 보니까 왕족 형제가 아주 찐형제인데."
"바보야, 계속 듣기나 해."
"하아…… 그런데 이 문양이 생긴 이후로는더욱 쓸데없는 자신감만 더 붙어서 아바마마가 쓰러지셔도 오히려 기회라고 왕위를 넘보려고 하고 있어. 이건 내 추측이지만 우르고스 녀석은 파괴충동과 유혹의 목소리에 휩쓸리지 않고 있다.
멍청하더라도 자기 의지만은 뚜렷한 녀석이니까. 너무 자기 의지가 뚜렷해서…… 빠득! 말로 풀려고해도 도무지 이해하려고 하지 않는 무식한 동생이다."
중간에 이빨 가는 소리를 들어보아 우리가 오기 전에도 몇 번 대화를 통해 설득 시도가 있었던 게 아닐까?
다만 전부 허사로 끝나 버린 것 같다.
"분명 이대로 회의를 해도 마족의 본능이다 뭐다라며 구시대적인 말이나 주장하며 강경하게 나갈 거다. 거의 확실하게 싸움으로도 번지겠지.부끄러운 일이지만 나는 동생보다 약하다.
그렇기에 나는 내가 신뢰할 수 있는…… 플단에 파견을 나간 제이슨에게 믿을 만한 플단의 모험가 동료와 함께 와달라고 전했다. 설마 S랭크 모험가까지 올 줄은 몰랐지만 말이야."
방금까지 동생에 대한 욕을 하던 분위기와는 다르게 입꼬리를 올리며 바르바 전하는 말을 이었다.
"사실 오늘 그대들에게 강경파들에게 실력을 보여 회의에서 싸움으로 번지면 그쪽도 만만치 않은 피해를 볼 거라는 경고를 날리려고 했다.
하지만…… 어제 소동 덕분에 그럴 필요는 없어졌어. 벌써 강경파들에게는 제이슨이 데려온 인간 모험가들이 강한 힘을 가지고 있다는 소식이 퍼졌지. 그러니 그대들은 어제처럼 회의가 일어나는 날까지 신나게 날뛰어서 더 많이 강경파들과 바보 동생에게 경각심을 주면 좋겠어."
예상 밖으로 일이 아주 잘 돌아가고있었다.
"저기…… 하나 물어도 될까요?"
"뭐지?"
"지금 누워계신다는 마왕님은 어떠신가요?"
"……문양이 나타난 날 아바마마는 무척이나 괴로워하셨다. 분명 나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의 파괴충동과 유혹의 목소리가 들려온 거다. 아바마마는 매일 밤 괴로워하시며 그 충동과 지금도 싸우고 계시고 있다."
흐음…… 해결방법 같은 건 없는 걸까?
"하지만 그건 너희가 고민할 문제는 아니다. 너희는 어제처럼 마음껏 지내주면 된다. 지금은 회의에서 바보 동생의 콧대를 납작하게 눌러주는 게 우선이니. 얘기는 이걸로 끝이다."
바르바 전하는 바로 소파에서 일어나 처음 앉아 있었던 책상 의자로 다가갔다.
"일방적으로 설명만 하고 끝내서 미안하지만, 나에겐 아버님을 대신해서 처리해야 할 공무가 있다. 대신만약 필요로 하는 게 있다면 뭐든지 제이슨에게 말해다오. 벤디나에 있는 동안 최대한 편안하게 있을 수 있도록 내가 할 수 있는 거라면 최대한 들어주지."
크라이그 씨가 씨익 웃으며 바르바 전하에게물었다.
"오호라? 그럼 벤디나의 고급 음식점에서 마음껏 식사하고 싶다는 것도 들어주나?"
"그 정도로 끝난다면야 오히려 나야 고맙지. 제이슨, 그들을 데리고 나가줘."
"알겠습니다, 전하."
우리는 제이슨 씨를 따라 다시방을 나갔다.
마왕성 밖을 나가는 복도를 걸으면서 제이슨 씨는 말했다.
"이제부터 다시 자유시간이다. 전하가 나에게 너희를 다시 만나고 싶다는 연락이 없는 한 자유롭게 행동하면 된다."
"저기…… 제이슨 씨."
"뭐지, 랜트."
"지금으로선 그 문양을 없앨 방법은 없는 건가요?"
문양이 있기 때문에 현 마왕인 바르바 전하의 아바마마라는 마족은 지금도 누워있다고 한다.
결과를 따지자면 이 문양만 없으면 전부 해결되는 게 아닐까?
"지금으로선 해결책은 없다. 지금은 왕궁에 있는 학자들과 바르바 전하가 고대문헌을 조사해가며 해결방안을 모색하고 계신다."
그러고 보니 바르바 전하의 책상에는 두꺼운 책이 몇 권 놓여 있었다.
그게 바로 고대 문헌이었던 걸까.
많은 대화를 나누지는않았지만, 바르바 전하는 그래도 평화를 위해 힘쓰고 계시는 분 같았다.
그런 사람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순 없을까?
아, 그래.
베인 씨!
『히으으응!』
아무래도 계속 솔리 씨에게 애무 당하고 있었는데 베인 씨는 첫 대답이 꼴릿한 신음이었다.
『뭐, 뭐야! 야, 분령! 랜트가 말 걸고 있잖아! 그, 그만해!』
『아쉽네요.』
『하아, 하아…… 뭐, 뭐야! 랜트! 뭐 물어보려고! 지금이라면 뭐든 말해주마!』
『말 안 해도 말하게 제가 애무하겠습니다.』
『넌 가만히 있어!』
지금 마족 왕족들에게 나타난 문양은 베인신이 무슨 짓을 한 거 맞죠?
『맞을 거다.』
역시나.
근데 확답이 아니네요.
『너…… 너에게 잡힌 이후로 난 기억공유도 아예 없다고! 애당초 그때는 그대로 네 정신세계에서 벗어나 다음 계획은 뭘 할까생각만 하고 있었단 말이야!』
베인 씨는 지금 베인신과의 동기가 끊어진 개별의 존재.
즉 그 후 베인신이 다른 계획을 세워도 베인 씨는 모른다는 거다.
그래도 지금까지 해온 기억공유가 있으니 짐작은 가능할 거다.
베인 씨, 어째서 베인신은 저런 짓을 했을까요?
『거대한 마물 전투는 만족했으니까 다음에는 예전처럼 돌아가 마왕으로 파괴를 보고 싶은 거겠지. 지금은 바로 강력한 마왕 같은 걸 만들려고 해도 솔리가 방해하니 아마 이미 만들어둔 마왕의 피를 잇고 있는 저 녀석들에게 힘을 주는 거고.』
힘을 주고 있다고요?
『파괴충동이니 유혹이니 하지만 그건 그냥 힘이 부여되면서 마왕으로 만들어졌을 때 생긴 피의 본능을 일깨우는 것뿐이야. 원래라면 곧바로 주변을 파괴하거나 다른 종족들을 덮치겠지만…… 피가 너무 옅어져서 저 정도로 끝났나 본데. 뭐, 그래도 문양을 흡수하면 원래 마왕처럼 되겠지만』
문양을 흡수해요?
『피도 옅으니까 더 강한 힘을 얻으려면 문양을 뺏으면 그 피에 담긴 힘을 흡수할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어.』
베인신의 예상과 다르게 너무 피가 옅어진 지금.
그렇다면 다른 피의 힘을 합치게 해서 마왕 부활을 노리려는 걸까?
어…… 문양을 뺏으려면 살가죽을 벗기거나 그런가요?
『아니, 힘으로 압도하고 문양을 빼앗는다고 의식하면 돼. 하지만 부여받은 힘을 다른 자에게빼앗기지는 않으려고 할 테니 서로 결국 싸우게 될 거고, 그 과정에서 생겨나는 파괴와죽음을 느끼는 것도 나쁘지 않지. ……라고 생각하고 있을걸.』
지극히 베인신다운 생각이었다.
『근데 지금 내 본체도 답답해하고 있을걸.』
왜요?
『피가 옅어져서 효과 적은 건 그렇다 치고 이놈들…… 전혀 안 싸우잖아. 피 튀기게 혈투를 벌이지도 않고. 왜 이렇게 사이좋은 거야. 적어도 예전에는 좀 힘만 부여하면 으하하하! 이것이 힘! 더 많은 힘을 나에게! 파괴! 파괴! 파괴다아아아! 하며 날뛰었을 텐데.』
어…… 예전엔 그랬나요?
『한 4번째로 만든 마왕은 그랬어.』
문양을 없애는 방법은 없나요?
『한 문양이 전체 나눠준 힘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으면 다른 마족들의 문양이 자동으로 한곳으로 모일 거다. 그리고 진정한 마왕이 된 자를 죽이면 마왕과 함께 문양도 없어지겠지.』
다른 해결방법 없나요?
『난 몰라. 애초에 그런 해결방법을 만들 리 없잖아.』
하긴…… 파괴와 죽음만을 생각하는 베인 신이 해결방법 따위를 만들 리 없었다.
만약 이게 파괴충동 같은 게 아니라 범하는 번식 충동 같은 거였다면 얼마나 야한 전개가 되었을까.
파괴 더 많이 하려면 강력한 마족!
즉 자신의 자손들을 늘릴 필요가 있다.
갑자기 성욕이 왕성해진 왕족들과 귀족들.
그 성욕의 배출구는 주변의 자신들을 따르는 가신.
즉 메이드나 알고 지내던 아낙네들에게 향하게 되는데!
평소에 친근하고 존경할 수 있던 귀족과 왕족들의 성욕에 차 돌변한 모습에 당황한 메이드들과 아낙네들!
하지만 권력과 왕족 특유의 강인한 힘으로 저항할 수 없는 그녀들은 왕족과 귀족들의 번식 및 성욕처리기가 되고 마는 것이다……!!!
『이젠 익숙한데 랜트, 이 녀석 왜 이렇게 야한 망상을 매일매일 하는 거냐. 한쪽에서 평범한 생각을 해도 다른 분신 쪽에서 끊임없이 야한 망상하고 말이야.』
『그게 랜트니까요.』
끄덕하고 솔리 씨가 고개를 움직이는 게 상상됐다.
『그보다 그닥 도움이 된 정보를 랜트에게 전하지 않았네요, 2호. 이게 랜트의 육변기 2호로서 할 짓입니까. 랜트의 성욕만이 아닌 일상의 문제도 적극적으로 해결할 마음가짐을 가져야 하지 않습니까 반성하세요.』
『누가 육변기 2호야! 나는 육변기가 아닌 베인의 분…… 흐아아앙! 하, 하지 마! 보지와항문에 동시에 손가락 넣지 마……!!!』
솔리 씨와 베인 씨의 사이좋은 투닥거림을 들으며 나는 고민했다.
으음…… 뭔가 딱 알맞은 해결방법은 없는 걸까?
일단 벤디나에서 지내보면서 내 나름대로 해결방도를 찾아보자는 다짐을 했다.
우선은.
"랜트~ 님♡"
여관에 돌아가면 기대의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는 니노 씨와 오전의 해피타임을 가져보도록 하자.